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2026

빛을 먹는 존재들



잔디를 깎고 나면 베인 풀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가 좋았다. 그런데 향기가 풀이 내지르는 화학적 비명이라는 의견이 떠올랐다. 식물과 곤충의 의사소통을 연구하는 슐츠라는 과학자가 말이다. 그럼 잔디를 깎지 말아야 하나? 그럴 수는 없다. 그럼 아예 잔디를 심지 말아야 하나? 다른 식물이나 꽃은 어떻게 대해야 하지?

잡지 <애틀랜틱> 과학· 환경 전문 기자인 조이 슐랭거가 빛을 먹는 존재들 식물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 슐랭거는 여러 과학자의 연구와 인터뷰를 통해 식물은 빛을 재료 삼아 광합성을 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산소와 열매를 주는 존재 이상임을 밝히고 있다. 식물은 보고, 듣고, 느낀다. 다른 식물과 소통하기도 하고, 경험한 것을 기억했다가 스스로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한다. 놀라웠다.

식물을 쓰다듬거나 음악을 들려주면 좋아한다는 말은 하나의 비유라고 생각했다. 자연을 돌보자는 차원으로. 그런데 식물은 그렇게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의 언어로 식물 세계를 표현하려다 보니 사람 중심의 사고를 하고 의인화하여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함부로 없다. 나는 자연친화적인 삶을 추구하면서도 식물이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되고 기쁨을 주는 대상으로만 취급했음을 고백한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나는 해마다 화분이나 텃밭에 토마토나 고추를 키우곤 한다. 그리고 해마다 작물들 속에서 나비 애벌레들을 만난다.  애벌레가 작을 때는 발견하지 못하다가 배설물이 크고 많아지면 존재를 확실히 알게 된다. 어머나! 너희들이 다시 나에게 찾아와 주었구나, 하며 기뻐할 법도 한데 나는 애벌레를 환영하지 못한다. 애벌레가 나의 야채를 갉아먹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떼어낼 궁리만 한다. 어른 손가락보다 굵은 초록색 애벌레는 그의 여러 발로 줄기를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떼어내려면 손에 힘을 주어야 한다. 정말 애벌레가 무섭다. 결국은 애벌레를 떼어내든가 애벌레가 붙어 있는 가지째 잘라서 나의 작물로부터 곳에 놓아둔다.

책에서 식물은 애벌레들이 들러붙어 자기 몸을 한참이나 뜯어먹어도 한동안은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하며 견딘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는 애벌레의 입맛을 떨어뜨리는 화학물질을 신중하게 자기 잎들 속에 채워 넣기 시작한다. 이때는 애벌레들 대부분이 앞으로 굶는다 해도 적어도 살아남아 변태하고 수분할 있을 만큼은 충분히 잎을 먹은 시점이다.” 라고 말한다. 지난날 애벌레가 나의 식물을 갉아먹더라도 그냥 놔둘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에게 정도의 인내심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오면 실험을 해봐야겠다.

식물은 화학 성분 합성의 천재들이라고 한다. 포식자가 잎을 뜯어먹으면 가까운 친족이나 이웃에게 화학 물질을 분비하여 공기로든 뿌리로든 경고 신호를 보낸다. 이것은 식물끼리 의도적으로 의사 소통을 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의도성은 어느 정도 지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식물학자 토니 트레와바스는 이건 학문적 지능이 아니라 생물학적 지능이라고 말한다. 식물에는 인간의 뇌와 같은 기관은 없지만 식물 전체에 신호를 처리하는 기관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식물은 촉각에 예민해서 쓰다듬으면 면역계가 활성화한다. 성장을 잠시 멈출 것인지 줄기를 키울 것인지 자신의 삶을 재조정한다. 해변달맞이꽃은 벌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녹음하여 들려주면 3분만에 꽃꿀의 당도를 높인다고 한다. 나사 포이소니아나는 뒤영벌이 오는 시간 간격을 기억하고 예상한 때에 맞춰 꽃가루를 내놓는다. 밖에도 흥미진진한 식물 세계가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어진다.

빛을 먹는 존재들로 식물을 소개하는 책은 식물을 먹는 사람 역시도 빛을 먹는 존재이니 공존하기 위해 서로 존중하라고 말한다. ‘ 안에 있다 유명한 한국드라마 대사가 떠오른다. 저자 슐랭거는 사람들이 식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식물에게 가족 구조가 있고 언어가 있고 사회생활을 하는 등등의 특징을 현실로 선택할 때라고 주장한다.

