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2019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신앙교육



<지난 겨울 어느 날, 우리 교회 두 김목사님네>


어제 우리 교회학교에서 교사와 학부모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습을 돌아보고 우리 교회의 교회학교 교육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자리였습니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우리 교회는 30, 40대 부모가 주된 교인이므로 자녀 교육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열띤 대화와 토론, 다양한 실천 제안, 새롭게 소개한 쉐마와 하브루타 교육은 현재 우리 교회의 자녀 신앙교육의 반성과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게 하였습니다. 모이기에 힘쓰고 함께 기도하며 마음을 나누는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귀한 열매를 맺습니다. 교육은 먼 미래를 보고 가진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입니다. 앞을 내다보며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갖고 시작하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모든 부모, 특히 아버지들이 함께 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늘 하지만 직접 자신이 나서서 현실적인 방안을 함께 찾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아버지들은 아예 엄마에게 자녀 교육을 떠넘겨 버리고 방관자가 되어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갖춘 유명한 학교와 교회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높은 교육열에 비해 부모들의 역할과 책임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된 가르침을 주는 좋은 부모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교회학교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주일학교는 1769년 영국의 한 교회에서 노동자의 자녀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하며 시작하였습니다. 어릴 때 교회에 갔던 추억이 있어 교회의 문턱을 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지난 250년간 많은 교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가르쳤던 신앙교육이 수많은 어린이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신앙교육의 장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주일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전적으로 가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신앙교육의 책임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 6:7)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면 먼저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다보면 부모가 더 배우게 되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 글은 남편 김성은 목사가 썼습니다. 그리고 2월24일(주일) 주보에도 실렸습니다.

2/20/2019

찾으면 찾아지는 감사 - 오크 마운틴 주립공원(Oak Mountain State Park)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주일에 한 번씩 등산을 한다는 어느 집사님의 경험담을 귀담아 들어두었다. 그 집사님이 이용하는 트레일은 매년 우리 교회 중고등부 수련회 장소로 사용되는 오크 마운틴 주립공원(Oak Mountain State Park) 캠핑장을 지나서 더 들어가야 한다고 했던가.

매표소에서 한참을 지나도 사람들이 걷기 시작할 것 같은 길이 보이지 않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이럴 땐 믿음과 느긋함이 필요하다. 집사님이 북쪽으로 가다보면 길이 있다고 했으니 믿고 가면 될 것이다. 공원길에서는 일반적으로 25-35마일 정도의 낮은 속도로 가야만 한다. 같은 거리의 길이라도 보통 길에서 운전하는 것보다 멀게 느껴질테니 여유롭게  있으면 될 터이다.

참고로 오크 마운틴 입장료는 3세 이하는 무료, 4-11세이거나 62세 이상은 2달러, 12-61세는 5달러이다. 네 사람까지 가능한 가족 연간 이용료는 230 달러. 매표소에서 신용카드를 내밀었더니 현금만 받는단다. 직원은 현금이 없으면 현금인출기를 이용하라며 턱으로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현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면 차를 길 옆으로 빼고 차에서 내려야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고, 타은행 현금인출기를 이용할 때 내는 수수료를 물 수도 있다.

앨라바마에서 제일 넓은 주립공원답게 매표소로부터 10분쯤 지나 내비게이션에서 보이는 초록 숲이 거의 끝나갈 즈음 노스트레일헤드(North Trailhead)라는 팻말이 보였다. 주차된 차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집사님이 말한 곳이 이곳이려니 싶었다.

오크 마운틴에 두번째 방문이라 트레일이 다양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트레일마다 색깔을 달리 표시하고 있는데 이번엔 하얀색 길을 따라 가다가 노란색 길로 바꿔 원점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우리가 걸어간 하얀색 길은 평지같아 아무 힘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크고 작게 흐르는 계곡물을 건너가며 걷는 길이라 심심할 틈이 없다. 개울이 있는 곳에는 편하게 건널 수 있도록 다리가 어김없이 있다. 그 다리들을 하나 둘 건너다보니 그 다음에 나타날 다리가 궁금해졌다. 단순하면서도 모두 다른 형태의 다리들.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이 산에 있는 다리들은 모두 다른 모양일까.






많은 사람들을 건네주었을 예스러운 다리. 보통 어른은 껑충 건너뛸 수 있는 실개울이라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할테니 밟기 좋게 놓여있는 평평한 돌, 널판지 한 쪽, 마주댄 널판지 두 쪽. 좀 더 넓은 계곡엔 쓰러졌으나 부러지지 않은 나무...

