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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2024

식물과 이사 이야기




사람은 적어도 두 번은 이사한다. 어머니의 태에서 세상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나는 그중 한 번을 포함하여 한국과 미국에서 여러 번 이사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이사는 아무런 짐이 없으나 살아가는 동안 이사할 때는 이런저런 짐들과 함께 다닌다. 그런데 어떤 이사를 하든 아무 짐이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식물이다.

얼마 전 텃밭에서 살던 파와 부추 몇 뿌리를 화분으로 옮겼다. 나무를 심었던 두 개의 커다란 화분이 다른 식물을 품으려 기다리는 듯 보였다. 하나에는 텃밭에서 이사한 실파와 한인마트에서 이사한 대파를 섞어 심었다. 다른 하나에는 이파리가 넓적한 부추와 여리여리한 부추를 심었다.

파는 처음 심을 때 온통 마트에서 이사했고, 부추는 지인들의 텃밭에서 나의 텃밭으로 오래전에 이사한 녀석들이다. 이파리가 넓적한 부추는 Z가 한국에 계신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다. Z는 꽤 튼실한 부추라며 나에게 그것을 나눠주었다. Z의 말처럼 이파리도 뿌리도 건강미가 넘치는 부추다. 이들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긴 꽃대를 올려 하얀 별처럼 생긴 꽃송이를 터트린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다. 부추꽃은 점점 까맣고 옹골찬 씨앗으로 에너지를 모아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그렇게 Z로부터 온 부추는 퍼지고 퍼져서 다른 집들로 이사하기도 했다.

또, 이파리가 가는 부추는 식물을 야무지게 키우는 A의 텃밭에 살았었다. A는 한 번 키운 식물들에서 꼭 씨를 받아 다음 해 텃밭을 만들었다. 고추는 물론이고 토마토, 오이에서도 씨를 받아냈다. A의 솜씨는 어려서부터 농사하시는 부모님을 도와 식물을 돌본 덕분이라고 했다. 그의 손에서 식물들이 생명을 이어가는 재미난 실험을 구경했었다. A가 비닐하우스에서 씨를 뿌려 키우던 여린 부추를 나눠주었다. 그것들이 나에게 이사할 때는 그 모양새가 Z의 건장한 부추와 사뭇 달랐다. A의 부추는 먹잘 것이 없을 정도로 작고 가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두 종류의 부추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해졌다. 재미있는 텃밭 생활이다.

파나 부추는 한번 심어놓고 새로운 흙이나 거름을 더해주면 싱싱하게 이파리를 올려 자신을 내어준다. 이번에 그들을 텃밭에서 화분으로 이사시키면서도 신선한 흙과 닭똥을 발효시킨 거름을 선물로 주었다. 아, 그것을 심기 하루 전에 할 일이 있다. 파와 부추의 초록색 부분을 잘라내고 뿌리도 1.5cm 정도로 다듬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식물이 새로운 환경에서 있는 힘을 다해 생명을 이어가도록 자극하기 위해서다. 짤막한 파와 부추를 그릇에 담아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물을 부어준다. 하루가 지나면 이파리가 나오는 부분에 초록빛이 돈다. 생명을 이어가려는 모양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

이사는 변화의 계기를 준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는 물리적인 자리 옮김이다. 파와 부추는 텃밭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다가 화분이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옮겨졌다. 식물에 덜 자연스러운 환경이지만 나의 보살핌을 더욱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이사다.

이사는 생존이다. 살아갈 환경을 찾아가는 일이다. 식물은 자연에 의지해서, 그리고 사람은 나름의 선택으로 살 곳을 찾아 나선다. 식물은 신이 창조한 자연과 우주에 기대어 살아간다. 사람은 이사하면서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데 신의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한다. 나의 의지보다는 신에게 삶을 맡기려는 태도다. 이런 태도는 식물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화분에서 식물이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란다. 어느 곳에서든 자신을 위해 어떤 짐도 만들지 않고 생명을 충실하게 이어가는 식물의 단순함이 필요에 따라 유익한 혹은 무익한 짐들을 복잡하게 쌓아놓은 내 환경 속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그리고 자연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속을 알차게 채워가면서도 그 능력을 뽐내지 않는 식물의 겸손함에 조용히 스며들고 싶다. 

