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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2026

평범한 인생




사람은 저마다 고유하고 특별한 굴곡을 가진 인생을 산다. 그럼에도 ‘평범한 삶이 행복하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오래전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도대체 평범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품고 카렐 차페크의 소설 《평범한 인생》(1934)을 집어 들었다. 이 소설을 철학 소설로 분류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였다.

카렐 차페크(1890~1938)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시대적인 불안과 증오에서 해방된 인간 존재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작가이다. 한편, 그는 희곡 《R.U.R.(로숨의 유니버셜 로봇)》(1920)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로봇’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인간 소외를 그린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평범한 인생》은 철도 공무원으로 산 주인공이 죽음을 앞두고 삶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정원에 날아든 방울 새가 “너는 대체 누구지?”  라고 묻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 ‘나’는 평범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이다. 나무로 가구나 문방구 따위를 짜는 일을 하는 소목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용하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고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가 바로 그만 두고 시를 쓴다. 그러다가 아버지로부터 경제적 자립을 하기 위해 철도 공무원이 된다. 어느 심성 좋은 역장의 딸을 만나 결혼하였고, 아내의 극진한 돌봄을 받는다. 주인공은 장인 덕분인지 몰라도 일찍 역장이 되어, 역장으로서 성실하게 리더십을 발휘한다. 얼마 후 전쟁을 겪으면서 체코인 동포들을 위해 역에서 발생하는 부대 이동 상황이나 보급 상태 등의 정보를 전달한다. 그리고 곧 전쟁이 끝난다.

이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적는다. “나의 삶에서는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략) 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범하고 시시한 삶인가!” 나는 주인공의 의견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평범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나의 생각을 알아챈 듯이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주인공은 평범하고 단일한 자아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그의 인생에 여러 자아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다.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소극적이고 안전한 생활을 원하는 우울증 환자의 모습도 고백한다.

“평범한 자아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일을 했고, 억척스러운 자아는 그 일을 상품화하면서 한눈팔지 않고 이 일은 하고 저 일은 하지 말라는 지침을 정해 주었으며, 우울증 환자인 자아는 가장 괴로워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았고 모든 일을 적당히 처리했다. 그처럼 세 개의 상이한 본성이었지만 서로 불화하지는 않았다. 말없이 타협했고, 아마도 서로를 배려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주인공은 자존심 센 겁쟁이, 낭만주의자, 시인, 용기 있는 사람 등내면에 숨어 있던 여러 자아를 마주한다. 카렐 차페크는 《평범한 인생》에서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려, 마치 한 사람이 단 하나의 자아로만 살아온 것처럼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 보여준다. 주인공은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그 생각이 자기기만이었다는 진실에 직면한다.

인생이란 살아낸 가능성과 잠재된 가능성의 집합체이다. 한마디로 평범한 인생은 없다. 다시 말하면 특별한 인생도 없는 것이 아닐까. 차페크에게 인생은 살아낸 자아와 잠재된 자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 모호함을 인정하는 태도가 나에겐 정직하게 다가온다.

나는 이 소설을 꽤 여러 날 붙잡고 있었다. 글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저 난해한 책으로 여기고 책장에 남겨두고 싶었지만 이해해 보려고 애쓴 시간이 아까워서 겨우 정리해 보았다. 

차페크를 이해한 마지막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아 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인생을 산다. 우리는 각각 다른 가능성을 산다는 뜻이다. 너는 내가 살 수도 있었던 다른 가능성이고, 그래서 내 삶인 줄만 알았는데 ‘우리’가 어우러진 삶이라고 차페크는 말한다. 이렇듯 광대한 관계 속에 있을 때 진정 평범한 인생이라고 강조한다. 비로소 주인공의 평범한 인생이 고유하고 신비롭게 보이는 지경에 이르러 참 다행이다.

12/18/2025

낚시질



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소설 <노인과 바다>를 아직, 청년이라 불리는 육십 대를 앞두고 읽었다. 이 소설을 영화로 봤기에 그동안 정독하려는 마음이 없었나 보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이른바 세계 명작을 읽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노인과 바다>에 이르렀다.

몇 년 전 성탄절 즈음에 미국 플로리다 남단에서 섬들이 서쪽으로 이어진 키웨스트를 갔었다. 연말 해넘이를 그곳에서 보려는 계획이었다. 물론 키웨스트에서 헤밍웨이가 살던 집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은 멕시코만-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초 멕시코만을 아메리카만으로 지명을 변경하는 행정명령을 내려서 구글 지도에는 아메리카만으로 나온다-이 멀지 않은 뉴올리언스에 살게 되면서 <노인과 바다>는 내게 점점 더 가까워졌다.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늙은이였다.’ 첫 문장에서 평생을 욕심 없는 어부로 산 노인이 보인다. 노인이 사는 곳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 소설은 노인 산티아고가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하다가 85일째, 먼 바다에서 5.5m나 되는 청새치를 잡아 돌아오는 이야기다.

