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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2024

식물과 이사 이야기




사람은 적어도 두 번은 이사한다. 어머니의 태에서 세상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나는 그중 한 번을 포함하여 한국과 미국에서 여러 번 이사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이사는 아무런 짐이 없으나 살아가는 동안 이사할 때는 이런저런 짐들과 함께 다닌다. 그런데 어떤 이사를 하든 아무 짐이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식물이다.

얼마 전 텃밭에서 살던 파와 부추 몇 뿌리를 화분으로 옮겼다. 나무를 심었던 두 개의 커다란 화분이 다른 식물을 품으려 기다리는 듯 보였다. 하나에는 텃밭에서 이사한 실파와 한인마트에서 이사한 대파를 섞어 심었다. 다른 하나에는 이파리가 넓적한 부추와 여리여리한 부추를 심었다.

파는 처음 심을 때 온통 마트에서 이사했고, 부추는 지인들의 텃밭에서 나의 텃밭으로 오래전에 이사한 녀석들이다. 이파리가 넓적한 부추는 Z가 한국에 계신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다. Z는 꽤 튼실한 부추라며 나에게 그것을 나눠주었다. Z의 말처럼 이파리도 뿌리도 건강미가 넘치는 부추다. 이들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긴 꽃대를 올려 하얀 별처럼 생긴 꽃송이를 터트린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다. 부추꽃은 점점 까맣고 옹골찬 씨앗으로 에너지를 모아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그렇게 Z로부터 온 부추는 퍼지고 퍼져서 다른 집들로 이사하기도 했다.

또, 이파리가 가는 부추는 식물을 야무지게 키우는 A의 텃밭에 살았었다. A는 한 번 키운 식물들에서 꼭 씨를 받아 다음 해 텃밭을 만들었다. 고추는 물론이고 토마토, 오이에서도 씨를 받아냈다. A의 솜씨는 어려서부터 농사하시는 부모님을 도와 식물을 돌본 덕분이라고 했다. 그의 손에서 식물들이 생명을 이어가는 재미난 실험을 구경했었다. A가 비닐하우스에서 씨를 뿌려 키우던 여린 부추를 나눠주었다. 그것들이 나에게 이사할 때는 그 모양새가 Z의 건장한 부추와 사뭇 달랐다. A의 부추는 먹잘 것이 없을 정도로 작고 가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두 종류의 부추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해졌다. 재미있는 텃밭 생활이다.

파나 부추는 한번 심어놓고 새로운 흙이나 거름을 더해주면 싱싱하게 이파리를 올려 자신을 내어준다. 이번에 그들을 텃밭에서 화분으로 이사시키면서도 신선한 흙과 닭똥을 발효시킨 거름을 선물로 주었다. 아, 그것을 심기 하루 전에 할 일이 있다. 파와 부추의 초록색 부분을 잘라내고 뿌리도 1.5cm 정도로 다듬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식물이 새로운 환경에서 있는 힘을 다해 생명을 이어가도록 자극하기 위해서다. 짤막한 파와 부추를 그릇에 담아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물을 부어준다. 하루가 지나면 이파리가 나오는 부분에 초록빛이 돈다. 생명을 이어가려는 모양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

이사는 변화의 계기를 준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는 물리적인 자리 옮김이다. 파와 부추는 텃밭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다가 화분이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옮겨졌다. 식물에 덜 자연스러운 환경이지만 나의 보살핌을 더욱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이사다.

이사는 생존이다. 살아갈 환경을 찾아가는 일이다. 식물은 자연에 의지해서, 그리고 사람은 나름의 선택으로 살 곳을 찾아 나선다. 식물은 신이 창조한 자연과 우주에 기대어 살아간다. 사람은 이사하면서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데 신의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한다. 나의 의지보다는 신에게 삶을 맡기려는 태도다. 이런 태도는 식물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화분에서 식물이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란다. 어느 곳에서든 자신을 위해 어떤 짐도 만들지 않고 생명을 충실하게 이어가는 식물의 단순함이 필요에 따라 유익한 혹은 무익한 짐들을 복잡하게 쌓아놓은 내 환경 속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그리고 자연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속을 알차게 채워가면서도 그 능력을 뽐내지 않는 식물의 겸손함에 조용히 스며들고 싶다. 

날이 따듯해지면 농원으로 나들이를 가 보련다. 다른 빈 화분으로 피튜니아나 마리골드나 제라늄같이 그만그만하게 섞여 살만한 꽃들을 데려와야겠다. 저마다 모양과 색깔이 다른 채소와 꽃의 어우러진 모습을 그려본다. 반짝이는 하늘 아래에서 그들이 만들어낼 변주가 들어봄 직한 재즈 가락이 되어 흘러가는 상상에 빠진다. 벌써 어깨가 들썩거린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10/21/2023

바람이 분다




영화 '더 이퀄라이저 3(The Equalizer 3)'가 최근에 개봉되었다. 그 이전 시리즈에서 보았던 주인공 로버트 맥콜 역을 맡은 덴젤 워싱턴의 차가운 듯 따듯한 연기와 액션 영화라는 장르는 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이탈리아 시골 농장의 평화로움과 거기서 습격당한 부하들이 죽어 널브러진 사이를 걸어가는 보스의 긴장감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짧은 대화가 있다. 영화 초반에 총상 입은 맥콜을 낯선 의사가 정성껏 수술해준다. 수술을 마친 의사는 맥콜에게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나쁜 사람인가?, 질문한다. 맥콜은 “모르겠다”, 고 대답한다. 