날이 따듯해지면 농원으로 나들이를 가 보련다. 다른 빈 화분으로 피튜니아나 마리골드나 제라늄같이 그만그만하게 섞여 살만한 꽃들을 데려와야겠다. 저마다 모양과 색깔이 다른 채소와 꽃의 어우러진 모습을 그려본다. 반짝이는 하늘 아래에서 그들이 만들어낼 변주가 들어봄 직한 재즈 가락이 되어 흘러가는 상상에 빠진다. 벌써 어깨가 들썩거린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6/25/2018

한번뿐인 것처럼





어떤 개인 주택의 수도는 건물에서 떨어져 마당이나 뒤뜰에 설치되어 있다면 지금 우리 집 같은 경우는 집 바깥벽에 두 개의 수도꼭지가 달려 있다. 양쪽 벽에 하나씩, 한 벽의 앞쪽에 그리고 다른 벽에는 뒤쪽에 설치되어 있다. 필요에 따라 그 각각의 수도꼭지에다가 호스를 연결해서 사용한다. 뒤뜰에서 물을 쓸 일이 있을 때는 벽 뒤쪽에 있는 수도를 쓰는 것이 당연히 편리하다. 그 수도와 연결된 호스 끝에는 분무기가 달려 있어서 물을 흐르게 하거나 그치게 할 수 있고, 물의 세기도 조절할 수 있다. 손바닥만한 꽃밭과 텃밭, 화분에 심겨진 식물들에게 아침마다 물을 준다. 분무기로 뒤뜰에 있는 식물들에게 물주는 일이 손쉽고 재미있다.

이 분무기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면 시원하고 활기찬 기분이 든다. 분무기의 방향을 잘 잡으면 아침 햇빛이 물방울에 닿아 무지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일곱 가지 색깔이 흐릿하게 뭉개져 있는 무지개, 반원에서 다시 절반만 보여주는 무지개, 깜박거리는 신호등처럼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무지개…… 모두 수줍음이 많은 무지개들이다. 어떤 날에는 데이릴리 꽃 더미에, 어떤 날에는 내 발등에 무지개가 걸리기도 한다. 무지개가 시작되는 곳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동화 같은 얘기를 확 믿어버리고 싶은 순간이다.

아침부터 80(26.6)로 시작되는 요즘 같은 때는 수도요금이 얼마가 나와도 걱정되지 않는다면 혹은 물을 아껴 써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을 무시할 수 있다면, 허공을 향해 질릴 때까지 물을 뿌려본다든가 옷을 흠뻑 적셔가며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은 고맙게도 수도꼭지만 돌리면 와주는 물과 한 손 안에 들어오는 이 플라스틱 분무기만 있으면 신나는 물놀이가 가능하다. 음양오행에서는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물질로 금, , 나무, , 흙을 말한다. 그 가운데 나는 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단다. 오래 전에 코칭과 관련된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알게 된 것인데 어떻게 따져보았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그러고 보니 샤워할 때도 넋 놓고 마냥 물 세례를 받으며 그대로 있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낀다. 하여튼 식물들한테 물 주는 잠깐 동안은 즐겁게 책임을 다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요즘 텃밭에 물 주기가 그리 흥이 나지 않는다.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다. 열매를 얻어 보겠다고 심은 고추와 호박에게 날마다 물은 주는데 열매가 별로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집 밖의 일을 한다고 텃밭 가꾸기에 관심을 끊고 살았다. 그러다가 올해 어설프게나마 다시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하다. 씨 뿌릴 때 까먹었던 거름도 때때로 주고, 쓰고 싶지 않았지만 화학비료도 쬐끔 줘 봤는데도 신통치가 않다. 기온이 너무 높은 날에는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며 보살펴주건만 그럴 때만 반짝 살아나는 것 같다. 맛과 모양이 낯선 미국 고추 몇 개를 얻었을 뿐이다. 텃밭을 가꾸는 교인들 가운데는 호박이나 오이, 부추를 벌써 거두어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시기도 하고, 올해 텃밭 열매가 실하다는 얘기를 전해주기도 하는데 내 식물들은 얌전하다.

