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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2026

가시고기



교회의 공유 공간 한쪽 벽에는 책상과 책꽂이로 꾸며져 있다. 책꽂이에는 책들이 빽빽하게 자리잡고 있다. 얼핏 보아도 오래된 책들이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는 교인들이 두고 간 책들일 것이다. 이 책들의 제목을 하나씩 살펴보고 싶은 충동을 가끔 느낀다. 그래서 제목들을 차례대로 읽어 나가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책이 대단히 많은 것도 아닌데 책을 끝까지 살피는데 이르지 못한다. 공유 공간의 특성상 책보다 사람이 먼저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전과 다른 방향에서 제목들을 훑다가 소설 <가시고기>가 눈에 띄었다. 가시고기에 빗대어,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모든 걸 내어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라고 많이 알려진 책이다. 수컷 가시고기는 알에서 새끼가 부화할 때까지 돌보다가 죽는다. 그 새끼들은 죽은 아비 가시고기의 사체를 먹으며 영양분을 얻는다. 죽은 몸까지 새끼에게 내어주는 수컷 가시고기는 이 소설의 제목이 되었다. 2000년도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이 소설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이 책이나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소설의 설정들이 눈물 콧물 빼도록 슬플 것이 분명했다. 그런 슬픔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싶지 않았다. 또, 나에게도 어린 아들들이 있었는데, 가시고기 부성애 같은 모성애를 소환하지 않아도 육아가 가능했다. 모든 면이 지체되어 있는 자녀나 건강하게 태어난 자녀를 돌보는 일은 당위였다. 나는 이 일을 오랜 시간 감당하기 위해서 감정을 중립 상태로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의 아이들은 삼십 대가 되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엄마로서 자녀를 사랑하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씩 쌓이고 있다. 나는 이제야 <가시고기>를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백혈병에 걸린 아이는 10살 다움이다. 아이는 철이 일찍 들었는지 자신의 치료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빠의 마음을 헤아린다. 아빠는 시인이고, 여성 잡지사 기자,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번역을 하고 있다. 다움이를 간병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움이를 치료할 유일한 길은 다움이의 조건과 맞는 골수 이식이다. 하지만 골수 이식 공여자를 찾지 못한다. 아빠는 다움이가 견디기 힘든 항암치료를 멈추기로 결정하고 퇴원을 한다.

나는 여기까지 읽고 몸과 마음이 답답했다. 그리고 허기를 느꼈다. 찬장을 뒤지다 손에 잡히는 과자를 꺼내 왔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한참 먹다가 과자에서 눅눅하고 전 내가 나는 것을 느꼈다. 유통기한이 서너 달 지나 있었다. 나는 과자 봉지를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다움이 아빠의 절망이 더 처절하게 다가왔다.

소설은 다움이에게 살아날 길을 보여준다. 다움이에게 적합한 골수 증여자를 찾는다. 아빠는 수술비를 마련하는 길을 찾다가 불법 장기매매에 대해 알게 된다. 그나마 수술은 안전한 곳에서 받을 수 있는 정보다. 아빠는 신장 기증 검사를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이 간암 말기임을 알게 된다. 다움이의 수술 이틀 전, 아빠는 약해진 신장이 아니라 각막을 팔아 수술비를 마련한다. 다움이 수술은 잘 끝난다.

아빠는 자신의 죽음보다 아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아빠는 다움이의 미래를 위해 이혼 후 매정하게 떠나서 프랑스에 살고 있는 전처에게 보내기로 결단하다. 다움이와 전처에게는 아빠의 상태를 비밀로 한다. 다움이가 그 사실을 알면 아빠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다움이는 엄마에게 보내지는 이유도 모른 체 아빠를 바라보며 울고 또 운다.

“나의 전부인 아들아. 아빠는 죽어도 아주 죽는 게 아니란다. 세상에 널 남겨놓은 한 아빠는 네 속에 살아 있는 거란다. …… 아빠는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앞으로 걸어가는 거란다. 영원히…….”

참으로 고통스러운 아빠의 심정이 읽혀서 나도 마음이 먹먹했다.

언젠가 나의 아들이 감기에 걸려서 너무 힘들게 기침하기에, 하나님, 아들 대신 제가 아플 테니 저 기침 멈추게 해주세요, 라고 바랐던 적이 있다. 곧 바람대로 되었는데, 기침하는 게 어찌 괴롭던지 내가 왜 그랬나 싶었다. 이런 나를 아들은 좋은 엄마라고, 나는 부족한 아들을 좋은 아들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산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1/12/2015

아빠와 딸


 




아빠에게 첫아이이면서 첫딸인 나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 가족들이 전해주는 말에 따르면 식사를 할 때에 아빠는 꼭 나를 먼저 먹이고 나서 식사를 하셨다고 한다. 외출하실 때에도 마스코트처럼 가능한 한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이야 육아에 엄마 아빠 모두 정성을 들이지만 거의 오십 년 전에는 어른들 앞에서 자기 자식을 드러나게 예뻐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던 때였다. 도리에 어긋나면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마구 야단을 치시던 호랑이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그런 할머니 앞에서도 꿋꿋하게 딸을 아끼던 요즘 말로 딸바보셨나 보다.