맥콜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자 이번엔 맥콜이 의사에게 나 어떤 사람 같아요?, 묻는다. 총에 맞은 사람을 보고 구급차도, 경찰도 안 부르고 상처에서 회복하도록 긴 시간을 들여 돌봐준 이유를 의사에게서 듣고 싶었나 보다. 더군다나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맥콜 자신도 모르겠다는 의아한 대답을 받고서도 말이다. 

의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대답은 좋은 사람만 할 수 있어요.” 선과 악, 예와 아니오를 명확하게 나누어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은 지점에서 이 영화는 나에게도 어떻게 대답할지 묻는다. 

맥콜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당하는 불의한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 맥콜에게는 모든 이웃을 도울만한 능력도 없다. 생선가게 아저씨가 마피아에게 두들겨 맞고 아저씨네 집에 누군가 불을 질러도 맥콜은 지켜볼 뿐이다. 맥콜은 자신의 체력을 키우면서 미국 정보기관에 마피아에 대한 정보를 흘려 도움을 받는 정도다. 

맥콜이 머무는 동네는 이탈리아 작은 어촌이고 마을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고, 소박하고, 우애가 깊다. 그들은 미국인 맥콜을 기꺼이 동네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맥콜은 마피아가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아무렇지 않게 악을 행하자 그제야 이퀄라이저로서 악당들을 척결하기 시작한다. 

자연 속에 음과 양은 언제나 존재한다. 음양은 한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다시 균형을 잡아간다. 맥콜은 물론이고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의 삶에서도 이런 균형을 찾아볼 수 있다. 계절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무더운 여름이 길게 느껴지는 몽고메리 날씨지만 한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서늘한 기온은 여름에 흘린 땀을 씻어주고 성실한 수고의 결실을 가져온다. 

아침이면 비슷한 시간에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동쪽을 향하여 도로를 달린다. 가을이 오면 그 시간대에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장관을 자주 목격한다. 오염이 적은 하늘이라 그런지 이곳이 정말 태양하고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태양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보인다. 몽실몽실한 구름이 낀 날에 맞이하는 일출도 얼마나 당찬지 모른다. 태양은 구름 테두리를 맑게 빛나는 금빛으로 장식한 구름옷으로 차려입고 위엄 있게 등장한다. 또 온 세상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은 언제 봐도 벅차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이 설레는 것은 변화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다만 올가을에는 일상에 큰 변화가 있고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잘 몰라 약간의 두려움이 있다. 기대와 두려움으로 두 눈을 꼬옥 감는다.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평화로운 바람이 흘러나온다. 그 신선한 바람은 나를 감싸 안고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도록 밀어준다. 

영화 속 맥콜처럼 나 역시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하나님의 큰 계획 가운데 내 삶이 들어 있다는 것만은 안다. 불현듯 가수 조용필이 부른 '바람의 노래'가 입속에서 맴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 스쳐 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 나는 이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3/18/2023

나무를 심는 사람들

        




미국 식목일은 4월 마지막 주 금요일이다. 미국 남동부에 있는 앨라배마주는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높아서 그런지 2월 마지막 주가 나무 심는 주간이다. 그즈음부터 지금까지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몽고메리 다운타운을 지나 셀마로 가는 80번 국도로 들어서면 곧 몽고메리 지역 공항이 나온다. 공항 근처에는 M교회가 리트릿센터로 꾸며지길 바라는 빈 땅이 있다. 그곳은 바로 옆에 자리한 한인 기업이 30에이커 땅을 사면서 10에이커는 M교회에 기증한 땅이다. 기증자들은 그들의 땅을 쓸모 있게 만들기 위해 땅을 고르고 철제 울타리를 설치하면서 리트릿센터 부지에도 똑같은 작업을 말없이 진행해왔다. 

게다가 그들은 얼마 전부터 리트릿센터 부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먼저 감나무 200여 그루를 심었다. 감나무는 관리하기가 수월하고, 농약을 안 쳐도 괜찮고, 몽고메리 기후에서 잘 자라는 수종이란다. 매실, 백도, 자두, 대추, 복숭아, 밤나무도 30그루를 심었는데, 이러한 나무들은 키우기가 까다로워서 개수를 점차 늘릴 계획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M교회의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나무 심을 기회를 주기 위해 단감나무 85그루를 남겨놓았다. M교회의 일원인 나는 이 행사에 슬쩍 끼었다. 꽃샘 추위가 찾아오는 3월에 초여름 같은 날씨라니, 변덕스럽기도 해라! 그늘 없는 땅에서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그날의 하늘은 명랑했다.

기증자들은 친절하게도 나무 심을 구덩이를 적당한 간격으로 파놓았고 구덩이 안에는 거름도 넣어 놓았다. 한 분이 나무 심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묘목에는 뿌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접붙인 흔적이 보였다. 그 접붙인 부분이 땅 위로 조금 올라오게 심어야 하니 구덩이 옆에 있는 흙으로 높낮이를 조절하라고 일러주셨다. 묘목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물을 2갤런 정도 붓고 물이 스며들도록 기다렸다가, 그 위에 다시 흙을 덮고 발에 적당한 힘을 주어 꼭꼭 눌러주면 된다고 하셨다.