그 중에서도 더 서운한 것은 호박이다. 호박이 심겨진 곳은 수도 호스가 닿지 낳는 곳이라 물통으로 물을 날라야 하지만 물 주기를 거른 적은 없다. 호박 줄기가 귀찮지 않을 정도로 잡초도 뽑아준다. 넓적한 이파리들이 달린 줄기는 쭉쭉 뻗고 꽃은 연신 피면서도 열매는 없다. 벌이 없으면 사람이 손수 꽃가루를 묻혀 수정해 주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어머님의 조언을 생각하며 관찰해보니 다행히 벌도 엄청 많다. 호박 열매가 새끼 손톱만하게 컸다가는 똑 떨어지고 만다. 많은 열매를 기대하며 씨를 뿌린 것은 아니더라도 너무한다 싶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으나 아직까지 호박은 열매를 하나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나마 위로를 주는 식물도 있다. 향기로운 로즈메리나 멀리 사는 친구가 준 바질은 쑥쑥 자라고 있다. 메리골드는 눈부신 노란색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듯 찬란하게 피어 있다. 돌보지 않아도 힘차게 자라난 돌나물과 분꽃은 고맙다. 어쨌든 이미 심겨진 것들은 열매가 있든 없든 자연스럽게 스러지기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앞으로 텃밭 가꾸기에서 재미를 보려면 몇 가지 바꿔보고 싶다. 호스가 닿을 만한 곳이면 좋겠다. 그러면 수도에서 멀리 있는 텃밭은 내버려두어야 한다. 차라리 집 가까이에 있는 꽃밭을 조금 더 넓혀서 사용하면 충분하다. 서너 가지 식물들을 심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면 된다. 모래가 많은 땅이니 흙을 더 넉넉하게 사다가 뿌리가 내릴 만큼의 두께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토양을 바꿀 수는 없으니 좋은 흙을 더 얹기라도 해봐야겠다. 그렇게 하려면 쌓인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텃밭 둘레를 나무 판자나 벽돌로 지금보다 높이 막아주어야 한다. 씨를 뿌리기 전에는 퇴비를 미리 섞어주어 흙 상태를 좋게 만들고, 좋은 퇴비 만드는 방법을 지금부터 알아봐야겠다.

지금 집에서 칠 년째 살고 있다. 처음 이사 올 때부터 텃밭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이제껏 흡족하게 만들지 못했다. 찔끔찔끔 소꿉놀이 하듯이 꽃이나 몇 개 심어 구경하고, 텃밭에서는 제대로 된 결실을 얻지 못했다. 현재 상태로라면 식물을 다시 심어도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뿌리가 내릴 만큼 양이 많고, 영양이 풍부한 흙부터 다시 준비해야겠다. 마치 내 생애에 한번뿐인 것처럼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물 분무기로 물 장난도 한 번 신나게 못 해보고 풍성한 남의 텃밭만 부러워하다 말 것 같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텃밭을 다시 정비해야겠다. 그럼 올 여름엔 확장할 꽃밭 정리부터……?!

5/14/2018

거기 계셔주세요





아침 햇살이 수줍게 퍼질 즈음이면 뒤뜰에서 겨우 겨우 자라고 있는 고추와 호박이 지난 밤을 잘 보냈는지 궁금해진다. 4월 중순이 넘어 모종을 사러 가면 부실한 것들만 남아 있는듯하여 올해는 4월 들어서자마자 서둘러 고추 모종을 사다 심었다. 호박은 지난해 추수감사주일에 얻은 늙은 호박에서 씨를 얻었다. 두 그루의 고추는 안전하게 양동이에 심었다. 그리고 호박은 잡초투성이인 텃밭을 삽으로 뒤집어 엎기만 하고 거기에 씨를 꾹꾹 박아 놓았다. 올해는 더도 말고 이 두 가지 식물이 자라고 열매 맺으면서 주는 기쁨을 누려보리라 상상하며 넉넉하게 물을 주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고추는 이파리가 군데군데 누렇게 되고 비실비실 댔다. 씨를 심고 3주쯤 지나서 호박 떡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흙 밖으로 나와준 싹에게 고마워서 잘 자라거라, 하며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성하게 자라날 호박을 그리던 끝자락에는 밑거름도 안하고 씨를 뿌렸다는 사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호박은 거름을 충분히 줘야 하는데 까먹었다. 하긴 호박을 제대로 심어 열매를 얻어본 경험이 겨우 한 해 밖에 없으니, 차분히 기억해내고 알아보고 심었어야 했는데 마음이 앞섰다. 그래도 어떻게 살려볼 길이 없을까 싶어 퇴비를 사다가 흙 위에 조심스럽게 뿌려주었다. 어찌 될 지 아슬아슬 하다.

