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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2025

뜻밖의 요청





인간 관계에서 때로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시간의 질이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과 미국에 사는 나의 가족처럼 서로 멀리 살아서 자주 만날 없는 관계는 더욱 그렇다.

지난 추석 어머니(남편의 엄마를 시어머니라 부르고 않고, 나의 엄마를 친정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부르다 보니 예의를 갖추면서도 관계의 거리감이 좁혀진다.) 우리 가족과 명절을 함께 보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뜻밖의 요청은 우리 가족의 마음을 흔들었고 설날 전후 일정으로 한국행을 결정하였다.

한국 날을 기다리던 어느 , 엄마에게 위암이 생겨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초기 단계의 암이라고는 하지만 치료하는 과정에서 육체가 지칠 것이 분명하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수술을 받은 엄마는 해쓱한 얼굴로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를 위해 엄마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내가 엄마의 식사를 챙겨 보리라 생각하고 왔는데 끼부터 엄마 손을 거친 밥상을 받았다. 엄마의 상태가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치료하는 의료 기술의 발전에 놀라워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밥상에는 굴전이랑 굴무침이 보였다. 미국에선 육류를 많이 먹을 테니 굴이나 같은 해산물을 먹이려는 엄마의 계획이 보였다. 환자가 준비할 음식은 아니었다. 엄마는 이렇게 음식 만든 것을 동생네한테 비밀로 달라고 부탁했다. 밤새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기내식을 모두 맛있게 먹었지만 눈앞에 놓인 엄마의 밥상에 아무 주저함 없이 달려들었다.

엄마는 우리가 식사를 마치면 그제서야 두어 숟가락의 죽을 겨우 먹었다. 엄마의 끼니를 위해서는 한꺼번에 쑤어 놓은 죽에서 숟가락 덜어내어 데우는 일이 전부였다. 별다른 수고가 따르지 않았다. 한국에 머무는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그저 엄마가 부를 대답할 있는 자리에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순종했다. 물을 가져오라면 물을 가져오고, 설음식을 사오라면 그렇게 하고.

한국을 떠나는 아침 밥상에는 사위가 좋아하는 게찌개가 등장했다. 전날 엄마가 주방에서 한참 동안 덜그럭거리며 뭔가를 준비한 결과물이었다. 엄마는 아침 시간에 어수선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음식을 만든 것이다. 며칠 , 진한 국물의 게찌개를 정신없이 먹는 사위를 엄마는 남은 마리 게를 먹여 보내야 마음이 편할 같았단다. 엄마는 다시 헤어지는 서글픔을 몸을 괴롭히며 달랬던 것일까.

내가 엄마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남편과 나의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나는 한국에 도착했을 때와 떠나기 , 그리고 설날 앞뒤로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다. 우리를 맞이하는 주름진 어머니 얼굴은 동백꽃처럼 환하게 피었다. 다만 무릎이 약해져서 계단을 어렵게 오르내리시는 모습이 낯설고 안쓰러웠다.

어머니는 하루에 시간씩 마을회관에서 다른 어르신들과 시간을 보내신다. 어르신들은 간혹 자녀가 가져온 간식이라며 나눠 드실 때가 있단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멀리서 찾아온 아들을 핑계로 받아먹은 것을 갚을 기회로 삼으셨다.

명절 장도 풍물시장에 갔다. 어머니는 계획이 있으신 떡집에서 동부나 팥이 들어간 쑥송편과 모시송편을 푸짐하게 사셨다. 귤도 박스 사셨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우리가 드린 쿠키 상자를 마저 챙기시더니 마을회관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셨다. 떡과 귤은 명절 분위기 내기에 좋은 음식이었다. 어머니는 어르신들이 그것들을 넉넉하게 나눠 드셨다고 알려주셨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옷을 사주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돌아다니다가 맘에 드는 옷을 사라며 크레딧카드를 주셨다. 이렇게까지 한국 옷을 입혀 보내려는 어머니에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온가족이 윷놀이를 하고, 설을 쇠면서 내내 즐거워하셨다.