감나무는 씨를 심어 키우면 열매가 시원치 않으므로 반드시 접붙여서 키워야 함을 알게 되었다. 접붙일 때 뿌리 쪽 나무를 대목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감나무의 대목으로 열매가 풍성하고 잘 자라는 고욤나무를 많이 쓴단다. 우리가 심은 감나무의 대목은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부디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주기를 바랐다.

나무 심기를 제안하신 분들은 나무 하나하나에 물을 주며 제대로 심었는지를 확인하셨다. 흙을 충분히 덮어주지 않거나 물을 주지 않은 묘목들이 발견되었다. 정성을 다해 심었어도 이런 일이 생겼다. 심는 것보다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는 말씀이 실감 났다. 얼마 동안은 열흘에 한 번 물을 줘야 한다는 말씀에 우리 가족이 한 달에 한 번쯤 물 주기를 담당하면 어떨까, 생각만 하다가 끝내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나무를 심는 일은 꽤 멋있어 보인다. 나무를 심으려고 흙을 만지던 어느 분은 행복하다, 고 고백했단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는 지난 10여 년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고 한다. 나무가, 자연이 주는 위로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이야기였다. 

그뿐 아니라 정겨운 물물교환 이야기도 들었다. 넓은 부지 곳곳에는 검은 더미들이 커다랗게 쌓여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게 다 소똥 거름이었다. 그 거름은 회사 가까이에 사는 지역 주민에게서 얻은 것으로, 그 집에 불필요한 나무들을 잘라준 대가로 받았단다.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내는 모습이 그려져 훈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일나무를 심는 사람은 느긋한 마음의 소유자다. 적어도 2~5년을 기다려야 제대로 된 열매를 얻는다고 하니 나무 심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대단하다.

나는 막대기 같이 가녀린 나무들 사이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사람들이 신선한 공기를 가득 품은 초록 나뭇잎과 열매들 사이를 거닐다가 어느 나무 아래 무심코 놔둔 낡은 의자에 앉아 쉬어 가겠지. 시원한 물 한 잔 건네는 손에게 고마움을 전하겠지. 가지가 휘어지게 열린 열매를 이웃과 나누며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확인하며 기뻐하겠지.

한 분이 160그루를 기증하고, 또 어찌어찌 80그루를 사들여서 과일나무를 연이어 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글은 애틀랜타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7/16/2018

분꽃






올 여름에도 분꽃이 피었다. 집 뒤쪽 담장 아래에 씩씩하게 피어있다. 처음 분꽃 씨앗은 돌아가신 김세영 권사님이 주신 것이다. 진한 분홍색 꽃이 더 예쁘다며 그 씨만 주셨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피었다. 진한 분홍, 옅은 분홍, 노랑, 주황, 하양. 꽃들은 늘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해질녘에 피어 밤을 지나고 아침 햇살이 고르게 퍼질 때쯤에는 꽃잎이 다시 움츠러든다. 한낮에는 활짝 핀 꽃을 볼 수가 없다. 여름 내내 꽃이 피고 진다.

여름이 끝날 즈음에는 꽃이 핀 자리마다 씨앗이 맺힌다. 씨앗을 갈무리했다가 다음 해에 원하는 자리에 심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자라도록 씨앗이 그냥 떨어지게 두었다. 계절이 바뀌면 분꽃은 이파리를 눈깜짝할 새 떨구고 가지도 누렇게 말라 마디 마디 똑똑 부러져 자신의 흔적을 말끔히 지운다.

다시 봄이 되면 동그란 모양을 한 새싹이 오만 군데에서 올라온다. 어느 해 봄에는 그 새싹들을 솎으면서 한 곳으로 모으다가 깜짝 놀라는 일이 있었다. 분꽃의 싹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다른 싹들과는 달리 성큼성큼 자라 눈길을 끌었다. 싹만 봐서는 분꽃이라는 확신이 안 들어 뽑아버리기로 했다. 싹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있으랴 싶어 손으로 잡아당겼는데 끔쩍도 하지 않았다. 흙 속으로 모종삽을 꾹 눌러 넣어 들어 올리려 했으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싹 주변을 여러 삽 파내고 나서야 그 뿌리를 볼 수 있었다.

마치 고구마처럼 생긴 뿌리였다. 분꽃이 아닌 것 같아 그것을 파내어 담장 아래에 던져 두었다. 그런데 그 뿌리가 마르지 않고 어떻게 땅 속으로 들어갔는지 살아있다가 꽃을 피웠다. 분꽃이었다. 분꽃은 씨가 맺히는 걸로 봐서는 뿌리로 번식하는 식물은 아닌 것 같은데, 굵은 뿌리가 남아 있다가 거기서 싹이 나온다는 것이 살짝 당황스러웠다. 씨와 줄기 뿌리로 동시에 생명을 이어가는 여러해살이 꽃인 줄 그제야 알았다. 씨에서 자란 것과 뿌리에서 자란 것을 비교해보니 나중 것이 더 튼실하다.