한국에서 지키는 어버이 날이 되어 부모님들께 전화를 드렸다. 먼저 강화 어머님과 통화를 하였다. 전화를 드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부만 여쭙고 있다가 부실한 호박과 고추 생각이 났다. 평생 농사를 지어오신 어머님한테는 내가 가진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책이 분명 있으리라 기대가 되었다. 엉터리 텃밭의 상황을 설명 드렸다.

, 괜찮아. 고추나 호박 싹에서 한 뼘쯤 떨어져서 손가락으로 동그래미를 그려. 거기다가 거름하고 비료를 솔솔 뿌려. 거기 퇴비는 오래 된 건가? 그러면 가까이에 뿌려도 되긴 한데……”

아차 싶었다. 사 온 퇴비를 조금이지만 벌써 가까이에 뿌렸다고 말씀 드렸다. 어머님은 그게 별로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듯 다음 말씀을 곧 이어가셨다.

거긴 벌 있니?”

뜬금없는 질문에 벌이 있는 것 같은데 확신할 수가 없어 말끝을 흐리며 네, 라고 대답했더니 어머님은 틈을 주지 않고 설명하셨다. 호박 줄기에 달린 암꽃과 수꽃이 수정을 해야 호박이 되는데, 벌이 있으면 신경 안 써도 되고 벌이 없으면 사람이 수정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박꽃은 다 똑같은 꽃이 아니었나?’ 난 새로운 사실에 살짝 놀라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호박의 암꽃과 수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들이 한 그루에서 같이 피는지 아닌지 몰랐다. 어머님은 애기호박에 달려 있는 꽃이 암꽃이고 수정 되지 않으면 호박이 자라지 않는다고 가르쳐주셨다. 어머님께서 사시는 곳에는 벌이 없어 직접 수정을 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벌이 없다니 정말 심각하네……’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언젠가 적어놓았던 마크 윈스턴이 쓴 『사라진 벌들의 경고』를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이 옆길로 빠지려는 순간, 근황을 전해주실 때의 담담한 목소리가 아니라 빠르고 높은 톤의 어머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내가 어머님 말씀을 잘 못 알아듣는다는 걸 눈치채신 모양이었다

, 수꽃을 매정하게 확 잘라! 꽃 주둥이 쪽을 쭈욱 도려 내. 그리고 암꽃에다가 꽃가루를 묻혀줘.”
…...”
나는 그대로 꽉 박아놓는다.”

그리곤 호호 웃으셨다. 꽃잎이 일부 잘려진 수꽃을 암꽃에다가 걸쳐놓은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머님이 하도 신나게 말씀하셔서 호박꽃이 피면 그리 해 보겠노라 답해 드렸다. 그랬더니 다급하게 한 마디 더 보태셨다.

어머, ! 호박꽃은 하루 이틀 밖에 안 펴. 피면 그냥 해야 돼!”

어머님은 심는 김에 가지나 토마토도 심어보라고 권해주셨다. 키우기 쉬운 것들이고 요즘 심어도 늦지 않았다고 알려주셨다. 난 다른 식물들을 더 심을 생각이 없어 얼른 화제를 바꾸어 가지치기에 대해 여쭤보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전문용어를 써 가면서 설명을 하는데 잘 이해가 안 갔었다. 어머님은 그것도 쉽게 정리해주셨다.

