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1/20/2024

인생의 지도




남편에게 형같은 분들이 있다. 그분들은 대체로 소신이 분명하다. 그들은 소신대로 살아가기에 삶을 글로 표현해도 잘 읽히거니와 글 쓰는 솜씨도 좋으시다. 남편은 그분들 글이 지면에 실리면 꼭 찾아서 읽곤 한다.  그들 가운데 S 목사님의 책 소개 글을 얼마전에 읽게 되었나 보다. 글에서 소개하는 책은 최종수 목사님이 쓰신 묵상집 <버섯처럼>이었다. 

최종수 목사님은 남편과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는 분이다. 장기수를 후원하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하 고난 함께)에서였다. 남편이 고난 함께에서 실무자로 일할 때였다. 최목사님은 미국에서 고난 함께 모임을 만들어 소식지도 만들고 후원금도 보내주셨다. 최목사님이 한국에도 방문하셔서 잠깐 얼굴을 뵈었으나 친분을 쌓지는 못했다. 두루두루 오래된 인연들이 눈에 띄자 남편은 마음이 끌렸나 보다.

연세가 팔십 중반이신 최목사님은 몇십 년 전부터 버섯에 깊은 애정을 가져오셨다. 버섯을 두루 연구하시고, 현장에서 버섯을 찾아다니시고, 그래서 그에게 쌓인 지식과 경험을 버섯 애호가들과 널리 나누고 계신다. 최목사님은 연세가 많아지시면서 그의 버섯 사랑을 이어갈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후배들에게 비추신 적이 있단다. 남편은 버섯이 사람에게 이로울 뿐만 아니라 생태계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고는 최목사님을 직접 만나 뵙길 원했다.

나도 버섯을 먹을 줄만 알았지 버섯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몽고메리 글쓰기 모임의 지인들은 내가 버섯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생긴 걸 듣자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환상의 버섯(Fantastic Fungi)'을 소개했다. 균류인 버섯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에 존재하면서 식물에 탄소를 공급하고 죽은 나무나 동물을 분해 흙으로 돌려보내는 등 생태계에 꼭 필요한 역할을 한다. 버섯은 오랜 시간 균사 형태로 있다가 식물로 따지면 꽃에 해당하는 자실체를 만든다. 이 자실체가 우리 눈에 보이는 버섯이다. 

나는 무엇보다 균사가 땅속에 널리 퍼져 있고 균사끼리 전기적 충격으로 소통한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영상이 보여주는 지하의 균사 세계는 마치 영화 '아바타'에서 본 장면같았다. 외계 위성 판도라에 사는 나비족이 촉수처럼 생긴 것으로 동물이나 식물과 서로 연결한다. 특히 영혼의 나무가 빛을 내면서 나비족의 조상 에이와와 연결하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어떤 버섯 연구가들은 지하에 자리잡은 균사의 지도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탄소 순환이나 비옥한 토양을 위해 버섯을 보전하려는 노력이란다.

최목사님은 메릴랜드주와 펜실베이니아주가 맞닿은 애팔래치안 산맥에 가까운 마을에 사신다. 우리 식구는 최목사님 댁에서 이틀 밤을 보냈다. 최목사님은 연세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정정하셨다. 첫날 저녁부터 최목사님은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첫날 밤 목사님과의 대화 상대는 남편이었다. 둘째 날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목사님 이야기를 바쁘게 들을 수 있었다. 목사님의 목회 여정, 독특한 이야기를 가진 버섯들, 그리고 가족 이야기. 목사님께서 관심 갖는 것들은 얼마나 깊게 연구를 하시는지 학자적인 열정이 흘러넘쳤다.

목사님은 12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는 버섯 채취를 안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버섯을 자연 속에서 직접 보는 기회 대신 게티즈버그 국립묘지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많았는데 목사님은 버섯을 알려면 나무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목사님과 가까이 살면 버섯이나 나무에 대해 많이 배울 것 같았다. 목사님의 버섯 후계자가 되려면 사는 곳이나 재정자립, 연구시간 등 큰 결단이 필요해 보였다.

최목사님 부부와 버섯이라는 매개체로 만나서 버섯 지도처럼 우리 인생의 지도가 확장된 기분이다. 고난 함께, 목회, 그리고 버섯까지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그곳이든 이곳이든 반가이 맞아줄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곳곳에 소중한 사람이 기록된 인생의 지도를 마음에 품으니 든든하다.

목사님댁을 떠날 때부터 비가 내렸다.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와 함께 달리는 애팔래치안 산맥도 보슬비에 젖고 있었다. 빽빽한 구름이 낮게 내려와 산에 말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 숲속 나무 사이사이에 자욱한 안개는 마치 숲의 정화 의식을 은밀하게 치르는 것 같았다. 산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안개 기둥은 구름에 가닿으려 애쓴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6/04/2018

동생을 그리워하는 산이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어느 골목길에서.

아들 산이는 불쑥 불쑥 동생을 떠올린다. 식사 시간에 불고기를 먹다가도 이거 윤이가 좋아하는데, 중얼거린다. 신발 가게에서는 점원에게 앞뒤 없이 내 동생은 대학교에 다니는데, 아파트에 살고 있다, 고 알려준다. 카운티 장애인부서에서 지역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인터뷰를 하러 온 담당자에게는 동생 아파트에서 같이 살고 있는 룸메이트 이름까지 말해 준다.

