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2015

마냥 좋지는 않아도 봄은 새롭다






강화에 사시는 어머님과 전화 통화를 하던 중 중부 지방에 비가 내리지 않아 봄 가뭄이 심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리조합에서 관리하는 물이 삼분의 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좀처럼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셨다. 여긴 비가 많이 와야 댜~, 라는 말씀에 물이 부족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여기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겨울이 우기라서 눈은 거의 오지 않고 비가 자주 내린다. 겨울 내내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비가 오더니, 봄이 지나가고 있는 요즘도 흐린 날이 많고 비도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 어머님네는 비가 오길 바라고 있는데 이곳은 비는 그만 오고 따뜻한 햇볕이 나서주길 기다리고 있으니 사는 처지가 참 다르다.

교인 가운데 병원에 입원한 분이 계셔서 병문안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 전날 비가 오기도 하고 기온도 떨어져서 그런지 하늘이 더없이 깨끗하고 파랬다. 높이가 낮은 건물들 덕분에 넓은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고, 솜 덩어리 같은 뭉게구름도 하늘 한가득 그림 같이 떠 있었다. 이렇게 맑고 포근한 하늘을 몇 달 만에 보는 것 같았다. 기분이 슬슬 좋아졌다. 이왕이면 자동차의 창문을 열고 봄바람도 느껴보고 싶어졌다. 창문을 반쯤 열고 잠시 달렸는데 목이 컥, 하고 막혔다.

꽃가루 때문이었다. 특히 천지에 퍼져 있는 송홧가루. 봄철 동안에는 노란 송홧가루가 건물 밖에는 어디나 날아다닌다. 그래서 꽃가루 알러지가 있는 사람들은 재채기, 콧물, 눈병, 가려움 따위로 아주 힘들어 한다. 알러지가 없던 사람들도 이곳에 사오 년 살다 보면 알러지가 생긴다고 한다. 사람이 무던한 건지 둔한 건지 나는 아직 꽃가루의 영향을 별로 받고 있지 않다. 그런데 달리는 자동차의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송홧가루에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청명한 봄하늘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데 꽃가루는 몸을 괴롭게 했다. 모든 것이 마냥 좋을 수는 없는가 보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교회에서 대청소를 했다. 교회 마당에서는 나무와 꽃들 사이에 솔잎을 깔아주었다. 남성 교우들과 아이들이 그 일을 맡아주었다. 커다란 솔잎 덩어리 80단이 교회 울타리 아래로 넓게 흩어졌다. 교회 건물 뒤편에도 솔잎이 필요한 곳이 있었는데 솔잎이 모자라 올해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전에 솔잎을 주문하던 교우가 없어 100단 정도가 필요한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교회 주변에 솔잎이 깔리고 나니 더욱 깔끔하고 넉넉해 보였다.

교회 안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던 물건들을 전부 정리하여 버리기로 했다. 방마다 사물함이나 책상 위에 무심히 쌓여 있는 물건들은 거침없이 커다랗고 까만 쓰레기 봉투로 들어갔다. 주방에 있는 그릇 수납장은 여러 사람이 일을 거들어야 했다. 주방 도구들을 죄다 끄집어내고, 수납장 바닥을 깨끗이 닦고, 꺼내 쓰기 편리하게 그릇들을 재배치 하였다. 쓰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것들은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든가 버렸다. 있는지 몰라서 사용하지 못했던 물건들을 찾아냈을 때는, 지난날 적절히 쓰여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앞으로 편리하게 사용될 것을 기대하는 눈빛을 서로 교환하기도 했다.

올해 부활절 맞이 대청소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많은 교우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에는 교회 일이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거나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대청소는 친교실 증축과 함께 여러 교우들이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구태의연한 교회에서 벗어나서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흐름이 교우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마음들이 모아져 결정된 친교실 증축이 못마땅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마냥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우들 대부분이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 뜻이 무엇일까를 묻고 또 물으며 이 새로운 변화의 흐름에 끈기 있게 동참하고자 마음 먹고 있다. 생명이고 진리이신 주님이 동행해주시길 겸손히 바라며 새로운 길을 가다 보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음을 고백하게 되리라 믿는다. 새로운 변화를 이어갈 담대한 용기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길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3/09/2015

일상 속의 페이스메이커(Pacemaker)




어느 집사님께서 심장 기능이 안 좋아져서 치료 받으시는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약물로 치료를 하다가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 페이스메이커(Pacemaker)라는 심박조율기를 심장과 연결하게 되었다. 이 조그마한 장치는 집사님의 어깨 아래 피부 속에 심겨졌다. 페이스메이커에서 나온 전선은 심장에 가 닿아 있어서 심장 박동이 정상이 되도록 자극을 주는 기계라고 했다. 이런 기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뒤로 연세 드신 어르신들 가운데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을 받는 분들이 여럿 계심도 알게 되었다. 심장이 자연스레 튼튼하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인공적으로 만든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니 고마운 일이라 여겨졌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면 페이스메이커는 이것을 감지하고 심장을 자극하게 되는데, 가만히 보면 일상 속에서도 안일하거나 게을러진 삶의 태도를 자극하는 여러 일들을 만나곤 한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이곳 한국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로 두 번째 학기를 보내고 있다. 지난 학기에 나의 반이었던 아이들과 새로 등록한 아이들을 만나 한글 낱말들을 익히고 그 낱말들을 이용하여 문장 만들기를 꾸준히 연습하고 있다.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으나 매주 숙제를 내주고 받아쓰기 하는 것은 웬만하면 거르지 않는다. 집에서 쉬고 싶은 토요일에 한국어를 배우러 나온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나름 이 궁리 저 궁리 하여 학습계획안을 작성하기는 하는데, 수업이 다 끝나고 나면 부족함을 종종 느낀다.

수업 일정에는 특별활동 시간도 있어서 만들기나 노래, 소고춤, 장구춤, 그리고 케이팝을 부르며 춤을 추는 반으로 나누어진다. 나의 반 아이들은 장구춤을 추는 반에 모두 들어가 있다. 이번 학기 특별활동에서 배운 것들은 가을에 열리는 한인축제에 나가 공연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활동 내용을 좀 더 확실히 익힐 필요가 생겼고 장구춤반은 내게 맡겨졌다. 장구춤반 아이들은 다른 선생님들과 지지난 학기부터 배워오고 있었고 난 몇 번 지켜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춤 순서를 제법 외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번 학기가 이미 시작되고 어중간하게 장구춤반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복잡하지 않은 몇 가지 동작을 반복하는 춤이기에 아이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우면 되리라 편안하게 생각했다.

장구춤반을 맡은 첫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아직 춤 순서를 다 외우지 못했어. 너희들이 하는 걸 먼저 볼게. 너희들이 좀 가르쳐 줘~.”
그 동안 관계를 쌓아온 나의 반 아이들이 대부분이니 반은 공손하게 반은 애교를 섞어 솔직한 부탁을 했다. 가수 윤도현이 부른 아리랑 노래에 맞추어 춤을 한 번 끝냈다. 내 눈에는 아이들에게 따로 가르칠 것이 없을 정도로 잘 하였다. 춤 순서를 아직 외우지 못한 사람은 나 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잘 하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이들을 두 모둠으로 갈라 서로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자고 했다. 한 모둠이 앞서 한 것처럼 잘 끝냈다. 다른 모둠이 뒤를 이어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에구, 이걸 어째! 두 번째 모둠 아이들은 춤 순서를 몰라 우왕좌왕 하면서 나를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선생인 내가 춤 순서를 지시해주길 바라는 눈길이었다. 아이들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나 역시도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아이들은 그 동안 순서를 잘 아는 다른 아이들을 보고 따라 한 것이었나 보다. 당황스러웠다.