고추나 가지는 뿌리에서 제일 가까운 이파리와 순만 따주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라고 하셨다. 토마토는 열매가 튼실하려면 곁가지가 자라지 않게 순을 모두 따줘서 원줄기만 살려야 하고, 반대로 호박은 잎이 네댓 장 달린 후에 원줄기를 잘라주면 가지가 더 많이 뻗어나가면서 열매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어머님은 그거 재밌어!, 라고 강조하셨다. 식물이 자라고 열매 맺어 하나 둘씩 따서 드시고, 둘째 아들네나 이웃과 나눠 먹는 재미를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여겨졌다. 어머님과 다른 때보다 훨씬 오래 전화 통화를 했다. 텃밭 가꾸는 데 필요한 좋은 정보는 내가 얻었는데 어머님이 더 즐거우셨던 것 같았다.

엄마네도 전화를 했다. 엄마하고도 통화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전화벨이 한참 울린 다음에 엄마가 허겁지겁 달려온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야.”
, 어버이 날이라 전화했지? 나 씻다가 나왔어. 다음에 통화하자. 별일 없지?”
.”
다음에 엄마한테 전화할 때는 열무김치 담그는 법을 여쭤보아야겠다.

다음 해에도, 그 다음 다음 해에도, 그 다음 다음 다음……해에도 거기 계셔서 내 전화를 받아주시면 참 좋겠다.

9/29/2014

뜻밖의 은총






지난 두 주간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았다. 친절하게도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이곳은 따뜻한 지역이라 요즘도 낮 평균 기온이 27도를 넘나든다.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하여, 싸늘한 공기 어딘가에 이른 벼를 베고 난 들판에서 맡을 수 있는 흙과 지푸라기 냄새가 묻어있지 않을까 찾아 본다. 가을이 되면 방향제가 들어 있는 제품들 가운데 주황색 둥근 호박과 시나몬(계피) 향이 섞인 것들이 많이 나온다. 미국에 오래 살다 보면 호박과 시나몬 향을 가을과 짝지어 추억하게 될 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올해 가을은 갑자기 열매가 한 번에 대여섯 개 달리는 호박이 주는 기쁨으로 시작했다. 호박 줄기들이 가을 첫머리에 내리는 비를 자주 맞더니 연두 빛의 애호박들을 마구 내놓았다. 여름 동안은 물을 매일 주었어도 호박에게는 넉넉하지 않았는지 가끔 하나씩 열매를 맺었었다. 그런데 이번 비에 호박들이 여기저기 쑥쑥 자라 재미를 보았다.





올 봄 남편을 귀찮게 졸라서 담 아래에 손바닥만하게 만든 텃밭이 있다. 땅이 모래가 엄청 많은 흙이라 가게에서 파는 흙과 퇴비를 사다가 섞어주었다.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는데 도움이 될만한 높이로 이랑을 만들었다. 쑥갓 씨도 뿌려 보고, 시금치와 붉은 상추 같은 잎채소도 심었다. 고추는 모종을 내어 심었다. 호박은 구덩이를 파서 거름과 흙을 넉넉히 넣고 여러 날 묵혔다가 거기에 씨를 뿌렸다.

이곳 저곳에서 주워들은 정보로 텃밭의 흉내를 내 본 것이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단순한 생활에 흙이랑 풀 가지고 장난이나 쳐볼 수 있는 코딱지만한 놀이터라 여겼다. 혼자 처음 가꿔보는 텃밭이니 식물들이 잘 자라지 않거나 해도 어쩔 수 없는 실험용 놀이터라 생각하고 가볍게 시작했다.

