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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2022

시구(始球)

 



지난해 가을쯤인가··· 한인 커뮤니티 단톡방에서 메디케이드 웨이버(Medicaid Waiver) 세미나가 줌에서 열린다는 알림을 보았다. 메디케이드는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장애인에게 주는 의료 프로그램으로 큰아들 산이가 사용하고 있다. 어란(AURAN: Auburn University Regional Autism Network)에서 주최하고 에이킵(AKEEP: Alabama-Korea Education & Economic Partnership)에서 한국어 통역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포스터였다.

이런 알림은 그동안 수도 없이 지나갔는데 문득(!) 그 세미나를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한 '문득'의 순간은 이성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라는 고백 밖에 다른 할 말이 없다. 그 세미나를 통해 메디케이드에 대한 정보가 뿐만 아니라 아주 친절하고 실력 있는 에이킵의 직원, I를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I는 우리에게 에이킵과 지역사회에서 열리는 여러 이벤트를 안내하고 산이와 나는 I의 제안에 대해 대부분 적극적으로 응답한다.

지난주에는 몽고메리 야구팀 비스킷(Biscuits)이 홈구장에서 경기하는 날에 열리는 코리안 헤리티지 나잇(Korean Heritage Night)에 초대받았다. 코리안 헤리티지 나잇은 에이킵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올해는 세 번을 계획했다고 한다. 에이킵은 이 행사에 에이시디디(ACDD: Alabama Council on Developmental Disabilities)와 장애인들을 초청하여 그 범위를 확장하였고 덕분에 우리도 초대해주었다. 나는 행사 시간이 수요일 저녁 예배 시간과 겹쳐서 아쉽게도 산이만 보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코리안 헤리티지 나잇은 지역 사람들에게 한국의 문화유산을 알리는 기회로 삼고 더불어 비영리단체인 에이킵을 유지하기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열린다. 올해는 애국가 제창, 스타토크(Startalk: 에이킵의 여름 캠프) 학생들의 케이팝 춤, 에이킵 소개 영상을 공연했다고 한다. 한편, 풀무원에서 준비한 음식, 티셔츠나 티켓 판매, 경매를 통해서는 기금을 모은다. 한인 지역사회에서도 이 행사에 참여해서 몽고메리에 한국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알리는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몽고메리 홈팀의 경기도 관람하고 응원도 하면서 말이다.

산이에게는 코리안 헤리티지 나잇에서 시구(始球)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공 던지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아서 산이에게 유튜브에서 투수의 자세를 찾아보라고 알려주었다. 어정쩡한 처음 모습과는 달리 그 다음번에는 한 다리를 뻣뻣하게 번쩍 들어 올렸다 내리며 공을 던졌다. 우습기도 하면서 그걸 따라 해보는 산이가 기특했다. I는 산이가 시구하는 모습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찍어 나에게 보내주었다. 정작 경기장에서 산이는 다리를 들어 올리지도 않았고 공도 냅다 던지는 모습이 살짝 긴장한 듯 보였다. 그래도 경기장 한가운데서 프로 선수들에게 공을 던지는 멋진 경험이라니! 그 경험을 산이와 우리 가족에게 선사한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2/23/2015

산이 곁에 있는 소리


집에 돌아오기 전 애틀랜타에서 장보는 산이. ^^


남편은 자신이 부목사로 일하던 아틀란타한인교회로 설교를 하러 갔다. 장로님들의 은퇴를 찬하하는 예배라고 들었다. 남편은 애틀랜타에 가기 두 주 전쯤 아들 산이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먼 길 오고 가는데 동행이 있으면 덜 피곤하기도 하고, 집에만 있는 아들에게 나들이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산이는 흔쾌히 가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산이가 손꼽아 기다리는 애틀랜타에 가기 일 주일 전, 내가 감기에 걸리더니 며칠 뒤에 작은 아이 윤이에게도 옮겨갔다. 산이에게는 감기에 걸리면 애틀랜타도 못 간다고 내 근처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엄마와 눈이라도 마주치려고 포옹 대신에 엄마 등에 얼굴 한번 비비고, 하이 파이브 대신에 팔을 반으로 접어 팔꿈치라도 부딪친다. 팔꿈치끼리 부딪치는 것은 산이가 가르쳐준 방법이다. 그러면서 엄마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연약할 것 같은 산이가 지독한 이번 감기를 요리조리 따돌리고 애틀랜타 가는데 성공했다.

산이가 집에 없으니 조용하다. 산이 곁에는 늘 소리가 있다. 지가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은 소리, 레고를 조립하느라 조각들 만지작거리는 소리, 찬송가 부르는 소리, 성경 읽는 소리, 그리고 중얼중얼 누군가와 얘기하는 듯한 소리……

“애틀랜타 갈까? 음. / 그래, 가자! / 감기, 절대 안 돼. 알겠지? / 음. 아빠하고 나하고. / 애틀랜타한인교회 좋아. 김정호 목사님 좋아. / 그래, 가자!”

자신의 일상적인 얘기를 누군가와 미주알고주알 소곤거린다. 표정도 마치 누군가를 바라보듯 다양하게 연출된다. 그만 하라고 지시하지 않으면 한참을 그러고 있기도 한다. 자기 말을 이해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혼자라도 떠드나 싶어 안쓰럽기도 하다가, 보통 사람의 모습은 아니니 그러지 말라고 퉁을 놓기도 한다.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나의 엄마는 산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냥 놔두라고 하신다. 말하는 것이 대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이를 지켜주는 천사가 있다고 믿고 계시며 천사와 얘기하는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윌리엄 폴 영이 쓴 소설 『갈림길』을 읽고 내 엄마의 말이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읽는 동안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지 내 마음은 어떤 상태일지 그려보게 해준다. 책을 삼분의 일쯤 읽었을 때 주인공 토니의 영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캐비에게로 미끄러진다(윌리엄의 표현).