그때 마침 지난 주까지 장구춤을 지도하던 선생님이 지나가시며 잘 돼?, 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우르르 그 선생님에게 몰려가 영어(!)로 불평을 하는 것이었다.
저 여자는 이 춤을 혼란스러워해. 엉망이야.”
순서 좀 틀리면 어때. 틀린 곳을 알았으니 다시 잘 배우면 되지!”
난 아이들이 쏟아놓는 불평을 듣다못해 호기롭게 말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을 정돈시켜 세우고 다시 한 번 음악에 맞추어 춤을 가르쳤다. 아이들에게 여유로운 듯 대꾸를 했지만 그 노래 한 곡이 끝나기까지 씁쓸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적어도 나의 반 아이들과는 친밀함을 쌓아가고 있고,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춤 한 판에 지들 선생을 그렇게 몰아세우다니…… 그러면서 순간,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던 아이들을 평가하는 내 자신을 보았다. 사실 춤 순서를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아이나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순서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불평하는 아이들은 배운지 오래 되었는데 집중하지 않아 순서를 익히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일이 자꾸 떠올랐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사람이 아이들 하는 것을 보고 배우겠다고 생각하다니 너무 안일했다. 아이들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게으른 나에게 에잇, 받아라, 하며 자극을 보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내 자신을 자책하고 싶지는 않다. 가르치는 역할을 건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따끔한 자극이 온 것일 뿐이다. 어리기만 한 아이들과 어설펐던 내가 한국학교에서 즐겁고 재미있게 서로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번 자극을 계기로 아이들에 대한 뭉뚱그린 생각이 아니라 세밀한 평가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장구춤반 선생에게 필요한 것은 춤을 잘 추는 게 우선일 것이다. 교회학교에서 율동 가르치던 실력을 오랜만에 발휘해봐야겠다.

2/23/2015

산이 곁에 있는 소리


집에 돌아오기 전 애틀랜타에서 장보는 산이. ^^


남편은 자신이 부목사로 일하던 아틀란타한인교회로 설교를 하러 갔다. 장로님들의 은퇴를 찬하하는 예배라고 들었다. 남편은 애틀랜타에 가기 두 주 전쯤 아들 산이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먼 길 오고 가는데 동행이 있으면 덜 피곤하기도 하고, 집에만 있는 아들에게 나들이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산이는 흔쾌히 가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산이가 손꼽아 기다리는 애틀랜타에 가기 일 주일 전, 내가 감기에 걸리더니 며칠 뒤에 작은 아이 윤이에게도 옮겨갔다. 산이에게는 감기에 걸리면 애틀랜타도 못 간다고 내 근처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엄마와 눈이라도 마주치려고 포옹 대신에 엄마 등에 얼굴 한번 비비고, 하이 파이브 대신에 팔을 반으로 접어 팔꿈치라도 부딪친다. 팔꿈치끼리 부딪치는 것은 산이가 가르쳐준 방법이다. 그러면서 엄마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연약할 것 같은 산이가 지독한 이번 감기를 요리조리 따돌리고 애틀랜타 가는데 성공했다.

산이가 집에 없으니 조용하다. 산이 곁에는 늘 소리가 있다. 지가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은 소리, 레고를 조립하느라 조각들 만지작거리는 소리, 찬송가 부르는 소리, 성경 읽는 소리, 그리고 중얼중얼 누군가와 얘기하는 듯한 소리……

애틀랜타 갈까? . / 그래, 가자! / 감기, 절대 안 돼. 알겠지? / . 아빠하고 나하고. / 애틀랜타한인교회 좋아. 김정호 목사님 좋아. / 그래, 가자!”

자신의 일상적인 얘기를 누군가와 미주알고주알 소곤거린다. 표정도 마치 누군가를 바라보듯 다양하게 연출된다. 그만 하라고 지시하지 않으면 한참을 그러고 있기도 한다. 자기 말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혼자라도 떠드나 싶어 안쓰럽기도 하다가, 보통 사람의 모습은 아니니 그러지 말라고 퉁을 놓기도 한다.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나의 엄마는 산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냥 놔두라고 하신다. 말하는 것이 대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이를 지켜주는 천사가 있다고 믿고 계시며 천사와 얘기하는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윌리엄 폴 영이 쓴 소설 『갈림길』을 읽고 내 엄마의 말이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읽는 동안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지 내 마음은 어떤 상태일지 그려보게 해준다. 책을 삼분의 일쯤 읽었을 때 주인공 토니의 영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캐비에게로 미끄러진다(윌리엄의 표현).

남부럽지 않은 사업가, 토니는 장애인을 사회라는 이름의 저수지에서 비생산적인 배수구 같은 존재, 오직 가족에게만 소중한 존재, 그들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가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논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용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이런 토니가 캐비에게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고 캐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캐비는 자신과 대화해주는 토니를 내 치!!”로 받아들인다. 친구도 없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이기적인 토니의 영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사실 이 책은 읽을 책들이 많았다면 더 나중에 읽었을지 말지 할 정도로 내 주의를 그다지 끌지 못했다. 심심해서 읽어준다는 심정으로 이 책을 붙잡았다. 페이지를 꽤 여러 장 넘겼는데도 시큰둥했다. 그러다 캐비가 나오는 부분에 이르자 흥미가 생겼다. 산이와 같이 다운증후군 장애인을 등장시키다니! 다운인에 대한 표현들도 실감나게 되어 있었고, 산이가 혼자 떠드는 것과 아주 비슷한 상황이 그려진 걸 보고 웃음이 나왔다. 토니와 캐비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한 부분이지만 난 어느새 이 책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이기적인 산이 엄마!

아틀란타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하룻밤을 그곳에서 묵기로 한 산이가 전화로 마구 얘기를 쏟아 놓는다.

한국 사람이 많아! / 나중에 같이 올라 오자! / 감기 어때? / 오늘 약이 많이 먹어. , 괜찮을 거야! / 윤이는 뭐 해? / 게임 해. (내 대답) / 괜찮아. 그냥 놔 둬!”

산이의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나도 잠깐 웃어 보았다. 산이의 엉뚱하고 제법 어른스러운 말들이 꽉 막힌 코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치료제 같았다

2/09/2015

묻어 둔 숙제




조각 하나.

지역 도서관에 자유롭게 수다 떠는(free talking) 반이 있어서 다닌 적이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난 오후라 그런지 참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영어가 모국어여서 각각의 그룹을 이끌어 가는 자원봉사자들이 더 많았다. 60대 초반의 백인 부부와 한 그룹이 되었다. 또 다른 참여자가 있기도 했는데 오다가 말다가 하여 내가 수다 떨 수 있는 시간이 더 길어져 좋았다.

대화 상대였던 백인 부부는 아주 꼼꼼해서 틀린 발음들을 잘 고쳐주었다. 특히 아내인 캐시 아줌마는 질문을 하면 간단히 답을 하지 않고 더 많이 가르쳐주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퀼트를 조금 해 본 적이 있고 관심이 있다고 했다. 캐시 아줌마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퀼트 모임이 있는데 언제든지 와 보라고 했다. 모임 시간과 교회 위치를 자세히 알려주었다. 교회는 내가 살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규모가 큰 장로교회였다. 퀼트도 배우고 영어도 더 얻어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졌다.

퀼트 모임도 평일 오후 시간이었다. 퀼트 하는 방에 이르자 곧 캐시 아줌마가 도착을 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로부터 젊은 새댁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책상을 앞에 두고 넓고 크게 둘러 앉아 내 소개를 했다. 회원 몇 명이 그 즈음에 개인적으로 만들고 있는 작품들도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서너 명씩 가까이 앉은 사람들과 소곤거릴뿐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캐시 아줌마는 그 모임에서 만들었던 작품들을 사진 찍어 모아 놓은 자료집을 보여주었다. 작품의 크기나 만드는 방법이 참으로 다양했다. 완성된 것은 부모 없는 아이들, 환자, 교회에 새로 부임한 부목사 등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된 사진도 볼 수 있었다. 모임에서는 완성된 퀼트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 어떤 모양으로 만들 것인지를 정하면 각자가 블록(조각 천을 붙여 만든 하나의 단위)들을 만들어오고, 누군가 그 블록들을 연결하고, 솜을 넣어 누비고…… 이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퀼트를 잘 하는 사람들이고, 모임 시간에 퀼트의 오밀조밀한 방법들을 배우기는 어려워 보였다.

조각 둘.

한 주가 지나 다시 캐시 아줌마와 그 남편을 도서관에서 만났다. 이 날은 이상하게도 캐시 아줌마의 남편과의 대화가 자꾸 막혔다. 시작은 exercise라는 단어였다. 나는 연습문제라는 뜻으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중학교 때부터 영어책에서 수도 없이 봐온 단어이기에). 그랬더니 아저씨는 그 단어의 뜻은 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운동도 맞고 연습문제도 맞다고 했더니 어이없어 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어를 배우겠다고 온 사람이 아는 체하는 꼴이 된 것이다. 또 무슨 얘기 끝에 Systematic Theology(조직신학)라는 단어를 말하게 되었다. 아저씨는 그런 단어도 있냐며 설명해보라고 했다. 이걸 영어로 설명하다니, 얼마나 버벅거렸는지…… 그리고 퀼트 모임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아저씨는 결국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비록 영어도, 퀼트도 서툴지만 아저씨가 나에게 뾰족하게 구는 태도는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난 다음 날부터 그 동안 퀼트 하면서 남아있던 자투리 천들을 모두 꺼내, 캐시 아줌마네 교회 퀼트 모임에서 최근에 진행중인 블록과 같은 모양으로 커다란 이불을 만들기 시작했다. 캐시 아줌마의 친절함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이불 만드는 것을 알고는 이불 뒷감으로 쓸 수 있는, 앞면과 잘 어울릴만한 커다란 천을 주기도 하였다. 솜을 살 때는 퀼팅 도구들을 파는 가게 Joann에도 같이 가 주었다. 캐시 아줌마는 이불 앞면이 완성되는 것까지만 보았다.