한 번은 모아둔 분꽃 씨앗이 주방 바닥에 떨어져 있었나 보다. 식탁 의자에 앉다가 바지직 소리가 나서 봤더니 씨가 바스러져 있었다. 씨앗 겉은 검은색인데 검은 껍질 안에는 하얀 가루 같은 것이 보였다. 이 흰 가루가 마치 여인들이 화장할 때 쓰는 분과 같아서 분꽃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씨에서 나온 싹과 뿌리에서 나온 싹의 모양이 다르고, 한 줄기에서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피고, 흙 위에 던져 둔 한 덩이 뿌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 모두 참 흥미롭다.

3/30/2015

마냥 좋지는 않아도 봄은 새롭다






강화에 사시는 어머님과 전화 통화를 하던 중 중부 지방에 비가 내리지 않아 봄 가뭄이 심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리조합에서 관리하는 물이 삼분의 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좀처럼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셨다. 여긴 비가 많이 와야 댜~, 라는 말씀에 물이 부족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여기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겨울이 우기라서 눈은 거의 오지 않고 비가 자주 내린다. 겨울 내내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비가 오더니, 봄이 지나가고 있는 요즘도 흐린 날이 많고 비도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 어머님네는 비가 오길 바라고 있는데 이곳은 비는 그만 오고 따뜻한 햇볕이 나서주길 기다리고 있으니 사는 처지가 참 다르다.

교인 가운데 병원에 입원한 분이 계셔서 병문안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 전날 비가 오기도 하고 기온도 떨어져서 그런지 하늘이 더없이 깨끗하고 파랬다. 높이가 낮은 건물들 덕분에 넓은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고, 솜 덩어리 같은 뭉게구름도 하늘 한가득 그림 같이 떠 있었다. 이렇게 맑고 포근한 하늘을 몇 달 만에 보는 것 같았다. 기분이 슬슬 좋아졌다. 이왕이면 자동차의 창문을 열고 봄바람도 느껴보고 싶어졌다. 창문을 반쯤 열고 잠시 달렸는데 목이 컥, 하고 막혔다.

꽃가루 때문이었다. 특히 천지에 퍼져 있는 송홧가루. 봄철 동안에는 노란 송홧가루가 건물 밖에는 어디나 날아다닌다. 그래서 꽃가루 알러지가 있는 사람들은 재채기, 콧물, 눈병, 가려움 따위로 아주 힘들어 한다. 알러지가 없던 사람들도 이곳에 사오 년 살다 보면 알러지가 생긴다고 한다. 사람이 무던한 건지 둔한 건지 나는 아직 꽃가루의 영향을 별로 받고 있지 않다. 그런데 달리는 자동차의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송홧가루에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청명한 봄하늘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데 꽃가루는 몸을 괴롭게 했다. 모든 것이 마냥 좋을 수는 없는가 보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교회에서 대청소를 했다. 교회 마당에서는 나무와 꽃들 사이에 솔잎을 깔아주었다. 남성 교우들과 아이들이 그 일을 맡아주었다. 커다란 솔잎 덩어리 80단이 교회 울타리 아래로 넓게 흩어졌다. 교회 건물 뒤편에도 솔잎이 필요한 곳이 있었는데 솔잎이 모자라 올해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전에 솔잎을 주문하던 교우가 없어 100단 정도가 필요한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교회 주변에 솔잎이 깔리고 나니 더욱 깔끔하고 넉넉해 보였다.

교회 안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던 물건들을 전부 정리하여 버리기로 했다. 방마다 사물함이나 책상 위에 무심히 쌓여 있는 물건들은 거침없이 커다랗고 까만 쓰레기 봉투로 들어갔다. 주방에 있는 그릇 수납장은 여러 사람이 일을 거들어야 했다. 주방 도구들을 죄다 끄집어내고, 수납장 바닥을 깨끗이 닦고, 꺼내 쓰기 편리하게 그릇들을 재배치 하였다. 쓰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것들은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든가 버렸다. 있는지 몰라서 사용하지 못했던 물건들을 찾아냈을 때는, 지난날 적절히 쓰여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앞으로 편리하게 사용될 것을 기대하는 눈빛을 서로 교환하기도 했다.

올해 부활절 맞이 대청소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많은 교우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에는 교회 일이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거나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대청소는 친교실 증축과 함께 여러 교우들이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구태의연한 교회에서 벗어나서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흐름이 교우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마음들이 모아져 결정된 친교실 증축이 못마땅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마냥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우들 대부분이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 뜻이 무엇일까를 묻고 또 물으며 이 새로운 변화의 흐름에 끈기 있게 동참하고자 마음 먹고 있다. 생명이고 진리이신 주님이 동행해주시길 겸손히 바라며 새로운 길을 가다 보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음을 고백하게 되리라 믿는다. 새로운 변화를 이어갈 담대한 용기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길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11/10/2014

숲길을 걸을 때




슬슬 걷기에 좋은 주립공원이 동네에서 가깝다. 숲 속과 호수 둘레를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도록 여러 갈래 길이 나 있다. 숲에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많다. 호수에는 몇 마리 오리가 떠다니거나 휴일이면 공원에서 빌려주는 노 젓는 배를 가끔 볼 수 있다. 그밖에 철마다 바뀌는 화려한 꽃이나 신나는 놀이 기구나 기암괴석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조용하고 수수한 공원이다.

