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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2026

프로젝트 헤일메리



나는 영화나 드라마 보기를 좋아한다. 그 중 추리, 액션, 공상과학 장르에 특히 흥미를 갖는다. 올해 봄부터 공상과학 어드벤처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재미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앤디 위어가 쓴 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원작이고, 그 작가가 「마션」도 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션’은 영화로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어서 ‘프로젝트 헤일메리’도 기대가 되었다.

한편, 인터스텔라나 인셉션 같은 영화를 재미있게 보기는 했는데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왠지 천체물리학이나 인지과학 분야의 지식이 있었다면 영화를 더 즐겼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순서를 바꿔 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먼저 읽기로.

앤디 위어는 컴퓨터 공학도,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가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책으로 만난 위어의 작품은 과학적, 물리적 개연성이 뛰어나서 이야기가 사실처럼 느껴졌다. 또한 내 속도로 이야기를 이해할 시간을 얻는 장점도 있었다. 이 책에서 감명 깊었던 두 장면을 나누고 싶다. 앞으로 이 소설을 읽을 독자는 눈을 반쯤만 뜨고 읽어 주길.

하나는, 외계인과 주인공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긴 터널에서 만나는 장면이다. 외계인은 그들의 기술로 두 우주선 사이에 긴 터널을 만든다. 긴 터널에는 벽을 두어 그레이스와 외계인에게 맞는 환경을 조성한다. 외계인이 먼저, 다음은 그레이스가 반대편에서 벽을 두드린다. “똑, 똑, 똑.” 이 세 번의 노크가 이렇게 예의 바르고 배려가 느껴지는 소리일 줄이야. 그들의 노크 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공명했다. 지구인과 외계인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조우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레이스와 외계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를 알아본 것 같다. 의심보다는 탐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외계인의 우주선은 헤일메리호를 발견하고 아주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다. 그레이스가 신호를 보내자 외계인도 같은 패턴으로 신호를 보낸다. 두 우주선은 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서로를 바라본다.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이다. 외계인은 어느 별에서 왔는지 가느다란 줄과 구체로 만든 모형을 원통에 담아 그레이스에게 띄운다. 마치 자기 소개를 담은 편지를 보는 듯했다. 그레이스는 외계인의 모습이 바위투성이 같다며 ‘로키’로 부른다.

인상 깊었던 다른 하나는, 문제를 해결하고 지구로 귀환하던 그레이스가 로키에게 닥친 문제를 깨닫고 보여준 선택이다. 그레이스와 로키는 외계의 미생물인 아스트로파지에 감염된 각자의 항성계를 구할 해결책을 찾기 위해 우주에 왔다. 결국 둘은 아스트로파지의 포식자 타우메바를 찾아낸다.

그들은 아쉬운 이별을 하고 각자 별로 돌아가던 중 그레이스는 타우메바가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레이스는 타우메바를 담을 상자를 다시 만든다. 그 순간, 그레이스는 로키에게도 자기와 똑같은 문제가 발생했음을 인지한다. 더구나 로키에게는 그 문제를 해결할 재료가 없다. 로키는 우주 어딘가에 멈춰선 채 그의 별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레이스는 소형 우주선에 타우메바를 실어 지구로 보낸다. 그런 다음 식량이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걸 알면서도 로키와 외계인 종족을 구하러 헤일메리호를 돌린다. “가고 있어, 친구. 기다려…” 그레이스의 선택을 읽으며 마음이 먹먹했다. 로키의 표현대로 내 얼굴에서 물이 샜다.

나는 뉴올리언스 한국학교에서 초급과 중급 사이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친다. 수업 중에 외계인 얘기가 나왔다. 한 녀석이 외계인은 무섭다고 그랬다. 외계인의 입이 징그럽다며 입을 오물오물 움직인다. 녀석이 외계인을 흉내내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사실 나도 입이 징그러운 외계인은 무섭다. 게다가 사람을 죄다 죽이려 드는 외계인은 상상도 하기 싫다. 지구가 좋다면 부탁을 해도 좋을 텐데 말이다. 집단 이기심은 참으로 쓸모가 없다.

그런데 한 아이가 안 무서운 외계인도 있다고 말했다. “로키!” 겁 많은 아이가 그렇게 말하니 의외였다. 여름방학 동안 한국을 다녀온 아이는 비행기에서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았다고 그랬다. 마침 나도 책을 읽고 감동이 남아있던 터라 무엇이 기억에 남았느냐고 물었다. “서로 도와주는 거”, 아이가 대답했다. 나도 답했다. 마음속으로. ‘서로의 일상을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거.’ 그리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거.’


*이 글은 당당뉴스에도 실렸습니다.

10/21/2023

바람이 분다




영화 '더 이퀄라이저 3(The Equalizer 3)'가 최근에 개봉되었다. 그 이전 시리즈에서 보았던 주인공 로버트 맥콜 역을 맡은 덴젤 워싱턴의 차가운 듯 따듯한 연기와 액션 영화라는 장르는 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이탈리아 시골 농장의 평화로움과 거기서 습격당한 부하들이 죽어 널브러진 사이를 걸어가는 보스의 긴장감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짧은 대화가 있다. 영화 초반에 총상 입은 맥콜을 낯선 의사가 정성껏 수술해준다. 수술을 마친 의사는 맥콜에게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나쁜 사람인가?, 질문한다. 맥콜은 “모르겠다”, 고 대답한다. 

