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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2024

우리들은 자란다




바람과 햇빛이 좋은 날, J는 아시안 식재료를 파는 마트에 구경 가자고 했다. J는 미국에서 첫발을 디딘 뉴올리언스에서 45년을 넘겨 살고 있다. 마트를 오가는 동안 그의 희로애락이 담긴 이민 이야기 속으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

70년대 끝 무렵, J는 먼저 도미한 아버지의 권유로 한국에 남아 있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에 도착한 J는 남부 시골 풍경에 무척 실망하였다. 미국이라면 영화에서 본 뉴욕처럼 높은 빌딩이 가득한 도시일줄 알았는데 J의 눈앞에는 녹슨 철도와 다리, 풀이 무성한 거리 뿐이었다. 서울 명동에 살면서 남산에 있는 국립극장 사무직 공무원이었던 그는 이런 시골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집안에 틀어박혀서 티브이만 보던 그에게 어느 한인은 왜 젊은 사람이 놀고 있냐며 호텔 일을 권유했다. J는 그의 엄마와 함께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하얏트 호텔 주방에서 접시 닦기를 시작했다. 호텔에서 일한 지 두어 달 지났을 때 그 모녀는 식품점으로 장을 보러 갔다. 

20대의 J는 예쁘장한 한국식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식품점을 둘러보던 그들에게 갑자기 강도가 다가와 J의 뒷목과 척추를 칼로 찌르고 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 그의 엄마는 딸의 가방을 되찾기 위해 강도를 붙잡았다. 강도는 엄마의 팔을 찔렀고 어수선한 상황을 보고 달려온 식품점 매니저의 어깨도 찌르고는 달아났다. J는 심한 장애를 입을 뻔한 아찔한 상황을 겨우 피했고 엄마와 함께 병원 치료를 받았다.

J는 호텔 의료보험이 좋아서 그 당시 병원비는 문제없었다며 그의 모험담을 마무리했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도 다운타운을 지날 때 그가 일했던 호텔을 잊지 않고 알려주었다. 호텔 꼭대기에 있는 돔은 서울타워 레스토랑처럼 360도 회전하며 꽤 돋보이는 빌딩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마트가 있는 동네에 들어서자 J는 이민 와서 처음 살았던 동네라서 익숙하다고 했다. 잊지 못할 장소에 와서 그랬는지 J는 그의 엄마에 대한 추억을 하나 더 들려주었다. 그의 엄마는 아주 씩씩하고 언변이 좋으셨단다. 

호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엄마는 재미난 말로 J의 고단함을 씻어 주시곤 하셨다. 엄마는 닭이 뭐라고 우는지 아느냐 물으시고는 수탉은“꼬끼오~ I love you~”하고 암탉은 “꼬끼오~ I don’t like you~”라고 대답하셨단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엄마의 우스갯소리가 재미있는지 깔깔 웃는다.

J의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10년이 채 안 되었다. 그는 부모님을 가족이 모두 묻힐만한 넓은 묘지에 정성스럽게 모셨다. J는 “여기는 엄마, 여기는 아빠”유골이 묻힌 장소를 가리켰다. 부모님 곁에 자기가 묻힐 자리도 있다며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부모님이 그리워 묘지를 자주 방문하는 J의 마음을 나는 알듯 모를 듯했다. 보통은 학교나 직장 혹은 결혼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는데 J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늘 함께 지냈으니 그 정이 더 깊은가 보다. J는 “나는 여기서 살 거야. 부모님이 여기 계신데 어디를 가겠어”라고 야무지게 말한다.

J는 호텔에서 8년쯤 일하다가 한식당, 코리안 하우스를 차렸다. 번화한 위치에 있던 한식당은 남동생까지 네 식구가 매달려 일했다. 그는 코리안 하우스가 지역내 유일한 한식당이어서 한국 연예인이나 고위 공직자나 유명 선수가 다녀갔다는 말도 덧붙였다. 식당을 35년 동안 열정적으로 경영했을 J의 모습이 그려졌다.