운동 삼아 공원을 자주 가던 어느 해 봄이 시작될 무렵의 일이다. 남편과 나는 늘 다니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숲에 가면 넓은 공간이 주는 자유로움 때문인지 집 안에서는 꺼내지 않았던 얘기들이 술술 풀려 나오곤 한다. 그날도 새로운 얘깃거리가 시작되려는 때였다

남편이 갑자기 한 발을 공중에 들고는 으아아~~”, 비명을 질렀. 처음 들어 보는 음색의 그 짧고 낮은 비명 소리는 두려움을 짙게 담고 있었다. 겁이 많은 나는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고 남편의 팔에 매달리며 왜 그래?”, 다급하게 물었다.

잘 놀라는 아내를 배려한 것인지 잠깐 숨을 돌린 다음 ”, 이라고 대답했다. 뱀이라는 말에 남편 팔에 매달리기라도 할 것처럼 있는 힘껏 끌어 안고는 어디?”, 라고 말하면서 눈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남편은 말없이 숲 쪽을 가리켰다. 제법 굵고 길며 까만 뱀이 낙엽 위를 마치 헤엄을 치듯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빠르게 달아나고 있었다. 뱀이 그렇게 날렵한지 처음 알았다. 그것도 우리 때문에 놀란 모양이었다.

또 한 번은 다른 도시에 사는 지인을 이 공원에서 만났다. 걷기에 좋은 곳이라고 소개했더니 만남 장소를 공원으로 정한 것이다. 산책로의 중간쯤에 이르러 화장실에 들렸다가 나머지 남은 길을 가기로 했다. 둘 다 볼일을 보고 내가 먼저 화장실 건물을 나섰다.

화장실 입구 쪽 희고 넓은 벽에 검고 길쭉한 무엇이 움직이고 있었다. ! 얼른 그것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지난번 일을 사람들과 나누던 중 이곳에서는 까만색 뱀은 독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인은 아직 화장실 안에 있었고 알릴 방법이 없었다

곧이어 화장실을 빠져 나오는 지인에게 저기, ”, 하고 그저 가르쳐주었다. 지인은 그쪽을 돌아보고는 오리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듯이 양손을 마구 저으며 두 발을 땅에 대지 않으려는 듯 겅중겅중 달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성격이 엄청 차분하고 말소리도 엄청 작은 사람이 그런 모양으로 달아나니 웃음이 났다.

이번엔 개를 만난 일이다. 공원에 있는 표지판들 가운데 개를 묶어서 데리고 다녀야만 한다는 안내문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호수 둘레 길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길에서는 이 규칙이 잘 지켜진다. 그런데 인적이 드문 숲길에서는 열에 일곱, 여덟은 개들이 묶여 있지 않다.

개를 키우는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는 숲길에서는 개들을 자유롭게 다니도록 풀어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숲길을 걸을 때가 있으며 그러다 그런 개들을 만나기도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나마 훈련이 잘 된 개는 멈추라는 지시를 잘 따르고, 더 친절한 주인은 개를 그 순간에 줄로 묶어 좁은 숲 길 바깥으로 물러나서 우리가 지나가도록 기다린다. 이런 주인과 개를 만나면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고마운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숲 속에서 낙엽이 바스락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들개처럼 생긴 누런 세 마리 개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그 가운데 한 마리의 이마에는 꼭지점이 네 개인 별 모양 문신 같은 것이 있었다. 이 개들은 무슨 먹이를 포위한 짐승처럼 남편과 나를 세 면에서 둘러싸고 이빨을 드러내며 짖어댔다. 정신이 황망하고 어이가 없었다. 주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개들은 계속 의기양양하게 짖어대고 난 최대한 개들에게 적의나 두려움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몇 분이 흘렀는지 몰라도 꽤 긴 시간 같았다. 갑자기 남편이 멀리 보이는 주차장(공원 밖 어느 축구장의 주차장이 보이는 곳이었다)을 향해 손으로 가리키면서 고우(Go)!” 라고 외쳤다. 그러자 개들은 지들이 언제 짖었냐는 듯이 깨갱거리며 눈에 힘을 뺐고 주차장 쪽으로 우리에게 왔던 것처럼 달려갔다.

개를 방치한 주인에게 화가 났다. 그 못된 주인과 개들 때문에 매우 언짢았지만 그날 걷기로 한 길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남은 숲길을 걸으며 여태껏 살아오면서 해보지 못한 욕을 그 들과 주인을 생각하며 몽땅 몰아 했다.

숲을 걸을 때 이 밖에도 우리가 호흡하며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좋아하는 쬐끔한 날 것들이나 곤충들이 귀찮게 하기도 한다. 송화 가루가 날리는 철에는 운동화나 바지가 노란 가루로 범벅이 되기도 한다. 꽃가루 알러지가 있는 사람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갑자기 비를 만나 길이 질척해지면 거기에 빠지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피해서 걸어야 할 때도 있다.

숲은 공기 중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하기도 하고 피톤치드(식물이 해충,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분비하는 물질)를 내뿜어, 그것들을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변하는 숲의 모습을 보며 시간의 흐름과 나와 우리의 삶따위를 생각하도록 이끌어주기도 한다. 반면 숲에서는 뱀이나 정신 없는 개들과 그 주인처럼 두렵고 화나는 일을 만나기도 한다. 그래도 숲은 여전히 사람에게 유익하다. 숲길을 걷고 또 걸으며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만나게 될 터이다.