5개월에 걸쳐 나의 퀼트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인 이불이 하나 만들어졌다. 천 조각 하나 하나마다 사연이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처럼 저마다 다른 천들의 고유한 재질과 무늬들을 보고 있자면, 그 다양성에 놀랍기도 하고 뭔가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에 설레기도 한다. 조각들이 이어져 쓸모 있는 무엇이 된 것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아름답다. 이불을 만드는 동안 곱고 예쁜 조각천들 덕분에 캐시 아줌마 남편의 뾰로통한 인상도 많이 희미해졌다. 어떤 이유로 시작했건 커다란 이불 하나를 만들고 나니 뿌듯했다. 이것은 큰 아들에게 먼저 주기로 했다.






조각 셋, .

작은 아이는 자기 것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왕 천들을 손에 잡은 김에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작은 아이가 대학 가서도 엄마와 가족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자는 동기를 팍팍 부여하고 시작했다. 새로운 모양의 블록으로 열심히 만들었다. 하지만 대학가는 일이 코앞에 닥친 일도 아니고 다른 관심사가 생기는 바람에 그만둔 지 2년이 넘었다.

남편이 한국에 갔을 때 친구가 가진 천으로 만든 가방을 보고 부러워했다. 그 친구의 아내는 퀼트를 아주 잘 하는 이여서 자기 남편의 가방을 손수 만들어 준 것이었다. 친구의 아내와도 잘 아는 남편은 자기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염치없이 부탁했다. 그 아내는 내 남편의 빠듯한 출국 일정에 맞추어 엄청 멋진 가방을 선물해 주었다. 남편은 이 가방만 들고 다닌다. 작은 아이는 아빠의 퀼트 가방을 이른바 명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관심과 사랑이 담긴, 세상에 하나뿐인 가방이기 때문이란다.

이젠 묻어둔 숙제를 꺼낼 때가 되었다. 작은 아이가 대학갈 날이 몇 개월 후면 다가오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자기 이불은 언제 만들거냐고 숙제를 자꾸 상기시킨다. 집을 떠나면서 엄마의 애정 어린 기도와 손길이 담긴 물건을 곁에 두고 싶어하는 아이의 갸륵한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어서 서둘러야겠다.

1/26/2015

영화 “로맨틱 레시피(The Hundred-Foot Journey)”




감기에 걸려 고생을 하던 남편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로맨틱 레시피(The Hundred-Foot Journey)”라는 영화였다. 한글 제목만 보고서는 남편의 마음이 읽혀졌다. 기침을 하면서도 감기 끄트머리라고 거듭 강조를 하더니 그날 밤은 아내의 품이 그리운 거였다. 그렇다고 재미없는 영화를 억지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은 영화에 대해 반신반의 하는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스티븐 스필버그와 오프라 윈프리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라는 정보를 슬쩍 흘렸다. 남편이 보자고 제안하는 영화가 언제나 재미난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들 대부분은 남편이 소개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특이하고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드는데 뛰어난 두 사람이 제작자들이라고 하니 두루두루 믿고 보자는 심정이 되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인도 음악이 흘러 나왔다. 뭔가 신비스러운 영상이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목이 나오는데 한글 제목과는 전혀 달랐다. The Hundred-Foot Journey. 백 걸음 여행이라는 제목에서는 짧은 거리 안에서 여행이라고 표현할만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보다 짐작해 보았다. 제목이 심오하다는 생각도 잠깐 했다. 원제와 한글 제목의 뜻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 두 제목을 붙인 각각의 이유를 알 듯도 했다.




The Hundred-Foot Journey

인도 뭄바이에서 하산 가족은 음식점을 운영했다. 누군가 정치적인 이유로 하산네 음식점에 불을 지른다.이 불로 요리사인 하산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고 그의 가족은 고국을 떠난다. 어머니가 하시던 영혼이 있는 요리를 하기 위해 정착할 나라를 찾던 중 프랑스에 머물게 된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프랑스 시골 마을로 이민을 오게 된 것이다.

인도 문명과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하산의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인도 음식점을 열기로 결심한다. 아버지는 이전에 레스토랑으로 사용했던 곳을 찾아낸다. 하지만 백 걸음 앞에는 유명한 레스토랑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인도 음식점과 프랑스 음식점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 음식점을 운영하는 마담 말로리는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음식 재료를 먼저 차지한다든지 이런 저런 이유로 민원을 넣는다. 어느 날 밤, 말로리 음식점에서 일하는 셰프가 하산네 음식점에 불을 지른다. 인도에서의 불은 하산네가 인도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면 프랑스에서의 불은 그 마을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말로리 부인은 불을 지른 셰프를 해고하고 하산을 요리사로 데리고 온다. 말로리는 하산에게 엄청난 요리 실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음식점 간의 전쟁은 끝이 나고 하산은 백 걸음의 여행을 시작한다.

백 걸음이면 길 하나 건너는 길이인가 보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것뿐 아니라 낯설고 새로운 곳을 보고 싶고, 알고 싶어 찾아 떠나는 것이리라.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로의 여행, 말 한마디 건넨 적 없는 이웃집으로의 여행, 자기만의 공간에서 가족 모두를 만날 수 있는 거실로의 여행, 차가운 머리에서 따뜻한 마음으로의 여행…… 마음만 먹으면 이해와 화해 속으로 날마다 여행을 떠나는 다채로운 삶을 살 수도 있겠구나 싶다.




로맨틱 레시피

하산은 말로리 음식점에서 요리 실력을 인정받고 파리로 진출하게 된다. 파리에서도 그의 천재성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스타 셰프가 된다. 하산은 프랑스에서 점점 더 유명해지지만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공허해 보인다.

말로리 음식점에서 일하는 요리사 마거리트는 하산의 마음에 담긴 연인이다. 하산은 마거리트에게 그물버섯 라비올리 레시피에 대해 묻는 메시지를 보낸다. “양파를 오일로 구웠나요 버터로 구웠나요? 당신과 함께 만들었던 그 맛이 안 나요.” 마거리트는 양파를 굽는 방법보단 버섯이 더 중요해요. 그물버섯은 여기서 나는 게 최고죠라고 답장을 보낸다.

하산의 외로움이 더해가던 어느 날, 인도 출신 동료 요리사가 도시락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도시락에는 동료 요리사의 아내가 싸준 인도 전통 음식들로 가득했다. 음식에 사용된 향신료에 대해 묻자 고향에서 보내준 것들이라고 동료는 대답한다. 하산은 도시락의 음식을 먹으며 울음을 참지 못한다. 하산은 자신의 명성을 뒤로 하고 가족과 연인이 있는 시골 마을로 다시 내려온다.

하산은 타고난 재능으로만 만들어내는 요리가 아닌 사랑으로 만들어내는 요리를 선택한 것이다. 레스토랑이 있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들로 만드는 요리 말이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도 사랑이 담긴 요리가 마을 사람들을 화해케 하고 감동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랑은 어디에 넣어도 어울리는 지상 최고의 음식 재료인 것이 분명하다. 신경하 감독님과 사모님께서 미국 여행 중에 주일 설교도 해주시고 우리 집도 방문해주셨다.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은 김치찌개와 고추장돼지불고기였다. 거기에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함께 넣어 대접하였다. 두 분께서 맛있다, 말씀해주셔서 행복했다

1/12/2015

아빠와 딸


 




아빠에게 첫아이이면서 첫딸인 나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 가족들이 전해주는 말에 따르면 식사를 할 때에 아빠는 꼭 나를 먼저 먹이고 나서 나중에 식사를 하셨다고 한다. 외출하실 때에도 마스코트처럼 가능한 한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이야 육아에 엄마 아빠 모두 정성을 들이지만 거의 오십 년 전에는 어른들 앞에서 자기 자식을 드러나게 예뻐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던 때였다. 도리에 어긋나면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마구 야단을 치시던 호랑이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그런 할머니 앞에서도 꿋꿋하게 딸을 아끼던 요즘 말로 딸바보셨나 보다.