남부럽지 않은 사업가, 토니는 장애인을 “사회라는 이름의 저수지에서 비생산적인 배수구 같은 존재, 오직 가족에게만 소중한 존재, 그들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가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논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용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이런 토니가 캐비에게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고 캐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캐비는 자신과 대화해주는 토니를 “내 치!구!”로 받아들인다. 친구도 없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이기적인 토니의 영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사실 이 책은 읽을 책들이 많았다면 더 나중에 읽었을지 말지 할 정도로 내 주의를 그다지 끌지 못했다. 심심해서 읽어준다는 심정으로 이 책을 붙잡았다. 페이지를 꽤 여러 장 넘겼는데도 시큰둥했다. 그러다 캐비가 나오는 부분에 이르자 흥미가 생겼다. 산이와 같이 다운증후군 장애인을 등장시키다니! 다운인에 대한 표현들도 실감나게 되어 있었고, 산이가 혼자 떠드는 것과 아주 비슷한 상황이 그려진 걸 보고 웃음이 나왔다. 토니와 캐비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한 부분이지만 난 어느새 이 책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이기적인 산이 엄마!

아틀란타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하룻밤을 그곳에서 묵기로 한 산이가 전화로 마구 얘기를 쏟아 놓는다.

“한국 사람이 많아! / 나중에 같이 올라 오자! / 감기 어때? / 오늘 약이 많이 먹어. 아, 괜찮을 거야! / 윤이는 뭐 해? / 게임 해. (내 대답) / 괜찮아. 그냥 놔 둬!”

산이의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나도 잠깐 웃어 보았다. 산이의 엉뚱하고 제법 어른스러운 말들이 꽉 막힌 코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치료제 같았다. 

9/22/2014

날마다 부르는 노래가




“엄마! 형, 소리 좀 줄이라고 해!”

둘째 아이, 윤이가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불평하며 소리치는 말이었다. 윤이가 이렇게 소리칠 즈음이면 큰 아이, 산이는 노래에 흠뻑 빠져 도취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때로는 얼굴은 벌개가지고 눈물, 콧물 흘리며 울부짖고 있기도 하다.

산이는 CD를 50 여장(올 여름 한국 방문 때 만난 목사님들께서 챙겨주신 8장의 CD가 보태어졌다) 가지고 있다. 대부분이 CCM(Christian Contemporary Music)이고 어릴 적 참여했던 여름성경학교 찬양모음이나 청소년기에 참여했던 여름캠프 찬양모음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집을 방문했던 친구가 TV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나는 가수다” 첫 번째 시즌에서 10곡을 뽑아 녹음해서 주고 간CD가 한 장 있다. 요즘 즐겨 부르는 다른 또 하나의 음악이 있는데 아이패드에 깔려 있는 새찬송가이다. 그 새찬송가에는 반주도 들어 있고 찬송 부르는 목소리도 들어 있어서 산이가 많이 따라 부르고 있다.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밤에 잠들기 전까지 많은 시간 노래를 불렀다. 모든 학교를 다 마친 요즘은 노래 부르는 시간이 더 늘어나서, 깨어 있는 시간 가운데 삼분의 일은 산이의 노래 소리로 집안이 가득하다. 레고를 조립하면서도, 컴퓨터로 한글 타이핑 연습을 하면서도, 그리고 밑그림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을 색칠하면서도 노래를 부른다. 온전히 노래 부르는 것에만 집중할 때는 항상 두 손에 드럼 스틱이 들려져 있다. 드럼 치는 것을 좋아해 앞에 없는 드럼을 상상하며 치는 것이다. 때로는 밥 먹으러 식탁에 와서도 노래가 끊어지지 않아 “밥 다 먹고 해”, 라는 말을 한두 번 듣고 나서야 멈춘다.

이렇게 오랜 시간 반복해서 노래를 듣다 보니 가사를 잘 외우고 있다. 나는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노래도 산이는 줄줄이 불러댄다. 산이는 기억력이 좋은 것 같다. 아주 어릴 때도 반복해서 불러준 노래와 율동을 잘 따라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도 학년별로 단체무용을 할 때 특수학급 선생님들은 산이를 꼭 참석시키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단체무용을 훌륭히 해냈다. 그래서 산이를 아는 사람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애틀랜타 밀알선교회에 다닐 때는 장애가 있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수어 찬양을 예쁘게 하기도 했었다. 가사나 무용을 잘 기억하는 것은 산이가 음악을 좋아하고, 현재도 계속 반복해서 듣고 따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때로 무슨 노래를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다. 귀를 기울여 보지만 단번에 어떤 노래인지 알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산이가 부르는 것을 들어보면 음의 높낮이가 많지 않고 발음도 어눌하다. 굵은 저음으로 부르다가 음이 높이 올라가거나 곡의 절정이다 싶은 곳에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래도 가만히 들어보면 노래의 가락이나 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또 예배 시간에 아는 찬양이나 찬송이 나오면 “앗싸” 혹은 “나 저거 알아” 하며 좋아한다. 가끔 회중 가운데 저 혼자 손 들고 찬양하기도 한다. 주먹을 꼭 쥐고 팔에 힘을 주어가며 부르기도 하고 박자에 맞추어 온 몸을 흔들며 부르기도 한다.

사실 산이가 어떤 마음과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지 다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날마다 노래 부르는 것이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산이의 그칠 줄 모르는 노래 부르기는 주변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

산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생이 집에 같이 있을 때는 노래 부르는 소리의 강약을 조절하려고 한다. 동생도 형이 집 밖까지 들리도록 소리를 높여 노래를 해도 조용히 하라고 불평하는 일이 많이 줄었다.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스크린에 비춰지는 파워포인트의 화면을 순서대로 띄우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산이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다. 와우! 아직은 서툴어서 실수가 있기는 해도 제법 잘 해내고 있다. 또 예배가 끝나고 이렇게 말씀해주신 집사님도 계셨다.