노인은 그의 조각배보다 긴 청새치를 잡기 위해 사흘을 고군분투한다. 노인은 자신을 잘 안다.  이젠 생각만큼 강하지 않을 지 몰라도 고기 잡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고 배짱도 있다고 확신한다. 거대한 청새치가 삼킨 낚싯줄을 풀고 당기기 위해 노인은 그의 어깨와 손을 아끼지 않는다. 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이 하루의 식량 전부였고, ‘노인은 오래전부터 먹는 것을 귀찮아해서’ 배에는 물 한 병뿐이었다. 청새치가 낚인 줄을 잠시도 놓을 수 없기에 낚싯줄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사용하여 미끼로 쓰려고 잡은 다랑어를 잘라먹거나 갈고리대로 해초를 건져 그 사이에서 떨어진 작은 새우를 먹으며 배고픔을 달랜다.

노인은 끝내 청새치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조각배에 청새치를 길게 묶는다. 노인의 집이 있는 아바나 항구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와의 싸움이 다시 시작된다. 노인은 포기하지 않고 상어와도 싸우지만 머리와 뼈만 남기고 청새치를 빼앗긴다. 앙상한 청새치를 가지고 아바나로 돌아온 노인은 항구에 배를 대고 돛대를 거두어 어깨에 멘다. 노인의 판잣집이 있는 언덕을 오르며 돛대를 멘 채로 여러 번 쓰러지기도 하고 쓰러져 일어서지 못하기도 한다. 집에 돌아온 노인은 사자 꿈을 꾸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책을 읽는 내내 노인에게서 어부로서 노련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보았다. 반면에 어부로서 고단함과 가시지 않는 외로움도 보았다. 나는 노인이 집에 돌아왔다는 것에 무척 안도했다.  노인을 따르는 소년 마놀린이 돌아온 노인을 살갑게 챙기고, 동네 사람들이 노인의 안부를 묻는 모습은 바다에서의 거친 모습과 대조를 이루며 다시 한번 마음이 놓였다.

사실 노인이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반복해서 소리친 혼잣말이 있다. “그 소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노인은 소년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고 배도 같이 탔었다. 언젠가 87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3주 내내 큰 고기를 잡았을 때도 함께 있었으나, 다시 40일 동안 어획량이 없자 소년은 그의 부모 뜻에 따라 다른 사람의 배를 탔다. 그래서 85일째 되는 날, 노인은 혼자였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이 소년은 노인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노인을 돌보는 소년이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한 지 나는 소년에게 머리를 숙였다. 어찌 노인이 그 소년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몇 주 전 우리도 낚시할 기회가 있었다. 이웃 P부부는 가슴이 답답해질 때 한적한 길을 달려 낚시를 하러 간다고 그랬다. P는 우리 가족이 낚시에 관심 있는 것을 알고는 그들의 낚시 포인트로 바로 초대했다. 낚시 도구는 물론 미끼로 살아 있는 새우를 챙겨왔다. 하루 전에 직접 잡은 새우였다. P와 처음 낚시했을 때는 서너 시간 동안 메기만 한두 마리 잡았다. 얼마 뒤 P는 멕시코만에 가까운 그랜드 아일로 우리를 인도했다. 거기서는 생선 조기와 맛이 비슷한 바다 송어를 신나게 잡았다.

나는 낚시를 하러 가는 것 자체가 좋다. 물론 노인이 어부가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은 고통스럽다고 한 말에 완전 동의하지만 말이다. 나는 고기를 잡으면 좋고 못 잡아도 괜찮다. 그런데 P에게서는 물고기 잡는 재미를 우리 가족과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노인이나 우리나 삶은 홀로 동시에 함께 하는 낚시질 같다.


*이 글은 당당뉴스에도 실렸습니다.

9/12/2025

자연은 계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의 가치를 숫자로 측정하는 인간 사회에서 <자연은 계산하지 않는다>는 책 제목은 삶의 흐름에서 잠시 멈추어 돌아보라고 채근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의 원제는 서비스베리(The Serviceberry). 서비스베리라는 이름도 처음 보았거니와 번역한 제목과 사뭇 달라 책 내용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저자 로빈 윌 키머러에 대한 소개도 눈길을 끌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엄마라는 단어. 남성에 대비되는 개념이 아닌 관계를 나타내는 어휘다. 뒤이어 아메리카 선주민 출신 생태학자라고 소개한다.