이 다리의 재료들은 자연에서 얻은 것이리라. 다리의 모양도 만든이의 솜씨를 뽐내기 보다는 소박하고 정겹고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다리를 설계하고 만든이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의 빛 한 줄기를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손수 지으신 세계와 지혜를 베푸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다.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출애굽기35:35)

어느만큼 가다보니 긴 의자들이 여러 개 있어 잠시 쉴 수 있는 곳이 나타났다. 우리 앞서 걷다가 사라진 은발의 노부부가 보였다. 그 은발의 남자는 우리를 보자 뭐 하나 말해도 되겠냐고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러라고 했다. 물가에 잎이 다 떨어진 작은 나무 어딘가를 가리키며 뱀이 있단다. 독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면서. 낙엽과 비슷한 갈색을 가진 뱀이 인기척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아리를 느슨하게 틀고 있었다.

그 노년의 부부와 우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다시 만나게 되니 어색함을 풀어보려고 말을 걸어왔는지 뱀이 나오는 철이니 조심하라는건지 알 수 없으나 고마웠다. 난 그에게 우수 절기라 겨울잠을 깨고 나와 햇빛을 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짧은 영어로 버벅거릴 것이 분명하여 그만두었다. 언어가 친밀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한하고 있어 아쉽다.

그의 아내는 마침 긴의자 위로 찾아온 따스한 햇살을 베고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이 부부에게서는 트레일 초입에서 봤을 때부터 묵직한 인상을 받았었다. 산길을 자주 걸어본 사람들 같았다. 나의 남편이 좋은 시간 보내라고 그들에게 인사를 하자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들과 헤어져 노란색 길로 접어들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이 길도 처음 걷는 것이라 맞게 가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으나 지도와 방향 감각을 사용하여 가 보는 수 밖에 없다. 나보다 방향감감이 뛰어난 남편이 있어 다행이다. 차를 주차해 놓은 곳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순간순간 의심이 생겨도 서로를 믿고 가야 한다. 길을 잘못들었다면 조금 돌아가면 되고, 그래서 계획하지 않았던 길까지도 보게 되고 그런거니까.

우리가 선택한 노란색 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주차해 놓은 곳으로 인도해주었다. 한 시간 반 조금 못 되게 걸었는데 느껴지기는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았다. 점잖은 사람들과 편안한 산책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산이 아니어도 하나님 은혜는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코스트코를 가서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해 돌아설 때 매장 직원이나 한국 사람이 떡하니 서있어서 질문할 기회를 갖게 되면 감사하다. 남편이나 아들과 같이 쇼핑을 하면 어디에도 없는 힘이 혼자 쇼핑을 할 때는 500ml 물병이 40개나 들어 있는 꾸러미를 번쩍 들어올려 카트에 싣는 엄청난 힘으로 발휘된다. 순간적인 힘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2/13/2019

떠나간 이가 남긴 깨달음


<여기가 어딘지... 엄마와 나>

가방 속에 있는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타주에서 열리는 미동남부 지방회의 장로 안수식이 막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막내 동생의 이름이 보였다. 

'아, 그렇지! 한국은 설날 아침이지...'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께 아직 설 명절 인사도 못 드린 상태였다. 

가족 생일이나 명절이 되면 엄마가 늘 먼저 전화를 주신다. 이번에도 내가 늦었다. 엄마가 설쇠기 위해 방문한 동생을 시켜 전화를 한 것이 뻔했다. 그런줄 알면서도 전화를 받을지 말지 아주 잠깐 주저거렸다. 무료 통화가 가능한 카톡 전화도 아니고 저렴한 이용 요금을 내는 스카이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나타내는 국제 전화 고유 번호 '82'가 전화 받기를 망설이게 한 것이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카톡으로 전화하자고 말해야지, 생각하며 연결 버튼을 눌렀다.

“응, 석아. 누나가 다시 전화할게.”
“아니 그게...”
“거긴 설날 아침이지?”
“응. 그런데...”
“우선 끊어 봐.”

조용한 곳을 찾으러 예배실을 나왔다. 뭐가 그리 급한지 동생은 그사이를 못 기다리고 카톡 전화로 나를 불러댔다. 지방회가 열리고 있는 이 교회를 나는 너무도 잘 안다. 지난 7년 넘게 교인들과 동고동락했던 곳이었다.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는 조그만 방이 불꺼진 채였다. 아무도 없었다. 그 방에 들어서고 나서야 전화를 연결했다.

“누나,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잠깐 기다려 봐, 엄마 바꿔줄게.”

인사치레할 것 같은 누나의 입막음을 위해 동생은 중요한 용건으로 선수를 쳤다. 울음 섞인 엄마의 음성이 들려왔다. 설 전날 동생네가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작은 아버지는 멀쩡하셨단다. 그런데 설날 아침에 살펴보니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며 엄마는 울먹거렸다. 작은아버지는 향년 78세.