이번 여행은 나를 고집하지 않고 부모님에게 집중하겠다고 다짐했어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저 부모님 곁에 있었을 뿐이고 오히려 부모님이 사랑을 부어 주셨다. 온기가 마음 한편에 남아 오래도록 힘이 되어줄 같다.


*이 글은 앨라배마 타임즈에도 실렸습니다.

2/28/2025

맛있는 우정




  다녀온 한국 여행은 명절을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지인들과는 짬을 내어 만날 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주 만나지는 않아도 삶의 굴곡이 생길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들이다. 특히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들에게 털어놓고 투정을 부린다. 그들과 쌓은 우정은 우리 부부에게 자산이다.

남편과 아들과 나는 약속이 먼저 잡힌 Y부부를 만나러 갔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 가족을 그들의 일터와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들은 워낙 정갈하고 세련되어서 처음에는 가까이 다가서는데 주춤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세련됨을 엿보고 싶고, 거기서 문화적인 신선함을 발견하곤 한다.

Y부부는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 일터인 교회를 새로운 곳으로 이사했다. 그들은 여전히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고 있었다. 새로운 예배실을 꾸미는 일과 건물 유지를 위한 청소도 몸소 감당하고 있었다. 우리는 예배실에 가보았다. 앞쪽에 불을 켜자 벽에 음각으로 새겨진 십자가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투명하고 광택이 나는 바닥에 십자가가 어렸다.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 비치는 십자가가 기도하는 사람 사람에게 흘러가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느낌을 말하자 물과 빛을 표현하는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알려주었다.

며칠 ,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S부부가 일하는 교회를 찾았다. S 남편의 의형제다. 나는 7 전에 S 교회에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남편은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가보고 싶어했다. S 십자가를 수집하고 연구하고 책을 쓰는 사람이다. S 아내 R 들꽃을 찍는 사진 작가이다. R 자신의 사진과 들꽃 이야기로 책을 펴냈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했다.

S 길을 걷다가도 메모를 한다고 R 알려주었다.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나 자료들을 꼼꼼하게 정리하는 S 습관과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 쓰는 솜씨를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습관의 바탕에는 관심사를 나눈 사람과의 관계를 정성스럽게 이어가는 성품이 배어 있다. 교회 개혁이나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일을 생각하고, 살고 있고, 글솜씨가 있으니 그의 글은 살아서 독자에게 닿는다. 은퇴 후에 작가로 살면서 좋은 글을 남기고 싶다는 S 소망은 한가로움이 아닌 절박함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부모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P부부와 만났다. P부부는 부모님을 보살피는 일들을 먼저 하라며 그런 후에 만나자고 우리를 배려했다. P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와 만난 사람의 신상을 기억하고 세세한 관심을 가지고 관계를 이어간다. P 아내 K P 사람에 대한 관심과 기억력은 하늘이 주신 거라고 말한다. P 한때 공황장애가 와서 무기력증으로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에너지를 얻는 그가 공황장애로 얼마나 힘들었을 상상이 되었다.

P 건강을 회복해가는 중이고 요즘은 시니어한테 관심을 쏟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P 일하는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오케스트라, 카페, 십자가 전시관 등으로 봉사한다. 최근에는 지역내 시니어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여러 일들을 벌이고 있다. 동네를 걷다가 시니어들끼리 만나면 수다도 떨고 함께 식사도 하는 생활을 권장한다. 하루에 번씩 전화로 시니어의 안부를 챙기고 식자재와 생활용품을 나누어 쓰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곳에도 시니어가 많은지라 P 실천이 같지 않았다.

대학 동기들 부부와의 만남도 빼놓을 없다. 부부는 농촌지역에서 교인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다른 부부는 도시에서 생활협동조합을 운영한다. 그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동기들과는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가 만난 이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맛있다. 손수 음식을 만들든 식당을 고르든 대충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 식탁이 건강하고 맛날 밖에. 우리들의 우정이 식탁에서 만들어진다고 정도다. 식탁 위에는 음식만이 아니라 자신보다 타인을 돌보는 따뜻한 삶이 함께 차려진다. 그렇게 나누는 삶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살아갈 힘을 공급하는 맛있는 우정으로 거듭난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8/10/2014

전문가와 비전문가


아들 산이가 찍어놓은 사진이 있길래... ^^


얼마 전 한국 여행 갔을 때 지난 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타시던 자동차가 아직 있어서 편안하게 다닐 수가 있었다. 집에서 먼 곳으로 외출할 경우는 버스와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고 집에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곳은 자가용으로 이동했다.