맥콜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자 이번엔 맥콜이 의사에게 나 어떤 사람 같아요?, 묻는다. 총에 맞은 사람을 보고 구급차도, 경찰도 안 부르고 상처에서 회복하도록 긴 시간을 들여 돌봐준 이유를 의사에게서 듣고 싶었나 보다. 더군다나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맥콜 자신도 모르겠다는 의아한 대답을 받고서도 말이다. 

의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대답은 좋은 사람만 할 수 있어요.” 선과 악, 예와 아니오를 명확하게 나누어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은 지점에서 이 영화는 나에게도 어떻게 대답할지 묻는다. 

맥콜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당하는 불의한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 맥콜에게는 모든 이웃을 도울만한 능력도 없다. 생선가게 아저씨가 마피아에게 두들겨 맞고 아저씨네 집에 누군가 불을 질러도 맥콜은 지켜볼 뿐이다. 맥콜은 자신의 체력을 키우면서 미국 정보기관에 마피아에 대한 정보를 흘려 도움을 받는 정도다. 

맥콜이 머무는 동네는 이탈리아 작은 어촌이고 마을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고, 소박하고, 우애가 깊다. 그들은 미국인 맥콜을 기꺼이 동네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맥콜은 마피아가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아무렇지 않게 악을 행하자 그제야 이퀄라이저로서 악당들을 척결하기 시작한다. 

자연 속에 음과 양은 언제나 존재한다. 음양은 한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다시 균형을 잡아간다. 맥콜은 물론이고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의 삶에서도 이런 균형을 찾아볼 수 있다. 계절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무더운 여름이 길게 느껴지는 몽고메리 날씨지만 한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서늘한 기온은 여름에 흘린 땀을 씻어주고 성실한 수고의 결실을 가져온다. 

아침이면 비슷한 시간에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동쪽을 향하여 도로를 달린다. 가을이 오면 그 시간대에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장관을 자주 목격한다. 오염이 적은 하늘이라 그런지 이곳이 정말 태양하고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태양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보인다. 몽실몽실한 구름이 낀 날에 맞이하는 일출도 얼마나 당찬지 모른다. 태양은 구름 테두리를 맑게 빛나는 금빛으로 장식한 구름옷으로 차려입고 위엄 있게 등장한다. 또 온 세상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은 언제 봐도 벅차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이 설레는 것은 변화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다만 올가을에는 일상에 큰 변화가 있고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잘 몰라 약간의 두려움이 있다. 기대와 두려움으로 두 눈을 꼬옥 감는다.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평화로운 바람이 흘러나온다. 그 신선한 바람은 나를 감싸 안고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도록 밀어준다. 

영화 속 맥콜처럼 나 역시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하나님의 큰 계획 가운데 내 삶이 들어 있다는 것만은 안다. 불현듯 가수 조용필이 부른 '바람의 노래'가 입속에서 맴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 스쳐 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 나는 이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8/06/2018

13년의 간격을 이어주는 추억


 

“엄마!!!”

누가 부른 듯하여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면서 고개를 들었다. 둘째 아들 윤이의 입 모양이 ‘마~’를 아직 끝내지 못해서 둥글게 벌어져 있었다. 우리 집 다른 두 사내의 눈길도 나를 향해 모아져 있었다. 다 늦은 저녁에 뭐 그리 애타게 엄마를 찾아댈 일이 있냐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들을 죽 둘러 보았다.

“내일 인크레더블 투(2) 보러 가자.”
“싫어.”

요 몇 달 동안 영화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그러니 보러 가고 싶은 것도 있을 리 없다. 그렇더라도 너무 매정하게 대답을 했나 보다.

“아빠하고 같이 가.”

형 산이랑은 당연히 같이 가는 거니까, 엄마 대신 아빠를 끼워 넣는 것이 적당했다.

“아빠가 싫대!”

영화 구경에 대한 내 의사보다 아빠의 대답이 벌써 있었던 모양이다. 이어폰을 끼고 대중매체의 충실한 수신자 역할을 담당하느라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그럼 형이랑 둘이 가라, 고 성의 없는 두 번째 제안을 했다. 윤이는 무척 실망스러운지 두툼한 아랫입술이 비죽이 내밀어졌다. 다 큰 놈이 부모랑 영화 보러 가자고 하질 않나, 싫다니까 서운해하다니 별일이다 싶었다. 이번엔 거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극장 입장료를 내주겠다며 달랬다. 그랬더니 관두란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세 번째 제안은 대학 마지막 학년을 남겨 두고 있는 청년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린 것 같았다.

“내 기억에는 처음으로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 게 ‘인크레더블’이야. 인크레더블 투가 개봉한 지는 꽤 됐지만 그냥 같이 가서 볼려구 그랬더니….”

윤이는 주절주절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아빠나 엄마의 결정이 바뀔 것 같지 않다고 짐작한 듯이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지간하면 아이들이 보고자 하는 영화의 내용이 궁금해서라도-그래야 얘기 거리도 더 생길 테니- 같이 가겠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럴 맘이 통 생기질 않아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윤이가 며칠 집에 머무르는 동안 가만 보니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어깨가 더 넓어졌다. 애틀랜타한인교회 여름캠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중고등부 수련회에서 카운슬러를 하고 오더니 생각이 깊어진 것도 같다.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슬쩍 엿보였다. 집에 온 첫 날에는 이번 여름에 경험한 것들을 세 시간 넘게 꼼짝 않고 풀어놓았다. 성실한 교회 오빠의 냄새가 폴폴 났다. 집에서는 아직 어린 애 같이 스스로 알아서 하지 않으려 하고 툴툴대는 말투도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 녀석이 영화 보자고 제안하기 전 날에는 책장 앞에서 누워 뒹굴뒹굴 하다가 책장 맨 아래칸에 있는 폴더를 하나씩 꺼내 들쳐본 것을 알고 있다. 애기 적부터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거기서 영화 ‘인크레더블’ 홍보 전단지와 전단지에 쓰여 있는 2005년 1월이라는 날짜를 발견하고는 옛날 추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때도 엄마랑 같이 가서 봤다고 했다. 윤이가 나중에 얘기해주었다.

