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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2014

새로운 설거지 짝꿍




우리 교회 주일 점심 식사는 늘 푸짐하다. 반찬이 항상 열 가지가 넘는다. 와우! 후식도 떡과 빵이 늘 있다. 교인들이 각자 알아서 해 온 음식들이다. 대부분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다. 각자 집에서 늘 해 먹던 음식이 아닌 다양한 것들을 먹는 즐거움이 있다. 다문화 가정의 미국 교인들도 한국 음식을 잘 드신다. 미국 남편과 사시는 교인들은 집에서 한국 음식을 요리할 기회가 아무래도 적다 보니, 그들 또한 주일 점심 식사에 대한 기대가 있는 듯하다. 예배를 드리며 영적인 갈망을 채우는 것만큼 음식에 대한 욕망을 맘껏 채우는 시간이다.

음식은 정해진 순서 없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 알아서 준비하고,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는 당번을 정하여 돌아가면서 한다. 두 사람이 한 조다.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연세 드신 교인들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설거지에 동참하고 계신다.

나와도 한 조를 이룬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함께 설거지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바람에 당번인 주일에 혼자 설거지를 했다. 물론 정말 혼자 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다른 집사님들이 도와주셨다.

그런데 나에게 다시 설거지 짝꿍이 생겼다. 우리 교회에 나오신 지 얼마 안 된 분이다. 어느 집사님이 내 설거지 짝이 없는 걸 아시고 그분께 설거지를 권유하셨나 보다. 그 분은 흔쾌히 내 설거지 짝꿍이 되어 주셨다. 나도 좋아서 그분께 다가가 “저와 설거지 같이 하시는 거예요!” 했다. 그분은 “그래유~” 하면서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요청하셨다. 설거지 하자는데 뭘 이렇게 기뻐하시나 싶었다. 그분은 언제가 당번인지를 물어오셨다. 나는 11월 마지막 주쯤 될 거라고 알려드렸다. 주일에도 한 주 건너마다 직장에 나가셔야 하기 때문에 미리 계획을 짜두셔야 했다. 그 뒤에도 설거지하는 날짜를 계속 확인하셨다.

설거지 당번인 주일. “설거지 할까요?” 했더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채 또 “그래유” 하셨다. 마음이 넉넉해 보이던 첫인상 그대로였다. 갈아 입을 옷과 앞치마까지 준비해 오셨다. 그릇을 세제로 깨끗하게 닦아서 헹구고, 종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그릇 주인이 찾아갈 수 있도록 죽 늘어놓았다. 처음이라 뭘 해야 될 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도 손은 계속 움직이셨다. 짝꿍이 있으니 얘기도 나누고, 일도 하는 것 같지 않게 빨리 끝난 것 같았다.

그분과 짧은 시간 동안 설거지를 같이 하면서 마음이 흥분되었다. 설거지는 누가 보아도 궂은 일인데 기꺼이 즐겁게 일하는 그 마음이 내게도 전하여지는 듯했다. 교회 안에 특별히 친한 사람도 없지만 교인들도 목사 아내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그들에겐 교인들끼리의 관계가 우선인 것이다. 한 지역에서 평생을 같이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에 도드라지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을 자주 느끼곤 한다. 그런데 짝꿍에게서는 그런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짝꿍은 흰 설탕도 여러 봉지 나누어 주셨다. 사실 그 설탕은 거의 매주 떡을 해 오시는 집사님에게 드리려고 가져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설탕을 쓰지 않으신다고 하여 나에게 흰 설탕을 먹냐고 물어오셨다. 나도 흰 설탕을 먹지는 않지만 효소 담글 때 쓰기는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중에 효소 담그는 방법을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며 자동차에서 설탕 몇 봉지를 꺼내 주셨다. 거저 받는 설탕 무게만큼이나 설거지하면서 느끼던 설렘도 더해졌다.  

