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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2026

이런 여행, 데스틴



다른 주에 사는 둘째 아들이 남편 생일을 축하할 겸 집에 왔길래 모처럼 네 식구가 데스틴으로 여행을 떠났다. 1박2일 동안 설렁설렁 놀기로 모두가 동의했다.

집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쯤 지나자 햇빛의 밝기가 달라졌다. 풍경의 해상도를 최대치로 높인 것 같은 쨍한 햇살은 플로리다로 들어섰다는 신호였다. 선샤인 스테이트라는 별명을 가진 플로리다의 햇빛은 언제 봐도 선명하다. 햇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편도 피곤하다는 말이 없었다. 아들에게 아버지의 짱짱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 음원 플랫폼인 멜론에서 다운받은 노래를 듣다 보니 어느새 데스틴에 들어섰다. 호텔 체크인은 오후 3시여서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바닷가에 나가기에는 한낮의 열기가 대단하여 호텔 측에 얼리 체크인을 요청해 보았다. 우리가 지정한 바로 옆방이 준비되어 있다며 방을 내주었다. 데스틴에서의 시작이 순조로웠다.

호텔방에서 더위가 조금이나마 식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남편과 두 아들은 이어폰을 꽂고 자신의 인터넷 세상으로 들어갔다. 이어폰을 챙기지 않은 내가 부주의한 사람인 듯했다. 나는 방에 있는 티브이를 켜서 넷플릭스 영화를 검색했다. 정치 스릴러이면서 어드벤처 장르의 ‘베킷’.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볼륨을 높여야 했다. 한참 지나 옆을 돌아보니 두 아들이 영화를 같이 시청하고 있었다.

이제 저녁 먹기 전에 바다를 감상해 보기로 했다. 햇빛의 기세는 여전했다. 우리는 바닷가로 나가는 입구를 찾다가 저녁 식사를 하려던 더 백 폴치(The Back Porch)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른 식사 시간에도 식당에는 손님이 가득하고 대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곳은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식당을 뒤로 하고 백사장을 걸어 바다에 이르렀다. 땀이 줄줄 흘렀다. 바다는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보기로 마음을 모았다.

시푸드 식당 가운데 다음 순번에 두었던 듀이 데스틴스(Dewey Destin’s)를 찾아갔다. 그 식당은 비어 있는 테이블이 많았다. 새우를 넣은 세비체, 매운 새우 튀김, 그날 갓 잡은 물고기 튀김을 주문했다. 우리는 야외 수상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역사가 오래된 식당의 운치와 바닷바람이 좋았다. 신선한 음식을 여유롭게 먹다 보니 손님들이 점점 늘어났다.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다시 더위를 식히면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호텔 수영장을 즐길 시간. 나도 아줌마살을 개의치 않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2년전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 일이다. 블루 라군, 스카이 라군, 야외 핫 텁에는 수영복을 입고 들어간다. 한 동안 수영복을 입지 않았던 나는 아줌마살이 많이 가려지는 서퍼가 입는 래쉬가드와 반바지를 준비했다. 게다가 그것들은 몸에 딱 달라붙는 모양새가 싫어서 한 치수 큰 옷이었다. 물 속에서 헐렁한 옷이라… 아이슬란드를 다녀와서 맘에 드는 수영복이 보이길래 그냥 사두었다. 이걸 데스틴에서 처음 입었다. 이번 여행은 뭐든 가족과 같이 해보자는 심산이었므로.

다음날 아침, 일출을 보면 좋았겠지만 다들 잠을 선택했다. 아침 식사 후 바닷가에 나갔다. 전날 오후와는 사뭇 다른 의아한 풍경이었다. 비즈니스용 파라솔이 해변에 가득했고 그 어중간한 곳에 공공 해수욕장이 보였다.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객에게 그런 의아함은 불필요하다. 우리는 데스틴의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잠시 걷는 것으로 만족했다. 호텔로 돌아가 발을 씻고 느긋하게 체크아웃을 했다. 호텔을 이렇게 알차게 이용한 적이 없었다.