우리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J는 불쑥 자신이 젊었을 적에 아버지를 닮아 고지식하고 퉁명스럽고 말수가 적어서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교만하다고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현재의 J를 보면 마음은 따뜻한데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게 서툴러서 그렇게 보였을 거라고 짐작했다. 

J는 이제와 돌아보니 식당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신문에라도 내야 할까? 그때 왔던 손님들에게 미안하다고 말이야.”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실행하지 않을 해결책이었다.

부모님이 남겨 주신 추억이 J의 존재를 온통 감싸고 있다. 자녀에게 헌신하고, 당당하며 예의 바른 삶을 사는 J를 보면 말이다. 5월은 푸르고 우리들은 부모님의 사랑으로 오늘도 자란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4/05/2021

책 『파친코』를 읽고


『파친코』,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문학사상, 2018.



교회 젊은 집사님들의 대화 속에서 얼핏 무슨 소설이 재미있다는 얘기가 귀에 들어왔다. 책 내용이나 제목도 알지 못한 채 무조건 빌려달라며 책 읽는 순서에 나를 올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집사님에게서 두툼한 두 권의 책을 받아들었다.

일단 책 표지가 흥미로웠다. 제목이 '파친코'라니···. 교회 오락 시간에 등장하는 네 박자 게임이나 인간관계 훈련을 위한 인간 보물 지키기 같은 놀이에는 '게임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자신 있지만 다른 게임은 그것을 운영하는 머리가 도통 없다. 그래서 관심도 없는데 이 기회에 파친코에 대해서 알게 되려나 싶었다-하지만 파친코하는 방법은 전혀 소개되지 않는다. 기대하면 실망한다.

표지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지은이 이름이다. 이름이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이름 석 자인데 옮긴이가 따로 있다. 표지를 넘겨 저자 이민진은 일곱 살에 미국 이민을 한 한국계 1.5세라는 소개가 보였다. 지은이에 대한 이 한 줄의 설명은 책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며, 소설은 영문으로 쓰였고 한국어로 번역이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서 현대(1910~1989)를 아우르면서 어느 재일동포 가족사의 애환을 그려낸다.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기에 이민자가 느끼는 감정을 세미하게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 가족도 미국에서 조금 보태어 15년여를 사는 동안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과 익숙해짐, 삶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가져오는 제한과 기회를 겪고 있다. 그렇다 보니 책 속의 주인공 순자 혹은 선자-번역 오류인지 편집 오류인지 주인공 이름이 두 가지로 나온다-의 가족에게서 나의 경험과 겹쳐다가 얼른 비껴가는 장면을 곳곳에서 만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시대극을 보는 것처럼 상황이나 정서의 동화가 쉽게 이루어진다. 선자 가족은 부산 영도에서 시작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대부분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일본은 가까운 이웃이라기보다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태생적(?) 감정이 앞서는 나라라서 관심이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 나라에도 여전히 나의 동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다가왔다.

한편 아쉬운 마음도 여전히 남았다. 선자 가족이 겪는 병이나 고문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절절한 슬픔, 역사나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 인물들 간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 따위를 파고들기보다는 견디고 지나가는 쪽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저자의 의도가 있을 테지만 재일동포에 대한 이해가 넓지 않아 그런지 그들의 더 나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책 읽기를 마치는 즈음 재일동포가 당하는 차별과 증오가 '이민자의 나라, 자유와 기회의 땅' 미국에서도 뿌리 깊음을 알게 되는 사건들이 전해졌다. 3월 16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로버트 애런 롱에 의한 총기 난사로 한국 여성 4명을 포함하여 8명이 사망하였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운영하고 직원들이 아시안인 업소를 골라 계획적인 살인을 저질렀는데, 아직 공식적으로 인종 혐오 범죄라고 조사 결과가 발표되지 않은 상태다. 3월 29일에는 건장한 노숙자가 맨해튼 거리에서 65세 아시안 여성을 폭행하는 CCTV 영상이 뉴스에서 보도되었다. 정말 헉, 하고 말문이 막히고 내가 당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두렵기까지 한 영상이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미국 곳곳에서 혐오 범죄를 멈추라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계 차별과 폭력 방지를 위한 전담반을 운영하고 그것에 필요한 4천950만 달러의 기금도 마련하도록 조치했다.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와 이민자로서 더 나은 삶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파친코』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담담하나 내적으로는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선하고 당당한 개개인에서 개인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서로 보듬으며 살아가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반복한다.