“내가 오늘 무척 힘든 상태에서 교회에 왔거든요. 그런데 예배 시간에 산이가 찬송을 열심히 부르는 모습을 보고 내가 힘이 생겼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삶이 되기도 한다. 산이가 좋아하는 노래 부르기와 꼼꼼한 성격(레고나 퍼즐 조립을 좋아하는 걸로 봐서)이 잘 발휘되는 행복한 삶이 펼쳐져 가고 있음을 주님께 감사한다. 

8/18/2014

지나친 슬픔







1992년, 텔레비전에서 성탄 특집으로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방송한 적이 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두 아이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술이면서도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이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조용한 울음도 계속되었다. 해맑은 아이들이 수술 후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감정은 점점 짙어졌다.

수술 후 3일이 지나 쌍둥이 가운데 한 아이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쯤에서는 내 목구멍이 조여오는 아픔을 느꼈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을 쉬려고 해도 몸이 맘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목줄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얼마간 견디다가 다시 숨이 돌아와 살았다. 울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첫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다음 해에 아이가 태어났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송을 볼 때는 내 아이가 장애아일줄 꿈에도 몰랐는데 뭐가 그렇게도 슬펐는지 죽을 만큼 울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몇 달 뒤, 극장에서 영화 “서편제”를 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본 이 영화의 줄거리를 짧게 정리해 보면 이렇다. 소리꾼인 유봉은 금산댁을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유봉에게는 양딸인 송화가 있고, 금산댁에게는 아들 동호가 있다. 금산댁이 유봉의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된다. 유봉은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고 동호에게는 북 치는 것을 배우게 한다. 소리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던 시절이라 세 사람의 삶은 퍽퍽하기만 하다. 동호는 이러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유봉과 송화의 곁을 떠난다.

유봉은 소리란 한(恨)에 사무쳐야 제대로 나온다고 여기고 송화에게 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송화를 남겨두고 유봉은 세상을 뜬다. 그렇게 송화와 동호는 각자의 삶을 살다가 어느 주막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송화는 소리를 하고 동호는 북을 치게 되는데, 앞을 못 보는 송화는 북소리만으로 동호임을 짐작한다.

이 오누이가 만나 북장단에 맞춰 소리를 하는 장면에서 난 또 한번 죽는 줄 알았다. 이미 몇 달 전에 울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있기에 감정을 조절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헤어져 살던 오누이가 마주 앉아 서로를 아는 체 하지 않고 들려주는 소리와 북소리에 내 온몸이 잠기는 것 같았다. 그들의 한이 온몸을 절절히 파고 들어 절여놓는 느낌이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극장이기도 하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간 남편에게 우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소리를 내지 않고 울다가 또 목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두 번의 울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한 뒤로 슬픈 영화나 드라마 따위는 아예 보지 않기로 했다. 어찌하다 보게 되더라도 목석 같은 심정이 되어 보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요즘 동영상도 아니고 멈추어 있는 사진 한 장만 보아도 가슴이 저릿하면서 눈물이 고이는 경우가 자꾸 생긴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광화문에서 단식하고 있는 희생자 아버지의 초췌해져 가는 모습,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가다가 경찰에게 끌려 나와 실신한 희생자 어머니가 길바닥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모습, 세월호 참사로 인해 죽어간 희생자들을 기억해 달라며 십자가를 지고 900 km를 순례한 희생자 아버지들의 울먹이는 모습……

샴쌍둥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영화 서편제를 보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슬픔을 느낀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소식들을 듣고 보면서 그 이유를 이제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생명, 가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보호되고 지켜내야 하는 소중한 가치들인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그 가치들이 존중 받지 못하고 훼손될 때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내 나름의 삶의 굴곡과 장애아를 자녀로 둔 어미의 심정이 보태어져서 그런 슬픔을 느꼈나, 짐작해 본다.

아직은 나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그 울음이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오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말씀에 기대어 보아야겠다. 

6/13/2014

낯설고 강렬한 경험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번 한국여행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산이의 치아 치료(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치료이고, 치료비용을 감안해 한국에서의 치료를 결정한 것이다)를 위한 여행으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산이의 치아 상태에 문제가 생겨 급작스레 예정보다 일정이 앞당겨졌다. 큰아들 산이와 나는 감사하게도 갈아타는 번거로움이 없는 한국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게다가 남편은 우리를 비행기가 출발하는 애틀랜타 공항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여건이 되었고, 한국 국적 비행기이니 여러 가지 면에서 편안한 이동수단이 되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긴 비행기 운항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줄 영화 목록을 살펴보았다. 보고 싶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있었다. 갑작스레 정해진 일정이었지만 비행기를 타기까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고 영화도 볼만한 것들이 꽤 있어서 이번 여행에 대한 느낌(느낌은 변화무쌍 하다. 신뢰할만 한 것이 못 된다)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제목만 봐서는 고풍스러운 배경을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근거 없는 기대가 있었던 영화였다. 비행기가 출발할 때부터 영화에 집중해서 한 시간 반 정도를 훌쩍 보내리라 생각했다. 새벽 일찍이 집을 나선 탓에 비몽사몽 오락가락 하면서 감상했어도 어쨌든 시간이 그럭저럭 흘러갔다.

한국 비행기 기내식의 대표 음식인 비빔밥을 점심으로 먹고, 저녁으로는 불고기와 밥을 먹었다. 당황스러운 사건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얼마 뒤에 시작되었다.

산이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이 그치지 않았고 그 소리가 점점 목구멍을 거칠게 훑고 나오는 것처럼 무거워졌다. 이때부터 평온한 여행에 대한 느낌은 쨍, 하고 깨져 버렸다. 산이가 기침을 힘들게 하기 시작하면 겁이 난다. 기침을 하다가 속을 싹싹 다 비울 때까지 토하기 때문이다.