다음 날 새벽 기도가 끝나고 남편과 함께 교회 주차장을 걸으며 영화관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얼른 그러라고 답했다. 남편은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신앙의 원칙을 깨뜨리는 일이 아니라면 뭐든 하라고 격려한다. 그 원칙은 분명해서 영역이 그다지 넓지는 않다. 내가 하려는 대부분의 것들을 하도록 부추기기까지 하는 편이다. 그래서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다.

어쨌든 아침 식사를 같이 하자고 아이들을 깨웠다. 잠 자리에 있던 아이들은 뭔 일인지 몰라 눈을 뜨지 않았다. 이불을 더 끌어당겨 얼굴을 덮길래 이번엔 내가 주절댔다.

“아들, 엄마도 영화 보러 갈 거야. 영화비도 줄일 겸 오전 꺼 보면 어때? 점심은 아빠랑 같이 밖에서 먹자! 우리가 안 가봤던 식당 트라이(try) 해보자고 했잖아. 아침 먹게 빨리 일어나~.”

내가 식탁에 이르기도 전에 뒤따라 나오는 아들들. 이럴 땐 이십 대 청년이 아니라 애기들이다. 두 아들은 아침에 잠을 깨울 때 나를 성가시게 한 적이 없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일어나라’ 한 마디만 하면 되었다. 산이가 씻고 나갈 준비하는데 느릿느릿 해서 그렇지 잠투정은 도통 없다. 고맙게 여긴다.

우리는 편안하고 여유롭게 ‘인크레더블 투’를 관람했다. 평점이 꽤 높은 영화인데 앞부분은 지루했다. 다만 히어로도 여성이고 악당도 여성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산이는 재미있다며 이 영화 DVD를 사고 싶다고 했다. 윤이는 추억 쌓기 한 거지, 라고 애늙은이 같이 말했다. 윤이 말처럼 영화 하나로 한국과 미국에서, 13년의 간격을 이어주는 추억이 생겼다.

네 식구가 다 모인 점심 시간도 즐거웠다. 집 근처 쇼핑센터 초입에 있는 퓨전식당인데 콜럼비아에 8년째 살고 있으면서 우리 세 사나이들은 처음 가 보았다. 난 전에 한국학교 선생님들과 두 번 간 적이 있어서 오늘의 식당으로 추천한 것이었다. 영화를 같이 보지 않은 남편은 따로 식당을 찾아왔다. 식당은 자주 다니는 길 가에 있다. 남편은 운전해 오면서 식당 주변이 이렇게 좋았나, 새삼 느꼈다고 했다. 남편은 맛의 기준이 하도 높아서 비~싼 궁중요리를 먹으면 모를까 맛난 추억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느낌의 장소가 한 곳 더해진 것 같긴 하다.

요즘 비가 자주 와서 그런지 날이 맑을 때 나온 햇빛은 유난히 깨끗하고 반짝거린다. 극장 앞도 식당 주변도 생기 넘치는 빛들로 가득한 한 나절이었다.




1/26/2015

영화 “로맨틱 레시피(The Hundred-Foot Journey)”




감기에 걸려 고생을 하던 남편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로맨틱 레시피(The Hundred-Foot Journey)”라는 영화였다. 한글 제목만 보고서는 남편의 마음이 읽혀졌다. 기침을 하면서도 감기 끄트머리라고 거듭 강조를 하더니 그날 밤은 아내의 품이 그리운 거였다. 그렇다고 재미없는 영화를 억지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은 영화에 대해 반신반의 하는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스티븐 스필버그와 오프라 윈프리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라는 정보를 슬쩍 흘렸다. 남편이 보자고 제안하는 영화가 언제나 재미난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들 대부분은 남편이 소개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특이하고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드는데 뛰어난 두 사람이 제작자들이라고 하니 두루두루 믿고 보자는 심정이 되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인도 음악이 흘러 나왔다. 뭔가 신비스러운 영상이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목이 나오는데 한글 제목과는 전혀 달랐다. The Hundred-Foot Journey. 백 걸음 여행이라는 제목에서는 짧은 거리 안에서 여행이라고 표현할만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보다 짐작해 보았다. 제목이 심오하다는 생각도 잠깐 했다. 원제와 한글 제목의 뜻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 두 제목을 붙인 각각의 이유를 알 듯도 했다.




The Hundred-Foot Journey

인도 뭄바이에서 하산 가족은 음식점을 운영했다. 누군가 정치적인 이유로 하산네 음식점에 불을 지른다.이 불로 요리사인 하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고 그의 가족은 고국을 떠난다. 어머니가 하시던 영혼이 있는 요리를 하기 위해 정착할 나라를 찾던 중 프랑스에 머물게 된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프랑스 시골 마을로 이민을 오게 된 것이다.

인도 문명과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하산의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인도 음식점을 열기로 결심한다. 아버지는 이전에 레스토랑으로 사용했던 곳을 찾아낸다. 하지만 백 걸음 앞에는 유명한 레스토랑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인도 음식점과 프랑스 음식점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 음식점을 운영하는 마담 말로리는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음식 재료를 먼저 차지한다든지 이런 저런 이유로 민원을 넣는다. 어느 날 밤, 말로리 음식점에서 일하는 셰프가 하산네 음식점에 불을 지른다. 인도에서의 불은 하산네가 인도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면 프랑스에서의 불은 그 마을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말로리 부인은 불을 지른 셰프를 해고하고 하산을 요리사로 데리고 온다. 말로리는 하산에게 엄청난 요리 실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음식점 간의 전쟁은 끝이 나고 하산은 백 걸음의 여행을 시작한다.