서너 살쯤 되었을까? 무더운 여름이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빠는 자전거를 태워주셨다. 해가 길어서 그랬던지 밀집 모자를 씌워주시곤 했다. 살던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무지개 빛을 내는 분수대가 있었다. 아빠는 그곳까지 자전거로 달려가 잠시 분수가 뿜어내는 시원한 물을 보여주셨다. 인천 숭의동 로터리에 그 분수대가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 기억이지만 참으로 시원하고 환상적인 나들이였다.

아빠는 무척 꼼꼼하고 자상하시다. 말수가 별로 없으신 편인데, 당신이 말재주가 없어 마음이 잘 표현이 안 된다고 안타까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난 아빠의 말재주 없는 면을 닮은 것 같다. 지금도 누군가 말을 재미있게 잘 하거나 유머가 풍부하거나 상황에 딱 떨어지게 대처하여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른다. 말이 적은 아빠의 오랜 취미는 낚시다. 그 아빠의 딸답게 어려서부터 낚시터에 잘 따라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소래 낚시터로 망둥이를 잡으러 다녔다. 망둥이를 잡으면 산 채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했다. 어른들은 이걸 먹는 나를 희한하게 보시면서도 재미있어 했다. 재미있어 하시니 나는 신나서 또 먹고……

아빠가 다니시던 회사에 낚시 동우회가 있었다. 낚시 동우회에서는 정기적으로 전국 낚시터를 방문했고 일 년에 두어 번 TV 같은 큰 상품을 주는 대회도 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큰 낚시대회에 따라 간 적이 있었다. 밤낚시를 하고 다음 날 점심 전에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45인승 관광버스 서너 대가 함께 갔으니 참가자가 꽤 많은 대회였다. 낚시터에 도착하자 아빠는 쫓아간 딸이 춥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줄 둔덕이 있는 곳을 찾아 작은 사이즈의 텐트를 치셨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고기가 잘 잡힐 것 같은 포인트로 빠르게 흩어졌다.

여기저기서 조용히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빠는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셨다. 낚시하시다가 괜히 우리 라면 끓여 먹자, 며 시간을 보내셨다. 내가 심심해 할까 봐 마음이 쓰이셨던 것 같다. 낚시 마감 시간이 다가오도록 별 소득이 없었다. 이번엔 안 되겠다며 낚싯대를 접으려는데 뭔가 걸렸다. 일단 물고기 길이가 30cm(12인치)가 넘으면 다른 이들과 겨루어볼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건져보니 36cm쯤 되는 놈이었다. 그놈으로 아빠는 장려상인가를 타셨다. 아빠의 취미 생활에 동행한 딸을 기특하게 여기셨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빠 낚시터에 따라오는 독특한 고등학생이거나 그 밖에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여학생이었지만 아빠에겐 그저 자랑스런 딸이었다.

그런데 그 딸이 늘 아빠의 기대를 만족시켜 드리지는 못했다. 신학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는 말씀을 드린 순간부터 아빠는 나와의 대화를 중단하셨다. 그 당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던 아빠는 여자가 신학대학에 간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셨다. 아빠가 어찌어찌 정신을 가다듬고 상상할 수 있었던 딸의 모습은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다니는 전도부인이었다. 학교를 다 마치도록 아빠는 딸을 잃었고 딸은 아빠를 잃었었다. 난 가고 싶은 길을 갔지만 가족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가족은 내 삶의 울타리일 뿐 멀어진 사이가 좁혀지지 않는 듯했다. 나는 한 술 더 떠 신학대학원을 진학했고 거기서 목사가 될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다.

아빠는 소박하면서도 정겹게 목회 하는 모습, 장애를 가진 아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장기수 같이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좋은 세상 만들어 보려는 애씀, 어려운 교회에 부임하여 교회 건축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딸네 모습을 죽 지켜보셨다. 그러시던 중에 정말 감사하게도 아빠는 하나님을 믿게 되셨다. 더불어 잃었던 아빠와 딸의 관계도 다시 회복되었다.

이젠 더 이상 아빠와 딸 사이에 걸릴 것이 없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빠는 다시 얻은 딸과 또 멀어지게 되었다. 출국 날짜를 받아놓고 아빠에게 낚시를 가자고 했다. 1월 한겨울, 얼음 낚시였다. 강화 교동도 고구리 저수지로 낚시를 갔다. 저수지는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아빠와 나 둘뿐이었지만 이번엔 아빠와 엄마, 그리고 딸과 사위와 손자들이 함께 간 낚시였다. 아빠는 얼음 낚시에 필요한 도구들을 꺼내와 손자들에게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주셨다. 엄청 추워서 얼음 위에 서 있기조차 어려웠다. 난 얼음 위와 땅 위를 왔다 갔다 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아빠는 손자들이 얼음 구멍에 낚싯줄을 담그고 놀도록 도와주셨고 얼음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으셨다. 아빠는 집에 돌아오도록 말도 없으셨고 웃지도 않으셨다.

미국 집에는 두 번 다녀 가셨다. 이곳에 오시면 함께 낚시도 가자고 했었는데 그런 여유가 잘 생기지 않았다. 같이 낚시할 날이 다시 있을 지 모르겠다.

지난 주 북극에서 몰려온 한파가 이곳 미국 동남부까지 이르러 무척 추웠다. 좀처럼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곳인데 영하 7.7 ℃(18)까지 내려갔었다. 눈은 오지 않았지만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교회에 갔다가 설핏 옷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문득 온통 얼어버린 고구리 저수지에서 맞았던 바람 같았다. 아빠가 보고 싶었다

1/05/2015

새로운 리듬을 타고




동네 가까운 곳에 있는 피트니스클럽은 자주 가고 싶은 곳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해에 가족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등록해 두었는데 일주일에 두 번 정도를 겨우 간다. 해도 바뀌었으니 일주일에 세 번은 가리라 다짐을 해 본다!

지난 여름 동안에는 식구들이 함께 운동하러 갔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운동기구들을 이용해 땀을 내고, 수영으로 개운하게 마무리하곤 했다. 난 수영도 못 하고 귀에 물이 들어가는 것도 싫어 수영장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군살이 덕지덕지 붙은 맨살을 드러내는 수영복을 입는 것이 더 싫었다. 그랬더니 이 기회에 수영을 배우면 되지 않겠느냐, 물속에서 걸으면 운동량이 더 많다더라, 며 꼬셔댔다. 수영장을 이미 다니고 있던 남편과 아이는 나보다 몸이 더 좋은 미국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라며 안심(?)하라고 했다. 남편은 아무도 당신에게 관심 없어, 라는 말로 식구들이 함께 수영하자는 의견에 쐐기를 박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기까지 아이들과 어울릴 겸해서 달갑지 않은 수영장에 들락날락했다. 학기가 시작되자 학교에 다니는 녀석은 피트니스클럽에서 하는 운동을 접었다. 가족이 함께 하는 운동시간이 끝난 것이다. 동시에 나도 수영장 가기를 그만 두었다. 내가 잘 할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는 걷기운동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보통 트레드밀을 이용하여 운동할 때 뛰는 사람은 흔하게 본다. 내가 운동하는 곳에서도 나처럼 전혀 뛰지 않고 걷기만 하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내 몸 상태에 맞게 걷는 운동을 선택했지만 트레드밀에 올라선 사람마다 달려가면, 내가 둔해 보이려나, 운동할 줄 모른다고 여기려나 잡생각들이 발걸음을 지치게 하기도 했다. 이럴 땐 아무도 당신에게 관심 없어, 라는 남편의 말이 그런대로 쓸모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걷는 운동만 하는 사람이 점점 눈에 띈다. 운동하는 곳이 익숙해져서 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상황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트레드밀에 올라가 활기차고 즐겁게 진행되는 아침 뉴스를 볼 수 있도록 TV 채널을 찾아놓는다. TV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이어폰을 연결한 다음 슬슬 걷기 시작한다. 몸이 풀렸다 싶으면 속도를 조금 더 올려 발걸음을 빠르게 한다. 속도가 높아진 얼마 동안은 숨도 차고 정강이에 힘이 들어가 발걸음이 무겁기도 하다. 아침 식사 때 마신 커피 탓인지 화장실에 가고 싶은 느낌이 들어, 화장실에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잠시 고민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때가 체육학에서 말하는 데드 포인트(Dead point). 운동의 강도를 높였을 때 곧 괴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 지점이다.