기침한다고 승무원이 와주지 않을 것 같아 얼른 일어나 승무원들이 있는 공간으로 나아갔다. 냅킨을 좀 달라고 했다. 서너 장을 건네 받았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자 산이는 울컥 게웠다. 체한듯 싶었다. 승무원을 부르는 벨을 눌렀다. 내 마음이 급한 것인지 벨을 잘못 누른 것인지 승무원이 오는 기색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승무원들이 잠시 머무는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우리가 있었다. 그제서야 승무원은 뭘 도와 드릴까요, 물었다.

"우리 아이가 토해서요..."

승무원은 물티슈 여러 개와 두 개의 비닐 쇼핑백을 들고 와서 쇼핑백의 입구를 벌리며 내밀었다. 내 손에 들린 지저분한 냅킨을 넣으라는 신호인듯 하여 그리 했다. 나는 그 쇼핑백이 필요할지도 몰라 달라고 해서 발 밑에 두었다. 승무원은 가지고 온 또 하나의 쇼핑백을 벌려  아무 말없이 또 내 앞에 내밀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몰라 물었다.

"담요 넣으시라구요."

토한 것이 살짝 묻어 뭉쳐놓은 담요가 내 무릎 위에 놓여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순간 승무원의 서비스를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승무원은 돌아 갔고 승객이 덥고 있던 담요를 가져갔으면 새 담요를 가져다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소식이 없었다. 받으러 갈까 하다가 승무원 부르는 벨을 눌렀다. 왜 불렀냐는 표정이었다. 담요가 필요하다고 했다.

난 어둑한 실내등 불빛을 찾아 손을 쳐들었다. 손목시계의 바늘을 정확히 보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려면 여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제발 이대로만 버텨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산이는 기침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혹은 피곤하게 비행을 하고 있는 다른 승객들에게 엄청 미안했다. 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면 고집스러워지는 산이는 화장실로 가는 것을 거부했다. 멈추지 않는 기침을 하면서 화장실로 이동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난 다른 승객들에게 큰 민폐를 끼치는 것인줄 알면서도 원하지 않는 기침을 하면서 괴로워 하는 산이의 편이 되기로 했다. 등을 쓸어주며 기도하는 것 밖에는 해줄 것이 없었다. 이 상황이 오래 지속 되면 승객들에게 같이 기도해 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산이는 몸을 떨며 토하기를 두 번 더 했고, 자신도 괴로운지 끝내는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그러는 동안 승무원은 벨소리를 듣고 온 것과 소화제를 요청하여 가져다 준 것을 빼고는 다시 오지 않았으며, 우리 옆을 지나치면서도 괜찮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우리 모자는 비행기 안에서 공공의 적이었던걸까.

산이에게 울지 말라고 달래는데, 도리어 날 달래듯이 산이가 이젠 괜찮아, 했다. 속이 좀 편안해졌다는 소리로 들렸다. 감사, 또 감사했다. 기다렸다는듯이 피곤이 마구 몰려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깜빡 들었다.

어수선한 움직임에 눈을 겨우 떠보니 승무원 세 사람이 눈 앞에 있었다. 우리 바로 앞에는 두 아들과 엄마가 앉아 있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이는 작은 아들이 코피가 난 모양이었다. 알콜솜의 냄새가 잠을 확 달아나게 했다. 이미 가지고 온 얼음 봉지가 모자란 지 한 승무원은 작은 지퍼백에 담긴 얼음을 짤랑거리며 다시 달려왔다. 좁은 통로에 모여 있는 승무원의 뒷모습은 보란듯이 내 시야를 다 가리고 있었다. 한참을 아이와 눈빛을 마주하고 속삭이던 그들이 물러갔다. 내가 앉은 통로에서 보지 못했던 다른 승무원들도 오고 가며 아이의 안부를 계속해서 물었다.

아, 외롭게 겪은 산이의 소동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산이를 위한 승무원의 서비스가 이해되지 않았어도 그날의 사건은 여럿에게 불편함을 끼친 죄인의 심정으로 미안함만 기억되었을 것을. 산이와 앞자리의 아이를 대하는 다른 태도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벌벌 떨리고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았다. 오, 주여...... 내가 모르는 승무원의 행동 수칙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승무원들은 그 규칙을 따랐을 뿐일 거라고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따끔따끔거리는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다다랐다. 산이 옆에 앉아 있던 청년 승객에게 불편함을 줘서 미안했다고 말했다. 청년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서고 승객들은 부산스럽게 짐을 꺼내 빠르게 통로를 꽉 채웠다. 우리도 일어섰다. 복잡한 승객들 사이를 비집고 멀리서 길고 흰 팔이 우리를 불렀다. 앉았던 통로 쪽에서 제일 많이 봤던 승무원이었다. 통로를 가득 메운 승객들 사이에서 산이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날 바라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하고는 마치 변명할 기회라도 얻은 사람처럼 아까는 화장실로 갈 상황이 안 되었다고 빠르게 덧붙였다. 비행기를 빠져나오는 동안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는 승무원들의 인사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평상시와는 달리 그들의 인사에 도통 대꾸할 수가 없었다.