그날도 친구를 만나기 위해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라 교통량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 복잡한 시내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라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자주 이용하곤 했다. 터널이 여러 개 연속해서 나오는 구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같은 차선에서 빠르게 저만치 앞서 달리던 자동차의 빨간 브레이크 등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내 차의 속도도 줄이면서 옆 차선을 보니 다른 자동차들은 쌩쌩 달리고 있었다.

뭐지? 차선을 잘못 선택했나 보군, 생각하는 순간 자동차 범퍼 보다는 작은 크기의 디귿 자 모양을 가진 물체가 내 차 앞에 뚝 떨어졌다. 내가 탄 자동차의 왼쪽은 터널 벽이고 옆 차선에는 자동차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그 물체를 밟고 지나갈 수 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오른쪽 앞 바퀴가 그 물체를 타고 넘는 것을 느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고 운전하는 내내 계기판 어딘가에 주황색의 경고 등이 혹시라도 들어오는 지 신경을 써야 했다.

다행히도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동안 자동차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 소심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문제가 있다가 자동차가 달리는 도중에 탈이 날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운전이나 조심스럽게 할 줄 알았지 자동차 구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쪼그리고 앉아 자동차 밑면을 들여다 보았다. ! 자동차 아래로 액체가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에어컨디션을 사용했으니 물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겁이 덜컥 났다.

자동차 수리나 검사를 하는 카센터를 운영하는 P 집사한테 득달같이 전화를 했다(미국에서라면 남편에게 전화 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친분이 있는 전문가에게 문제 상황에 대해 한국말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나 편안하던지…). 상황을 짧고 다급하게 설명을 했다. 집사님은 떨어지는 액체가 투명한 지 색깔이 있는 지 살펴보라고 차분하게 알려주었다. 다시 몸을 구푸려 살펴보니 색깔이 있거나 냄새가 나는 액체가 아니니 물인 것이 분명했다. 집사님의 한 마디에 자동차에 대한 걱정이 싹 날아가버렸다.

P 집사는 남편과 함께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자신도 자동차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있는 듯했다. 나중에 이 상황에 대해 다시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 전화로 정비 한 건 했어요라고 말하는 집사님 때문에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자동차에서 떨어지는 액체를 분별하여 문제가 있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은 상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동차 수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게는 P 집사의 처방은 전문가의 소견이었다. 나는 상황에 따라 지레짐작 하여 불안했지만 집사님은 차분하고 명료하게 대처했다. 비전문가와 전문가의 차이인가 보다.

그러고 보면 자동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난 어리바리 비전문가다. 그래서 삶을 바라보는 시야도 좁고, 생활이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않다고 여기기도 한다. 어느 순간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기도 하지만 많은 시간 동안 염려를 떨치지 못하기도 한다.

주일 예배 설교 시간에 베드로후서 3장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목사님은 한 사람의 인생도 끝이 있으며 지구를 포함한 모든 별들도 언젠가는 소멸을 겪게 될 것이니, 우리는 하루를 천 년 같이 천 년을 하루 같이 여기며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자고 했다. 그리고 죽음과 소멸은 끝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이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으니 그 약속을 믿고 살자는 것이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한 시간이 아니라 평강 가운데 말이다.