서너 살쯤 되었을까? 무더운 여름이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빠는 자전거를 태워주셨다. 해가 길어서 그랬던지 밀집 모자를 씌워주시곤 했다. 살던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무지개 빛이 나는 분수대가 있었다. 아빠는 그곳까지 자전거로 달려가 잠시 분수가 뿜어내는 시원한 물을 보여주셨다. 인천 숭의동 로터리에 그 분수대가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 기억이지만 참으로 시원하고 환상적인 나들이였다.

아빠는 무척 꼼꼼하고 자상하시다. 말수가 별로 없으신 편인데, 당신이 말재주가 없어 마음이 잘 표현이 안 된다고 안타까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난 아빠의 말재주 없는 면을 닮은 것 같다. 지금도 누군가 말을 재미있게 잘 하거나 유머가 풍부하거나 상황에 딱 떨어지게 대처하여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른다. 말이 적은 아빠의 오랜 취미는 낚시다. 그 아빠의 그 딸답게 어려서부터 낚시터에 잘 따라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소래 낚시터로 망둥이를 잡으러 다녔다. 망둥이를 잡으면 산 채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했다. 어른들은 이걸 먹는 나를 희한하게 보시면서도 재미있어 했다. 재미있어 하시니 나는 신나서 또 먹고…

아빠가 다니시던 회사에 낚시 동우회가 있었다. 낚시 동우회에서는 정기적으로 전국 낚시터를 방문했고 일 년에 두어 번 TV 같은 큰 상품을 주는 대회도 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큰 낚시대회에 따라 간 적이 있었다. 밤낚시를 하고 다음 날 점심 전에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45인승 관광버스 서너 대가 함께 갔으니 참가자가 꽤 많은 대회였다. 낚시터에 도착하자 아빠는 쫓아간 딸이 춥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줄 둔덕이 있는 곳을 찾아 작은 사이즈의 텐트를 치셨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고기가 잘 잡힐 것 같은 포인트로 빠르게 흩어졌다.

여기저기서 조용히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빠는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셨다. 낚시하시다가 괜히 우리 라면 끓여 먹자, 며 시간을 보내셨다. 내가 심심해 할까 봐 마음이 쓰이셨던 것 같다. 낚시 마감 시간이 다가오도록 별 소득이 없었다. 이번엔 안 되겠다며 낚싯대를 접으려는데 뭔가 걸렸다. 일단 물고기 길이가 30cm(12인치)가 넘으면 다른 이들과 겨루어볼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건져보니 36cm쯤 되는 놈이었다. 그놈으로 아빠는 장려상인가를 타셨다. 아빠의 취미 생활에 동행한 딸을 기특하게 여기셨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빠 낚시터에 따라오는 독특한 고등학생이거나 그 밖에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여학생이었지만 아빠에겐 그저 자랑스런 딸이었다.

그런데 그 딸이 늘 아빠의 기대를 만족시켜 드리지는 못했다. 신학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는 말씀을 드린 순간부터 아빠는 나와의 대화를 중단하셨다. 그 당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던 아빠는 여자가 신학대학에 간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셨다. 아빠가 어찌어찌 정신을 가다듬고 상상할 수 있었던 딸의 모습은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다니는 전도부인이었다. 학교를 다 마치도록 아빠는 딸을 잃었고 딸은 아빠를 잃었었다. 난 가고 싶은 길을 갔지만 가족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가족은 내 삶의 울타리일 뿐 멀어진 사이가 좁혀지지 않는 듯했다. 나는 한 술 더 떠 신학대학원을 진학했고 거기서 목사가 될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다.

아빠는 소박하면서도 정겹게 목회 하는 모습, 장애를 가진 아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장기수 같이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좋은 세상 만들어 보려는 애씀, 어려운 교회에 부임하여 교회 건축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딸네 모습을 죽 지켜보셨다. 그러시던 중에 정말 감사하게도 아빠는 하나님을 믿게 되셨다. 더불어 잃었던 아빠와 딸의 관계도 다시 회복되었다.

이젠 더 이상 아빠와 딸 사이에 걸릴 것이 없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빠는 다시 얻은 딸과 또 멀어지게 되었다. 출국 날짜를 받아놓고 아빠에게 낚시를 가자고 했다. 1월 한겨울, 얼음 낚시였다. 강화 교동도 고구리 저수지로 낚시를 갔다. 저수지는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아빠와 나 둘뿐이었지만 이번엔 아빠와 엄마, 그리고 딸과 사위와 손자들이 함께 간 낚시였다. 

아빠는 얼음 낚시에 필요한 도구들을 꺼내와 손자들에게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주셨다. 엄청 추워서 얼음 위에 서 있기조차 어려웠다. 난 얼음 위와 땅 위를 왔다 갔다 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아빠는 손자들이 얼음 구멍에 낚싯줄을 담그고 놀도록 도와주셨고 얼음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으셨다. 아빠는 집에 돌아오도록 말도 없으셨고 웃지도 않으셨다.

미국 집에는 두 번 다녀가셨다. 이곳에 오시면 함께 낚시도 가자고 했었는데 그런 여유가 잘 생기지 않았다. 같이 낚시할 날이 다시 있을 지 모르겠다.

지난 주 북극에서 몰려온 한파가 이곳 미국 동남부까지 이르러 무척 추웠다. 좀처럼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곳인데 영하 7.7 ℃(18℉)까지 내려갔었다. 눈은 오지 않았지만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교회에 갔다가 설핏 옷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문득 온통 얼어버린 고구리 저수지에서 맞았던 바람 같았다. 아빠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