*이 글을 수정하여 모바일 앱 '바이블 25'와 인터넷신문 '당당뉴스'에도 실었습니다.

2/06/2019

기침이 그린 그림




지난 열흘 여러 가지 일로 몹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시카고에서 열린 한인 목회자 세미나, 몽고메리지역 연합 부흥회, 그리고 미주 동남부 지방회가 얼마 전까지 목회하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에서 있었다.

미국의 북쪽과 남쪽 지역을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섭씨 영하 30도에 히터를 틀기도 하고 영상 25도에 에어컨디션너를 틀기도 하는 엄청난 기온 차이를 체험하였다. 춥고 더운 기온과 장시간 자동차 안에 있다보니 목이 잠긴다. 몸이 지쳤다는 신호다.


2019년 1월29일 시카고.
듣던 대로 시카고는 길에 쌓인 눈을 참 잘치운다.

시카고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미국 남부에선 보기 힘든 많은 눈을 5년만에 보아 설레기도 했고 동시에 바람의 도시(The Windy City)라는 별명답게 매서운 칼바람이 더해진 맹추위도 맛보았다. 콜럼비아는 어찌 그리 날씨가 좋던지 겨울 겉옷이 필요없는 시원한 날씨가 상쾌했다. 어디론가 떠났다가도 마침내는 돌아와야 하는 목적지가 된 몽고메리는 습기가 있는데다 기온이 높아 봄인듯 여겨졌다.  

시카고에서는 '변화 속의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미국에 사는 한인 목회자로서의 정체성과 앞으로 어떤 목회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도전이었다. 남편은 앞으로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한반도가 통일이 되고 한반도의 젊은이들이 역량을 발휘하기 위하여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럴 때 그들이 역사의식을 가지고 세계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민목회자로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그들과 나누는 역할을 감당해야겠단다.  이 각오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으로 어떤 선교와 교육...을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몽고메리에서는 개인의 고난과 절망이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어 회복되는 메세지를 들었다. 언제나 예수님은 진리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찬양팀, 여선교회의 간식, 아동부 교사들의 어린이 돌봄, 연합성가대에 참여한 성가대원들까지 모두 기도하며 협력하는 모습이 은혜스러웠다.

콜럼비아에서는 목회하던 교회의 두 장로님 안수식에 참여하였다. 콜럼비아제일교회에 대한 목회를 마무리하는 듯한 예식이었다. 헤어진 지 5개월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교우들도 있었으나 최선을 다해 그들만의 이야기로 남겨두고 떠나왔다. 

나보다 먼저 아들 산이의 목이 깊이 잠겼다. 산이의 기침은 거칠고 무겁다. 우리 부부는 산이가 목을 쉬게 가만 두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산이는 집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모임이나 예배 찬양하는 시간에 마이크를 놓지 않는다. 기침이 심하면 예배에 못 갈 수도 있겠구나 싶은데, 산이는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자신의 목을 달랜다. 기침이 나오려고 하면, “아, 괜찮아. 괜찮아~” 하며 목을 쓰다듬는다. 목과 가슴을 쓸어내리는 산이의 손은 간절하다.