공존은 선언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꽃을 심고 식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작은 시도들로 기꺼이 나아갈 때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4/10/2026

그녀를 지키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지켜준다는 의미는 존재가 오늘에 존재하도록 삶의 일부를 기꺼이 내어주는 행위이다. 그것을 사랑 혹은 우정이라고도 부른다. 소설 『그녀를 지키다 』는 1900년대부터 1940년대의 이탈리아가 주된 배경이다. 주인공 미모와 비올라는 당시 관습과 계급의 수많은 심연을 건너며 그들의 우정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를 지키다 』는 개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글을 전개한다. 부분은 3인칭 시점이다. 죽음을 앞둔 82 미모와 그가 마지막으로 조각한 피에타상(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으로 인한 이상한 현상을 풀어가는 이야기다. 다른 대부분은 1인칭 시점이다. 나이든 미모가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펼친다.

우리는 인생에서 실패하고 부서지는 경험을 한다. 미모와 비올라 역시 그런 경험에서 비껴가지 않는다. 미모는 연골 형성 저하증을 갖고 프랑스에서 태어난다. 가난한 조각가였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미모는12세에 홀로 그의 부모님의 나라 이탈리아로 보내진다. 공방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암흑 같은 시기를 보내기도 한다.

비올라는 귀족 가문의 딸로, 똑똑하고 미래지향적인 꿈을 꾸는 여성이다. 비올라는 어릴 적부터 하늘을 날고 싶어했고, 대학에 가길 원했고, 이탈리아 파시즘 시대가 지나가자 제헌 의회 선거에 출마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문의 이익 때문에 비올라는 인생을 맘껏 펼치지 못한다.

반면에 미모의 재능은 낭중지추 같아서 조각하는 것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미모에게는 원석 안에 있는 형체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 미모에게 조각은 형체를 풀어주기 위한 작업이다. 그에겐 현대적인 감각도 있어서 시대의 요구에 맞는 조각을 찾아낸다.

비올라는 이런 미모와 친구인 것을 로마 교황청에서 일하는 오빠 프란체스코 신부에게 알린다. 후로 미모는 그의 공방도 갖게 되고 주교나 추기경, 정부 인사의 주문도 받는다미모는 오르시니 가문이 후원하는 조각가가 되어 가치가 한껏 높아진 작품들을 만들고 명성을 날린다.

오르시니 가문과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는 미모의 욕망은 한껏 채워진다. 미모는 부요하게 되고 생활은 안정된다. 그러자 조각가로서 원석 안의 형체를 보는 능력은 사라진다. 능력은 미모의 삶의 절반이 무너지는 경험을 이후에 되찾는다.

소설에서 이야기가 극적으로 전환할 자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중 인상 깊었던 장면들이다. 소설 초반, 바람이 많이 불어서 오르시니 가문의 저택 지붕에서 조각상 하나가 떨어진다. 미모는 조각상을 복원하러 갔다가 30 우정을 쌓게 비올라를 대면한다.

소설 종반에서는 성당 지붕에 균열이 생기는 바람에 돌덩이 하나가 떨어져 나와 성당 마당에 있는 피에타상을 산산조각 낸다. 균열은 어떤 자연 현상의 전조이다. 미모는 새로운 피에타상을 조각하는 임무를 맡는다.

즈음 비올라는 의원 선거에 출마하는데 고장을 통과하는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한다. 그러자 권력에 붙어 경제적 이익을 보려는 자들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미모는 비올라를 살리기 위해 선거를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비올라는 포기하지 않는다. 미모는 비올라를 떠나고, 다시 한번 자연의 어떤 불협화음은 사람을 완전히 갈라놓는다.

미모는 비올라에게서 영감을 받아 피에타상을 조각하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작품은 관람자들에게 이상한 감정을 발생시킨다는 이유로 사크라 수도원에 유폐된다. 피에타상에는 어떤 비밀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미모가 그녀를 기억하고 지키는 길이었다. 그리고 미모는 피에타상과 함께 수도원에서 그의 남은 생애 40년을 보낸다.

『그녀를 지키다 』를 다시 훑어보면서, 뉴올리언스 식물원에서 청동 조각상이 떠올랐다. 곧게 서서 손으로 아기를 감싸안고 젖을 먹이는 단호한 얼굴을 가진 엄마 조각상이다. 엄마의 다른 손은 뒤로 뻗고 있다. 조각상의 뒤로 돌아가면 뜻밖의 장면과 맞닥뜨린다. 엄마는 장총을 붙들고 있다. 조각상은 엔리케 알페레스(1901-1999) 작가가 젊은 시절에 경험한 멕시코 혁명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미모의 피에타와 알페레즈의 엄마 조각상은 역사에서 고통받는 이가 누구인지 기억나게 하고 그들의 존재 가치를 지키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임을 보여준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