이런 몸과 마음의 상태를 눈치채면 차분히 살피고 달래준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고, 뒤로 젖혀진 목을 바로 세워 살짝 앞으로 잡아 당기고, 숨을 더 깊게 들이 마시고 내뱉는다. 건강한 몸을 위하여 운동하기로 정한 시간만큼 기쁘게 채우고 흐뭇한 마음으로 이 건물을 나서자고 나에게 부탁한다. 그러다 보면 속도가 빨라진 트레드밀에 몸이 익숙해져서 발걸음도 가볍고 호흡도 편해져 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느낌도 사라지고 없다. 걷는 것을 멈추지 않고 걷고 또 걷는 동안 몸은 새로운 리듬을 만든다. 세컨드 윈드(Second wind) 상태에 이른 것이다.

세컨드 윈드란 격렬한 운동에 대해서 모든 신체기능이 동원되어 새로운 평형 상태가 성립된 시기이고, 신체 활동에 적응하도록 각종 내분비선과 기타 장기의 작용이 조정되어 세컨드 윈드가 되도록 돕는다고 친절한 이웃(^^)인 네이버 지식백과가 잘 알려준다.

새해 새로운 마음으로 하지 않던 일을 하려 하거나 하던 일의 강도를 높이는 경우라면 곧 데드 포인트에 이를 확률이 높다. 긍정적이고 자발적인 자극이 몸을 잠시 괴롭게도 하지만, 잘 이기고 나아가면 더 건강해지도록 돕는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일주일에 세 번, 즐겁게 걸어야겠다. 운동이 몸에 새로운 리듬을 주듯 다시 주어진 한 해의 시간을 정성스레 걷는 동안 삶도 새로운 리듬을 타고 신나게 노래했으면 좋겠다

12/29/2014

언제나 남는 것은 사람


시카고에서




지난 주에는 가족과 함께 장거리 여행을 했다. 시카고 근처에 사는 몇몇 친구들을 만나고 오는 일정이었다. 이 여행이 실행되기를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을 빼고 자동차로만 열두세 시간이 걸리는 긴 여행을 아이들과 함께 해 보고 싶었고, 아직 미국 중북부를 가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곳의 풍광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오래된 친구들이 있으니 기회만 되면 그들에게로 달려가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이 여행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 둘째 아이는 성탄절 즈음에 친구네 가족을 따라 스키장에 가도 되느냐고 했다. 우리 가족은 딱히 계획이 없었던 지라 아이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허락했었다. 아이는 방학이 가까워지자 스키장에서의 구체적인 일정을 점검하고 있었다. 스키장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는 홈페이지도 보여 주었다. 거기엔 스키복과 스키 장비를 빌리는데 드는 비용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는 맨몸으로 가서 모든 장비를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빠르게 속셈을 해보니 그것들을 하루만 빌린다 해도 몇 백 달러가 필요했다. 이거 너무 비싸다, 했더니 안 되겠지, 라는 대답이 바로 이어서 나왔다. 렌트 비용을 미리 살펴본 눈치였다. 아이와 이런 짧은 대화가 오고 간 다음날 남편은 시카고 여행을 제안했다. 중북부를 여행할 기회가 바로 이때라고 판단되었나 보다.

가족 여행 계획이 친구와 스키장을 가지 못한 아이의 아쉬움을 얼마나 채워줬는지는 모르겠다. 남편은 친구들과 연락을 하여 적극적으로 일정을 잡았다. 남편의 그런 모습은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방학 동안 심심해 할 아이들을 위해서도, 단순한 일상 속에 묻혀 있는 아내를 위해서도, 그리고 친구들이 몹시 그리운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여행이라 여겨졌는지 일을 진행하는 모습에 파드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100세가 가까워 오시는 권사님께서 성탄주일이 되기 일주일 전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날마다 병문안을 다니던 남편은 아무래도 여행 계획을 취소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어느 정도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에게도 이러한 형편을 알리자 우리 가족이 그렇지, , 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원래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전날, 권사님께서 퇴원하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권사님께서 입원해 계시는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권사님의 병세가 어떠신지 직접 눈으로 살펴야 했기 때문이었다. 권사님의 눈동자와 말소리에 힘이 조금 생기신 것 같았다. 우리는 권사님이 퇴원하시게 되었으니 시카고로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고 말씀 드렸다. 권사님은 걱정 말고 다녀오시라며 오히려 우리를 격려하셨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부리나케 여행 가방을 꺼냈다. 그래도 혹시 권사님께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마음은 들뜨지 않도록 잘 붙들어 두었다.




그런 복잡한 사정을 뒤로하고 떠난 여행은 감사하게도 순조로웠다.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대체로 도로 사정이 좋았다. 북부지역이라 눈이 오면 어쩌나 했는데(눈이 오면 오는 대로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남부에서는 눈을 보기가 어려우므로) 우리 가족이 남부의 따뜻한 기온을 몰고 왔다고 농담할 정도로 그다지 춥지 않았다. 미주리 주의 선배 목사님네를 시작으로 아이오와 주와 일리노이 주의 친구들을 찾아 다니는 동안 비록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일지라도 구경도 많이 했다. 친구들이 사는 크고 작은 도시들, 고속도로 주변에 스치는 여러 분위기의 도시들, 추수가 끝나 빈들이 되어버린 탁 트인 평야와 풍력발전에 사용되는 거대한 바람개비들, 무엇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끝없는 하늘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여행자의 눈에는 지루한 줄 모르는 신선한 경치들이었다. 아이가 영화에서만 보던 시카고는 몇 군데 걸어 다녀보기도 했다.

여행에서 만난 동료 목사님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우리 가족에게 정성스런 음식과 편안한 잠 자리를 내어주었다. 밤이 깊어지는 것도 모른 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목회 현장에 대한 이야기와 신앙인으로써 이 시대에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지 진지하게 풀어 놓았다.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도 열띤 논쟁이 있었다. 다들 중년에 이르러서인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자신의 견해를 풀어가는 성숙한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에 대한 자부심이 더 커졌다.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 가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어린 조언들을 들을 때에는 감동이었다. 오래 묵은 친구들에게서만 풍겨 나오는 진한 향기를 맡는 듯했다.

또 노래도 엄청 불렀다. 어느 부부 목사가 기타 반주를 하며 오 거룩한 밤노래에 화음을 넣어 멋있게 부른 것이 시작이었다. 우리가 젊었던 8,90년대에 거리에서 불렀던 노래나 대중 가요를 정말 오랜만에 다시 불러 보았다. 가사를 모르거나 연주 코드가 헷갈리면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척척 내놓았다. 부부끼리 노래 부르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주기도 했다. 잘 불러도, 틀리게 불러도 웃기고 재미있었다. 중년의 나이에 사는 모습이 조금씩은 달라도 노래 부르는 동안은 나라의 발전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던 젊은 시절의 그들 같았다.

둘째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며 이렇게 말했다.
옛날 노래가 지금 노래 보다 더 좋은 것 같아. 내가 나이 들어서도 엄마, 아빠들처럼 그렇게 함께 노래 부르며 즐길 수 있을까?”
엄마, 아빠들이 같이 노래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단다. 대화의 내용도 많이 엿듣다 잠이 들었다고 했다. 아이가 이번 여행에서 스키장에 못 가는 아쉬움과 여행이 취소될 뻔해서 느꼈던 감정들 대신에 더 소중한 가치들이 있음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와도, 여행을 떠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도 언제나 남는 것은 사람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가족, 친구, 동료, 교우……

12/22/2014

그 플러그(plug)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감고 나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된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집안에서  일을 하든, 사람을 만나거나 교회에 가는 일 따위로 외출을 하든 말이다. 머리를 감은 후에 급하게 집 밖을 나갈 일이 아니라면 헤어 드라이어를 쓰지 않고 젖은 머리가 자연스럽게 마르도록 나둔다. 헤어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열기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다.