예배 시간 중에 산이가 그렇게 기침을 하다가 토할까 봐 걱정이다. 아직까지 그런 적은 없으나. 남편이 산이에게 예배 시간에 앞에 앉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나 보다. 그랬더니 잠 자기 전에 남편에게 쪽지 하나를 주고 들어가더란다. 내용은, 아빠한테 미안하지만 약 먹고 다음에도 또 예배에 갈거라는 것이다. 아, 예배와 찬양을 이렇게 좋아하는 산이를 어떻게 가지 말라고 말릴 수 있을까.

걱정되던 산이의 기침이 몽고메리 연합집회 때도 두어번 있었다. 우리 교회가 아니라서 다행히도 산이는 나와 뒤쪽에 앉아 있었다. 산이가 설교 시간에 기침을 하자 근처에서 물을 건네는 손이 여럿 있었다. 다른 교회 교인도 있었고 우리 교회 교인들이었다. 예배와 보살핌이 있는 곳, 난 행복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쾌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과제는 언제나 나와 달라붙어 있다. 기침도 나에게 옮겨주었다. 몸은 처지나 내 영혼은 주님을 향해 고양된다. 이 마음을 헤아려주는 교우들이 주변에 있다. 미국 이민·신앙 역사라는 큰 그림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교우들과 함께 그려갈 그림이 기대된다. 질서있고 창조적이고 조화로운 우리 몫의 그림.

1/26/2015

영화 “로맨틱 레시피(The Hundred-Foot Journey)”




감기에 걸려 고생을 하던 남편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로맨틱 레시피(The Hundred-Foot Journey)”라는 영화였다. 한글 제목만 보고서는 남편의 마음이 읽혀졌다. 기침을 하면서도 감기 끄트머리라고 거듭 강조를 하더니 그날 밤은 아내의 품이 그리운 거였다. 그렇다고 재미없는 영화를 억지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은 영화에 대해 반신반의 하는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스티븐 스필버그와 오프라 윈프리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라는 정보를 슬쩍 흘렸다. 남편이 보자고 제안하는 영화가 언제나 재미난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들 대부분은 남편이 소개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특이하고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드는데 뛰어난 두 사람이 제작자들이라고 하니 두루두루 믿고 보자는 심정이 되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인도 음악이 흘러 나왔다. 뭔가 신비스러운 영상이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목이 나오는데 한글 제목과는 전혀 달랐다. The Hundred-Foot Journey. 백 걸음 여행이라는 제목에서는 짧은 거리 안에서 여행이라고 표현할만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보다 짐작해 보았다. 제목이 심오하다는 생각도 잠깐 했다. 원제와 한글 제목의 뜻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 두 제목을 붙인 각각의 이유를 알 듯도 했다.




The Hundred-Foot Journey

인도 뭄바이에서 하산 가족은 음식점을 운영했다. 누군가 정치적인 이유로 하산네 음식점에 불을 지른다.이 불로 요리사인 하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고 그의 가족은 고국을 떠난다. 어머니가 하시던 영혼이 있는 요리를 하기 위해 정착할 나라를 찾던 중 프랑스에 머물게 된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프랑스 시골 마을로 이민을 오게 된 것이다.

인도 문명과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하산의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인도 음식점을 열기로 결심한다. 아버지는 이전에 레스토랑으로 사용했던 곳을 찾아낸다. 하지만 백 걸음 앞에는 유명한 레스토랑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인도 음식점과 프랑스 음식점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 음식점을 운영하는 마담 말로리는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음식 재료를 먼저 차지한다든지 이런 저런 이유로 민원을 넣는다. 어느 날 밤, 말로리 음식점에서 일하는 셰프가 하산네 음식점에 불을 지른다. 인도에서의 불은 하산네가 인도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면 프랑스에서의 불은 그 마을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말로리 부인은 불을 지른 셰프를 해고하고 하산을 요리사로 데리고 온다. 말로리는 하산에게 엄청난 요리 실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음식점 간의 전쟁은 끝이 나고 하산은 백 걸음의 여행을 시작한다.