속상한 마음이 내 안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풀어놓았다. 동시에 이 낯설고 강렬한 경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듣고 싶다고 했다. 어린 아이처럼 장애인 역시도 연약함을 가지고 있어서 관심 있는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 묻고 협력하면서 그 돌봄의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피상적인 돌봄에 그치기 쉽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할 때 연약한 이들을 진심으로 돌볼 수 있는 지혜가 열릴 것이다. 산이를 아들로 주시고 가까이서 돌보게 하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6/06/2014

학교 이후의 삶을 시작하며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공식적인”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비공식적으로 첫째 아이, 산이는 학교 일정이 마치기 하루 전에, 둘째 아이는 이틀 전부터 방학에 들어갔다. 둘째 아이의 말을 빌리자면, 일 주일 전부터 수업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 학교 분위기가 싱숭생숭하다고 했다. 학점을 따기 위하여 필요한 시험이나 과제를 다 끝냈고, 출석 일수에 지장이 되지 않으면 결석 처리가 되더라도 등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도 방학하기 이틀 전부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마무리를 잘 해야 되지 않을까, 하며 수업은 빠지지 않아야 된다는 밑도 끝도 없는 고정관념을 가진 나에게 둘째 아이는 대놓고 답답하다고 했다. 다 알아보고 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내 자신이 보편적인 제도나 질서 따위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어서 스스로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부분도 적지 않다. 둘째 녀석은 나와 닮은 듯하나 똑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나보다 훨씬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멋지게 만들어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방학하기 이틀 전 아침, 둘째는 학교를 가든 안 가든 알아서 잘 하겠지, 해놓고 첫째 아이는 학교에 보냈다.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산이한테서는 아무런 정보를 들은 것이 없으므로, 그리고 공교육을 하는 학교에 다닐 날이 더 이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학교 가려고 나서는 아이를 품에 안고 이마를 맞대고 잘 갔다 와, 하는데 가슴이 짠하다. 그 동안 한국에서 받았던 조기교육(만 4세)부터 미국 고등학교와 과도기 과정(transition class, 만 18-21세)을 마치기까지 겪었던 일들과 감정들이 뒤섞여 왈칵 왈칵 올라오는 것을 지난 주부터 참고 있었다.

지난 주에 산이가 학교 생활을 마치는데 부모의 사인이 필요하다며 학교로 오라고 했다. 이 모임은 산이를 위한 교육에 대해 재평가하는 자리로 두 달 전쯤 모였어야 했다. 하지만 방학을 코앞에 두고 호출하는 것이니 새로운 정보를 나누는 자리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올해 산이와 같은 반 친구들 가운데 네 명이 졸업하는데 모두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를 위해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단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래도 산이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서 의논할 것이 없다는 말에 무척 서글펐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학교 생활이 끝나면 아이와 여행도 하고, 평상시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수영과 볼링도 정기적으로 다닐 거라고 얘기했다.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직업재활(Vocational Rehabilitation) 하는 곳에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도 선생님에게 전해주었다.

산이와 우리 가족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담임 선생님과 직업훈련 담당 선생님은 두 분 모두 산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서두르지 말라(Be patient)는 말을 남기셨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산이의 담임선생님들한테 엄마로서 내가 부탁했던 말이 바로 기다려 달라, 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을 선생님들로부터 내가 듣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산이를 선물로 주신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인내를 배워가라는 것이라고 늘 말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산이가 학교를 떠난 후 앞으로의 삶에 대해 결정된 것이 없다는 사실에 불편한 마음이었다.

방학 기간이 끝나도 이제는 돌아갈 학교가 없다는 것이 헛헛하기만 한데 산이는 빨리 방학했으면 좋겠단다. 산이에게는 학교에 가지 말라는 말이 큰 꾸짖음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산이는 빨리 학교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만 스물한 살의 특별한 청년에게 학교는 어떤 곳이었을까?

방학을 하루 앞두고 아이가 학교를 갔다 왔는데 시큰둥했다. 친구들하고 선생님들하고 다 만났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네 반 친구들이 많이 안 왔다는 것이었다. 주초에 있었던 피자 파티가 학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나 보다. 둘째 아이 말 듣고 학교에 보내지 말 걸 그랬다. 남은 하루의 등교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 보내고 공교육을 끝낸 새로운 삶의 단계로 슬쩍 옮겨갔다. 감사하게도 산이는 여느 날처럼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바심도 조급함도 그에게서 느껴지지 않는다. 정한 때에 일을 이루시며 서두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산이의 어딘가에 숨겨놓으셨나 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잘 알려진 라르슈나 캠프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도 그런 마을을 이루어 살면 좋겠다는 꿈을 늘 꿔왔다. 산이의 학교 이후의 삶을 시작하며 돌아보니, 물리적인 공간을 가진 마을은 아니었어도 사랑의 관계로 이어진 공동체 안에서 살았음을 깨닫는다. 산이를 중심으로 가족, 친척, 친구들과 그들의 가족, 교우들,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이 산이를 풋풋한 젊은이로 키웠다. 라르슈 같은 마을공동체도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니, 꿈 같은 그런 마을을 만들 수 있는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져 있다. 

11/07/2013

IEP (2)


Prom 2013


 
앞으로 두 번 정도 남은 IEP 미팅이라도 잘 해보자는 생각으로 일 년 전 받았던 IEP 서류를 꺼내 다시 훑어보았다. 모든 학교 생활이 끝나면 부모와 같이 산다고 하더라도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전자레인지를 이용하여 간단한 음식 조리해 먹기, 식기세척기나 세탁기 사용하기, 시계보고 시간 알기, 동전과 지폐의 가치 알고 헤아리기, 일터에서 다른 사람의 건설적인 비판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기…… 이러한 목표들을 학교에서, 집에서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 묻고 답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직업훈련과 관련된 질문을 적어보기 위해 강산이가 그 동안 일했던 곳과 맡겨진 일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살펴보았다.