11/03/2014

솔잎을 긁어모으며





소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이 뒤뜰에 온통 흩어져 있다. 소나무는 사시사철 초록 잎을 달고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집 소나무는 가을이면 누런색의 잎을 떨구어 낸다.

담장 가까이에 엄청 키가 큰 소나무 세 그루가 있다. 어림 잡아도 15미터(49피트)가 넘을 것 같다. 나무의 키도 크려니와 나무 껍질을 보면 두툼하고 쩍쩍 갈라진 것이 나이가 꽤 들어 보인다. 나무의 아래 절반에는 가지가 없고 위쪽에는 가지가 흐느적 흐느적 달려 있다. 또 나무 기둥에서 뻗어 나온 가지를 보면 가지 끝으로 갈수록 초록 솔잎이 손바닥을 힘껏 편 것처럼 달려 있다.

봄이 되면 가지 끝에는 노란색 송화도 피고 여린 연두색 솔잎도 나온다. 그렇게 새로 나온 잎들은 더우나 추우나 오랫동안 초록빛을 간직한다. 그러니까 가지 끝으로 갈수록 세상에 나온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잎들이다. 낙엽은 항상 가지 끝에서 떨어지는 줄로만 알았는데 집 가까이에 사는 소나무 덕에 그렇지 않은 나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을이 되면 가지 제일 안쪽에 있는 나이든 솔잎들이 누런색 옷으로 갈아 입고 나무 아래 땅으로 내려 앉는다. 누런 솔잎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은 없으나 여전히 솔잎이라는 이름으로 땅에서도 오랫동안 머무른다.

솔잎을 모으고, 나르는 아이들. 어느새 일 년 전 그림이 되었네요.

지난해, 소나무에서 떨어진 솔잎이 뒤뜰에 가득하길래 아이들에게 솔잎을 긁어 모으라고 시켰다. 모아진 솔잎은 소나무 아래에 다시 뿌려줄 생각이었다. 둘째 녀석은 일 시킨다고 구시렁거리면서도 꼼꼼하게 모아놓은 솔잎을 보니 꽤 많은 양이었다. 일부는 뒤뜰 쪽 집 벽 아래를 덮는데 쓰고도 남을 것 같았다. 집 둘레의 세 벽면은 동네 관리하는 회사에서 이미 새로 갈아놓은 상태였다.

사람이나 자동차가 드나드는 길을 빼고는 집을 삥 돌아가면서 7센티미터(3인치) 이상 되는 두께로 솔잎을 깔아 놓는다. 검고 탁한 색으로 변한 묵은 솔잎 위에 누렇지만 싱싱한 솔잎이 얹어진다. 집 앞쪽 심겨진 나무들 아래에도 솔잎이 풍성하게 깔려 있다. 집 양 옆으로는 나무가 있든 없든 솔잎이 가지런히 깔려 있는데, 여기까지는 관리 회사에서 해마다 두 번씩 솔잎을 덮어준다.

뒤뜰 쪽은 개인이 알아서 관리한다. 솔잎이 필요하면 가게에 가서 사다가 깔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집에 살고 있는 키 큰 소나무가 솔잎을 넉넉하게 내어주는 바람에 솔잎을 사오는 비용과 수고를 덜어주었다. 솔잎은 두껍고 길수록 좋다고 한다. 가게에서 파는 보통 솔잎은 23센티미터(9인치) 정도이고 아주 좋은 솔잎은 35센티미터(14인치) 이상이다. 와우! 우리 집 솔잎의 길이를 재보니 어느 솔잎이나 고르게 28센티미터(11인치) 쯤 되었다. 꽤 괜찮은 솔잎인가 보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집 둘레에 솔잎이 깔려 있는 모습은 아늑해 보이기도 하고 자연과 더 친밀한 느낌을 주어서 좋다. 게다가 큰 비가 내려도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는다. 꽃밭과 나무 주변을 덮고 있는 솔잎은 장식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기온 변화로부터 식물과 흙을 보호하기도 한다. 솔잎을 두껍게 깔수록 그 안은 빛이 차단되어 잡초가 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집을 갉아먹는 흰개미는 향 때문인지 솔잎을 싫어한다고 한다. 그러니 흰개미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을 것 같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떨어진 솔잎을 모아 집 뒤쪽에 깔아주었다. 이번엔 남편이 수고를 했고 큰 아이가 나르는 것을 조금 도왔다.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솔잎은 다시 모아서 소나무들 아래로 보내려고 한다.

무뚝뚝하게만 보이는 소나무가 우리 집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이제야 해본다. 생명을 다한 솔잎마저도 쓸모가 있다니 참 고마운 나무다. 오래 전에 떨어진 솔잎은 썩어서 흙에게 좋은 영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서 다시 식물들이 건강하게 자라날 것이고. 소나무가 자연이 순환하는데 한결 같이 기여하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하다.

