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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2019

물러설 때와 나설 때


<숲 속 길을 걷다가>


교회는 나의 삶이다.

난 교회가 참 좋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다. 성장하는 시기에 맞게 드려지는 예배나 행사에 빠지지 않았고, 어떤 일이나 과제를 주어도 싫어하지 않고 끝까지 완수했다. 교회에 있으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했다.

김포에서 목회할 때였다. 상가건물을 빌려 10명도 안 되는 교인들과 어렵게 신앙생할을 하다가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다. 교회가 지어지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구석 구석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매주 교회를 방문하거나 등록하는 새가족이 생겨났다. 나의 부모님도 교회 옆으로 이사오시고 어려서부터 알던 고향 친구도 어찌어찌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내가 할 일도 적지 않았다. 전도, 심방, 예배 안내, 찬양 인도, 아동부 교육, 성인 교육, 주방일, 청소... 어릴 적 소원대로 교회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남편은 당신은 부목사나 마찬가지야, 라며 고무하였다. 나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교인이 점점 늘어나던 그즈음 당회에서 남편은 나에게 맡겼던 교육부장을 다른 이로 바꾸어 발표하였다. 새로운 교육부장은 나의 친구였다. 나랑 한마디 의논도 없었다. 교육부장이든 아니든 나에겐 별로 의미가 없었지만 남편에게 서운했다. 사실 결혼해서 함께 목회하는 내내 교회학교 교육은 거의 내 몫이었다. '교육부장이든 아니든 별로 의미는 없었지만' 남편은 교육부장에 내 이름을 올려놓곤 하였다. 남편은 내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직분-달라고 요청하거나 수락한 적도 없는-이 뭐가 중요하냐며 당신은 교회 전반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오히려 강조하였다.

그해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때였다. 강습회에서 찬양과 율동을 잘 익혀 성경학교 때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했다. 비용을 아낄 생각으로 율동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하지 않았다. 악보만 모아놓은 책도 한 권만 샀던 것 같다. 강습회에 세 명이 참석을 했는데 찬양 책은 주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찬양을 열심히 따라 했고 나는 율동을 기억하기 좋게 적어놓고 있었다. 열심히 율동을 익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교육부장이 악보가 담긴 책을 휙 끌어가 자기 앞에 놓았다. 난 순간 멍했고, 뭐가 잘못되었나 그 순간을  머릿 속에서 반복할수록 화가 났다.

나의 엄마도 나 만큼이나 교회를 사랑한다. 어쩌면 나보다 순수해서 교회에 더 심하게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모녀지간이니 기질적인 면에서 닮은 구석이 있겠지만 교회에 관하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부분이 많지 않은 듯싶다.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된 엄마 권사님은 주방 일을 거의 도맡아 하셨다. 엄마는 음식을 맛있게 만드신다. 양이 많은 음식도 겁내지 않고 만들어내신다. 성격이 깔끔하셔서 일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면 할 일이 하나도 없이 마무리를 해 놓으신다. 엄마는 나에게 교회에서 할 일이 많은데 주방 일은 이젠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딸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그러셨을 것이다. 엄마 마음을 이해했기에 주방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교회 젓가락이 몇 벌인지도 알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그곳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교회가 부흥하고 교인이 늘어나서, 여러 사람이 일을 나누고 협력할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감사한 일이었다. 교회는 변화하고 성장하는데 난 옛모습에 머물러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일들을 맡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일상이 되어 있었다. 어떤 일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나님을 위해, 적어도 교회를 위해 열심히 무엇인가를 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일을 나누기도 하고 아예 그 일을 놓고 물러서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 새로운 일(사명)로 나아가야 한다. 난 그걸 전혀 모르고 살다가 가족과 친구에게 제대로 한 방 맞고 깨달은 것이다. 그 한 방의 여운이 가시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미국으로 건너와 애틀랜타에서는 교회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천 여명 모이는 교회의 부목사 아내에게 요청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서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런 상황을 어색해 하는 나에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해서 하나님이 쉬라고 하시나 보다. 지금은 그냥 편안히 쉬어.”

엄마의 조언처럼 그저 쉬면서 내 믿음만 잘 지키면 되었다. 덕분에 영어공부하는 학교도 기웃거리고, 선교센터의 간사도 해보고, 한국학교에서 가르치는 경험도 갖게 되었다. 콜럼비아교회에서는 다시 담임 목회자의 아내로 지내야 했지만 한국에서처럼 온갖 일을 다하려고 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일인데 하려는 사람이 적거나 없을 때 기꺼이 나섰다.