헤어 드라이어의 열기를 때로 피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열로 머리 모양을 잡아주는 플랫 아이론(flat iron)을 사용해야 하는 단계가 남아 있다. 플랫 아이론은 직사각형 모양을 한 넙적한 판이 마주보고 달린 고데기 같은 도구이다. 머리카락에 남아 있는 물기가 마르는 동안 부스스해지고 이리저리 삐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펴주는데 아주 쓸모 있는 도구이다. 이 플랫 아이론의 열이 머리카락을 더 손상시킬지도 모르지만 지난 몇 년 전부터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플랫 아이론은 미용실 원장님이 쓰던 것을 받아온 것이다. 원장님이 내 머리에 퍼머를 해주었는데 잘못되어 머리카락이 거의 다 타버렸었다. 뜨거운 압축기로 눌러놓은 것처럼 머리카락이 작은 지그재그 모양으로 구부려졌다. 그걸 만지면 바사삭 바스러질 것처럼 건조하고 거칠기가 이를 데 없었다. 머리를 묶지 않고 풀러 놓으면 가발을 쓴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머리를 삭발하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냥 괴상한 머리카락을 달고 그냥저냥 시간이 가서 머리카락이 자라는 대로 조금씩 잘라내며 상태가 나아지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머리카락 때문에 참담함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원장님은 미안한 마음에 다시 퍼머도 해주고(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자기가 쓰던 플랫 아이론과 고데기도 주었다. 그렇게 플랫 아이론은 머리카락을 일시적으로 진정시켜주는 도구로 나와 친해졌다.

얼마 전, 머리를 감고 다 마르도록 그냥 놔두었다. 하던 일이 마무리 되어 머리를 마저 정리하기 위해 플랫 아이론이 있는 화장실로 갔다. 플랫 아이론의 플러그를 찾아 콘센트에 꽂았다. 어라! 전원이 들어온 걸 표시하는 빨간 불이 켜지지가 않았다. 그 전날까지 멀쩡했기에 별 생각 없이 플러그를 뽑았다가 다시 꽂았다. 불은 여전히 켜지지 않았다. 그 쬐그만 등이 고장 났나 싶었다. 아이론이 뜨거워지기만 하면 등이 고장 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기다리다가 아이론에 손을 대보았는데 차가웠다.

그렇다면 화장실 콘센트 전체의 전원이 꺼져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인지 같은 벽면에 있는 콘센트의 전원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장치들이 되어 있다. 안방 화장실은 아이들이 주로 쓰는 화장실 콘센트에서 전원을 켜고 끌 수 있다. 가서 확인을 해 보니 전원은 들어와 있었다. 기대를 살짝 하며 다시 돌아와 플러그를 꽂아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갑자기 아쉬운 마음이 확 들었다. 손에 익은 아이론을 더 이상 쓸 수 없어 아쉽기도 했고, 그 아이론에 묻어 있는 기억의 조각들도 더 멀어져 가는구나 싶었다.

그 엉망이었던 퍼머를 하게 된 까닭은 40대 중반을 넘어 도전하게 된 지역 전문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머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간편한 스타일로 바꾸려는 마음에서였다. 영어 실력을 넓히고 미국식 사회복지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한 학기가 지나 그만 두었다. 더 공부할 마음이 있었으면 주변 상황이나 조건을 따지기 보다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 학기가 지나 재정적인 문제에 부닥치자 나는 곧 학교를 미련 없이 그만 두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엄청 흥미로운 일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얄팍하나마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과 가치관과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나름 진지했던 도전과 재빠른 포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플랫 아이론을 이제는 보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 잠깐! 잠깐만! 이 플러그가 아니잖아!’  
    
화장실 서랍 속에는 헤어 드라이어와 플랫 아이론이 같이 들어 있다. 헤어 드라이어의 플러그를 꽂아 넣고는 플랫 아이론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오해한 것이었다.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플랫 아이론과 연결된 플러그를 꽂자 빨간 전원등이 수줍게 켜졌다. 얻어서 쓰던 조그마한 미용 도구의 수명이 다 했다고 여기며 지난 몇 년 전 일들을 떠올려 정리하고 있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전기가 공급된 플랫 아이론은 뜨거워졌고 거울을 보며 삐친 머리카락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도전한 것은 제대로 된 플러그를 사용했던 걸까?’
지금은 어떤 플러그를 쓰고 있는 거지? 인내의 플러그? 건강한 신앙 공동체에 대한 소망의 플러그?’
한 동안 감사의 플러그가 빠져 있었던 것 같아. 그건 하나님을 신뢰하는 플러그도 함께 서랍 속에 갇혀 있었다는 거겠지?’

머릿속에 날아다니는 어쭙잖은 생각들도 아직까지 잘 작동하는 플랫 아이론이 닿을 때마다 가지런하고 예쁘게 정리되면 좋으련만.

12/08/2014

새로운 설거지 짝꿍




우리 교회 주일 점심 식사는 늘 푸짐하다. 반찬이 항상 열 가지가 넘는다. 와우! 후식도 떡과 빵이 늘 있다. 교인들이 각자 알아서 해 온 음식들이다. 대부분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다. 각자 집에서 늘 해 먹던 음식이 아닌 다양한 것들을 먹는 즐거움이 있다. 다문화 가정의 미국 교인들도 한국 음식을 잘 드신다. 미국 남편과 사시는 교인들은 집에서 한국 음식을 요리할 기회가 아무래도 적다 보니, 그들 또한 주일 점심 식사에 대한 기대가 있는 듯하다. 예배를 드리며 영적인 갈망을 채우는 것만큼 음식에 대한 욕망을 맘껏 채우는 시간이다.

음식은 정해진 순서 없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 알아서 준비하고,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는 당번을 정하여 돌아가면서 한다. 두 사람이 한 조다.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연세 드신 교인들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설거지에 동참하고 계신다.

나와도 한 조를 이룬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함께 설거지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바람에 당번인 주일에 혼자 설거지를 했다. 물론 정말 혼자 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다른 집사님들이 도와주셨다.

그런데 나에게 다시 설거지 짝꿍이 생겼다. 우리 교회에 나오신 지 얼마 안 된 분이다. 어느 집사님이 내 설거지 짝이 없는 걸 아시고 그분께 설거지를 권유하셨나 보다. 그 분은 흔쾌히 내 설거지 짝꿍이 되어 주셨다. 나도 좋아서 그분께 다가가 저와 설거지 같이 하시는 거예요!” 했다. 그분은 그래유~” 하면서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요청하셨다. 설거지 하자는데 뭘 이렇게 기뻐하시나 싶었다. 그분은 언제가 당번인지를 물어오셨다. 나는 11월 마지막 주쯤 될 거라고 알려드렸다. 주일에도 한 주 건너마다 직장에 나가셔야 하기 때문에 미리 계획을 짜두셔야 했다. 그 뒤에도 설거지하는 날짜를 계속 확인하셨다.

설거지 당번인 주일. “설거지 할까요?” 했더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채 또 그래유하셨다. 마음이 넉넉해 보이던 첫인상 그대로였다. 갈아 입을 옷과 앞치마까지 준비해 오셨다. 그릇을 세제로 깨끗하게 닦아서 헹구고, 종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그릇 주인이 찾아갈 수 있도록 죽 늘어놓았다. 처음이라 뭘 해야 될 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도 손은 계속 움직이셨다. 짝꿍이 있으니 얘기도 나누고, 일도 하는 것 같지 않게 빨리 끝난 것 같았다.

그분과 짧은 시간 동안 설거지를 같이 하면서 마음이 흥분되었다. 설거지는 누가 보아도 궂은 일인데 기꺼이 즐겁게 일하는 그 마음이 내게도 전하여지는 듯했다. 교회 안에 특별히 친한 사람도 없지만 교인들도 목사 아내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그들에겐 교인들끼리의 관계가 우선인 것이다. 한 지역에서 평생을 같이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에 도드라지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을 자주 느끼곤 한다. 그런데 짝꿍에게서는 그런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짝꿍은 흰 설탕도 여러 봉지 나누어 주셨다. 사실 그 설탕은 거의 매주 떡을 해 오시는 집사님에게 드리려고 가져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설탕을 쓰지 않으신다고 하여 나에게 흰 설탕을 먹냐고 물어오셨다. 나도 흰 설탕을 먹지는 않지만 효소 담글 때 쓰기는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중에 효소 담그는 방법을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며 자동차에서 설탕 몇 봉지를 꺼내 주셨다. 거저 받는 설탕 무게만큼이나 설거지하면서 느끼던 설렘도 더해졌다.  

꽤 무거운 설탕 봉지들을 끌어 앉고 내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설탕을 땅 위에 내려놓고 트렁크를 열어 문을 높이 올렸다. 허리를 굽혀 설탕을 들어올리는데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두 손은 설탕을 들어올리느라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손이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설탕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트렁크 안으로 밀어 넣는데, 으악!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트렁크 문이 스르르 반쯤 내려와 있었나 보다. 눈과 눈 사이에 있는 높지도 않은 콧등을 트렁크 문 모서리에 힘차게 들이댄 것이다.

