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연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연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8/14/2025

빛과 멜로디




싱그러운 나뭇잎이 초록빛을 맘껏 발산하는 더운 날이었다. 미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미미는 나에게 병문안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H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쳤다. H는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었다.

미미는 동네 어르신들과 정답게 지낸다. 동네를 걷다가 문 앞에 앉아 계신 할머니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안부를 묻는다. 할머니와의 대화가 어떤 내용일지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어 익숙하지만, 미미는 늘 처음 듣는 것처럼 귀 기울인다. 또 미미에게는 적극적인 다정함이 있다. 옆집 할아버지의 기운이 부쩍 약해진 것을 느끼고는 정성껏 호박죽을 쑤어 가져다 드렸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잊지 않고 찾아 뵈었다. 또 다른 이웃집에 평소보다 많은 차가 주차된 날, 그 풍경이 뜻하는 바를 알아채고는 이웃 할머니에게 서둘러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이번엔 미미의 다정함이 H를 향했다. 미미는 H의 지병과 수술한 부위를 고려하여 단백질이 많은 콩국물을 만들었다. 병실 분위기를 밝힐 오렌지 빛의 꽃 화분도 준비했다. 그런데 병원에 혼자 가기가 낯설다며 나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H를 찾아가 보려는 마음이 있던 터라 미미의 제안을 선뜻 받았다. 나는 뒤뜰에서 아직 살이 덜 오른 연두색 아삭이 고추 여남은 개를 급하게 거두었다. 아삭이 고추가 맵지 않으니 밍밍한 병원 식사를 할 때 H의 입맛을 돋우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H는 꽤 큰 수술을 받았는데도 밝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치료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병실 창가에는 다채로운 꽃다발들이 여러 화병에 꽂혀 죽 늘어서 있었다. 오랜 동안 H는 지역사회 다민족 연대를 위해 헌신해 왔다. H를 문병 온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우리는 병실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잠시나마 수다로 채웠다. 잡다한 얘기 가운데 H의 작은 아들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아들은 사진과 영상을 다루는 작가이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현지인에게 그의 전문 분야를 가르치고 있다. 현지인들이 기술을 습득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그 엄마의 그 아들이다.

병문안 오기 전 막 읽기를 끝낸 소설 <빛과 멜로디>가 문득 떠올랐다. 주인공 권은은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이다. 나는 권은과 H의 아들 이야기가 섞이면서 어느 이야기가 허구이고 실제인지 잠시 헷갈렸다. <빛과 멜로디>는 2024년 발간되었고, 지금도 전쟁 중인 시리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가자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은은 어둡고 살기 가득한 전쟁터를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전쟁터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드러내고 그 생명을 사진으로 보듬는다. 그에게 사진찍기는 연민 같은 감성팔이가 아니라 삶을 이어가도록 구체적인 희망을 주는 일이다. 이런 희망을 일찍이 열두 살의 권은은 경험했다. 부모가 떠나고 홀로 남아 어둡고 차가운 방에서 죽기를 바라던 때였다. 그런 권은에게 같은 반 승준은 필름 카메라를 건넨다. 권은은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자신을 살게 하는 빛을 발견한다. 시간이 흘러 권은 자신도 사진 작가가 되어 사람을 살리는 가장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맘 먹는다.