키머러는 시티즌 포타와토미 네이션의 일원인데, 그들은 서비스베리를 베리 중에 최고로 취급한다. 키머러는 그 맛을 이렇게 알려준다. “블루베리님 맛이 나는 열매에 사과님의 묵직한 크기, 은은한 장미 향, 오도독 씹히는 작은 아몬드 맛 씨앗을 두루 갖춘 열매.” 달콤하고 낭만적인 맛일 것 같다. 사실 키머러는 서비스베리의 맛을 알려주려는 것보다 서비스베리가 담고 있는 의미 때문에 이 책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서비스베리는 포타와토미어로 보자크민이라고 부른다. 그 단어에는 ‘선물’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서비스베리는 대지에게서 받은 선물로, 그것을 먹고 나누는 새나 인간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이룬다. 키머러는 이러한 선물 경제의 화폐는 관계라고 말한다.

선물 경제는 감사와 나눔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자의 이웃, 샌디는 글라디올러스 줄기 조림병, 호박, 붉은감자를 ‘공짜’라는 팻말과 함께 앞뜰 탁자에 내놓는다. 또 다른 앞뜰에서는 자신이 필요한 양보다 많이 갖고 있는 살림살이를 나눈다. 공짜 나눔을 하는 키머러의 이웃들은 여전히 시장 경제의 일원이지만 동시에 선물 경제에 참여하기도 한다. 키머러는 상호부조, 지역 선물 경제, 돈이 오가지 않는 품앗이, 협동 농장, P2P 대출 등은 풍요와 나눔의 기쁨을 토대로 한 부의 재분배 체계라고 생각한다.

키머러는 선물 경제가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나눔의 규모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 경제가 여전히 작동하지만 선물 경제도 발전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경쟁보다 협력을, 쌓아두기보다 나누기를, 선형적이 아니라 순환적인 경제를 이루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공공도서관이 있다. 키머러는 공공도서관의 개념과 실천을 숭배한다. 공공도서관은 도시 규모에서 실천되며 공동 소유 개념이 이뤄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공원, 산책로, 그리고 문화 경관 등도 공공도서관처럼 소중한 공유 자원이다.

오래전부터 키머러는 더 기뻐하는 사람이 이긴다고 믿고 있다. 나의 이웃들도 텃밭이나 뜰에서 거둔 선물을 기쁨으로 나눈다. 꿀, 깻잎, 고추, 대추나 오디도 있다. 비록 작은 텃밭에서 거둔 열매지만 흥미롭게도 자연은 여럿이 나눌 만큼 넉넉하게 내어준다. 가게에서 산 배추나 무라도 필요 이상의 것은 기꺼이 나누곤 한다.

키머러의 서비스베리를 읽고 나니 나의 이웃 J의 멀베리(오디) 얘기도 하고 싶다. 가지마다 오디가 주렁주렁 열리면 J는 그것을 따 가라고 알려준다. 오디를 따는 일은 즐겁다. 통통하게 영근 오디를 따 먹으면 오디의 달콤한 즙이 입속에서 부드럽게 터진다. 한 알씩 먹기도 하고 여러 알을 모아 한 번에 털어 넣기도 한다. 입이 온통 자줏빛으로 물든다. 건강한 오디를 먹어 즐겁고 공짜라 더 즐겁다.

오디를 어느 정도 따다가 그만두려고 하면 J는 바람이라도 불면 다 떨어지고 만다며 어서 더 따라고 고운 소리를 한다. 멀리서 새들이 우리를 지켜본다. 새들도 우리와 오디를 나누는데 별 불만이 없는 것 같다. 어차피 뽕나무의 높은 데 달린 오디는 그들의 몫이니까. J가 나눠준 오디를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어서 일부를 얼려두었다. 멀리서 사는 둘째 아들에게도 얼린 오디를 나눠주었다.

아들은 멀베리(그는 멀베리라고 부르는 것이 편한가 보다)를 받고 얼마 뒤, 그의 친구들과 블루베리를 따러 농장에 갔다. 더웠을 텐데, 열린 하늘을 보며 땅을 딛고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찾아내다니 아들이 제법이다. 아들은 친구와 함께 블루베리와 멀베리로 잼을 만들었다. 나는 아들이 만든 베리베리 잼을 사진으로만 맛보아서 아쉬웠다. 하지만 아들이 그의 이웃들에게 잼을 선물하며 누렸을 기쁨을 생각하니 아쉬움보다 흐뭇함이 컸다. 풍요로운 삶의 비밀을 엿보는 것 같았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