아무도 주차장에 없길 바라며 뒤로 돌아섰는데 짝꿍이 그대로 서서 지켜보고 계셨다. “괜찮아요?” 물어보시길래 하며 멋쩍게 콧등을 쓸어 내렸다. , 만지지 말 걸…… 가로로 움푹 패인 것이 손을 댈 수 없게 아팠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짝꿍과 헤어졌다.

설거지하면서 그리고 설탕을 받으면서 설레었던 마음이 한 순간에 가라앉았다. 콧등이 욱신거릴 때마다 교인들을 대하는 평정을 잃지 말며 거저 받는 것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신호 같았다. 새로 온 교인과 함께 설거지하며 설렌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더욱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길 기도하고 있다

12/01/2014

두 권사님


2011 부모님들과 디즈니월드에서(올랜도, 플로리다)



한국에 계신 두 권사님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기질도 다르고 각각 다니는 교회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꽤 많다.

우선, 70대의 여성분들로 삶이 곧 신앙생활 그 자체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기도이며, 일상 속에서도 예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그들의 태도나 언어에 배어 있다. 주일을 반드시 지키는 것은 물론이요(중병으로 수술을 해도 병원에 마련되어 있는 예배실에서 주일을 지킨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나 모임에 빠지지 않으신다. 헌금도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드린다.

두 분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쌓아두는 법이 없다. 그러면 이웃들은 이 권사님들께 무엇인가를 다시 나눈다. 그들의 나눔은 계속 순환되기도 하고 혹은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 그걸로 만족하기도 한다. 권사님들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살고 계신다.

개인적인 성품으로는 부지런하여 일을 미뤄두지 못하는 성격이시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당장 끝장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몸이 지치기도 하는데, 입술에 물집이 여러 개 생기면서 부르트는 모습도 비슷하셨다. 두 분 모두 일을 하시다가 지독한 감기 몸살에 걸리셨다. 몸살 치료하려고 병원에 가셨다가 14, 12년 전에 대장암을 진단받기도 하셨다.

그때만 해도 대장암 수술이 큰 수술이어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겠노라, 그래도 살려주시면 신앙생활 더 잘 하겠노라 기도하시고 들어가셨다. 두 분의 수술은 잘 되었다. 그 뒤로 혹독한 항암치료를 견뎌내셨고 5년 동안 정기적으로 몸 상태를 살펴야 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살려두셨을 거라며 더욱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이웃과 나누는 생활을 이어가고 계신다.

두 권사님은 감리교인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게 엄청 규칙쟁이다. 먼저 수술 받은 권사님은 입원했던 병실에서 만난 어느 환우로부터 야채 스프와 현미차에 대하여 소개를 받으셨다. 권사님은 퇴원하신 다음 야채 스프와 현미차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5년 이상을 만들어 드셨다. 뒤이어 같은 암에 걸린 다른 권사님은 친분이 깊던 앞서 권사님의 권유로 야채 스프와 현미차를 또 오랫동안 드셨다. 만드는 방법이 간단해 보여도 야채 스프와 현미차를 손수 만들어 오랜 시간 드셨다는 것은 웬만한 정신력과 정성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식이요법회 회장, 다테이시 가즈(立不一)가 개발한 야채 스프에는 무(4분의1), 무우청(4분의 1), 당근(2분의 1), 우엉(4분의 1, 작은 것은 2분의 1), 표고버섯(화고, 자연 건조한 것 1)이 들어간다. 야채 스프를 먼저 드시기 시작한 권사님은 좋은 재료를 얻기 위해 텃밭에 야채를 무농약으로 키우기 시작하셨다. 집에서 기를 수 없는 것은 재배지에서 직접 구해오기도 하셨다. 또 재료를 많이 구해서 나중 권사님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셨다.

야채 스프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야채는 물로 씻어서 큼직큼직하게 썬다.
     야채를 많이 넣지 말고 기본 분량을 꼭 지킨다.
     모든 야채 재료의 양에 3배의 물을 붓고 센 불로 끓인 후 약한 불로 60분 달인다.
     끓이는 기구는 스텐, 알미늄, 유리그릇을 사용한다(테프론, 법랑 용기는 사용하지 말 것).
     보존 용기는 유리병이나 사기그릇을 사용한다.

현미차에는 현미 1홉과 물 8홉이 필요하다. 현미차를 만드는 방법도 옮겨 본다.
     현미를 짙은 갈색이 되도록 볶는다(기름기 없는 용기 사용).
     8홉의 물을 다른 용기에서 센 불로 끓인다. 끓으면 현미를 넣고 불을 끈다.
     5분쯤 후에 채에 받치어 낸 물이 1번 차이다.
     채에 걸러진 현미를 다른 용기에 넣고, 새로운 물 8홉을 부어 센 불로 끓인 후 약한 불에서 5-10분간 끓인다. 다시 채에 받쳐 낸 물이 2번 차이다.
 ⑤ 1번 차와 2번 차를 혼합하여 보관, 사용한다(용기는 유리병, 사기그릇을 사용).

두 권사님들께서는 야채 스프와 현미차를 지극정성으로 드셨을 뿐 아니라 식생활도 많이 달라지셨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육류를 많이 드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두 분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계신다. 난 그것들을 마셔본 적은 없으나 두 분을 뵈면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다.

2012.1.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 날. 주일예배 끝나고.

이 두 권사님은 나의 어머님(남편의 엄마)과 엄마이시다. 그들의 견고하고 부지런한 신앙 생활은 나에게 항상 자극을 준다. 내 신앙은 그들보다 유연하고 덜 부지런하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서 부딪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서로에게서 배운다.

주일 예배에 가려고 손거울을 들고 화장을 하다 보니 입술에 돋은 좁쌀만한 물집 두 개가 눈에 띄었다. 시력도 갑자기 안 좋아지는 것 같더니 거울에 비친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 보고서야 알았다. 입술에 물집이 생긴 것은 처음이다. 딱히 힘든 일도 없었는데…… 두 어머니가 문득 생각이 났다

11/24/2014

살아가게 하는 힘



이민 오는 날.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2014 추수감사주일에.


내가 이민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이민이라는 말은 그저 신문과 뉴스에나 나오는 낱말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민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민 생활이 어떠한 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살림살이를 싸 가지고 미국에 들어오면서도 아예 살러 오는 것인지 살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남편이 일할 곳이 미국으로 정해졌으니 늘 그랬던 것처럼 나머지 가족은 그저 따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 교육하기에 좋고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잘 되어 있다는 지극히 막연한 인식이 미국행을 결정하는데 보탬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뭘 모르니 용감하게 미국 땅으로 날아온 것이다.

비행기 값을 아끼려고 미국 국적 비행기를 한 번 갈아 타고 애틀랜타에 있는 하츠필드 잭슨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지고 어두웠다. 새로운 곳에 대한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하얀색 형광등과는 달리 공항에 수없이 밝혀져 있는 노란색 등은 이국적이면서도 그 긴장감 마저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다른 나라에서 살려고 찾아온 이방인답게 부피가 큰 이민 가방이 세 개, 크고 작은 여행용 가방도 세 개쯤이었다. 한국에서 부친 이삿짐은 한 달이 걸린다 하니 미국에 도착해서 한 달 동안 사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압축팩에 담긴 이불과 베개, 옷가지들이 대부분이었다. 성경을 포함하여 몇 권의 책과 노트북도 있었다. 살게 될 곳에 큰 한인 마트가 여럿 있는 줄 몰랐으니 라면도 몇 개 챙겨 왔다.

저녁 때라도 공항은 분주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가족을 마중 나온 두 분을 만나게 되었다. 앞으로 살게 될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타고 온 15인승 교회 차는 우리 가족과 보따리를 싣고도 넉넉했다. 우리가 다니게 될 교회 가까이 가서는 한국 음식점에서 따뜻한 설렁탕으로 저녁도 먹여 주었다. 두 분 중 한 분 목사님은 지금도 연락이 되는데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씨는 변함이 없다.

애틀랜타에 도착한 날이 수요일이라 저녁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친 후 생각지 못한 남편의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기 전 그는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300달러가 들어 있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어떤 집을 얻어야 할지 집을 구하기 전까지 어디서 머물러야 할지 이 또한 몰랐다. 남편과 동료가 될 한 부목사님은 닷새 정도 머물 수 있는 집으로 우리 가족을 안내했다. 장로님 댁이었다. 장로님의 따님이 다른 주에서 결혼을 하게 되어 며칠 집을 비우시게 되었다. 그 여러 날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 가족에게 집을 통째로 내어주신 것이다. 주인이 없으니 조심스러우면서도 호텔과는 달리 집이 주는 편안함을 누릴 수 있었다.