<빛과 멜로디>는 난민이 겪는 고난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다. 이 책을 쓴 조해진 작가의 원작 <로기완을 보았다(2011)>가 작년에 영화 ‘로기완’으로 공개되었다. 이 영화는 탈북민 로기완이 벨기에에서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처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는 영화라서 기억에 남아 있었다. 원작이 있는 영화인줄 <빛과 멜로디>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차갑고 어두운 곳에 놓인 사람에게 공감하고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도록 돕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하게 만든다. 권은에게는 카메라가 사랑이었고 빛이었다. 권은은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실의에 빠진 어느 난민을 살아가도록 빛으로 이끈다. 그 난민은 또 다른 난민과 그 빛을 나눈다. 오늘 나는 미미, H와 그의 아들에게서 빛의 조각들을 본다. 빛의 조각들은 어우러져 멜로디가 되고 다시 사람들 속으로 퍼져 나간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6/07/2025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의 삶은 그 자체로 인터내셔널이다. 앞집에 사는 룻과 쟌은 각각 아일랜드와 독일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다. 세탁소에서 일하는 시슬은 스페인어가 모국어이다. 한인 이민자의 정체성을 가진 내게 김기태 작가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그 제목이 눈에 띄었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 상황에 안테나를 높이 세워도, 한국은 이곳에서 참 멀다. 그런 내게 김기태의 소설은 사회 여러 분야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케이팝의 팬덤 문화, 외국인, 노동과 사랑, 교육, 노인… 한국에서 다른 나라 출신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이야기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맘에 다가왔다.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먹었던 아이스크림 ‘보석바’가 생각났다. 그의 담담한 문장 사이에서 보석바에 박힌 얼음 보석이 자꾸 반짝거려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는 9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 두 개를 소개해 보련다. ‘세상의 모든 바다’(세모바)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케이팝 그룹이다. 이 그룹을 “블랙핑크 만큼 매혹적일 뿐 아니라 U2처럼 사회적인 그룹”이라고 소개한다. 세모바는 여러 대륙 출신과 인종으로 구성하고 있다. 멤버들은 인권과 환경 보전을 위해 애쓰며, 그들의 실제 이야기가 가사로 쓰인다. 이런 케이팝 그룹이라면 나도 그들의 팬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세상의 모든 바다는 이어져 있다는 세모바의 세계관은 작가가 이 책 전체에서 말하고 싶은 주제 같다. 그리고 작가는 가까이 있는 사람과 일상의 소중함을 기발하고, 세련되고, 담담하게 표현한다. 아니, 외친다.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는 권진주와 김니콜라이가 나온다. 진주는 내국인이고 니콜라이는 고려인 4세로 외국인이다. 두 사람은 중학교 때 학교에 내야 할 돈을 내지 않아 교무실로 불려갔던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스물다섯 살이 되어 우연히 마주친다. 진주는 마트에서 일하고, 니콜라이는 자동차 하청업체에서 일한다. 두 사람은 동네에 아는 사람 한 명쯤 있는 것이 좋아 가끔 만난다. “자아실현 같은 건 모르겠지만 견딜만한 일을 하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다가도 불안정한 삶을 걱정하는 젊은이들이다.

두 사람은 큰 돈을 벌지 못한다. 둘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밈을 보다가 알게 된 인터내셔널가를 들으면서 이삿짐을 푼다. 이 노래가 노동자 해방과 사회 평등의 내용을 담고 있음을 나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둘은 ‘친한 사이’로 관계를 규정한다. 이 소설에서 두 사람을 엮어 ‘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각각의 이름이나 두 사람이라는 표현은 독립적인 개인을 존중하면서 그 둘의 연대를 응원하는 듯하다. 김기태 작가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공존과 연대의 방식을 참신하고 차분하게 보여준다.

인터내셔널인 나의 이야기도 덧붙여 본다. 나에겐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들이 있다. 공교육을 마치고 십일 년째 나와 붙어 살고 있다. 아들, 산이는 요즘 ‘일하고 싶다’ ‘혼자 살고 싶다’고 말한다. 산이 생각을 현실로 이루기에는 난관이 많으므로 그의 외침이 안타깝다.

하루는 산이와 함께 장보러 샘스클럽에 갔다. 금발의 수수한 여인이 다가와 산이의 나이를 물었다. 서른두 살이라고 하자 여인의 아들도 다운증후군이라고 말했다. 나이를 물은 건 말을 걸고 싶어서 그랬나 보다. 여인은 지지스 플레이하우스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셀폰으로 그 홈페이지를 찾아 보여주었다. 정보 저장을 위해 나보고 셀폰 화면을 사진으로 찍으란다.

며칠 뒤에 코스트코에서 짧은 은발의 여인이 또 산이의 나이를 물었다. 그 여인의 아들은 마흔두 살이라고 말하며 지나갔다. 다시 며칠 후, 남편과 산이가 장을 볼 때 또 다른 여인이 나타나 말을 걸었다고 한다. 세 천사가 찾아온 것일까.

GiGi’s Playhouse는 다운증후군 사람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다. 지지스 플레이하우스의 여러 프로그램에 신청서를 넣었다. 산이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나의 이메일을 열어본다. “마미, 플레이하우스에서 이메일 왔어”, 산이가 외쳤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와 당당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