신앙인들이 늘 듣는 평이한 설교 같아도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은 나에겐 마음에 찔림을 주는 설교였다. 내 삶의 문제를 진단해주고 기꺼이 고쳐주는 전문가는 성경과, 그 성경을 해석하고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는 지금의 담임목사라는 생각이 든다

7/28/2014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큰 아들 산이와 6주 동안의 한국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내가 할 일들이 가득하다. 봄에 만들어 놓은 손바닥만한 텃밭에 물주는 일을 둘째 아이에게 맡겨 놓았는데 책임감 있게 감당한 듯 하다. 하지만 오로지 물만 주었지 다른 것엔 도통 손을 대지 않아 심어 놓은 식물과 풀들이 사이좋게 섞여 있었다. 나중에 해도 되련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집으로 돌아온 첫 번째 할 일로 풀 뽑기를 선택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많이 머무르는 주방 곳곳에 낀 물때도 닦아냈다. 교회와 관련된 일도 몇 가지 하고 나니 이틀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내가 원래 살던 자리로 돌아온 것이긴 하나 여행의 여운을 즐길 틈도 없이 너무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나마 여행하는 내내 누렸던 여유로운 시간 동안 새로운 경험과 만남들에 대해 되새겨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남는 것은 사랑과 우정을 키운 일이다. 앞일은 알 수 없으나 가족과는 다음에 만나기까지 좀 긴 시간이 걸릴 듯싶은 마음에 더욱 애틋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자녀, 교회, 시대적인 문제 같은 주제들을 거리낌 없이 얘기하며 격려하는 편안한 자리였다.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친절함도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다. 글 쓰는 일로 만난 사람들, 선배 목사님들 교회에 주일 예배 드리러 갔다가 만난 사람들, 산이의 긴 치과 치료 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

돌이켜 보니 이번 여행 동안 만난 사람들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기 위해 시간과 정성이 보태어져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로가 자기 시간의 일부를 내어주고,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되도록 진실되고 성실하며 친절한 모습이었다.

그리운 사람들을 뒤로 하고 미국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리 가족은 한반도 평화 행진과 기도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워싱턴 D.C.를 향해 자동차로 8시간을 달려갔다. 한인연합감리교회 통일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기독교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가 참여하는 초교파적인 행사였다.

한국전쟁 정전 61주년이라는 것과 이제는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뀔 때라는 글이 쓰여진 흰색 티셔츠를 입은 기독교인들의 무리가 파운드리연합감리교회(Foundry UMC)에서 백악관 앞까지 2 km 정도를 행진했다. 유모차에 타고 있는 어린 아이들, 청소년, 교인들, 목사들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걸어 나갔다. 백악관 정면에 있는 뜰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남한과 북한이 평화적인 관계를 맺고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구호도 외치고 기도도 했다.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은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두 시간 가까이 자리를 지키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몇 곡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들어 있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고등학생인 둘째 아이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나 이 노래 몰라, 했다. 모국의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노력이 나의 둘째 아이에게도 이어지도록 집에 돌아가면 이 노래를 꼭 함께 불러보아야겠고 생각했다. 모국을 위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소수의 무리가 부르짖는 평화의 외침이 이 소식을 들어야 할 모든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길 빌었다.

한국 여행 동안 사랑과 우정을 만들어 가는데 시간과 정성이 보태어져야 한다는 것이 마음을 떠나지 않는데, 이번 평화 행진에서도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나의 가족이 먼 길을 달려 평화 행진의 한 구탱이를 차지하고 목소리를 보탠 것은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도 시간과 정성이 깃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6/29/2014

여행 중에도 기도 시간을




몸을 뒤척이다가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일어났다. 아직 어두움이 가득한 거실에 걸려 있는 벽시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어슴푸레 읽어 보았다. 새벽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잔 탓에 집안 공기가 후텁지근 했다. 창문 하나를 열어 강화어머님네(나의 시어머님이시다) 집 둘레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휘젓고 다니던 바람을 불러 들였다. 창문을 열자마자 밀려들어 오는 새벽 공기가 참으로 시원했다. 뒤뜰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님은 지난해 가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 주무실 때 문이란 문은 모두 걸어 잠근다고 하셨다. 평생을 모든 것이 익숙한 고향의 한 마을에서 살고 계신 어머님에게서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이었다. 며칠씩 집을 비울 때는 모르겠지만 하루 안에 돌아오는 외출을 하실 때는 현관문도 잠그는 일이 없으셨다. 큰 집에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되신 어머님이 아직 익숙지 않은 '혼자됨'을 힘들게 겪고 계시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강인하고 꾸밈이 없는 성격의 어머님이신지라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날 새벽 공기가 실어오는 상쾌함과 쓸쓸함을 들이키고 있는데 어머님이 깨어 나오셨다. 초여름이라도 으쓱한(어머님 표현에 따르면) 새벽 공기를 막아줄 얇팍한 긴팔 옷을 챙겨 입으시며 이미 깨어 있는 나에게 같이 새벽기도 가자, 고 하셨다.
 "목사 사모가 와 있는줄 다 알텐데, 왜 새벽기도도 안 나오나 할 거 아냐?" 
오랜만에 들어보는 꾸중 섞인 말씀이다.