백 걸음이면 길 하나 건너는 길이인가 보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것뿐 아니라 낯설고 새로운 곳을 보고 싶고, 알고 싶어 찾아 떠나는 것이리라.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로의 여행, 말 한마디 건넨 적 없는 이웃집으로의 여행, 자기만의 공간에서 가족 모두를 만날 수 있는 거실로의 여행, 차가운 머리에서 따뜻한 마음으로의 여행…… 마음만 먹으면 이해와 화해 속으로 날마다 여행을 떠나는 다채로운 삶을 살 수도 있겠구나 싶다.




로맨틱 레시피

하산은 말로리 음식점에서 요리 실력을 인정받고 파리로 진출하게 된다. 파리에서도 그의 천재성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스타 셰프가 된다. 하산은 프랑스에서 점점 더 유명해지지만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공허해 보인다.

말로리 음식점에서 일하는 요리사 마거리트는 하산의 마음에 담긴 연인이다. 하산은 마거리트에게 그물버섯 라비올리 레시피에 대해 묻는 메시지를 보낸다. “양파를 오일로 구웠나요 버터로 구웠나요? 당신과 함께 만들었던 그 맛이 안 나요.” 마거리트는 “양파를 굽는 방법보단 버섯이 더 중요해요. 그물버섯은 여기서 나는 게 최고죠” 라고 답장을 보낸다.

하산의 외로움이 더해가던 어느 날, 인도 출신 동료 요리사가 도시락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도시락에는 동료 요리사의 아내가 싸준 인도 전통 음식들로 가득했다. 음식에 사용된 향신료에 대해 묻자 고향에서 보내준 것들이라고 동료는 대답한다. 하산은 도시락의 음식을 먹으며 울음을 참지 못한다. 하산은 자신의 명성을 뒤로 하고 가족과 연인이 있는 시골 마을로 다시 내려온다.

하산은 타고난 재능으로만 만들어내는 요리가 아닌 사랑으로 만들어내는 요리를 선택한 것이다. 레스토랑이 있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들로 만드는 요리 말이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도 사랑이 담긴 요리가 마을 사람들을 화해케 하고 감동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랑은 어디에 넣어도 어울리는 지상 최고의 음식 재료인 것이 분명하다. 신경하 감독님과 사모님께서 미국 여행 중에 주일 설교도 해주시고 우리 집도 방문해주셨다.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은 김치찌개와 고추장돼지불고기였다. 거기에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함께 넣어 대접하였다. 두 분께서 맛있다, 말씀해주셔서 행복했다. 

10/06/2014

영화 “안녕, 헤이즐(The Fault in Our Stars)”을 보고






영화 “안녕 헤이즐(The Fault in Our Stars)”을 보았다. 점점 부드러워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가을을 타고 있는 남편의 권유로 보게 되었다. 제목만 봐서는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 알 수 없었다. 재미가 있든 없든 같이 영화 보자는 남편의 기분을 맞춰 주고 싶었다.

영화 시작부터 장면이 낯설지 않았다. 코에 튜브를 걸고 산소공급기를 가지고 다니는 헤이즐은 우리 교회 어느 교우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이즐은 갑상선 암이 폐까지 전이되었고 임상 실험용 약을 먹고 있는 암 말기 환자다. 곧이어 등장하는 순박한 청년 어거스터스도 골육종이라는 암에 걸려 무릎 아래 다리를 절단했고 다행히도 일 년 넘게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열 여덟 살의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암환자 모임에서 만나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은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서로에게 소개하면서 더욱 가까워진다. 헤이즐은 어거스터스에게 소개한 “거대한 아픔”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를 엄청 만나고 싶어한다.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의 이런 마음을 헤아리고는 자선 단체를 통해 여행을 갈 수 있도록 애를 쓴다.




두 사람의 몸은 불편하지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작가를 만나고 오는 여행을 하게 된다. 두 사람과 더불어 암스테르담의 풍경을 잠시나마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풋풋하고 애틋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삶과 죽음, 현재와 영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십대 청년들이다. 청춘을 누리지도 못하고 지독한 병에 걸린 그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올해 하반기에 들어 암이 발견되어 투병하고 있는 우리 교회 교우들이 있다. 육, 칠십 대에 이른 분들이지만 영화의 젊은 주인공들만큼이나 안타깝고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 집사님은 오래 전에 폐에 있던 작은 종양이 온 몸에 퍼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남아 있는 삶이 삼 개월에서 육 개월이라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교우들은 황당해 했다. 하지만 그 집사님은 자신이 왜 죽게 되는지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서 말이다. 더욱이 얼마 전부터 성경 읽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고 즐거웠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굳세지도록 준비시켜주신 거라고 고백하셨다. 집사님은 얼마 전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보고 오신 뒤로 많이 밝아지시고 항암 치료에 대해서도 고려하고 있다.

다른 한 집사님도 암 진단을 받으셨는데 치료 가능성이 많은 편에 속한단다. 혼자 사시고 기초 체력이 약하여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교우들과 이웃들의 집사님을 향한 관심과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집사님은 우리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는 오래된 교우들 가운데 한 분이다.