3/28/2014

부러진 나무, 구부러진 나무





날씨가 좀처럼 따뜻해지질 않는다. 올해 첫머리에 기온이 뚝 떨어져 이곳에선 흔하지 않은 눈도 보고 좋다고 했더니, 그 추위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실내를 따뜻하게 하기 위한 전기요금이 엄청 불어나고 바깥 운동을 하지 못하는 찌뿌둥함도 쌓여 있다. 기온이 조금 오른 날에도 운동 삼아 하는 숲 속 걷기를 아침에는 추워서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오후에 햇볕이 한참 풀렸다 싶을 때 나갔다 온다. 걷는 운동도 그나마 일 주일에 한 번 하면 다행이다.

모처럼 날씨도 좋고 시간도 나서 집 근처 공원으로 나갔다. 늘 가던 길을 잡아 걷기 시작했다. 춥다 춥다 해도 세상 만물이 제 역할을 하며 움직이고 있듯이 아직도 칙칙한 겨울 색깔을 벗겨내지 못한 나무에도 새순이 제법 올라와 있다. 새 생명을 세상 밖으로 기꺼이 밀어내고 있는 나무들이 대견하다. 그들이 내어놓는 새순을 바라보면 경이롭고 앙증맞고 귀하다.

그 모양과 색도 가지각색이어서 오래 두고 볼 요량으로 늘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은 거의 실패다. 핸드폰으로 어떤 대상을 가까이 찍으면 흐릿하게 나온다(요즘 스마트폰에 근접 촬영 기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것은 아이폰이다). 사진이 선명하게 찍히지 않는 줄 알면서도 자꾸 버튼을 눌러대는 이유는 새순을 볼 수 있는 시간은 한 때, 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다, 고 혹시라도 제대로 찍힌 사진이 하나 걸리면 좋겠다는 생각에 보이는 새순마다 찍어댔다.

그렇게 숲길을 걷다가 길을 가로질러 쓰러져 있는 소나무를 만났다. 세찬 바람이 불거나 큰 비가 온 다음에 숲을 찾아가면 쓰러져 있는 나무들을 가끔 보게 된다. 나무가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약해서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 같다. 제 삶을 다한 나무가 안쓰러워 한 번 더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덩치가 큰 나무는 쓰러져 있어도 그 기운이 당당하여 근처에 가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한다. 이번에 만난 소나무는 그다지 굵지도 않았고 밑동을 보니 튼실해 보이지도 않았다. 올 겨울 추위와 바람은 그 소나무에게 숲 속 다른 나무와 동물들을 위해 거름이 되어달라고 부탁했고, 그 나무는 기꺼이 순응을 한 것인지……

공원 관리인들이 어떤 절차에 따라 쓰러진 나무를 치우는지 모르겠다. 쓰러진 나무는 그렇게 길을 가로 막은 채 몇 개월이고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자리에 가보면 톱으로 잘려져 길을 다시 터 놓는다. 잘려진 나무 토막들은 숲 속에 그대로 둔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는 배려인 듯싶다.





죽은 나무를 뒤로 하고 다시 숲길을 걸었다. 이번엔 늘 다니던 길에서 일 년도 훨씬 전에 쓰러진 또 다른 나무에 다다랐다. 이 나무는 참나무의 일종으로, 쓰러지기는 했어도 아직까지 나무 밑동에 연결되어 있다. 이 나무 밑을 지나려면 고개를 살짝 숙여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은 내려서 지나가야 한다. 길을 가로질러 낮게 쓰러져 있어서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만 아직 생명이 붙어 있어서 그런지 공원 측에서는 이 나무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쓰러져서 구부러진 모습이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똑바로 서 있는 다른 나무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으나 여전히 새싹과 줄기를 내며 생명 활동을 하고 있는 이 나무가 다시 보였다. 세상에! 다른 나무의 새싹은 조그맣게 열리고 있는데 이 나무는 새 줄기가 쭉쭉 뻗어 나와 새로 나온 잎들도 잔뜩 달고 있었다. 대단한 생명력이다. 그 나무 아래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왕성한 기운을 나눠주며 좋아라, 하는 것만 같았다.

나무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뿌리가 달린 밑동에서 떨어져 나간 소나무는 초록 솔잎이 달려 있었지만 누가 봐도 죽은 나무다. 그런데 구부러져 있을지언정 밑동에 붙어 있는 나무에서는 생명을 보는구나, 생각했다. 구부러진 나무가 있는 길을 벗어나는데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첫번째로 암송했던 성경 구절이 문뜩 떠올랐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께만 붙어 있으면 산다는 말씀이다. 난 이 말씀을 굳게 믿는다. 어둠이 나를 삼킬 듯이 덤벼들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을 겨우겨우 혹은 억지로라도 붙잡고 있으면 된다. 힘든 때를 벗어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소심한 몸짓으로 허우적거려도 괜찮다. 하늘을 바라볼 수만 있으면 된다. 말라빠져 죽은 가지처럼 보여도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꼬~옥 붙어 있으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싹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난 그렇게 믿는다.

숲 속에서 만난 나무들에게 고마움을 남기고 공원을 총총히 떠났다.