애틀랜타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우리 부부는 습관처럼 새벽기도회에 갔다. 자동차가 있을 리 없으니 어느 집사님께 부탁을 드린 것이다. 집사님은 새벽에 학교에 보내야 할 자녀도 있었고 집사님 집에서 우리가 머물던 장로님 댁까지 꽤 먼 거리인데, 자신의 사정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고 운전을 해주셨다. 미국에 살아보니 내가 새벽(!)기도 가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운전을 부탁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때는 뭘 몰라도 정말 한참을 몰랐다. 집사님은 아이들 학군을 고려하여 살기에 편안하고 좋은 위치에 있는 집을 구하는데도 동행해 주셨다.

닷새 안에 월세 집을 정했다. 담임 목사님께서는 새로 온 부목사네 가정에 아무 물건도 없으니 있는 것들을 나눠 쓰시라, 광고해 주셨다. 부엌에서 쓰는 그릇을 나눠주신 분들, 식탁이 없어 신문지를 깔고 밥을 먹고 있었는데 어찌 알았는지 한국 교자상과 숟가락을 사다 주신 분, 그 밖에 가재도구들도 많이 나눠주셔서 미국 생활의 모양을 잡아 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3, 5년 살다 보면 영어를 공부하겠다는 마음이 옅어진다며 당장 영어 공부를 시작하라고 조언해주는 집사님이 있었다. 집사님은 적극적으로 지역 안에 있는 학교나 교회에서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곳들을 찾아 그 목록을 전해주었다. 미국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지역 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법도 도서관에 함께 가서 직접 알려주었다. 미국 장애인 단체와 연결해 주기도 했다. 여름성경학교나 한국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집사님은 열정과 리더십이 뛰어나고,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 집사님처럼 이중언어나 일을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도록 날 늘 자극하였다.

11월은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때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감사하고. 이 감사의 계절이 되면 처음 미국 생활에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늘 떠오르곤 한다. 아무 조건 없이 같은 신앙공동체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나눠주신 분들이다. 정말 고맙다. 마음에 고이 간직하련다. 이민 생활 첫 부분에 만난 잊지 못할 고마운 이야기들을 짧은 글로나마 갈무리하는 모양새를 보니 내가 이민자라는 정체성이 이제야 슬슬 생기기 시작하나 보다.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하다. 고백된 감사와 미처 깨닫지 못하여 고백되지 않은 감사가 있을 뿐이다. 감사는 과거를 의미 있게 하고 미래를 소망으로 채우며 현재를 살게 하는 힘이다. 이제는 올 한 해, 애틀랜타가 아닌 이곳에서 만난 고마움들을 되새겨보려 한다.

11/10/2014

숲길을 걸을 때




슬슬 걷기에 좋은 주립공원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가깝다. 숲 속과 호수 둘레를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도록 여러 갈래 길이 나 있다. 숲에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많다. 호수에는 몇 마리 오리가 떠다니거나 휴일이면 공원에서 빌려주는 노 젓는 배를 가끔 볼 수 있다. 그밖에 철마다 바뀌는 화려한 꽃이나 신나는 놀이 기구나 기암괴석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조용하고 수수한 공원이다.

운동 삼아 공원을 자주 가던 어느 해 봄이 시작될 무렵의 일이다. 남편과 나는 늘 다니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숲에 가면 넓은 공간이 주는 자유로움 때문인지 집 안에서는 꺼내지 않았던 얘기들이 술술 풀려 나오곤 한다. 그날도 새로운 얘깃거리가 시작되려는 때였다. 남편이 갑자기 한 발을 공중에 들고는 으아아~~” 하는 것이었다. 처음 들어 보는 음색의 그 짧고 낮은 비명 소리는 두려움을 짙게 담고 있었다. 겁이 많은 나는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고 남편의 팔에 매달리며 왜 그래?” 다급하게 물었다.

잘 놀라는 아내를 배려한 것인지 잠깐 숨을 돌린 다음 이라고 대답했다. 뱀이라는 말에 남편 팔에 올라서기라도 할 것처럼 있는 힘껏 끌어 안고는 어디?” 라고 말하면서 눈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남편은 말없이 숲 쪽을 가리켰다. 제법 굵고 길며 까만 뱀이 낙엽 위를 마치 헤엄을 치듯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빠르게 달아나고 있었다. 뱀이 그렇게 날렵한지 처음 알았다. 그것도 우리 때문에 놀란 모양이었다.

또 한 번은 다른 도시에 사는 지인을 이 공원에서 만났다. 걷기에 좋은 곳이라고 소개했더니 만남 장소를 공원으로 정한 것이다. 산책로의 중간쯤에 이르러 화장실에 들렸다가 나머지 남은 길을 가기로 했다. 둘 다 볼일을 보고 내가 먼저 화장실 건물을 나섰다.

화장실 입구 쪽 희고 넓은 벽에 검고 길쭉한 무엇이 움직이고 있었다. ! 하고는 얼른 그것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지난번 일을 사람들과 나누던 중 이곳에서는 까만색 뱀은 독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인은 아직 화장실 안에 있었고 의지할 아무 것도 없으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곧이어 화장실을 빠져 나오는 지인에게 저기, 하고 가르쳐주었다. 지인은 그쪽을 돌아보고는 오리가 날개를 푸드덕 대듯이 양손을 마구 저으며 두 발을 땅에 대지 않으려는 듯 겅중겅중 달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성격이 엄청 차분하고 말소리도 엄청 작은 사람이 그런 모양으로 달아나니 웃음이 났다.

이번엔 개를 만난 일이다. 공원에 있는 표지판들 가운데 개를 묶어서 데리고 다녀야만 한다는 안내문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호수 둘레 길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길에서는 이 규칙이 잘 지켜진다. 그런데 인적이 드문 숲길에서는 열에 일곱, 여덟은 개들이 묶여 있지 않다.

개를 키우는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는 숲길에서는 개들을 자유롭게 다니도록 풀어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숲길을 걸을 때가 있으며 그러다 그런 개들을 만나기도 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나마 훈련이 잘 된 개는 멈추라는 지시를 잘 따르고, 더 친절한 주인은 개를 그 순간에 줄로 묶어 좁은 숲 길 바깥으로 물러나서 우리가 지나가도록 기다린다. 이런 주인과 개를 만나면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고마운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숲 속에서 낙엽이 바스락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들개처럼 생긴 누런 세 마리 개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그 가운데 한 마리의 이마에는 꼭지점이 네 개인 별 모양 문신 같은 것이 있었다. 이 개들은 무슨 먹이를 포위한 짐승처럼 남편과 나를 세 면에서 둘러싸고 이빨을 들어내며 짖어댔다. 정신이 황망하고 어이가 없었다. 주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개들은 계속 의기양양하게 짖어대고 난 최대한 개들에게 적의나 두려움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몇 분이 흘렀는지 몰라도 꽤 긴 시간 같았다. 갑자기 남편이 멀리 보이는 주차장(공원 밖 어느 축구장의 주차장이 보이는 곳이었다)을 향해 손으로 가리키면서 고우(Go)!” 라고 외쳤다. 그러자 개들은 지들이 언제 짖었냐는 듯이 깨갱거리며 눈에 힘을 뺐다. 그러더니 주차장 쪽으로 우리에게 왔던 것처럼 달려갔다.

개를 방치한 주인에게 화가 났다. 그 못된 주인과 개들 때문에 매우 언짢았지만 그날 걷기로 한 길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남은 숲길을 걸으며 여태껏 살아오면서 해보지 못한 욕을 그 들과 주인을 생각하며 몽땅 몰아 했다.

숲을 걸을 때 이 밖에도 우리가 호흡하며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좋아하는 쬐끔한 날 것들이나 곤충들이 귀찮게 하기도 한다. 송화 가루가 날리는 철에는 운동화나 바지가 노란 가루로 범벅이 되기도 한다. 꽃가루 알러지가 있는 사람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갑자기 비를 만나 길이 질척해지면 거기에 빠지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피해서 걸어야 할 때도 있다.

숲은 공기 중에 필요한 산소를 공급하기도 하고 피톤치드(식물이 해충,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분비하는 물질)를 내뿜어, 그것들을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변하는 숲의 모습을 보며 시간의 흐름과 나와 우리의 삶따위를 생각하도록 이끌어주기도 한다. 반면 숲에서는 뱀이나 정신 없는 개들과 그 주인처럼 두렵고 화나는 일을 만나기도 한다. 그래도 숲은 여전히 사람에게 유익하다. 숲길을 걷고 또 걸으며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만나게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