영화 속 헤이즐은 0과 1 사이에는 무한대의 많은 숫자가 있음을 알려준다. 0.1, 0.12, 0.112…… 우리에게 주어진 나날들이 한정된 것 같아도 그 시간 안에는 작은 무한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무한대는 곧 영원을 뜻하는 것이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누리자고 한다. 한편 작은 무한대를 포함하는 더 큰 무한대가 있음도 이야기 한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신앙의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집사님들도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한 순간 한 순간을 꼭꼭 지르밟듯이 금쪽같이 살아내고 계신다.

영화가 끝났다. 앉았던 자리를 뜨지 않고 영화의 가시지 않는 여운을 느껴보고 있었다. 우리 집 특별한 아들, 산이의 한숨 섞인 말이 들려온다.

“주여~, 마음이 아프다. 주여, 주여.
주여~, 마음이 안 좋다. 어떻게 하지?
강화 할아버지……”

산이에게는 이 영화가 지난 해 시월에 돌아가신 강화 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나 보다. 암과 싸우시던 모습을 얼마간 지켜본 기억이 옅어지지가 않은 것 같다. 곧 아버님의 첫 추도일이 다가온다. 맑고 밝은 하늘 나라에 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산이와 얘기해 보아야겠다. 산이의 아픈 마음이 조금이라도 달래지면 좋겠다.

가을은 열매로 풍성하기도 하고 생명을 다하여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뿐 아니라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될지라도 누군가에게 기억될 때 영원 속에 남게 된다. 그 기억이 희미해진다 해도 영원, 그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는다. 이왕 남겨질 흔적이라면, 그것이 사랑이면 참 좋겠다. 

8/18/2014

지나친 슬픔







1992년, 텔레비전에서 성탄 특집으로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방송한 적이 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두 아이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술이면서도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이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조용한 울음도 계속되었다. 해맑은 아이들이 수술 후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감정은 점점 짙어졌다.

수술 후 3일이 지나 쌍둥이 가운데 한 아이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쯤에서는 내 목구멍이 조여오는 아픔을 느꼈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을 쉬려고 해도 몸이 맘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목줄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얼마간 견디다가 다시 숨이 돌아와 살았다. 울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첫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다음 해에 아이가 태어났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송을 볼 때는 내 아이가 장애아일줄 꿈에도 몰랐는데 뭐가 그렇게도 슬펐는지 죽을 만큼 울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몇 달 뒤, 극장에서 영화 “서편제”를 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본 이 영화의 줄거리를 짧게 정리해 보면 이렇다. 소리꾼인 유봉은 금산댁을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유봉에게는 양딸인 송화가 있고, 금산댁에게는 아들 동호가 있다. 금산댁이 유봉의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된다. 유봉은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고 동호에게는 북 치는 것을 배우게 한다. 소리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던 시절이라 세 사람의 삶은 퍽퍽하기만 하다. 동호는 이러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유봉과 송화의 곁을 떠난다.

유봉은 소리란 한(恨)에 사무쳐야 제대로 나온다고 여기고 송화에게 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송화를 남겨두고 유봉은 세상을 뜬다. 그렇게 송화와 동호는 각자의 삶을 살다가 어느 주막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송화는 소리를 하고 동호는 북을 치게 되는데, 앞을 못 보는 송화는 북소리만으로 동호임을 짐작한다.

이 오누이가 만나 북장단에 맞춰 소리를 하는 장면에서 난 또 한번 죽는 줄 알았다. 이미 몇 달 전에 울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있기에 감정을 조절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헤어져 살던 오누이가 마주 앉아 서로를 아는 체 하지 않고 들려주는 소리와 북소리에 내 온몸이 잠기는 것 같았다. 그들의 한이 온몸을 절절히 파고 들어 절여놓는 느낌이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극장이기도 하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간 남편에게 우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소리를 내지 않고 울다가 또 목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두 번의 울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한 뒤로 슬픈 영화나 드라마 따위는 아예 보지 않기로 했다. 어찌하다 보게 되더라도 목석 같은 심정이 되어 보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요즘 동영상도 아니고 멈추어 있는 사진 한 장만 보아도 가슴이 저릿하면서 눈물이 고이는 경우가 자꾸 생긴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광화문에서 단식하고 있는 희생자 아버지의 초췌해져 가는 모습,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가다가 경찰에게 끌려 나와 실신한 희생자 어머니가 길바닥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모습, 세월호 참사로 인해 죽어간 희생자들을 기억해 달라며 십자가를 지고 900 km를 순례한 희생자 아버지들의 울먹이는 모습……

샴쌍둥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영화 서편제를 보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슬픔을 느낀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소식들을 듣고 보면서 그 이유를 이제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생명, 가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보호되고 지켜내야 하는 소중한 가치들인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그 가치들이 존중 받지 못하고 훼손될 때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내 나름의 삶의 굴곡과 장애아를 자녀로 둔 어미의 심정이 보태어져서 그런 슬픔을 느꼈나, 짐작해 본다.

아직은 나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그 울음이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오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말씀에 기대어 보아야겠다. 

2/21/2014

힘이 되는 사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버지니아 주를 향하여 내달렸다. 지난 주에 내린 눈 때문에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이곳에서 버지니아 주 북쪽에 이를 때까지 고속도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친구네 집 가까이 가서야 길가로 밀어내어 쌓아놓은 두꺼운 눈 더미를 볼 수 있었다.

자동차로 장거리 여행을 나서면 운전은 거의 남편이 맡는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남편에게 말도 걸어주고, 먹을 거리도 챙겨주고, 피곤해진 남편의 등도 두드려준다. 그리고 졸릴 때는 별 수 없이 잔다. 운전하고 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잠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남편을 두고 편안한 마음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잠을 콜콜 자는 나를 남편은 때론 얄미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남편의 태도가 달라졌다.