지난해 9월, 몽고메리제일교회가 새로운 목회지가 되었다. 한국에 계신 강화 어머님과 통화를 하면서 아동부를 돕게 되었는데 교회학교 교육에서 멀어져 있었기에 잘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된다고 말씀 드렸다.

“ 힘들어도 열심히 햐.~ 배운 게 아깝지 않니? 내가 할려고 하면 안 댜아.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햐.”

어머님은 연세가 70대 중반을 넘어선 강화 망월교회 권사님이시다. 어느 날 연합속회를 인도하시게 되었다. 순서에 따라 진행하시던 중 성경 읽는 것을 까먹고 다음 순서로 넘어 가려 하셨다. 그러자 어머님 가까이에 계시던 박장로님이 눈치로 알려주셨다고 한다.

“이렇다니까요!”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교인들이기에 모두가 공감이 되어 까르르 웃고 지나가셨단다. 그러고 나서 어머님은 속회 인도자를 그만 내려놓겠노라 목사님께 말씀드렸다고 얘기해주셨다. 어머님은 이 일로 물러설 때를 감지하신 것이다.

우리 가족이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할, 몽고메리제일감리교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배움이나 경험이 교회를 위해 쓰여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엄청 감사할 뿐이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물러서야 할 때 가벼이 발걸음을 돌리리라.

6/11/2018

강화 종합시장 횡단보도 사건




여름이 시작되는 때다. 낮 기온이 93-95(34-35)는 보통이다. 그래도 요즘 이른 아침 시간에는 바람이 살랑거려, 마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봄의 손끝이 빠르게 달궈지는 여름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새벽 기도가 끝나고 잠시 걷기에 좋은 시간이 계속 허락되고 있다. 손이 옷 주머니 속을 자연스럽게 찾아 들어가는 쌀쌀한 봄 언제부터 새벽 기도가 끝나고 교회 주차장을 남편과 함께 돌고 있다.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며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을 되밟으며 여러 번 걷는다.

어느 날 새벽녘, 윗옷 위에 겉옷을 한 겹 겹쳐 입고도 어깨가 움츠러들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다. 교회 문을 나서서 몇 발을 떼지 않았는데 남편은 내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손을 잡혀줄지 거두어 들일지 빠른 판단을 위해 얼른 남편을 쳐다보았다. 내가 쳐다보는 눈길을 느끼면서도 앞만 바라보고 있는 남편의 옆얼굴에 멋쩍음이 가득했다. 예전 같으면 남편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이 왜 그러시나? 하던 대로 하셔, 하면서 잡힌 손을 다시 빼내 왔을 것이다. 짧은 순간이라도 자신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나를 남편은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런 남편의 태도와 약간 늘어진 볼살 위에 거칠게 솟아나온 수염마저도 안쓰러워 보였다.

신혼 때는 첫 목회지인 강화에서 살고 있었다. 강화도는 한국에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를 이어 네 번째로 큰 섬이다. 장을 보려면 신혼집에서 강화읍까지 버스로 30분을 가야 했다. 현재 강화터미널이 사용되기 전에 있던 옛날 강화터미널에 조금 못 미쳐 종합시장이라는 건물이 두 동인가 있다. 흔히 알고 있는 재래시장이 아니라 건물 안에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들어가 있어 종합시장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종합시장의 정면에는 강화 양사면에서 시작되어 서울 세종로까지 이어진 48번 국도가 지나간다. 남편의 손이 미덥지 않다고 각인되던 그 사소한 일이 있었을 때는 왕복 2차선 도로였고 신호등 없이 횡단보도만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우리 일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생겼다.

읍에 장을 보러 간 것인지 약속이 있었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과 나는 터미널 전 정거장인 종합시장 맞은 편에 서 있었다. 종합시장 건물 쪽으로 도로를 건너야 했다. 넓지 않은 도로이므로 자동차를 피해 이쪽저쪽 잘 살피고 건너면 되었다. 난 좀 겁이 많은 편이라 신호등이 없는 길을 혼자 건너길 꺼려했다. 동행을 의지하든지, 아무도 없을 때는 누군가 길 건너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슬쩍 묻어서 건너곤 하였다. 강화에서 믿을 사람이라고는 남편 밖에 없는데 그 남편이 옆에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더욱 안전하게 길을 건너려는 순간에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남편이 손을 비틀어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손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말이다. 누가 보면 어떡하냐, 고 남편이 말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조금 보태 삼십여 년 전만 해도 환한 대낮에 길거리에 손잡고 다니는 연인이 별로 없었다-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젠 확실치가 않다. 나같이 소심한 인간은 생각도 못할 행동이었다. 그리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남편보다 내가 더 강함을 남편이 잘 알고 있다. 겁이 많은 것도 남편은 알고 있었고 길을 건널 때도 그렇다는 걸 말한 적도 있었다. 신혼이라 서로를 가까이서 겪어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해도, 알고 지낸 지는 꽤 여러 해가 지났었다. 연애할 때는 어떻게든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애쓰던 남편이었는데 결혼식이라는 형식적인 행사를 치룬 이후로는 고리타분한 남성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 의식을 진보적으로 새롭게 하고 헌신할지언정 가부장제의 타파나 양성평등은 관념에 머물러 있었다. 남편은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국회 청문회에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을 남편도 이럴 때 사용한다. 어쨌든 난 강화 종합시장 횡단보도 사건 이후로 길에서 남편의 손을 잡는 일은 혹은 잡혀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나에게도 옹졸하고 완고하기가 보통을 넘는 구석이 있다.