데스틴에서 마지막 식사는 더 걸프 클럽(The Gulf Club)으로 정했다. 그곳은 음식점이면서 경기를 감상할 수 있는 스포츠 펍이다. 이웃의 가족이 운영하는 곳이라 궁금했었다. 경기 관람을 위해 티브이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활기차고 밝았다. 우리는 인기가 많은 불고기 에그롤, 양배추 고추장 무침을 곁들인 삼겹살찜, 삼겹살을 토핑으로 올린 폴리네시안 피자를 주문했다. 한국 식재료와 조리법이 미국 음식과 섞여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맛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투덜대는 사람이 없었다. 몸과 마음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었는데도 모두 흡족했다. 데스틴은 우리 가족 여행에서 새로운 버전을 경험한 곳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작은아들이 운전대를 잡았다.

10/20/2025

평화가 온몸에 스며들다





9월의 마지막 날, 우리는 뉴욕 북부에 있는 메이플릿지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방문했다. 나의 가족은 그곳에 두 번째 방문이었고, 여행을 함께 한 4명의 교우들은 처음 방문이었다. 2000년에 책 <브루더호프의 아이들>을 읽고, 그 공동체는 아이들 교육의 이상향으로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2023년, 그 이상향을 실제로 목격하게 되었다. 장애가 있는 나의 아들은 브루더호프를 경험한 이후로 거기서 일하며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이번 기회에 연세 많으신 교우들은 공동체에 사는 노인들의 삶을 엿보고 싶은 것 같았다. 우리는 브루더호프를 방문하기 전에 브루더호프와 관련된 여러 책들 중 한 권씩을 읽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책은 브루더호프를 설립한 에버하르트 아놀드가 쓴 <공동체로 사는 이유>였다. 얇고 작은 판형의 책이지만 신앙적 영감을 주는 글들이 알차게 들어 있다.

에버하르트(1883년~1935년)는 어릴 적부터 사회적 불평등에 반대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친구로 지냈다. 에버하르트가 열여섯 살 때, 목사인 삼촌과 구세군의 어떤 대표자가 만나서 친밀하게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된다. 그 대화 속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흘러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며, 그는 내적 변화를 겪는다. 그런 후, 에버하르트는 중산층의 사교 생활을 거부하지만 브레슬라우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에버하르트를 이해하지 못한다.

에버하르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은 공동체로 존재하기에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길은 현실과 인간 개성으로 인해 위험과 고난이 따른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 길을 걷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하나님은 현실을 극복하는 사랑의 힘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은 이 현실 보다 강한 분이기 때문이다.

에버하르트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교를 믿고 고백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역사 속에서 짧게 존재했지만 그 영향력은 여러 공동체에 미치고 있다. 공동체는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한다. 누구도 공동체의 소유가 아닌 어떤 것을 따로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공동체가 소유한 것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1920년 독일 자네츠에서 시작한 브루더호프는 올해로 창립 105주년을 맞이했다. 브루더호프는 그동안 나치의 탄압이나 공동체 내부 분열 같은 “치명적인 위험과 괴로운 고난의 길”을 걸어오면서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려 노력해 왔다. 그들은 공동체 초기부터 있었던 “어린이들의 공동체, 농장 일, 정원 일, 건축 일, 수공예, 출판, 방문객과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일”을 지금까지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공동체를 체험하며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음에 감사했다. 교우들은 한결같이 꿈 속에 있다가 나온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한인 박성훈 님이 쓴 <이상한 나라 하나님 나라> 제목처럼 정말 이상한 나라가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신선한 충격은 반나절도 안 지나 찾아온다고도 표현했다. 미국 안에서 이제껏 보지 못한 다른 나라가 있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점심 공동 식사할 때의 일이다. 그들은 어느 공동체 멤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노래였는데 누군가 노래를 시작하자 은은한 화음이 이루어졌다. 노랫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천국의 소리가 있다면 이와 같을 거라는 소감에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교우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연세가 많으시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돌보는 모습은 역시 인상적이었다. 돌보는 것 같지 않게 돌보는 일상의 모습.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자연스러움 속에 세밀한 보살핌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다.  주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런 모습일 수 없다고 우리는 얘기했다.

브루더호프는 미국, 독일, 영국 등 여러 나라에 3,000명 정도의 멤버를 가지고 있다. 한국 영월에서도 2022년 브루더호프가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미국 브루더호프의 방문객 대부분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공동체에서는 이런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브루더호프가 하나님을 믿으며 공동체로 살아가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진정한 섬김, 나눔, 화해, 평화를 이루려는 그들의 삶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스며드니 말이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8/31/2024

멀어도 가까운





모처럼 아들이 사는 조지아 주 동쪽으로 길을 나섰다. 루이지애나 주에서 시작하여 다섯 개 주를 거쳐가는 여정이었다.