역시…… 식물들이 초보자를 알아 보는 것 같다. 쑥갓은 싹이 몇 개 나오더니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시금치와 붉은 색 미국 상추는 모종을 사다가 심은 것이다. 그들은 3개월 정도 조그만 잎사귀만 보여주다가 없어졌다. 가지는 두 개의 열매를 주고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까지 살아 있는 고추나무와 호박 몇 줄기가 텃밭을 처음 시도해본 나를 위로하고 있다. 우리 집 고추는 미국 이민 오셔서 몇 십 년 내내 텃밭을 가꾼 할머니 권사님네서 봤던 고추나무와는 비교도 안 되게 키가 작다. 열매도 권사님네 것은 길쭉하고 통통했는데 우리 것은 모양이 짧거나 구불거린다. 우리 고추나무 모종낼 때 할머니 권사님이 주신 씨로 한 건데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호박도 어설프긴 마찬가지이다. 두 구덩이에 씨를 심었는데 심은 씨의 개수대로 싹이 다 나고 처음부터 하루가 다르게 잎(!)이 잘 자라 재미있었다. 똑같이 구덩이를 만들고 물도 주었는데 한 구덩이에서 나온 줄기는 점점 노랗게 마르다 없어졌다. 그나마 다른 한 구덩이는 잘 살아 잎이 무성하고 호박꽃도 군데군데 피어 있어 멀리서 봐도 풍성해 보인다. 호박 열매가 별로 없어도 말이다.

그렇게 나의 처음 텃밭은 미숙하게 끝나나 보다 했다. 그런데!!! 가을을 알리는 몇 번의 비가 내리는 동안 고추와 호박이 마구 열린 것이다. 고추도 미끈하게 쭉쭉 뻗은 녀석들이 가지마다 가득하고, 호박도 줄기마다 꽃을 피우더니 통통하게 여물어 갔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많은 열매가 맺힌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에 비하면 신통방통하기가 짝이 없었다.

작은 공간이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똑같이 물을 주어도 힘 없이 시들어가는 식물들을 볼 때는 안타까웠다. 물 주고 풀 뽑아주며 그저 생명이 붙어있는 식물들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다. 가끔 어줍잖은 열매를 얻을 때도 기분 좋았다. 식물들이 초짜의 손에 키워지면서도 열매를 내어줄 때는 고맙기까지 했다. 호박 몇 개를 다른 이들과 나눌 때는 쑥스러우면서도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이런 저런 맛에 텃밭을 하나 보다. 나의 아빠는 텃밭을 하는 이유가 열매를 거두어 엄마에게 가져다 주면 어머!” 하며 놀라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손수 가꾸는 수고가 담긴 열매가 주는 기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초가을에 문득 찾아온 텃밭의 열매들처럼 기대하지 않았던 기분 좋은 결과들이 주어지는 것은 나의 수고가 아닌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더 이상의 열매가 없을 거라는 엉성하고 허술한 내 생각의 한계 위에 촉촉하게 대지를 적시는 가을비처럼 부드럽게 내려앉는 뜻밖의 은총이다

4/11/2014

나의 놀이터가 될 텃밭





드디어 뒤뜰에 손바닥만한 텃밭을 만들었다. 나무 뿌리와 잡초들이 뒤엉킨 땅을 고르고, 흙을 일구어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돌보겠노라, 며 남편을 보채서 만든 텃밭이다. , 그리고 남편이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더 있긴 하다. 흙을 사다가 이곳의 모래투성이 흙과 섞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식물을 심을 수 있는 터가 준비된다.

여기는 흙을 한 삽만 떠내면 모래가 나온다. 숲 속에도 모래가 깔려 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흙에 왜 이리 모래가 많은지 언제인가 가족들과 얘기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둘째 아이의 말에 따르면 목화를 많이 심었던 곳이라 그렇단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과거에 많은 노예들을 동원해 목화 재배를 주요 산업으로 삼았던 미국에서 대표적인 주였다. 목화는 흙에 있는 좋은 성분을 다 흡수하고 땅을 황폐화하는 작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땅은 모래흙으로 변했다. 목화 재배가 점점 줄어들고 이미 거칠어진 땅에는 그나마 생명력이 질긴 소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 주변, 꾸며지지 않은 곳에는 정말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엄청 많다. 둘째 아이의 말이 일리가 있는 듯도 하다.