여기 지역 과도기 학급(transition class, 만 18-21 세)의 직업훈련은 기본적으로 다니던 고등학교에 출석하면서, 학교 안에서 일하는 것(school-based work experience)과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것(community-based work experience) 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 참고로 전에 살았던 곳에서는 직업훈련이 ADAPT(Assisting Developing Adults with Productive Transitions)와 STRIVE (Supported Training and Rehabilitative Instruction In Vocational Education) 프로그램으로 나뉘어 있다. ADPAT는 다니던 고등학교에 계속 머무르면서 학교와 지역사회를 경험하는 프로그램이다. STRIVE는 교육 시간 내내 일터로 직접 나가서 직업 훈련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이것 역시 공교육 과정에 들어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4 년을 마친 후 이 두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주마다 다르고, 같은 주라도 카운티마다 조금씩 다르다. 사실 강산이를 통해 미국의 특수교육을 아주 조금 경험했을 뿐 새로운 현실에 맞닥뜨리면 여전히 어리바리 하다.

강산이네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직업훈련은 학교 소식지 발송을 위해 라벨 붙이기, 온실 관리, 일정 지역 청소 등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강산이가 지역사회에서 했던 일은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수건 정리하는 일, 백화점이나 Family Thrift shop(재활용품 파는 곳)에서 옷 따위를 옷걸이에 걸어 진열, 정리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USC School of Medicine(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 약학대학)에서는 사무실 업무 보조 역할로 편지 발송을 위한 라벨 붙이기와 간단한 서류 정리를 했다고 한다. 직업훈련과 관련되어서는 실습을 나간 곳에서 강산에게 맡겨진 일들을 잘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가장 재미있게 잘 하는지를 꼭 물어보리라 적어두었다.

그리고 강산이가 학교 밖에서 잘 하고 있는 일 한 가지를 더 적어두었는데, 교회 재정부에서 집사님들을 도와드리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집사님들이 헌금 정리하시는 시간에 강산이가 교회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일마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 같아 집사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하루는 사무실 문을 살짝 열고 강산이 보고 그만 나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집사님은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도 마음이 쓰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한 집사님께서 강산이가 어디 있느냐며 찾으셨다. 재정부 일 볼 시간이라면서 말이다. 집사님은 일부러 강산이와 함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집사님들 곁에 강산이의 자리를 마련해주신 그 배려에 어찌나 감사하던지…… 강산이가 사무실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재정부 일이 끝났는지 종이 두 장을 들고 나온다. 그 중 하나인 헌금 수입 보고서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교회 게시판에 걸어두고, 다른 하나인 재정보고서는 재정부장님과 목사님의 사인을 받아가지고 간다. 그 일을 하는 동안 강산이의 걸음은 얼마나 힘찬지 모른다. 이 사실을 IEP에 가서 얘기하고 싶어 잘 보이게 적어놓았다.

정해진 IEP 미팅 시간보다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현관에서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실이 있는 3층으로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데 마침 강산이와 담임 선생님이 엘리베이터 문 앞에 와 있었다. 회의실이 1층으로 바뀌었다며 내려가자고 했다. 엄마가 학교에 온다고 강산이가 많이 좋아라 했다며 선생님께서 전해주셨다. 선생님이 그 말을 하는 바람에 금방 잊었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면 조금 헤맬 뻔 했다. 학교가 생각보다 넓고 복잡하다.

담임 선생님은 회의를 시작하자며, 그 동안 여러 차례의 IEP 미팅을 하느라 애쓰셨을 텐데 오늘이 마지막 회의가 될 것이라, 고 말씀하셨다. 2014 년 1월에 강산이가 스물 한 살이 되므로 이번 학년도가 마지막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장애 학생은 스물 두 번째 생일 전 날까지, 그러니까 교육 받을 수 있는 21 세까지는 꽉 채워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 강산이는 이번 학년도가 끝나는 2014년 6월이 끝이 아니라 스물 두 살 생일이 들어있는 2015년 1월이 끝이어야 하는 것이다. 내년 6월이 끝인지 몇 번 확인을 했는데 그렇다는 것이다. 한 학기 일찍 학교를 마친다고 해서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학교 심리학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강산이가 학교를 마친 후에 일할 곳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강산이가 자원봉사든, 보수를 받든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생긴다는 것은 사회와 소통하는 길 가운데 중요한 하나다. 그 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것일지라도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어떤 노력도 하기 전에 단정지어 얘기하는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한편 일터와 더 먼 거리에 있는 중증장애인들을 생각하면 강산이의 경우는 투정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담임 선생님은 강산이가 지난 IEP 목표들을 대체로 잘 수행했다고 평가해주셨고, 나는 준비해간 직업훈련과 관련된 질문들을 주로 했다. 선생님은 강산이가 특히 사무실 업무를 좋아하고 잘 한다고 하셨다. IEP 초안에도 사무실 일과 관련된 기술들을 강화하는 계획들이 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의 약학대학 사무실에서도 일을 아주 잘 했다고 하셨다. 강산이가 교회 재정부에서 일을 돕고 있다는 것도 비슷한 종류의 일인 것 같아, 선생님의 평가에 이어 자연스럽게 잊지 않고 얘기할 수 있었다. 보통은 IEP 회의에 가도 난 그다지 말이 많지 않은데, 이번엔 미리 준비한 얘기가 적절하게 강산이의 강점을 드러내는데 도움을 준 것 같았다. 신기하고 감사했다. 담임 선생님은 이번 IEP모임을 한 장에 정리한 문서를 나중에 보내주셨는데, 강산이가 사무실 업무를 더 잘하기 위해서 지역 내 다른 교회나 미술을 가르치는 사무실 등에서 훈련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잘 되었다.