우리가 지나던 고속도로는 온통 베인 풀의 신선함으로 가득했다. 고속도로 갓길과 중앙 분리대 잔디 위에는 잔디 깎는 기계를 장착한 트랙터가 엄청 많았다. 어느 곳에는 여덟 대가 두 대씩 나란히 움직이며 풀을 깎았다. 

어디는 두 대가, 어디는 한 대에 두 개의 잔디 깎는 기계를 매달고 작업하고 있었다. 풀은 깎여 나가면서도 이렇게까지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다니, 먼 길 가는 나로서는 풀과 그것을 다듬는 일을 하는 분들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아들이 사는 도시에 가까워지자 해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달큰한 꿀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유로운 기운이 가득한 듯했다.

드디어 고속도로를 벗어났고 아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출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유소가 나타났다. 친숙한 풍경이 우리를 맞이하는 것 같아 그것 마저도 반가웠다.

날씨는 화창하고 도로는 막힘이 없어 힘들이지 않고 아들네 도착했다. 자동차로 10 시간 걸리는 그 거리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아들이 집밖으로 나와 포옹으로 아빠와 형, 그리고 엄마를 맞이했다.  아들 얼굴을 보니 그냥 좋았다. 곧 밤이 깊어져 잠 자리에 들었는데, 낯선 잠 자리가 주는 선잠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 피로감은 아들을 만난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들네 가면서 뭔가 선물을 하고 싶어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은 실내 식물을 사 달라고 대답했다. 의외였다.

아들이 우리 집에서 이사 나갈 때 내가 키우던 식물을 준다고 했더니 질색하였다. 자신이 그것을 가져가면 죽일 것이 뻔하다며 극구 사양했다. 

나는 집안에 초록빛 생명이 있으면 보기에도 좋고 공기 정화도 해주어서 좋다는 이유로 아들을 설득했다. 아들은 못이기는 척했고, 나는 지지플랜트 화분 하나를 아들에게 안겨주는데 성공했다.

아들은 꼼꼼하고 책임감이 있어서 식물을 맡겨도 걱정은 안 되었다. 자신이 식물을 보살피는데 서툴다는 것을 아니까 나름 잘 키워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애쓸 터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화분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관리하고 있었다. 새싹이 나와서 줄기가 커다랗게 뻗었는데 어떻게 세워줘야 하느냐, 화분 공간이 빽빽한데 괜찮냐며 식물 소식을 가끔 전해주었다.

아들네 도착한 다음 날, 실내 식물을 사러 농원에 갔다. 아들은 나에게서 받은 지지플랜트를 분갈이하고 싶다고 했다. 또 다른 화분에 뿌리를 나누어 심고 싶은데, 엄마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나는 그래 그러자, 담백하게 대답했다. 아들의 변화를 기특하게 여기는 나의 마음은 실내 식물과 화분 갈이에 필요한 물품을 선물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나는 실내 식물을 보기에 좋은 중간 크기로 사려고 했더니 아들은 작은 것을 선택했다. 작은 것부터 키워보고 싶다며. 초보자가 키우기 쉬운 피스 릴리와 골든 포토스를 골라주었다.

또 하나 화분, 아프리칸 바이올렛도 선물했다. 이것은 일 년 전에 지인에게서 받은 것을 번식시킨 것이다. 

지인에게 받았을 때는 손톱만한 이파리가 몇 장 있었는데 어느 순간이 되니까 잎이 진초록이 되면서 넓어졌다. 그리고 보라색과 흰색이 섞인 꽃이 한참 동안 피어 기쁨을 주었다. 나는 그 화사한 기쁨을 아들에게도 맛보게 하고 싶었다.

우리는 분갈이를 뒤뜰에 그늘 지는 시간을 골라 시작했다. 겨우 화분 몇개를 다루는 일이고 단순한 과정의 분갈이인데도 아들은 이 일에 관심있게 참여하였다. 자신의 화분이라 그런지 뭘 시켜도 투덜대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녀석의 변화에 흐뭇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들과 함께 흙을 만지며 식물을 다루는 놀이가 아주 즐거웠다. 아들도 식물을 돌보는 내내 즐겁기를 바란다. 실내 식물을 키우는 일이 비록 작은 규모일지라도 지구 환경을 해치는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실천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가볍게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었다. 아들은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고 남은 식구들은 뒷정리를 하고 길을 떠나기로 했다. 다음번에는 아들이 우리 집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