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2026

마음의 주름을 펴는 세탁소



마음의 얼룩을 지우고 마음의 주름을 펴는 세탁소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기억과 상처를 품고 그 문을 두드리게 될까. 윤정은 작가의 힐링 판타지 소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에는 그런 마법 같은 세탁소가 등장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뉴올리언스 곳곳에 자리한 한인 세탁소들을 떠올렸다.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에서 만나는 한인들 가운데는 유독 세탁소를 경영하는 분들이 많다. 보통 부부가 세탁소에서 함께 일하신다. 아내는 카운터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세탁물을 접수하며, 남편은 드라이클리닝이나 다림질이 이루어지는 작업장을 맡는다. 세탁소를 방문할 때마다 카운터 뒤편에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반갑게 맞아 주시던 분들, 비닐을 씌운 옷들이 레일을 타고 스르륵 돌아가는 소리가 지금도 눈과 귀에 선하다.

그들에게 세탁소는 삶의 든든한 보루이자 치열한 일터다. 사계절 내내 푹푹 찌는 열기 속에서 묵직한 스팀다리미의 하얀 수증기와 특유의 솔벤트 냄새를 들이마시며 수십 년을 보냈다.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고 빳빳하게 옷을 다리며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삶을 지켜온 시간이었다.

70대를 살고 계시는 그들은 은퇴를 맞이했거나 조용히 가게를 정리하고 계신다. 최근에 은퇴를 준비하시던 분들에게 소중한 일터를 정리하는 마음이 헛헛하지는 않으신지, 혹 손을 보탤 일은 없는지 여쭤보았다. 시원섭섭하죠, 라고 밝게 웃으며 대답하셨다. 아쉬움보다는 후련함이 느껴졌다. 언젠가 들려주셨던 허리케인 피해 속에서 겪은 일이나 손님과 각별했던 이야기 보따리를 다시 풀어 놓으셨다. 아마도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억이리라.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뉴올리언스를 온통 물바다로 만들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인 세탁소 세 곳은 그때 물에 잠기지 않았다. 같은 거리에 있는 건물이라도 어떤 곳은 물에 잠기고 어떤 곳은 멀쩡했다. 뉴올리언스에서 유명한 세인트 찰스 거리에 있던 세탁소에는 주변 호텔에서 빨랫감을 어찌나 많이 가져오는지 일감이 넘쳐났다. 영업이 가능한 다른 세탁소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대피했던 주민들이 돌아와서 빨래할 곳이 절실한 상태였다. 세탁소에서는 밤낮없이 기계가 돌아갔다. 세탁비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시련이 어떤 사람에게는 상실로, 어떤 사람에게는 뜻밖의 기회로 남았다.

한편, 세탁소는 단순히 세탁물을 맡기고 찾아가는 가게를 넘어, 미국인 이웃들과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정거장이었다. 오래 거래하던 어느 부자 노신사는 매월 제철 과일을 주문해서 보내주어 미안할 정도였다. 그들은 갈비와 만두로 답례했다. 15명에게 장학금을 주던 노교수는 연세가 많아지면서 대소변 얼룩이 묻은 옷을 가져오곤 했다. 그들은 두말없이 그 옷을 받아서 세탁했다.

오랫동안 이웃과 변함없는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웃의 옷을 정성스레 세탁해서 제때에 입게 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성실함 때문이었다. 평생 손때 묻은 다리미를 잡고 이웃들의 구겨진 옷을 반듯하게 펴주던 그 손길은, 어쩌면 소설에서 마음 세탁소를 운영하는 지은이가 사람들의 마음 얼룩을 어루만지던 따뜻한 위로와 닮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지은이는 마음의 얼룩을 깨끗이 없애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배운다. 마음에 진 어떤 얼룩은 억지로 지우기보다 가만히 품어 안을 때, 상처가 아니라 비로소 “마음의 나이테”가 된다고 했다. 이민자의 고단한 삶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낯선 땅에서 삼켜야 했던 서러움, 고향을 향한 그리움 같은 얼룩들을 어찌 다 말끔하게 지울 수 있을까. 그들은 지워지지 않는 삶의 얼룩들을 원망하는 대신, 하루하루 마음을 묵묵히 다스려가며 살아왔다. 피하지 않고 견뎌낸 그 세월의 흔적이 마침내 깊고 단단한 마음의 나이테를 빚어낸 셈이다.

평생 남의 옷의 얼룩과 구김을 살피느라 정작 자신을 위해 고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던 몇 분의 고단한 마음을 헤아려본다. 은퇴를 맞이한 분들의 남은 날들 위에 햇볕에 잘 마른 빨래처럼 보송하고 따뜻한 평안이 머물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 마음에 불쑥 찾아오는 사소한 얼룩과 구김살들도 조급하게 굴지 않고, 시간을 들여서 정성껏 다루어 보리라 다짐해 본다. 책장을 덮고 창밖을 내다보니, 폰차트레인 호수 쪽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나직하게 내려앉고 있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