우리가 만들 텃밭의 크기를 어림잡아 흙과 퇴비를 예닐곱 푸대 사고, 몇 십 달러가 계산되었다. 썩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이 돈으로 야채 실컷 사 먹어도 되겠다!”
여보, 내가 일 년 동안 가지고 놀 놀잇감 산 거라고 생각해~”

장보러 가서 야채 값이 조금이라도 비싸다고 여겨지면 나중에 먹으면 되지, 하며 눈길을 돌리곤 한다. 그런 내게도 몇 십 달러는 꽤 가슴 떨리는 액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강조하며 그에 비하면 흙 값은 별거 아니라는 쪽으로 얘기를 돌렸다.

집에 돌아와 흙 푸대를 나르려던 남편은 흙이 꽤 무거웠는지 아이들을 불러댄다. 힘 쓰는 일은 결국 자기 손이 가야 되는 것 아니냐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농사 짓는 것을 보고, 돕고 자란 남편은 농사가 쉽지 않은 일임을 너무도 자세히 알고 있어서 그런지 작은 텃밭일지라도 섣불리 시작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가 있다. 지난 여름, 멀지 않은 미래에 식량을 자급자족 해야 되는 때가 올 것이고 그 방법으로는 자연과 인간을 다같이 살리는 자연농법이어야 할 거라며, 자연농법과 관련된 책들에 푹 빠져 있던 남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목회와 내실을 다지는데 더 집중해야 할 때라고 여긴다. 그렇다 보니 텃밭이 정신을 분산시키는 자질구레한 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텃밭에 대해 이유 있는 거부를 하고 있는 남편과는 달리 나는 그저 주어진 자투리 공간에 텃밭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이다. 이번에는 나의 단순한 고집이 남편의 고상한 이유들을 이겼다. 아니면 텃밭 만들기에 대해 계속 나 몰라라 했다가는 일 년 내내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 입막음 하기 위해 져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어느 날인가 담장 아래 잔디가 깔리지 않은 땅(미국 사람들은 이런 공간에 보통 나무를 심는 것 같다)을 깔끔하게 골라 놓았다. 그리고 가게에서 사가지고 온 흙과 퇴비를 섞어 고랑을 만드는 일은 둘째 아이와 힘을 합쳐서 남편의 할 일을 마무리 했다.

나는 텃밭에 제일 먼저 쑥갓 씨를 뿌렸다. 고것이 어느새 코딱지 만하게 새싹을 내놓았다. 상추, 가지, 시금치와 방울 토마토는 모종을 사다가 조금씩 심어놓았다. 고추는 지금도 모종을 키우는 중인데, 모종 시작하는 시기를 잘 몰라 너무 늦어 버렸다. 잘 자란 모종을 사다가 심어볼까도 했지만 그냥 내 모종이 자라는 대로 실험 삼아 심어 보련다. 퇴비를 듬뿍 넣은 구덩이에는 호박씨도 심어두었다. 모두들 부디 잘 자라주기를 부탁하며 날마다 물도 정성껏 뿌려주고 있다.

사람들이 텃밭을 가꾸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자연과 친해지기 위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가까이서 느끼기 위해서, 건강한 먹거리를 얻기 위해서…… 나는 그냥 거기 빈 땅이 있어서, 그리고 이민 생활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놀이터가 될 듯하여 텃밭을 갖는 즐거움을 누리려 한다.

그리고 호박이 잘 자라면 올해 연세가 98세이신 S 권사님께 보여드리고 싶다. 권사님은 이민 오신 뒤로 오랫동안 집 주변에 텃밭을 만들어 온갖 야채를 키우셨다. 그 연세가 되셨는데도 고추, 오이, 호박이나 고춧잎, 깻잎 따위를 얼마나 잘 가꾸시는지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권사님의 열매를 나눠 받았다. 처음 딴 열매는 황송하게도 목사네 집에 주셨다.

지난해까지 권사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오이와 호박을 얻어 먹었는데, 올해는 권사님의 손에서 키워진 열매들을 나눠주실는지 아직 모르겠다. 권사님은 얼마 전 많이 편찮으셨고 지금도 기운이 무척 없으시다. 권사님께서 다행히도 무기력과 가족들의 만류를 떨치고 텃밭을 가꾸셔서 호박을 우리에게 나눠주시면 못이기는 척 받아 챙겨야지. 올해는 권사님이 잘 드시는 호박을 내가 좀 나눠드릴 수 있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