또 마지막 IEP 모임이기 때문에 가디언십(Guardianship, 장애인의 법적인 후견인을 세우는 일)이나 직업재활센터에 대한 정보를 다른 때보다 구체적으로 제공해주었다. 데이케어(day care, 주간보호시설)에 대해서는 지난 번과는 달리 언급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방문하여 알아본 데이케어 종일반에 다닐 경우 매월 3,000 달러 정도의 비용이 든다. 또 현재 어느 장애학생이 다니는 데이케어에서도 그 정도의 비용을 받는다고 그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 있다. 이 비용은 개인적으로 부담하기도 하고, 메디케이드 웨이버(Medicaid waiver, 연방정부가 정한 기준에 해당되는 장애인에게 주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는 사람은 주정부가 그 비용을 담당하게 되므로 장애인 본인은 무료로 데이케어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메디케이드 웨이버 대기자가 몇 천명에 이른다. 여기는 5,000 명 정도 된다고 했다. 강산이가 데이케어를 이용하려면 그 비용을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와우! (더 적은 비용으로 다닐 수 있는 주간보호시설이 있는지, 이것을 지원하는 정부차원의 다른 서비스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와우! 반면, 만약 저렴한 비용으로 다닐 수 있는 데이케어가 있다면 애틀랜타에서 만난 여러 장애우들이 다니고 있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내가 만난 이들 중에 한 명도 없었다.)

회의를 마치고 갑갑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가면 되겠지, 하면서도 산 넘어 산 같이 여겨진다. 당장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해서 그 짐을 덜어내리라. 애틀랜타에 살 때 알고 지내던 어느 장애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공립학교에 언제까지 다닐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스물 두 번째 되는 생일 전 날까지 다니는 거라고 했다.

나는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애틀랜타에서는 스물 두 살 생일이 되는 전 날까지 학교를 다니는데 강산이에게 이번 학년도가 마지막인 것이 맞느냐고 말이다. 선생님은 바로 답장을 주셨다. 주마다 법 적용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정책에 따르면 21 세 생일이 들어 있는 학년도까지만 학교에 다니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내년 6월 6일이 마지막 날, 맞는다고 하셨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답글을 보내드렸다.

보통은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직장을 갈 나이쯤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는데 우리 강산이는 더 가까이 오게 된다. 강산이가 학교를 다 마친 후의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패턴의 삶이 딱 한 학기만큼 더 가까이 와 있다.  

10/30/2013

IEP (1)


<고등학교 첫해에 참석한 홈커밍 파티에서 >
 


IEP는 Individualized Education Program 혹은 Individual Education Plan(개별교육프로그램)의 준말이다. 나의 첫째 아들 강산이 같이 장애가 있는 학생(student with special needs-장애인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로는 the handicapped, the disabled, 그리고 special needs 따위가 있다. 그 가운데 special needs가 제일 맘에 든다)은 일 년에 한 번씩 IEP를 검토, 수정, 보완하기 위한 모임을 갖는다.

보통은 일 년을 주기로 IEP 모임을 갖지만 일 년이 되지 않았을 때에도 장애학생을 교육하는데 IEP 모임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부모나 교사는 언제고 모임을 요청할 수 있다. IEP 모임 일정은 학교측에서 한 달 전, 그리고 적어도 5일 전, 이렇게 두 번 알려주도록 되어있다. 한 달 여유를 두고 모임 날짜를 알려주지만 사정이 생기면 날짜와 시간을 형편에 맞게 조정할 수도 있다.

이 회의에는 학생, 부모, 특수학급 교사, 일반학급 교사는 꼭 참석하고 IEP를 결정해야 하는 사항에 따라 학교 심리학자, 과도기 전문가(transition specialist), 상급학교 교사, 학교 사회복지사(school social worker) 등이 참석하기도 한다.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부모는 통역사를 요청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부모 입장에서 교사들에게 내 아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학교 밖에서의 생활을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을 초청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교회학교 교사나 과외활동 지도교사 등이다. 이런 경우에 부모와 함께 동행하는 사람에 대하여 학교에 미리 알리는 것이 예의인 것 같다.

IEP 모임에 대해 알고 있는 일반적인 규칙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미국에서 아이를 어려서부터 키운 부모나 이민 생활이 오래된 부모들은 IEP에 대한 경험이 많을 터이니 여기에 덧붙일 것들이 더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강산이는 현재 공립학교의 과도기 학급(transition class, 만 18-21 세)에 속해 있다. 장애가 있는 학생은 공립학교에 만 21 세까지 다닐 수 있도록 특수교육법에 정해져 있다. 과도기 학급은 학교를 떠나서 사회에 나가면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일자리를 얻어 봉사하거나 급여를 받아 생활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곳이다. 과도기 과정을 위한 계획은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는 만 14 세부터 세워진다. 그리고 고등학교 4년 과정 이후에 과도기 학급에서는 사회에 통합할 수 있는 학습과 훈련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부모님은 고등학교 이후에 정규 교육 과정으로 과도기 학급에 다니는 아이들을 두고 대학 다닌다고 재미있게 얘기하기도 한다.

미국에 와서 처음 살았던 애틀랜타에서 첫번째 IEP 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선생님들이 물어보는 것에 답하는 것 밖에는 말을 거의 안 한 것 같다. 이 모임의 성격도 잘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학교에 처음 다니게 되는 강산이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아 속이 상해있기도 했다. 낯선 사람과 환경 속에서 강산이는 자기를 어떻게 표현할 줄 몰라 몸도 마음도 웅크리고 있던 때였다. 언어도 통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선생님이 뭘 지시해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 지시를 따를 수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선 한 학년이 새로 시작되는 시기였으나 미국은 학년 말이어서 많은 부분 기다려주고 설명해주어야 하는 새로운 전학생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학교의 입장을 이해하고 학교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하며 두어 달을 괴롭게 보내고 모인 자리였다.