부부로 살면서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풀지 못한 매듭들을 그대로 갖고 있기도 하다. 굳이 그 매듭들을 드러내고 싶지 않거나, 막상 드러내도 해결할 자신이 없거나 확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늘 성찰하는 삶을 산다고 해도 모든 관계의 매듭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해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성경에 비추어 살펴보기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땐가 풀리는 매듭도 있으리라. 그날 새벽 시간이 바로 그 때였나 보다. 내 손을 잡은 남편은 최근 몇 년 전 나로부터 횡단보도 사건을 듣고 그럴 리 없다며 부인했었으나 그 매듭을 벌써 풀어 놓고 있었다. 온전히 풀리지 않은 매듭의 한 쪽은 내 몫이었다. 나도 어색함을 극복해야 했다. 남편 손 안에 내 손을 그대로 놓아두었다.

이럴 땐 추운 게 낫군.”

남편은 친절하게도 자신과 나의 멋쩍음을 대신할 말을 찾아주었다.

이번 주 초반, 잠 자리에 들려는데 아랫배가 따끔거렸다. 한두 번 그러는 걸 느끼다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 날 새벽이 되어 교회에 가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기도 드리기가 끝나고 힘이 좀 없었지만 그래도 걷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아주 더워지면 이른 아침 시간도 걷기에 불편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걸을 만할 때 걷자는 마음이었다. 뭘 잘못 먹어 배탈이 났나 남편과 함께 되짚어보았다. 점심에 교회 야외예배 때 쓰고 남아 냉동해 두었던 삼겹살을 먹었다. 그리고 저녁 때는 친구가 준 바질을 텃밭에 심었는데 새로운 잎들이 돋는 것이 싱싱해 보여 이파리 여러 장을 땄다. 바질이 토마토와 잘 어울린다기에 토마토와 치즈 위에 얹어, 오랜만에 구운 스콘과 함께 저녁거리로 삼았다. 보통 때와는 다른 특별한 끼니를 먹기는 했으나 상할 음식들이 아닌 것 같아 의아했다. 화장실을 휴게실로 쓸 만큼 화장실과 친한 남편도 같은 음식을 먹었으나 멀쩡했다.

뭘 잘못 먹었다면 장이 예민한 당신이 먼저 탈났겠지!”

남편에게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은 음식 때문에 배탈이 난 게 아닌 확실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나니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남편의 약한 곳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서로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했다. 이 단순한 사실을 떠올리고 감격해 하다니 유치하다.

세상에서 당신 장이 예민한 거 아는 사람 몇 명이나 돼?”
많지 뭐!”

당신 밖에 없다는 낭만적인 말을 조금 기대했으나 역시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남편다운 대답이었다.

부모 곁을 떠나 긴장된 타국에서의 생활이 십여 년 지나 지천명의 나이를 넘겼다. 늘 가까이에 두고 보호해야 할 자녀가 남아 있으나 또 다른 자녀는 자신의 길을 찾아 점점 더 멀리 떠나가고 있다. 서로 의지하고 보살펴야 할 가족과 함께 부드럽게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걸어 나가야지. 황금색 빛으로 헤치고 나오는 햇살이 어스름한 새벽 속에서 제일 또렷하게 보여주는 형체는 다름 아닌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손을 잡고 있는 남편이다. 강화 종합시장 횡단보도 사건 종결.

1/05/2015

새로운 리듬을 타고




동네 가까운 곳에 있는 피트니스클럽은 자주 가고 싶은 곳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해에 가족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등록해 두었는데 일주일에 두 번 정도를 겨우 간다. 해도 바뀌었으니 일주일에 세 번은 가리라 다짐을 해 본다!