'아, 그래서 그때...'

지난해 가을 아빠 팔순 생신이 있어 한국에 갔었다. 아빠의 생신 축하는 가족과 가까운 친척 30 여분만 모시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난 약속 장소로 먼저 가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명절 때면 늘 보던 얼굴들이었다. 작은엄마가 오셨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아버지도 함께 오셨다. 내가 알기로는 작은아버지가 아빠와 엄마가 관련된 가족 행사에 오신 것은 아주 아주 오랜만이었다.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나와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맞이하셨다. 작은아버지는 아빠와 포옹을 하셨다. 작은엄마와 엄마는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콧잔등이 시큰했으나 기쁜 일이니 얼른 눈가에 물기를 날렸다. 아빠는 이날 동생과 화해한 것으로 여기고 무척 기뻐하셨다. 

형제간에 사이가 나빠진 것은 제사문제 때문이었다. 엄마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집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몹시 힘들어하셨다. 17년 전 엄마가 대장암에 걸린 적이 있었다. 수술받는 날 내가 엄마 곁에 있었기에 엄마가 아빠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수술 받으면 내가 죽어서 나올지 살아서 나올지 모르겠어요. 만일 살아서 나오면 난 제사를 지내지 않을 거에요!”

엄마는 수술을 잘 받으셨고 자신의 신앙 결단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신앙이 없던 아빠는 내키지 않아도 엄마의 의견을 따르시면서 한편으로 작은아버지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엄마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아빠가 서운해하시지 않도록 기일에는 꼭 할머니 산소에 들려 꽃과 기도를 드렸다. 작은엄마와 성당을 다니던 작은아버지는 형수인 엄마의 결정을 매우 못마땅해하셨다. 그 어느 때부터 가족 행사에 작은아버지만은 오시지 않았다. 나는 그런 작은아버지가 늘 안타까웠다. 

작은아버지는 결혼 해서 아들을 낳기 전까지 나를 무척 예뻐해 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아빠와 작은아버지 뿐이었다. 단촐한 가족인데 작은아버지에게 첫 조카가 생겼다. 작은아버지가 연애할 때 작은엄마를 만나러 가면서도 나를 데리고 가셨단다. 두 분이 신혼 여행 떠날 때는 내가 같이 가겠다고 떼를 써서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고. 또 신혼방에 놀러가서는 두 분 사이에서 잠을 잤다나. 어린 아이는 누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구석이 있으므로 어르신들의 얘기를 종합해 볼 때 작은아버지가 조카딸을 끔찍하게 사랑하셨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특별한 것도 없는 나를 언제나 대견스러워 하셨다. 

나에게도 작은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분이셨다. 학창시절 졸지 않기 위해 소나무에 높이 올라가 앉아 공부했다는 일화는 위인전에서 읽을 법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방학하여 작은집에 놀러가면 아침 식사 전에 꼭 일본어 회화 공부를 하시던 모습도 기억난다. 결국 독학으로 일본어에 능통하게 되셨다. 회사를 대표하여 일본 출장갔다 오셔서 일본 가정의 생활상을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아이디어가 많아 다니던 회사에서 신제품을 만들기도 하셨고 자신의 기업을 일으키시도 했다. 유머도 많으셔서 이야기 중에 가족들을 많이 웃게 하셨다.  

아빠와 작은아버지가 좀 더 행복한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았으련만. 작은아버지가 가진 마음의 빗장을 이제야 여셨는데... 작은집과 우리집 식구들의 마음을 편안히 해주신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보다. 

동생이 먼저 하늘나라 가셨으므로 서글퍼하실 아빠에게 전화를 드렸다. 

“별일 없으시죠?”
“응 여긴 추워. 낮에도 영하야. 나랑 얘기하면 재미없어. 엄마 바꿀게.”

아빠는 잘 받아들이고 계신 듯하다. 이제는 한국에서 오는 전화를 가벼이 받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이글을 올해 설날에 돌아가신 작은아버지를 추모하려고 시작했다. 그런데 글을 마치려다 그 추모의 끝이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에게 가 닿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내 엄마.

할머니 기일이 다가오면 엄마는 아빠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긴장하며 더 많은 기도를 드린다. 명절 때는 내 동생들이 작은아버지댁에 문안인사를 드리도록 챙긴다. 작은아버지 생신도 꼭 기억하여 축하의 마음을 전하신다. 이것은 우리 가족의 일상일 뿐 엄마가 견디고 있을 제사문제와 거기서 비롯된 모든 불편함에 대해선 헤아려본 적이 없었다. 

“작은아버지가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고 가신 것 같아.”