5/27/2011

남편 머리를 깎으며






남편이 문득 머리를 깎아야겠다고 합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는데 머리가 너무 덥수룩하여 더 더워 보인다며 머리를 깎아달라고 합니다.
푸하하~
남편이 뭘 믿고 저한테 머리 깎는 것을 맡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직접 깎아주기는 했어도 남편은 깎아 준 적이 없습니다.
큰 아이가 어릴 때 미용실에 가면 낯선 환경이기도 하고, 머리 깎는 기계 소리가 싫었는지 많이 울었습니다.
집에서는 울어도 남의 눈치 안 보고 맘껏 달래며 깎을 수 있어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때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과 지속 가능한 자연 친화적인 삶,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삶에 대한 고민과 실험을 하던 때라, 의식주 생활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 여러 도전을 했었습니다.
머리 깎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고, 재봉틀을 사용해서 생활 한복이나 생활 소품들을 만들어 썼고, 가벼운 병은 음식, 민족생활건강, 수지침으로 달래고, 아이들 교육도 함께 하고요.
저는 이런 정도에 머물렀지만 어떤 친구들은 더 나아가 유기농으로 농사지어 도농(도시와 농촌) 직거래를 통한 유통, 산야초를 효소로 만들어 그 효능을 인정받기도 하고, 직접 집도 지어 마을 공동체로 나아가기도 하고, 좋은 책을 골라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열기도 했습니다.

아이고~ 말이 옆길로 샜습니다.
아직까지 나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요즘은 자꾸 많지도 않은 제 나이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진짜 나이 든 것이라는데 말입니다.
뭘 기록하는 것을 잘 하고 단기 기억력은 좋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까먹는 횟수가 늘어나고, 건강은 타고났나 보다 했는데 예전 같지 않은 미세한 신체의 변화들이 느껴지고, 지금처럼 주제에서 벗어나 옛날 얘기나 하고 있고요.
*^^* 이것이 지금의 나인가 보다, 하며 그저 한 번 웃고 지나갑니다.

크게 접힌 신문지 한 장의 가운데를 오려내서 아이들 머리에 쑥 끼워 목에 얹혀놓고, 솜씨는 없어도 꽤나 신중한 표정을 지어가며 머리를 깎던 재미있는 사진이 사진첩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몇 해 동안 아이들 머리를 깎였어도 남편에게 머리 깎아주겠다는 말도 안 해보았고, 남편 역시 자기 머리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저의 머리 깎는 솜씨는 누가 보아도 영 미덥지가 않았던 것이죠. ^^




그로부터 15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 남편이 먼저 나서서 자기 머리를 깎아 달라는 것입니다.
콜럼비아로 이사 오고 나서의 변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분들에게는 죄송스럽게도 간단한 머리 손질은 집에서들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옛날 해 봤던 기억을 되살려 집에서 아이들 머리를 깎아줘 볼까 싶어 교회 어느 집사님에게 머리 깎는 기계를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할만하면 하나 장만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집사님은 빌려 달라고 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니, 어느 날 머리 깎는 기계를 보여주시며 이건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고 저건 저럴 때 사용하는 것인데 사용설명서를 보면 쉽게 할 수 있게 되어 있다며 가져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만 보니 기계가 새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거 새것 아니에요, 하고 여쭈어보니 그냥 두고 쓰세요, 하셨습니다.
집사님 것을 빌려서 연습 한 번 해보고 어찌 할까 결정하려고 했는데 새 기계를 사주시는 바람에 오랫동안 두고 사용해야 하는 기분 좋은 부담이 생긴 것입니다.

기계도 생기고 해서 오래 전에 쓰던 가위들도 꺼내어 이번 달 초에 남편과 첫째 아이 머리를 조심 조심 깎아보았습니다.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 깎는 것은 이제부터 저보고 하라며 편안한 마음으로 머리를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도 멋지지 않은, 깎은 티도 안 나는 첫 번째 이발이었습니다.
이번 두 번째는….
남편이 저를 믿어주며 마구 용기를 주길래 머리카락을 팍팍 잘라내었습니다.
이상하게 잘라지면 어쩌나 했는데 오히려 깔끔하니 머리 깎은 티가 납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머리 깎기 시작할 때 마음속으로 기도도 했습니다.
예쁘게 자르도록 도와 달라구요.
두루두루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 집사님께, 남편에게.

머리 두 번 깎은 것을 핑계로 예전처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른 힘(특히 돈)을 쉽게 빌리지 않고 얼마나 지속하고 있는가 돌아보니 많이 게을러진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연 환경과 더불어 잘 살 수 있을까요?
생각만 하다 세월 다 보내면 안 되는데….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장26절-28절)

4/01/2011

쑤~욱


교회 뒷쪽으로 넓은 마당이 있습니다.
그 마당에는 교우들이 가꾸는 텃밭도 있고, 오래 전에 몇 포기 심어놓은 쑥이 시간이 흐르면서 넓게 퍼져 자라난 곳도 있습니다.
쑤~욱 쑤~욱 잘 자라는 쑥은 교우들이 뜯어다가 떡을 만들어 오십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친교를 나누는 점심 시간에는 교우들 각자가 만들어오신 반찬도 다양하고 맛날 뿐 아니라, 매주 떡을 해오시는 교우도 계십니다.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쑥이 나는 철에는 쑥떡도 자주 먹게 될 것 같습니다. *^^*

쑥도 쑤~욱 쑤~욱 자라고,
교우들의 사귐도 쑤~욱 쑤~욱 자라고.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4장1절-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