백 걸음이면 길 하나 건너는 길이인가 보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것뿐 아니라 낯설고 새로운 곳을 보고 싶고, 알고 싶어 찾아 떠나는 것이리라.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로의 여행, 말 한마디 건넨 적 없는 이웃집으로의 여행, 자기만의 공간에서 가족 모두를 만날 수 있는 거실로의 여행, 차가운 머리에서 따뜻한 마음으로의 여행…… 마음만 먹으면 이해와 화해 속으로 날마다 여행을 떠나는 다채로운 삶을 살 수도 있겠구나 싶다.




로맨틱 레시피

하산은 말로리 음식점에서 요리 실력을 인정받고 파리로 진출하게 된다. 파리에서도 그의 천재성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스타 셰프가 된다. 하산은 프랑스에서 점점 더 유명해지지만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공허해 보인다.

말로리 음식점에서 일하는 요리사 마거리트는 하산의 마음에 담긴 연인이다. 하산은 마거리트에게 그물버섯 라비올리 레시피에 대해 묻는 메시지를 보낸다. “양파를 오일로 구웠나요 버터로 구웠나요? 당신과 함께 만들었던 그 맛이 안 나요.” 마거리트는 “양파를 굽는 방법보단 버섯이 더 중요해요. 그물버섯은 여기서 나는 게 최고죠” 라고 답장을 보낸다.

하산의 외로움이 더해가던 어느 날, 인도 출신 동료 요리사가 도시락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도시락에는 동료 요리사의 아내가 싸준 인도 전통 음식들로 가득했다. 음식에 사용된 향신료에 대해 묻자 고향에서 보내준 것들이라고 동료는 대답한다. 하산은 도시락의 음식을 먹으며 울음을 참지 못한다. 하산은 자신의 명성을 뒤로 하고 가족과 연인이 있는 시골 마을로 다시 내려온다.

하산은 타고난 재능으로만 만들어내는 요리가 아닌 사랑으로 만들어내는 요리를 선택한 것이다. 레스토랑이 있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들로 만드는 요리 말이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도 사랑이 담긴 요리가 마을 사람들을 화해케 하고 감동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랑은 어디에 넣어도 어울리는 지상 최고의 음식 재료인 것이 분명하다. 신경하 감독님과 사모님께서 미국 여행 중에 주일 설교도 해주시고 우리 집도 방문해주셨다.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은 김치찌개와 고추장돼지불고기였다. 거기에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함께 넣어 대접하였다. 두 분께서 맛있다, 말씀해주셔서 행복했다. 

11/24/2014

살아가게 하는 힘



이민 오는 날.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2014 추수감사주일에.


내가 이민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이민’이라는 말은 그저 신문과 뉴스에나 나오는 낱말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민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민 생활이 어떠한 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살림살이를 싸 가지고 미국에 들어오면서도 아예 살러 오는 것인지 살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남편이 일할 곳이 미국으로 정해졌으니 늘 그랬던 것처럼 나머지 가족은 그저 따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 교육하기에 좋고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잘 되어 있다는 지극히 막연한 인식이 미국행을 결정하는데 보탬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뭘 모르니 용감하게 미국 땅으로 날아온 것이다.

비행기 값을 아끼려고 미국 국적 비행기를 한 번 갈아 타고 애틀랜타에 있는 하츠필드 잭슨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지고 어두웠다. 새로운 곳에 대한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하얀색 형광등과는 달리 공항에 수없이 밝혀져 있는 노란색 등은 이국적이면서도 그 긴장감 마저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다른 나라에서 살려고 찾아온 이방인답게 부피가 큰 이민 가방이 세 개, 크고 작은 여행용 가방도 세 개쯤이었다. 한국에서 부친 이삿짐은 한 달이 걸린다 하니 미국에 도착해서 한 달 동안 사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압축팩에 담긴 이불과 베개, 옷가지들이 대부분이었다. 성경을 포함하여 몇 권의 책과 노트북도 있었다. 살게 될 곳에 큰 한인 마트가 여럿 있는 줄 몰랐으니 라면도 몇 개 챙겨 왔다.

