3/22/2021

고통의 계곡에서 두 번째 산을 오르다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이경식 옮김, 부키, 2020


이곳 겨울철 우기의 절정은 3월이다. 겨울에도 평균 5-17를 유지하는 미국 남부라 겨우내 내리는 비는 봄을 서둘러 데리고 온다. 산사나무는 벌써 흰 꽃을 피웠다. 지인들의 텃밭에서는 겨우내 자란 상추의 초록이 싱그럽고 모종으로 쓸만한 깻잎, 오이, 토마토도 앙증맞은 초록을 내밀고 있다. 난 이들의 텃밭 이야기가 몹시 궁금해서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 뭐가 즐거운지, 식물을 잘 자라게 하는 비법이 있는지 따위를 묻곤 한다.

오래전에 이민을 오신 70세쯤 되신 권사님이 한번은 동네에 작은 한인 식료품 가게를 가셨다가 그 근처 개울가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미나리꽝을 발견하고 그것을 몇 뿌리 옮겨 심은 일이 텃밭의 시작이셨단다. 권사님의 미나리꽝은 돌아가신 시어머님과 함께 가꾸시던 추억이 남아 있다고 하셨다 (영화 '미나리'에 나오는 미나리꽝은 아칸소주에 있으니 앨라배마주에 사시던 권사님이 거기서 가져오시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미나리는 아무 데서나 잘 자란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그래도 영화를 보고 두 이야기가 닮은 구석이 있어 깜짝 놀랐다). 텃밭을 잘 가꾸시는 분들은 씨나 모종은 물론 식물이 먹을 만큼 자라면 이웃과 부지런히 나눈다. 어떤 분들은 남의 집 텃밭을 만들어주고 씨도 직접 뿌려주면서 관계를 돈독히 쌓아가기도 한다.

나는 텃밭을 핑계 삼아 타국에서 살게 된 이민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저마다의 텃밭에는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는 언제나 다른 사람, 그 무엇과의 관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의 최근 책 두 번째 산은 고통을 겪으면서 개인에게 집중되었던 삶에서 관계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에게 있어 이혼은 첫 번째 산의 계곡으로 떨어지는 아픔이었고 두 번째 산에 오르는 계기가 된다. 개인적인 고통이 더 높은 차원의 사랑과 헌신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첫 번째 산이 자아를 세우고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다(전자책으로 읽었더니 쪽 수가 수시로 바뀐다).

나는 중년에 이르러 신앙 안에서 나답게 사는 것,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었다(이걸 시쳇말로 사춘기 이후에 찾아오는 오춘기라고 한다). 너 하고 싶은 대로 살라, 고 통쾌하게 말해줄 것 같은 제목의 책들을 여러 권 읽었다. 그런데 저자들은 한결같이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타인에게 관심과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삶이 더 의미 있다고 말한다.

브룩스의 두 번째 산도 그런 맥락의 내용을 담고 있다. 두 번째 산은 첫 번째 산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이어지는 과정에서 만나며 "더 깊고 더 기쁜 인생"이 거기에 있다고 소개한다. 두 번째 산에서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도덕적인 기쁨을 누리며 "한곳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깊이 있는 헌신"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두 번째 산에 사는 사람들의 직업, 결혼, 철학과 신앙,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실천을 읽다 보면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고 슬며시 손을 내밀도록 부추긴다.

다시 나는 일상에 담긴 영성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고 두 번째 산에서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자리로 돌아와 있다. 그렇다 해도 자신이 더 중요한 세속적인 속성을 다 벗어버리지 못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부룩스의 담대함이 부러울 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강조(개인적인 성공, 자기 충족, 개인적인 자유, 자아실현)는 재앙일 뿐이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려면 훨씬 더 큰 차원의 전환이 필요하다. (중략) 문화적 패러다임 전체의 무게 중심이 첫 번째 산의 초개인주의에서 두 번째 산의 관계적 사고방식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 글은 모바일앱 '바이블 25'와 인터넷 신문 '당당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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