아빠가 건네준 전화기에서 들려온 엄마의 첫마디였다. 

신앙의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것이었나. 이제까지 엄마는 나를 보살펴야 할 사람이지 내가 보살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왜 이리 이기적이고 아둔한가. 

내가 지금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엄마의 여생이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으로 차고 넘치길 간절히 기도한다. 

2/06/2019

기침이 그린 그림




지난 열흘 여러 가지 일로 몹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시카고에서 열린 한인 목회자 세미나, 몽고메리지역 연합 부흥회, 그리고 미주 동남부 지방회가 얼마 전까지 목회하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에서 있었다.

미국의 북쪽과 남쪽 지역을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섭씨 영하 30도에 히터를 틀기도 하고 영상 25도에 에어컨디션너를 틀기도 하는 엄청난 기온 차이를 체험하였다. 춥고 더운 기온과 장시간 자동차 안에 있다보니 목이 잠긴다. 몸이 지쳤다는 신호다.


2019년 1월29일 시카고.
듣던 대로 시카고는 길에 쌓인 눈을 참 잘치운다.

시카고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미국 남부에선 보기 힘든 많은 눈을 5년만에 보아 설레기도 했고 동시에 바람의 도시(The Windy City)라는 별명답게 매서운 칼바람이 더해진 맹추위도 맛보았다. 콜럼비아는 어찌 그리 날씨가 좋던지 겨울 겉옷이 필요없는 시원한 날씨가 상쾌했다. 어디론가 떠났다가도 마침내는 돌아와야 하는 목적지가 된 몽고메리는 습기가 있는데다 기온이 높아 봄인듯 여겨졌다.  

시카고에서는 '변화 속의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미국에 사는 한인 목회자로서의 정체성과 앞으로 어떤 목회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도전이었다. 남편은 앞으로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한반도가 통일이 되고 한반도의 젊은이들이 역량을 발휘하기 위하여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럴 때 그들이 역사의식을 가지고 세계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민목회자로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그들과 나누는 역할을 감당해야겠단다.  이 각오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으로 어떤 선교와 교육...을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몽고메리에서는 개인의 고난과 절망이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어 회복되는 메세지를 들었다. 언제나 예수님은 진리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찬양팀, 여선교회의 간식, 아동부 교사들의 어린이 돌봄, 연합성가대에 참여한 성가대원들까지 모두 기도하며 협력하는 모습이 은혜스러웠다.

콜럼비아에서는 목회하던 교회의 두 장로님 안수식에 참여하였다. 콜럼비아제일교회에 대한 목회를 마무리하는 듯한 예식이었다. 헤어진 지 5개월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교우들도 있었으나 최선을 다해 그들만의 이야기로 남겨두고 떠나왔다. 

나보다 먼저 아들 산이의 목이 깊이 잠겼다. 산이의 기침은 거칠고 무겁다. 우리 부부는 산이가 목을 쉬게 가만 두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산이는 집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모임이나 예배 찬양하는 시간에 마이크를 놓지 않는다. 기침이 심하면 예배에 못 갈 수도 있겠구나 싶은데, 산이는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자신의 목을 달랜다. 기침이 나오려고 하면, “아, 괜찮아. 괜찮아~” 하며 목을 쓰다듬는다. 목과 가슴을 쓸어내리는 산이의 손은 간절하다.

예배 시간 중에 산이가 그렇게 기침을 하다가 토할까 봐 걱정이다. 아직까지 그런 적은 없으나. 남편이 산이에게 예배 시간에 앞에 앉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나 보다. 그랬더니 잠 자기 전에 남편에게 쪽지 하나를 주고 들어가더란다. 내용은, 아빠한테 미안하지만 약 먹고 다음에도 또 예배에 갈거라는 것이다. 아, 예배와 찬양을 이렇게 좋아하는 산이를 어떻게 가지 말라고 말릴 수 있을까.

걱정되던 산이의 기침이 몽고메리 연합집회 때도 두어번 있었다. 우리 교회가 아니라서 다행히도 산이는 나와 뒤쪽에 앉아 있었다. 산이가 설교 시간에 기침을 하자 근처에서 물을 건네는 손이 여럿 있었다. 다른 교회 교인도 있었고 우리 교회 교인들이었다. 예배와 보살핌이 있는 곳, 난 행복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쾌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과제는 언제나 나와 달라붙어 있다. 기침도 나에게 옮겨주었다. 몸은 처지나 내 영혼은 주님을 향해 고양된다. 이 마음을 헤아려주는 교우들이 주변에 있다. 미국 이민·신앙 역사라는 큰 그림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교우들과 함께 그려갈 그림이 기대된다. 질서있고 창조적이고 조화로운 우리 몫의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