저녁 때라도 공항은 분주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가족을 마중 나온 두 분을 만나게 되었다. 앞으로 살게 될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타고 온 15인승 교회 차는 우리 가족과 보따리를 싣고도 넉넉했다. 우리가 다니게 될 교회 가까이 가서는 한국 음식점에서 따뜻한 설렁탕으로 저녁도 먹여 주었다. 두 분 중 한 분 목사님은 지금도 연락이 되는데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씨는 변함이 없다.

애틀랜타에 도착한 날이 수요일이라 저녁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친 후 생각지 못한 남편의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기 전 그는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300달러가 들어 있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어떤 집을 얻어야 할지 집을 구하기 전까지 어디서 머물러야 할지 이 또한 몰랐다. 남편과 동료가 될 한 부목사님은 닷새 정도 머물 수 있는 집으로 우리 가족을 안내했다. 장로님 댁이었다. 장로님의 따님이 다른 주에서 결혼을 하게 되어 며칠 집을 비우시게 되었다. 그 여러 날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 가족에게 집을 통째로 내어주신 것이다. 주인이 없으니 조심스러우면서도 호텔과는 달리 집이 주는 편안함을 누릴 수 있었다.

애틀랜타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우리 부부는 습관처럼 새벽기도회에 갔다. 자동차가 있을 리 없으니 어느 집사님께 부탁을 드린 것이다. 집사님은 새벽에 학교에 보내야 할 자녀도 있었고 집사님 집에서 우리가 머물던 장로님 댁까지 꽤 먼 거리인데, 자신의 사정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고 운전을 해주셨다. 미국에 살아보니 내가 새벽(!)기도 가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운전을 부탁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때는 뭘 몰라도 정말 한참을 몰랐다. 집사님은 아이들 학군을 고려하여 살기에 편안하고 좋은 위치에 있는 집을 구하는데도 동행해 주셨다.

닷새 안에 월세 집을 정했다. 담임 목사님께서는 새로 온 부목사네 가정에 아무 물건도 없으니 있는 것들을 나눠 쓰시라, 광고해 주셨다. 부엌에서 쓰는 그릇을 나눠주신 분들, 식탁이 없어 신문지를 깔고 밥을 먹고 있었는데 어찌 알았는지 한국 교자상과 숟가락을 사다 주신 분, 그 밖에 가재도구들도 많이 나눠주셔서 미국 생활의 모양을 잡아 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3년, 5년 살다 보면 영어를 공부하겠다는 마음이 옅어진다며 당장 영어 공부를 시작하라고 조언해주는 집사님이 있었다. 집사님은 적극적으로 지역 안에 있는 학교나 교회에서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곳들을 찾아 그 목록을 전해주었다. 미국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지역 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법도 도서관에 함께 가서 직접 알려주었다. 미국 장애인 단체와 연결해 주기도 했다. 여름성경학교나 한국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집사님은 열정과 리더십이 뛰어나고,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 집사님처럼 이중언어나 일을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도록 날 늘 자극하였다.

11월은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때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감사하고. 이 감사의 계절이 되면 처음 미국 생활에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늘 떠오르곤 한다. 아무 조건 없이 같은 신앙공동체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나눠주신 분들이다. 정말 고맙다. 마음에 고이 간직하련다. 이민 생활 첫 부분에 만난 잊지 못할 고마운 이야기들을 짧은 글로나마 갈무리하는 모양새를 보니 내가 이민자라는 정체성이 이제야 슬슬 생기기 시작하나 보다.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하다. 고백된 감사와 미처 깨닫지 못하여 고백되지 않은 감사가 있을 뿐이다. 감사는 과거를 의미 있게 하고 미래를 소망으로 채우며 현재를 살게 하는 힘이다. 이제는 올 한 해, 애틀랜타가 아닌 이곳에서 만난 고마움들을 되새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