어머님네 와서 밤잠을 자게 되는 경우는 주로 명절을 쇠러 올 때다. 명절을 준비하느라 고단하기도 하고, 모처럼 부모님 집에 왔으니 목회 현장에서 떠나 푹 쉬고 싶은 마음이다. 날마다 드리던 새벽기도도 접고 길고 깊은 잠도 자보고 싶다. 그런데 어머님은 새벽기도를 가시면서 잠들어 있는 남편과 나를 보시면 화를 내셨다. 목회자 부부가 새벽기도를 빼먹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게다가 목사는 안 나가도 사모는 기도해야 할 것 아니냐, 고도 하셨다(이것은 내가 이해가 안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도 꿈적하지 않으면, 새벽기도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셔서는 문을 소리나게 쾅쾅 여닫으시고 그릇도 더 달그락 소리가 나게 다루셨다. 아침 한나절은 어머님의 볼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는 신호였다.

어머님 댁을 방문할 때마다 새벽기도에 대해서 일관된(?) 태도를 보이자 어느 때인가부터 더 이상 새벽기도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머님과 내가 고부지간으로 만난 지 이십 여년이 흘쩍 넘었으며, 미국에 살다가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하여 며칠 어머님 댁에 묵고 있는데 그 새벽기도 얘기가 다시 나온 것이다. 난 웃으며 어머님만 다녀오세요, 했다. 밖으로 드러나 훤히 보이는 어머님 고집이나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내 고집이나 만만치가 않다.

어머님의 새벽기도 시간은 남다르시다. 잠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시간이 교회가는 시간이다. 새벽 두, 세 시라도 일어나시면 곧바로 교회로 가시곤 했다. 요즘은 네 시쯤 가시는 것 같다. 새벽예배 후에도 한참을 기도하시다 집에 돌아 오신다. 그동안 어머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본 바에 따르면 기도 드릴 때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실지 그려진다.

난 어머님과 같이 부지런하고 열정적이고 한결같은 기도를 드리지는 못한다. 나도 새벽기도를 드리지만 정해진 시간 동안 기도하며 대부분 읊조리거나 말없는 기도를 드린다. 삶이 단순하기에 생활하는 중에도 짧막한 기도를 자주 드리곤 한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멀리 떠나 여행할 때는 새벽기도를 드리지 않기도 한다. 이러한 어머님이나 나의 기도 생활이 온전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의 기도 생활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결코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에 같이 가자는 어머님의 이번 요청을 따르지 못한 것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여행을 하는 중이라도 기도 시간을 따로 떼어놓지 않으면 깊이있는 기도를 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이 생기는 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하루를 보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변화의 시점에 있는 내 교회와 부모님들이 다니시는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기를 위해서, 가족의 평안을 위해서, 그리고 여행 중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주님이 함께 하여주시길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새벽기도 가시고 집에 남겨진 나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정돈하고 하나님께 내 기도를 올려 드렸다.

6/21/2014

가족




"많이 돌아다닐 생각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와."
한국으로 오기 전 남편에게 여러 번 들은 말이다. 두 번째 한국 방문이니 첫 번째만큼 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얘기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번은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것이고, 일 년만에 다시 오게 되었으니 반가움이 덜할 것이라고 쉽게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은 미국에 남아 있으면서 한국 방문을 하는 아내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가 살짝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다. 자신의 아내가 그리 번잡스러운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런 당부의 말을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도, 한국에 머물고 있는 중에도 툭툭 하니 말이다.