“피곤하면 먼저 자. 의자도 뒤로 더 젖히고.”

남편이 부드러워지고 상냥해졌다. 중년 남성의 호르몬 변화 때문이든 책이나 드라마 따위를 통해 여성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까닭이든 괜찮은 변화다. 남편은 다음 말을 잇는다.

“그리고 운전 교대하자.”
“……”

오랜 시간 여행을 하자면 으레 번갈아 가며 운전을 해야 덜 피곤하리라. 그런 당연하면서도 친절한 말을 듣고 더 푹 잘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잠이 달아나고 만다. 운전하랴 아내 챙기랴 바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런지, 자고 나서 운전을 교대하기 싫어서 그런지 모르겠다(난 운전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그저 필요에 따라 한다). 사실 둘이 번갈아 운전을 한 적은 몇 번 되지 않는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나면 남편이 다시 운전대를 잡는다. 난 그저 웃음 한 번으로 미안함을 때우고 만다.

이번 여행에서 남편은 7시간을 혼자 운전했다. 나에게 운전을 부탁하지도 않았다. 휴게소에서도 짧게 쉬었다. 저녁도 간단한 음식으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해결했다. 나도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내내 수다도 엄청 떨었다. 친구들에게 점점 가까워질수록 정신은 맑아지고 피곤한 기색을 찾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을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은 대학교 다닐 때부터 사귐이 있던 이들이다. 서로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언니나 오빠로 부르기도 한다. 어느 날 나보다 선배인 오빠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옆에 계시던 한참 선배이신 분이 “이젠 다른 사람의 아내인데 이름을 부르는 것은 좀 그렇잖아!” 하셨다. 그때는 딱히 틀린 말씀도 아닌 것 같아 어찌 불러야 할지 몰라 어색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어르신들 앞에서는 조심하면 될 터이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촌수에는 맞지 않지만 이모나 삼촌으로 부른다. 아이들도 버지니아 주에 사는 삼촌네 가는 걸 좋아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편한가 보다(이것이 정말 특별한 이유다).

첫째 아이는 이 삼촌네가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있기는 하다. 삼촌 집에 놀러 갔을 때 두어 번 방문했던 워싱턴 D.C. 때문이다. TV나 영화에서 워싱턴 D.C.가 나오면 첫째 아이는 꼭 이 도시 이름을 외치며 즐거워한다. 언젠가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 버스 드라이버 있잖아~ 이름이 뭔지 알아?”
“엄마는 모르지. 이름이 뭔데?”
“워싱턴 D.C.”

요즘엔 아이들이 학교 버스를 타지 않기에 운전하는 분의 이름을 모른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면 특수학급 학생들을 위한 버스 운전 기사도 여러 분이 계시고, 아이들이 버스에 타는지 부모의 차에 타는지 확인하는 분도 계신다. 아마도 그 분들 가운데 워싱턴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있는가 보다. 첫째 아이에게 “워싱턴”이라는 단어는 “워싱턴 D.C.”여야 맞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워싱턴 D.C.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이번 여행에서도 그 곳을 방문했다.

친구들을 만나 밥을 같이 먹으며 그 동안 지내온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누군가 얘기하면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들어주고 인정해준다. 서로 잘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이다. 또 한국과 미국을 오고 가며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또는 안타까운 마음을 쏟아 놓는다. 서로 사귀어 온 30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그나마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시간이다.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친구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나섰다. 친구들이 사는 동네는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큰 한인 사회가 있는 도시의 극장에서는 한국 영화를 상영하기도 한다. 친구들이 사는 동네를 벗어나기 전에 친구들은 이미 보았다던 한국 영화 “변호인”을 보았다. 친구들은 눈물이 났다고 했던가,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던가…… 

       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날 사람도 없건만 굳이 눈 화장을 했다. 울음이 나면 눈에 화장한 것이 번지는 것을 핑계로 참아 보려고 말이다. 안타까움에 울기보다는 연약한 사람을 사랑하고 바르게 살려는 마음을 더 굳건히 하고 싶었다.

친구들에게서 받은 공감과 위로와 격려를 잔뜩 안고, 친구들에게 달려갔던 길을 되짚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2/14/2014

영화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를 보고





얼마 전 눈이 거의 안 오는 이곳에 눈이 내려 좋아라 했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더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이 많이 쌓인 곳은 거의 20 cm(거의 8 인치)쯤 된다. 아이들도 눈이 내리기 시작한 날은 수업을 절반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 프레지던츠 데이(Presidents’ Day) 공휴일까지 합쳐 일 주일을 집에서 쉬는 방학 아닌 방학을 맞았다.

사르르 쌓이는 눈과 우박처럼 생긴 얼음 눈이 마구 섞여서 내렸다. 기상정보를 알려주는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교통사고, 정전, 학교나 공공기관 폐쇄와 같은 소란스러운 뉴스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눈 폭풍은 이 세상의 당황스러움과 시끄러움을 알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엄청난 눈과 비를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고 있다. 지구의 기후 변화뿐 아니라 뭔가 변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주, 지구, 내가 사는 곳……

오!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뒤뜰에 눈 내리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나가서 눈 속에 서 있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뒤뜰로 나가는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눈이 쌓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을 열 수 없을 만큼 눈을 쌓아 놓았다. 일기예보와 지난번 눈에 대한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눈이 쌓여도,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면 이 정도의 눈은 어느새 녹아버릴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뒤뜰로 나가는 문이 열리지 않으니(현관문을 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 집안에 갇힌 느낌이 살짝 들면서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뜻을 찾아보니 ‘고립되어 구원받을 데가 없다’ 이다. 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생각에 힘없는 웃음이 풋, 하고 나왔다. 