꽤 무거운 설탕 봉지들을 끌어 앉고 내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설탕을 땅 위에 내려놓고 트렁크를 열어 문을 높이 올렸다. 허리를 굽혀 설탕을 들어올리는데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두 손은 설탕을 들어올리느라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손이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설탕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트렁크 안으로 밀어 넣는데, 으악!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트렁크 문이 스르르 반쯤 내려와 있었나 보다. 눈과 눈 사이에 있는 높지도 않은 콧등을 트렁크 문 모서리에 힘차게 들이댄 것이다.

아무도 주차장에 없길 바라며 뒤로 돌아섰는데 짝꿍이 그대로 서서 지켜보고 계셨다. “괜찮아요?” 물어보시길래 “네”하며 멋쩍게 콧등을 쓸어 내렸다. 아, 만지지 말 걸…… 가로로 움푹 패인 것이 손을 댈 수 없게 아팠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짝꿍과 헤어졌다.

설거지하면서 그리고 설탕을 받으면서 설레었던 마음이 한 순간에 가라앉았다. 콧등이 욱신거릴 때마다 교인들을 대하는 평정을 잃지 말며 거저 받는 것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신호 같았다. 새로 온 교인과 함께 설거지하며 설렌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더욱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길 기도하고 있다. 

12/05/2013

영혼의 불꽃을 일으킨 한 단어, 순수


즐겨 걷는 길가에 서있는 오래된 참나무(Oak)다. 
나무 이름이 참(!) 좋다.


어려서부터 교회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주일에 교회를 거의 안 빠지고 예배에 참석했다. 교회 선생님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잘 따라 했다. 성경 구절을 외우라면 외우고, 찬양을 예쁘게 부르라고 하면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교회 선생님들은 나를 많이 귀여워해 주셨고 나는 더 열심히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듣고 따랐다. 어린 나에게 교회는 유익하고 즐거운 놀이터였다.

교회 선생님으로부터 성경 말씀과 그들의 신앙 태도를 여전히 배우면서, 중학교 2 학년 때부터 나도 교회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의 모교회는 작은 교회가 아니어서 청년들도 많았는데 어린 나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어찌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고 그 맡겨진 일을 얼마나 잘 감당했을까, 돌아보니 의구심이 들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늘 흥분되고 도전이 되었다. 아마도 교회는 나에게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을 꾸게 해준 곳이었던 것 같다.

교회 안에는 지금이나 그때나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귀찮은 일들이 있다. 행사준비, 청소, 식사준비, 설거지, 예배 후 뒷정리…… 난 무슨 생각이었는지 집에서는 손도 까딱하지 않으면서 교회에서는 그런 일들이 마치 나의 일인 양 참 잘도 했다. 그때의 마음을 기억해보면 칭찬을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생색을 내려고 한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그냥 남들이 잘 안 하려고 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런 자리에 내가 있었을 뿐이었다. 개신교와 천주교, 뭐 이런 개념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난 수녀가 되어야 하나 보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이 밖에도 나의 모교회는 내 삶의 태도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고등학교 3 학년이 되어 가고 싶은 대학을 고르기 전까지 신학대학이라는 학교가 있는 줄 몰랐다. 난 학교 선생님이 되어서 세상 지식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신학대학이라는 존재를 알고 나서 어떤 길이 하나님을 위해 더 잘 일할 수 있는지, 일 년 동안 밤 9 시만 되면 교회 있는 곳을 향하여(왜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더 정성스럽다고 여겼는지…… 나의 과거지만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된다)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 물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 더 헌신하길 원하시면 증거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 증거로 대입 학력고사 점수를 몇 점을 달라고 내 맘대로 정했다. 학력고사 결과가 나왔는데 점수는 기도하던 것에서 일 점도 어긋나지 않는 딱 떨어지는 그 점수였다. 난 망설임 없이 신학대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일반 대학에 진학하길 바랐던 기대를 저버린 딸에 대한 부모님의 분노도, 친척들과 친구들이 찾아와 신학대학 가는 것을 말리는 충고도 이미 확실한 증표를 가진 내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면접이 있었던 날이다. 교수님은 왜 신학대학을 왔냐고 물으셨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님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라고 대답했다. 난 교회가 좋고 교회를 위해서 뭔가 더 잘 하고 싶은 단순한 마음이었다. 원서 접수를 할 때 신앙고백을 적어 내는 것이 있었다. 난 거기에 사도신경을 적어서 냈다. 그 보다 더 좋은 신앙고백문이 있을 수 없다는 고매한 생각에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이라고는 사도신경 밖에 몰라 그걸 적은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 보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교수님은 내 대답과 신앙고백문을 보고 어찌 생각하셨는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웃으시며 나중에 교수님 자신의 아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셨다(교수님의 두 아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수님을 통해 그 아들을 소개받는 일은 없었지만 교수님은 재미있는 기억 하나를 만들어 주셨다). 신학과 180 명 신입생 가운데 다섯 번째의 꽤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을 했다.