지난 여름 동안에는 식구들이 함께 운동하러 갔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운동기구들을 이용해 땀을 내고, 수영으로 개운하게 마무리하곤 했다. 난 수영도 못 하고 귀에 물이 들어가는 것도 싫어 수영장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군살이 덕지덕지 붙은 맨살을 드러내는 수영복을 입는 것이 더 싫었다. 그랬더니 이 기회에 수영을 배우면 되지 않겠느냐, 물속에서 걸으면 운동량이 더 많다더라, 며 꼬셔댔다. 수영장을 이미 다니고 있던 남편과 아이는 나보다 몸이 더 좋은 미국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라며 안심(?)하라고 했다. 남편은 아무도 당신에게 관심 없어, 라는 말로 식구들이 함께 수영하자는 의견에 쐐기를 박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기까지 아이들과 어울릴 겸해서 달갑지 않은 수영장에 들락날락했다. 학기가 시작되자 학교에 다니는 녀석은 피트니스클럽에서 하는 운동을 접었다. 가족이 함께 하는 운동시간이 끝난 것이다. 동시에 나도 수영장 가기를 그만 두었다. 내가 잘 할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는 걷기운동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보통 트레드밀을 이용하여 운동할 때 뛰는 사람은 흔하게 본다. 내가 운동하는 곳에서도 나처럼 전혀 뛰지 않고 걷기만 하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내 몸 상태에 맞게 걷는 운동을 선택했지만 트레드밀에 올라선 사람마다 달려가면, 내가 둔해 보이려나, 운동할 줄 모른다고 여기려나 잡생각들이 발걸음을 지치게 하기도 했다. 이럴 땐 아무도 당신에게 관심 없어, 라는 남편의 말이 그런대로 쓸모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걷는 운동만 하는 사람이 점점 눈에 띈다. 운동하는 곳이 익숙해져서 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상황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트레드밀에 올라가 활기차고 즐겁게 진행되는 아침 뉴스를 볼 수 있도록 TV 채널을 찾아놓는다. TV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이어폰을 연결한 다음 슬슬 걷기 시작한다. 몸이 풀렸다 싶으면 속도를 조금 더 올려 발걸음을 빠르게 한다. 속도가 높아진 얼마 동안은 숨도 차고 정강이에 힘이 들어가 발걸음이 무겁기도 하다. 아침 식사 때 마신 커피 탓인지 화장실에 가고 싶은 느낌이 들어, 화장실에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잠시 고민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때가 체육학에서 말하는 데드 포인트(Dead point). 운동의 강도를 높였을 때 곧 괴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 지점이다.

이런 몸과 마음의 상태를 눈치채면 차분히 살피고 달래준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고, 뒤로 젖혀진 목을 바로 세워 살짝 앞으로 잡아 당기고, 숨을 더 깊게 들이 마시고 내뱉는다. 건강한 몸을 위하여 운동하기로 정한 시간만큼 기쁘게 채우고 흐뭇한 마음으로 이 건물을 나서자고 나에게 부탁한다. 그러다 보면 속도가 빨라진 트레드밀에 몸이 익숙해져서 발걸음도 가볍고 호흡도 편해져 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느낌도 사라지고 없다. 걷는 것을 멈추지 않고 걷고 또 걷는 동안 몸은 새로운 리듬을 만든다. 세컨드 윈드(Second wind) 상태에 이른 것이다.

세컨드 윈드란 격렬한 운동에 대해서 모든 신체기능이 동원되어 새로운 평형 상태가 성립된 시기이고, 신체 활동에 적응하도록 각종 내분비선과 기타 장기의 작용이 조정되어 세컨드 윈드가 되도록 돕는다고 친절한 이웃(^^)인 네이버 지식백과가 잘 알려준다.

새해 새로운 마음으로 하지 않던 일을 하려 하거나 하던 일의 강도를 높이는 경우라면 곧 데드 포인트에 이를 확률이 높다. 긍정적이고 자발적인 자극이 몸을 잠시 괴롭게도 하지만, 잘 이기고 나아가면 더 건강해지도록 돕는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일주일에 세 번, 즐겁게 걸어야겠다. 운동이 몸에 새로운 리듬을 주듯 다시 주어진 한 해의 시간을 정성스레 걷는 동안 삶도 새로운 리듬을 타고 신나게 노래했으면 좋겠다