5월 첫 주일, 교회에서 야외예배를 드린 다음, 놀이 시간이었다. 산이도 두 팀 중 한 쪽에 들어가 게임을 같이 하고 있었다. 팀원 가운데 한 사람이 어떤 낱말을 말 없이 행동으로 표현하면 그 낱말이 무엇인지 팀의 나머지 사람들이 맞추는 게임이었다. 낱말을 설명하는 사람은 열 손가락을 반쯤 오므리고 앞으로 찍어대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뭘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재빠르게 타이거라고 크게 외쳤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 낱말을 맞춘 사람은 오! 대학교, 내 동생, 하며 신나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누가 그 낱말을 맞췄는지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산이었다. 타이거는 동생이 다니는 학교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주황색 호랑이 발자국이 그 학교의 심볼이고, 그 심볼이 새겨진 옷을 보거나 그 모양의 스티커가 붙은 자동차를 보면 여지없이 동생과 학교의 이름을 외친다. 어디서나 동생 생각이 가득하다. 다행히도 교우들은 빨리 답을 맞추어야 하는 게임 시간에 아무도 몰라도 될 정보를 제공하는 산이를 기특하게 여겨주는 듯한 표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산이에게는 동생이고, 나에게는 둘째 아들인 윤이가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언제 올 수 있는지 전화로 물어보고 있었다. 그 통화 내용을 들은 산이는 동생이 오는 날을 물어보았다. 한 번 알려주었더니 아침마다 동생 오는 날을 계속 확인했다. 그 질문을 줄이기 위해 달력에 동생 오는 날을 표시하기로 했다. 산이는 날짜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숫자 아래에 동생 이름을 적었다. 이름 옆에는 게임기라고 함께 적어두었다. 지난 번 동생이 새로 산 플레이스테이션을 가지고 왔었는데 그걸 다시 보고 싶어했다. 난 윤이에게 형이 게임기도 보고 싶어하니 가지고 오라고 귀띔해 주었다. 형이 동생 보고 싶어하는 것은 윤이도 이미 알고 있기에 긴말하지 않았다.

드디어 동생이 집에 왔다. 방학 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일 주일쯤 된다고 했다. 방학 동안 어느 학과목을 수강하는 것도 있어 집에 안 오려다가 형 때문에 왔다고 했다. 형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하지만 엄마도 저를 보고 싶어하는 줄은 아는지……

윤이는 여름강좌를 공부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바로 시작해야 했다. 두꺼운 책을 읽고 리뷰하고 토론하느라 계속 책을 붙들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책만 붙들고 씨름하는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학기 중에 정신 없이 공부만 한다며 방학 때 집에 머무르는 시간에는 컴퓨터 게임과 운동을 열심히 했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밥만 먹고 나면 소파에 뒹굴뒹굴 대며 책만 들여다 보았다. 산이는 윤이 옆을 지나가며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한마디씩 던졌다.

싫을지 말지…… 좋을 지 말지……”
윤아, 나 형!”

동생 옆을 지나가면서 손을 꼭 잡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형이 그러거나 말거나 윤이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난 그쯤에서 눈치를 챘다.

윤아, 형이 너 게임 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나 봐.”
나 바빠.”
좀 쉬어. 게임도 하고.”

, ! 언제는 게임을 너무 해서 은근 걱정인 적도 있었는데 게임을 좀 하라고 종용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우스웠다.

산이에게는 엑스박스라는 게임기가 있다. 내가 일했던 사무실에서 함께 있었던 한 청년이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산이에게 주고 간 것이다. 산이가 게임할 때 얼핏 보니까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게임과 현실을 구별할 줄 알고, 복잡한 게임 규칙과 게임을 풀어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걸 보고 허용하기로 했다. 산이는 컴퓨터나 아이패드를 사용하여 자신의 관심거리들을 잘 찾아낸다. 자기가 좋아하는 드럼 연주를 위해 유튜브에서 필요한 동영상을 찾아 배우기도 하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즐기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한다. 그러니 동생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게임기에도 관심이 많았고, 동생이 게임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 했다.

오늘은 금요일이야, 윤아!”
그래서?” 

산이는 동생이 금요일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말한 것이다. 일 주일 동안 윤이의 게임기는 가방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윤이 녀석은 형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면서도 얄밉게 대답을 했다.

 금요일에 집에 간대.”

동생이 자기의 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한 번 더 말해주는 형. 하지만 더 이상 동생의 대답이 없자 나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엄마, 윤이 게임기 안 한대.”
나쁜 놈!”

난 할 말이 없었다. 윤이는 절대 게임을 안 할 거라고 나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게 뭔 청개구리 심보인지 모르겠다. 산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 욕을 해주는 수 밖에.

어떻게 해?”
“……”
윤이 게임기 사고 싶다.”

동생을 욕해주면 산이의 마음이 풀리려나 했더니 헛다리를 짚었다. 동생을 욕한다고 좋아할 산이가 아니었다. 산이가 나름 생각해 온 해결책이라니, 놀랍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이런 재미난 놈!’

산이의 맹랑한 생각에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얼른 집어 삼키고 못 들은 척했다. 그 말에 장단을 맞춰주면 새로운 게임기에 대한 긍정적인 대꾸로 알아들을까 봐 지레 짐작한 것이었다.

뒤뜰에 사는 초록도마뱀이 요즘 매일 눈에 띈다. 그 놈이 그 놈인지 알 수 없으나 고추나무 받침대에 붙어 있기도 하고, 저녁 식사 시간에 창문에 달라붙어 허연 배때기를 보여주며 눈길을 끌기도 한다. 우리 부부는 그 초록 도마뱀을 심드렁하게 바라볼 뿐인데 산이는 사진 찍어서 윤이에게 보내주라고 한다. 어떻게 그 순간에 동생이 생각나는지 신기하다. 이것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