성실한 교회 언니에서 신학생이 되고, 전도사가 되고, 20 여 년 전부터 목사의 아내가 되어 살고 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교회와 더불어 신앙생활 하면서 기쁘고 은혜롭고 감사한 일들과 슬프고 황당하고 괴로운 일들이 참으로 많이도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숲길을 걸으며 남편과 새해에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나 이야기 하게 되었다. 야트막한 산 속을 한 시간 반 이상 걷다 보면 수다를 많이 떨게 된다. 이 날은 이야기가 흘러 흘러 교회와 관련된 나의 어린 시절을 더듬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남편은 당신의 순수함을 보시고 이 길로 이끄셨나 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발에 밟혀 부스러지는 나뭇잎 소리에 섞여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남편은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당신의 그 순수함을 회복해야 될 때 같은데.”
‘순수함?’
머릿속에서 반짝하는 불꽃이 튀었다. 일정한 주제도 없이 떠들어댄 기억의 조각들 속에서 나의 순수함을 읽어준 남편이 예뻐 보였다. 동시에 미국으로 와서 느슨해져 있던 기도의 끈을 다잡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나이가 어리든 나이가 들어가든 순수하게 살 수 있다. 어릴 때는 세상에 물들지 않아 그 자체로 순수한 상태라면 나이가 들어서도 사사로운 욕심이나 그릇된 생각을 하지 않는 순수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미국으로 온 뒤로 난 자꾸 순수와는 거리가 먼 속물이 되어 가는 것 같다. 낯선 현실이 불안하게만 여겨졌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성경 가방 속 깊숙이 밀어두고, 한 달의 수입과 지출에 맞추어 모든 것이 숫자로 표현되었다.
“당신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아니야,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어떡할 거야!”
남편과 이런 주제로 때때로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지금까지 왔다. 그런데 나에게도 순수한 구석이 있었노라 남편이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 동안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을 때의 마음가짐도 보통 때보다 순수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다. 불안과 걱정, 지식과 경험, 선택과 방법, 손해와 이익 계산을 다 떠나 보내고, 앞으로 열려질 모든 가능성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그 어떤 것을 주셔도 그것은 좋은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모형인 가족과 교회를 위한 응답을 바라는 마음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리라 믿고 마음을 텅텅 비우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한결 같은 사랑으로 나의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확신시켜 주셨다.

이제부터 하나님께 드릴 기도의 키워드를 찾아냈다. 바로 교회다. 미국에 온 뒤로 목사는 교회라는 일터에서 월급 받는 고용인 같다는 느낌이 많았다. 난 그 고용인의 월급으로 살림을 사는 아내일 뿐이고 말이다. 누구도 이렇게 얘기한 사람은 없다. 그냥 나의 시답잖은 느낌이다. 이런 느낌도 불필요한 것이므로 흘러 보내려 한다. 그저 나는 교회를, 교인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남편 말대로 혹여 교회를 사랑하는 나의 순수함을 보시고 지금의 자리로 이끄셨다면, 그래서 빈 마음으로 다시 교회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분명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우리 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교회, 소망이 있는 교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