꼬박 이틀이 지나 눈이 그쳤다. 먹이를 찾아 나온 새들도 보인다. 담 넘어 도로에 오고 가는 자동차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인다. 요즘 달달한 음식이 땡긴다는 둘째 아이의 말도 생각나고 하여 도넛을 먹고 싶다고 남편을 꼬드겼다. 도로 위에는 눈이 얼마나 녹았는지 살펴볼 겸 나갔다 오라고. 남편은 또 첫째 아이를 달래어 함께 나갈 채비를 했다. 두 사람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도넛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손에 들려 있는 것은 DVD 두 장. DVD 자판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올 이즈 로스트(All is lost)” 였다. 눈 때문에 집 안에만 머물러야 하는 약간의 갑갑함을 해소할 요량으로 영화에 집중했다. 주인공의 나이든 모습을 보니 오래 전에 찍은 영화는 아닌 듯 했다. 레드포드가 타고 있던 요트가 바다에 떠다니던 컨테이너에 부딪히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 대사가 거의 없다. 영화 초반에 고장난 무전기가 잠시 작동을 하면서 구조 요청 하는 몇 마디 말을 들을 수 있다. 후반부에서는 마실 물이 담긴 통에 바닷물이 들어가 섞인 것을 보고 God / Fuck 라는 대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배를 만났을 때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Help를 몇 번 외치는 것을 빼고는 대사가 없다. 내 기억으로는 배경음악 조차도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영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인공의 몇 마디 말이 이 영화에 필요한 모든 대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주인공은 바다와 배에 대하여 풍부한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자기가 타고 있던 배 옆구리에 구멍이 났을 때도, 폭풍이 몰아칠 때도, 배가 침몰할 때도, 심지어 구명보트가 다 타버릴 때도 그는 침착하다.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잃어버리는 절망의 연속이다. 주인공은 이런 고립무원(이럴 때 딱 맞는 단어였다!)의 상황에서 맞서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주어진 상황에 담담하면서도 부지런히 대처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가 타고 있던 구명보트까지 다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의지를 놓은 채 자신의 생명을 바다에 맡기려 한다.

“안돼!”

영화를 보던 첫째 아이의 외침이다.

“왜 여태껏 잘 해 놓고……”

나도 너무 아쉬웠다. 영화는 그 뒤에 한 장면이 더 남아 있다.

올해 78 세가 된 로버트 레드포드의 더 함도 덜 함도 없는 깊이 있는 연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지난 해에 상영된 얼마 안 된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그 이야기 속에 우리네 인생의 단면이 들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한 발을 겨우 빼고 나면 다른 한 발이 이미 깊이 빠져들고 있는 수렁 같은 상황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떤 모습이었나. 폭풍우가 치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구멍난 배를 타고 있는 것 같은 현실을 만나면, 난 얼마나 의연하고 능숙하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 많던 눈들도 한 나절 만에 절반 넘게 녹아 내렸다. 


9/20/2013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Secret)"을 보고




애틀랜타에 살 때부터 즐겨보는 유선방송 채널이 있다. 여행 채널(TRAVEL CHANNEL)이다. 그 채널 가운데서도 세계 곳곳(미국 국내를 포함해서)을 여행하면서 볼거리, 먹을거리, 잠잘 곳 따위를 직접 체험하면서 소개해주는 쇼들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Rachel Ray의 $40 a day, Anthony Bourdain의 The Layover or No Reservations, Samantha Brown, 그리고 Andrew Zimmern의 Bizarre Foods 이다.

$40 a day는 여기 콜럼비아에서는 본 적이 없으나 애틀랜타에서는 방송 시간을 기억했다가 찾아서 보곤 했다. 이 쇼의 진행자 Rachel(요리사)은 하루에 40 달러를 가지고 세 끼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행한 지역에서 주로 유명한 식당들을 찾아 다니는데 음식값이 비싼 곳에서는 가진 돈이 적다며 코스 요리에서 음식 하나만 골라 시킬 때도 있다. 그러면 음식점 주인이나 종업원은 흔쾌히 주문을 받는 것은 물론, 자기네 대표음식을 소개해주기도 하고(비싸도 그냥 주기도 한다), 비싼 음식이면 양을 적게 주어 음식값을 적게 받기도 한다. 처음엔 저렇게 알뜰하게 여행을 할 수도 있겠구나 했다. 그러다 방송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없거나 유명한 방송인이 아니고, 평범한 동양 여인이 방문해도 저런 합리적인 호의를 받을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애틀랜타에서와는 달리 한국 방송 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미국 방송을 보는 시간은 많이 줄었다. 유선방송 요금을 내는 것이 아까울 정도니 말 다했다. 그래도 내 손에 텔레비전 리모컨이 쥐어지면 어김없이 여행 채널부터 눌러본다. 화면으로나마 미국과 세계를 경험하는 것도 즐겁다.

한국 방송 중에도 여행과 관련된 쇼들을 즐겨본다. 정글의 법칙, 아빠 어디가?, 1박2일, 한국인의 밥상, 그리고 요즘 흥미롭게 보고 있는 꽃보다 할배가 있다. 앞의 것들은 여행하면서 생존, 미션, 게임, 음식과 결합된 것이라면 꽃보다 할배는 그냥 순수한 여행 체험기다. 70 세 이상 된 4명의 연륜 있는 배우들과 젊은 배우 한 명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고, 명소를 찾아 다니고, 음식점을 찾아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은 여느 사람이 여행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다른 예능 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인위적인 미션 같은 것 없이도 그 안에는 낯선 곳에서 겪을만한 긴장과 흥분, 감동이 다 담겨있다. 그런 면에서 꽃보다 할배를 무척 재미있게 보고 있다.