하긴 나도 남편이 며칠 동안 외출을 하게 되면, 여행 가서 좋겠다!, 며 부러운듯한 말을 마구 던진다. 남편의 외출은 거의 교회와 관련된 모임이기에 회의나 교육 받는 시간이 대부분인 것을 안다. 그래도 일상을 떠나 낯선 장소가 주는 신선함이 있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도 있으니 외출 혹은 여행은 부러움을 살만한 경우들이다.

이럴 때 남편의 반응에 따라 더욱 얄미워지기도 하고 마음에 위로가 되기도 한다.
"회의만 하는데 뭐가 좋아, 지루하지. 집이 최고야!"
쳇, 아무렴 회의만 할까! 쉬는 시간에 수다도 떨고, 준비된 맛난 식사도 먹을 거면서.
"당신도 같이 가면 좋을텐데... 거기 가 봐서 좋으면 나중에 같이 가자."
경험상 나중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음을 알면서도 이런 말은 집에 남겨진 사람의 답답함을 어느 정도 가시게도 한다.

어쨌든 이번 한국 여행은 내가 집에 남겨진 남편뿐 아니라 작은아들의 부러움까지도 사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사는 곳에서 10분쯤 걸어가야 되는 곳에 조그만 텃밭을 가꾸고 계신다. 산책 삼아 나가 돌아보았는데 밭 한쪽이 온통 싱싱한 씀바귀로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뿌리째 뽑아 장아찌를 담그려고 키우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밭 주위를 지나 다니던 사람들에게도 이 씀바귀가 눈에 띄었나 보다. 어떤 사람이 씀바귀 효소를 만들면 좋겠다며 잎을 베어가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셨단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두 분 모두 텃밭에 나가셨는데, 아침 먹을 때쯤 아빠만 돌아오셨다. 엄마는 남아 있는 씀바귀를 모두 캐어 씻어가지고 올 거라고 아빠가 얘기해주셨다. 엄마도 씀바귀로 장아찌가 아니라 효소를 만들 작정이라면서.

조금 있다가 엄마는 젖은 씀바귀가 담긴 커다란 부대를 땀을 뻘뻘 흘리며 들고 오셨다. 엄마는 집으로 먼저 돌아오신 아빠가 계신 안방으로 곧장 가시더니 코 맹맹한 소리로 한 마디 하셨다.
"씀바귀가 많은 줄 알면 들어주러 와야지. 자전거를 가지고 오든가. 자전거 소리가 나길래 얼른 내다봤네, 에잇!"
말투는 무거운 씀바귀를 들고 오느라 힘이 들어 짜증났음을 드러내는 것 같은데, 내 귀에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아내의 애교 섞인 투덜거림으로 들렸다. 나의 부모님은 이런 식으로 서로가 필요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확인시키며 사시는구나, 새로이 알게 되었다.

애정어린 부러움과 질투, 애교스런 투정은 서로의 관계가 무뎌지지 않게 하는 윤활유 같은 것들이다.

한국 방문 중인 산이와 나에게 누군가 미국에 있는 다른 가족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산이가 반복적으로 하는 말을 들으며 가족에 대한 산이의 생각도 엿본다.
"아빠, 윤아, 기다려. 빨리 올게."
"미국 가서 비행기 빨리. 우리 한국 가자! 아빠랑 윤이랑 같이. 가족이니까"
"엄마는 우리 엄마. 아빠는 우리 아빠. 윤이는 뭐지?"
"내 동생." 요것은 내 대답이다.
"아빠 감기 해? 기도할게."

산이는 가족 누군가가 외출을 하게 되면 언제 오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한다. 어린 아이 같이 순수한 산이에게 가족이란 숫자 4(네 식구)인 것 같다. 우리 가족 네 식구가 늘 같이 있어서(지금까지는) 꽉 채워진 숫자 4 말이다.

가족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다. 가족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언제나 행복하고 안정된 상태로 지속된다는 말은 아니다. 때론 관계가 삐그덕거려도 사랑은 가족을 지탱하게 해준다. 난 그 사랑이 더욱 견고해지기 위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늘 가닿아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