6/06/2014

학교 이후의 삶을 시작하며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공식적인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비공식적으로 첫째 아이, 산이는 학교 일정이 마치기 하루 전에, 둘째 아이는 이틀 전부터 방학에 들어갔다. 둘째 아이의 말을 빌리자면, 일 주일 전부터 수업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 학교 분위기가 싱숭생숭하다고 했다. 학점을 따기 위하여 필요한 시험이나 과제를 다 끝냈고, 출석 일수에 지장이 되지 않으면 결석 처리가 되더라도 등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도 방학하기 이틀 전부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마무리를 잘 해야 되지 않을까, 하며 수업은 빠지지 않아야 된다는 밑도 끝도 없는 고정관념을 가진 나에게 둘째 아이는 대놓고 답답하다고 했다. 다 알아보고 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내 자신이 보편적인 제도나 질서 따위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어서 스스로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부분도 적지 않다. 둘째 녀석은 나와 닮은 듯하나 똑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나보다 훨씬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멋지게 만들어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방학하기 이틀 전 아침, 둘째는 학교를 가든 안 가든 알아서 잘 하겠지, 해놓고 첫째 아이는 학교에 보냈다.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산이한테서는 아무런 정보를 들은 것이 없으므로, 그리고 공교육을 하는 학교에 다닐 날이 더 이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학교 가려고 나서는 아이를 품에 안고 이마를 맞대고 잘 갔다 와, 하는데 가슴이 짠하다. 그 동안 한국에서 받았던 조기교육( 4)부터 미국 고등학교와 과도기 과정(transition class, 18-21) 마치기까지 겪었던 일들과 감정들이 뒤섞여 왈칵 왈칵 올라오는 것을 지난 주부터 참고 있었다.

지난 주에 산이가 학교 생활을 마치는데 부모의 사인이 필요하다며 학교로 오라고 했다. 이 모임은 산이를 위한 교육에 대해 재평가하는 자리로 두 달 전쯤 모였어야 했다. 하지만 방학을 코앞에 두고 호출하는 것이니 새로운 정보를 나누는 자리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올해 산이와 같은 반 친구들 가운데 네 명이 졸업하는데 모두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를 위해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단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래도 산이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서 의논할 것이 없다는 말에 무척 서글펐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학교 생활이 끝나면 아이와 여행도 하고, 평상시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수영과 볼링도 정기적으로 다닐 거라고 얘기했다.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직업재활(Vocational Rehabilitation) 하는 곳에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도 선생님에게 전해주었다.

산이와 우리 가족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담임 선생님과 직업훈련 담당 선생님은 두 분 모두 산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서두르지 말라(Be patient)는 말을 남기셨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산이의 담임선생님들한테 엄마로서 내가 부탁했던 말이 바로 기다려 달라, 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을 선생님들로부터 내가 듣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산이를 선물로 주신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인내를 배워가라는 것이라고 늘 말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산이가 학교를 떠난 후 앞으로의 삶에 대해 결정된 것이 없다는 사실에 불편한 마음이었다.

방학 기간이 끝나도 이제는 돌아갈 학교가 없다는 것이 헛헛하기만 한데 산이는 빨리 방학했으면 좋겠단다. 산이에게는 학교에 가지 말라는 말이 큰 꾸짖음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산이는 빨리 학교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만 스물한 살의 특별한 청년에게 학교는 어떤 곳이었을까?

방학을 하루 앞두고 아이가 학교를 갔다 왔는데 시큰둥했다. 친구들하고 선생님들하고 다 만났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네 반 친구들이 많이 안 왔다는 것이었다. 주초에 있었던 피자 파티가 학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나 보다. 둘째 아이 말 듣고 학교에 보내지 말 걸 그랬다. 남은 하루의 등교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 보내고 공교육을 끝낸 새로운 삶의 단계로 슬쩍 옮겨갔다. 감사하게도 산이는 여느 날처럼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바심도 조급함도 그에게서 느껴지지 않는다. 정한 때에 일을 이루시며 서두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산이의 어딘가에 숨겨놓으셨나 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잘 알려진 라르슈나 캠프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도 그런 마을을 이루어 살면 좋겠다는 꿈을 늘 꿔왔다. 산이의 학교 이후의 삶을 시작하며 돌아보니, 물리적인 공간을 가진 마을은 아니었어도 사랑의 관계로 이어진 공동체 안에서 살았음을 깨닫는다. 산이를 중심으로 가족, 친척, 친구들과 그들의 가족, 교우들,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이 산이를 풋풋한 젊은이로 키웠다. 라르슈 같은 마을공동체도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니, 꿈 같은 그런 마을을 만들 수 있는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져 있다

8/22/2013

다시 한 번

<집 근처 주립공원에서>

이렇게 2 년 만에 은근슬쩍 돌아옵니다.
네모난 화면에 삶과 사랑을 담아 세상과 다시 한번 소통하고자 합니다.
제 자신에게는 다시 한 번 글쓰기를 해보라는 격려와 거칠고 부족한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소박한 애정을 담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