요즘 꽃보다 할배는 지난 번 유럽에 이어 대만 여행기를 방송하고 있다. 101 타워, 신베이터우 온천, 단수이 해변 공원 등을 소개하고 있다.  단수이 해변에 이르러서는 강 하류인데 바다와 연결되는 곳이며, 주걸륜이 감독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이 방송의 PD는 알려준다. 바로 그때, 이 방송을 함께 보고 있던 둘째 아들 윤이가 한 마디 한다.

“아, 저기였구나!”
“너 저 영화 봤어?”
“응. 좋은 피아노 곡 찾다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나도 봤어.”

윤이는 한참 전부터 알려진 “River flows in yours”, “Flower Dance”, 일본 애니메이션 삽입곡들 중 “또 다시”나 “인생의 회전목마” 같은 곡들을 잠깐씩 피아노로 연습하기도 한다. 리듬이 감미로운 것들이기에(사춘기 아들이 좋아할 만하다) 윤이가 연주하면 듣기 좋다. 정신이 사나워 피아노를 그만 쳤으면 할 때도 아주 가끔 있지만 거의 참고 듣는다.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언제까지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윤이는 가지고 있는 피아노 곡들이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다른 곡을 찾아보곤 했었나 보다. 그러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는 영화도 보게 되고.

그 영화 재미있어?, 했더니 잔잔하고 볼만하단다. 주걸륜이 감독도 하고 주연도 맡았으며 피아노도 직접 쳤다며 주절주절 말이 길다(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주걸륜이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은 사실이며 영화에 나오는 피아노 배틀 장면에서 직접 연주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듯). 잔잔해? 지루한 것 아니야?, 물어보려다 그만두고 꽃보다 할배를 보는 중이니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다며 윤이의 입을 막아버렸다.

토요일 오후, 저녁을 먹고 나면 각자 방으로 흩어진다. 남편은 주일 설교 원고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시간이다. 그런데 윤이는 영화 보자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대고 남편은 푹신한 팔걸이 의자에 앉아 영화감상 모드를 취하고 있다. 다음 날, 그러니까 주일 설교는 우리 교회 중등부에서 설교를 해주시는 톰슨 목사님이 하시기로 되어 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톰슨 목사님은 다른 주에 있는 미연합감리교회에서 은퇴하시고 여기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살고 계신다. 우리 교회 집사님과의 인연으로 주일마다 중등부 아이들과 예배를 드리신다. 그 목사님 덕분에 남편은 여유 있는 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게 된 것이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Secret)”의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었다. 길을 따라 야자나무가 줄지어 있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고등학교가 비춰진다. 영화에서 나오는 키가 큰 야자나무와 같은 종류인 작은 야자나무(Palmetto)는 이곳 주(state)를 대표하는 나무이고 곳곳에서 볼 수 있어 눈에 익숙하다. 하지만 아직도 야자나무가 심기어진 것을 보면, 살고 있으면서도 이국적이라는 느낌이 더 많다. 대만이 여기처럼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음을 감지하며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기대가 되었다. 참고로 이 학교는 담강예술고등학교로 주걸륜이 실제로 다닌 학교라고 한다(별걸 다 알아봤다).

이 학교로 전학 온 상륜(주걸륜)은 피아노를 매개로 계륜미(샤오위)를 만나게 되고 예쁘고 상큼한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가슴 시린 사랑을 하게 된다. 세상살이에 눈이 밝기 전, 조금 어린 나이에 설레고 소화가 안 되어 얹혀 있는 느낌 같은 첫사랑을 해 본 이들은 그들이 보여주는 사랑에 살며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윤이같이 아직 사춘기에 있는 이들은 아마도 주인공들의 감정에 동화되겠지…….

사이 사이에 음악학과 친구와 상륜이 피아노 배틀을 하기도 하고, 계륜미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는 등 아름다운 연주곡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이 가는 곳, 사는 곳의 배경이 단수이 해변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평화롭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한낮의 햇볕이 점점 부드러워져 가는 이 가을과 잘 어울리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꽃보다 할배에서 이 영화를 몇 줄 자막으로 소개를 한다. 화면이 빨리지나 가는 바람에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오히려 영화의 재미를 위해서 잘된 일이었다. 여기 그 자막을 그대로 옮겨보련다. 영화를 볼 마음이 있거든 눈을 게슴츠레 하게 뜨고 획 지나치듯 읽으면 좋겠다. 그들의 사랑이 애절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될만한 단어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주걸륜이 감독 및 주연을 직접 맡은 판타지 로맨스 영화.”
“흥미로운 음악과 풋풋한 사랑, 그리고 시간 여행을 한데 묶어 호평을 받았다.”(꽃보다 할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장면들과 사건들의 앞뒤를 맞추어보거나 영화에서 다 말하지 못한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윤이와 함께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보여지는 장면에만 집중하고 있던 50대를 바라보는 나와는 달리 그 상상력이 놀랍고 넓었다.

신문을 보다가 영어 한 문장을 발견했다.

“When you know that you love her, you’ll know what to do.”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된다, 음! 이 말은 남자 주인공 상륜의 용감한 선택을 표현해주는 말 같아 적어두었었다. 그리고 ‘her’를 ‘Jesus’로 살짝 바꾸어 묵상의 소재로 삼아보기도 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