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올리언스는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묘지의 외관이 벽돌이나 그 위에 회칠한 작은 집 모양이면서 구획에 맞추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묘지 문화는 18세기 프랑스와 스페인 식민지 시기를 지나면서 스페인식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몇 년 전 뉴올리언스로 이사했을 때 지역 한인들을 처음 만난 곳이 바로 그 묘지였다. 고인은 향년 90세로, 뉴올리언스에서1980년대 목회하실 때부터 사셨던 목사의 아내였다. 고인을 생전에 뵌 적도 없는데 고인은 새로운 곳이 낯설기만 한 우리 가족을 이렇게 환영해 주셨다. 우리는 고인이 섬겼던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목회자 가정이었다.
뉴올리언스로 오기 전, 우리는 신의 곁을 떠난 적은 없지만 목회를 이어갈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뉴올리언스에 교인 다섯 명이 2년여 동안 목회자 없이 주일예배를 지키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땅에 내려서지도 못하고 하늘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을 떠다니던 마음이 뉴올리언스를 향했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뉴올리언스에서 살기로 했다. 그 마음을 고인도 알아채셨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환영하는 신비로운 방식에 휩싸였던 느낌은 프랑스 작가, 발레리 페랭이 쓴 장편소설 《비올레트, 묘지지기》를 읽으며 다시 살아났다. 이 소설은 주인공 비올레트가 사랑하고 연민하며 절망으로부터 ‘힘겹게’ 삶의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을 비올레트를 중심으로 한 세 부류의 주변인물들로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부류로, 비올레트가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비올레트는 스물아홉 살에 묘지지기가 되고 그곳에 잠든 이들을 예의와 마음을 다하여 돌본다.
두 번째는, 비올레트 곁을 떠나간 사람들이다. 비올레트는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비올레트의 엄마가 그를 낳았을 때 사산아인줄 알고 옆으로 밀쳐 놓았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온통 보랏빛을 띤 아기가 살아났다. 보라색을 뜻하는 비올레트가 아기의 이름이 되었다.
비올레트의 남편은
비올레트 곁에 온전히 머문 적이 없다. 비올레트는 위탁가정을 전전하다가 열일곱 살에 잘생기고
무책임한 필리프 투생을 만난다. 그들은 결혼했으나 투생은 비올레트와 만난 첫 해부터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비올레트가 피폐한 삶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에도 투생은 자기만의 사랑을 찾아 사라졌다.
비올레트와 투생
사이에는 딸 레오닌이 있다.
레오닌은 비올레트에게 살아갈 힘이고 기쁨이다. 레오닌은 일곱 살 생일을 앞둔 여름,
캠프에 참여했다가 의문의 죽음에 이른다. 비올레트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캠프 주최측과의 재판에서 레오닌과 친구들이 우유를 마시려다 사고를 일으켰다는 증언을 듣는다. 레오닌은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 비올레트는 그 사고가 인재라고 확신하고 원인을 규명하려고 나선다.
그 과정에서 투생의 여자들도 알게 된다. 비올레트를 멸시하는 투생의 부모가 저지른
비극도.
마지막 부류는, 비올레트에게 사랑과 연민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그 중에 셀리아와 사샤가 떠오른다.
그들은 고아인 비올레트에게 마치 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존재들이다. 비올레트가 묘지지기를
하기 전 건널목지기였을 때, 국영열차 파업으로 객차가 건널목 근처에서 멈춘 적이 있다. 비올레트는 열차를 살펴보다가 데리러 와줄 사람이 없는 셀리아와 손녀 에미를 발견한다. 비올레트는
그들이 집에서 묵어가도록 호의를 베풀었고, 나중에 셀리아는 비올레트에게 그의 별장 문을 열어둔다.
셀리아는 묘지지기를
하던 사샤에게 비올레트를 소개한다. 신비한 치료사 같은 사샤는 인상깊은 인물이다.
비올레트는 사샤를 만나자마자 마음의 평화를 경험한다. 사샤에게는 비올레트에 대한
어떤 평가의 기색이 없다. 사샤는 비올레트에게 관사에 딸린 정원을 가꾸는 법을 가르쳐주고 묘지의 일상을 보여준다.
비올레트는 딸의 죽음을 딛고 자신이 거듭 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샤는 은퇴하면서
비올레트에게 묘지지기 바통을 넘겨준다. 비올레트는 사샤를 보면서 뱃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꾸며낸 어떤 것이나 인생에서 잠깐 지속되는 흥분 같은 것이 아니라, 충만감”을 느끼면서 “그 여름을, 그 순간을, 정원을, 사샤를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한다.
나는 비올레트와
주변 인물들 사이에 극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가족의 부재나 죽음 같은 무거운 주제를 위트와 추리로
균형을 잡는다. 무엇보다, 생명을 돌보며 오늘을 사는 비올레트를 만나
반가웠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와 당당뉴스에도 실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