그 모임에는 고등학교 선생님 두 분이 와 있었다. 강산이는 한국에서 홈 스쿨을 하다가 남편의 목회지가 옮겨지면서 더 이상 홈 스쿨을 할 수 없어 뒤늦은 만 9 세에 초등학교 일 학년에 입학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왔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수업을 받으러 간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측에서 강산이를 어찌 생각했는지 나이를 문제 삼았다. 미국 학제에 따르면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나이이므로 고등학교 선생님을 초청했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왔으니 미국 법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중학교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는 것이 어찌 이상했다. 학생, 부모, 선생님이 동의가 되면 나이가 한 살 많아져도 중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다른 장애학생 부모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선생님 두 명 가운데 남자 선생님은 짧지만 한국 경험이 있는 분이었는데, 강산이에게 다가가 한국 말로 인사를 나누어주셨다. 또 다른 선생님도 잔잔한 목소리로 영어 인사를 건네며 웃어주셨다. 강산이는 고등학교 남자 선생님과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면서 관심을 나타냈다. 매가리가 하나도 없고 웃음을 보여주지 않는 중학교 담임 선생님과 심술궂고 딱딱한 표정의 특수학급 전담 교감 선생님과는 참으로 대조적이었다(이러한 인상은 중학교 선생님들이나 나나 서로에게 마음이 열려있지 않았기에 그리 보였을 거란 걸 안다). 세 시간 가까이 엄청 오랫동안 진행된 IEP 모임에서(그 이후에는 평균적으로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함께 참석하고 있던 강산이는 매우 의젓한 태도를 보여주었고 중학교 교감 선생님의 친절한(!) 지시에 따라 주어진 과제도 문제 없이 수행했다. 중학교 측의 강산이를 밀어내는 듯한 입장이나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강산이 서로의 호의적인 태도, 공립학교에 소속된 어느 한국인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강산이는 하루가 다르게 적응해 나갔고, 일 년이 지나 IEP 모임에 갔을 때는 학교 생활을 즐거워하고, 자기 반 친구들 친절하게 잘 도와주며, 게다가 영어로 학교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선생님 말씀에 깜짝 놀랐다. 우리 식구 중에서 영어를 두려움 없이,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강산이가 되었다(강산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한국어를 읽거나 쓰는 것도 문제 없다. 이 또한 자랑스럽다). 또 여기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로 이사 와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동생 윤이가 전해주는 말에 따르면, 형이 학교에서 무척 인기가 높고 아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특히 여학생들과 친한데 서로 아는 척하며 포옹하는 것을 늘 본단다. 누굴 닮은 것인지……

지난 주에 강산이를 위한 IEP 모임이 있었다. IEP 회의에 가려면 늘 긴장됐는데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다. 여러 해 동안 IEP에 참석했다고 여유가 생겼나,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이 미리 작성한 IEP 초안을 가지고 회의를 하다 보면 그 문서의 내용이 자세하고 강산이에게 필요한 교육 목표들을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어서 질문하기 보다는 잘 듣고, 동의하고 그와 관련된 강산이의 강점을 애기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강산이가 사회로 나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지 직업 훈련과 관련된 질문들이 여러 개 떠올랐다.
 
---다음에 이어서

12/17/2010

저희 집에도 빈 방 있어요

          <몇 년전 만들어두었던 것을 오랜만에 꺼내 창문에 걸어놓은 성탄 장식들입니다.>


성탄절 행사 때 하는 연극이기도 하고, 성탄절 설교의 예화로도 쓰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빈 방 있습니까”입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한국의 어느 연출가가 대본을 쓰고 연극으로 만들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연극은 성탄절 즈음이 되면 대학로 소극장에서 오랫동안 상연되곤 하였답니다.

연극 내용은 교회 고등부 아이들이 성탄절 축하 연극을 준비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습니다.
아이들 가운데는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덕구가 있었는데, 연극 담당 선생님은 덕구도 연극에 참여시키고자 대사가 아주 짧은 여관집 주인 역을 맡깁니다.
덕구가 해야 할 대사는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집에 오면 “빈 방 없어요”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덕구와 함께 연극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덕구는 연극 연습을 아주 열심히 합니다.

연극을 발표하는 날이 되어 막이 오르고 연극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만삭이 된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집 문 앞에 이르렀고, 그들을 본 덕구는 자기가 맡은 대사 “빈 방 없어요”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덕구는 잠깐 연극과 현실을 혼란스러워 하며, “빈 방 있어요. 마구간에 가지 마세요” 하면서 웁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자기가 연극을 망쳤다고 우는 덕구에게 담당 선생님은 오히려 덕구 때문에 성탄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위로하며 연극은 마치게 됩니다.


이 연극이 올 성탄절에 생각나는 것은 저희 집에도 빈 방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인 것 같습니다.
덕구처럼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께 드릴 맑고 깨끗한 사랑이 저한테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저희 집 빈 방에 초청하고픈 간절한 마음은 있습니다.
빈 방에 오셔서 저희의 기도 소리를 들어주시고, 저희의 찬양을 들어주시고, 저희의 예배를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희 집 빈 방도 보잘것없으나 아기 예수님이 누우신 곳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낯선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들의 방문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 저희(저희들 이름 아시죠?) 집에도 빈 방 있어요!!!”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 천사들이 목자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간 뒤에, 목자들이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 /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일이 자기들에게 일러주신 그대로임을 알고, 돌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찬미하였다.”(누가복음 2장 7, 10-12, 20절/ 새번역)

12/10/2010

"기적의 오케스트라-엘 시스테마(El Sistema)"를 보고


영화 “엘 시스테마(El Sistema)”는 2008년에 만들어져서 한국에서는 올해 8월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엘 시스테마는 남미에 있는 베네수엘라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음악 교육 재단을 가리키는 말로, 베네수엘라의 상징이 된 단체이기도 합니다.


이상이 현실로
1975년,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현재 71세)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총, 마약,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11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브레우 박사는 오케스트라나 합창단 같은 단체를 통하여 사회관계를 배우고, 협동과 단결을 배우며, 음악을 통하여 지성을 계발하고, 정서 함양을 도와주고, 잠재된 예술적 재능을 열어주어 세상의 위험과 유혹에서 구해줄 수 있다는 이상을 현실화하기 위한 사회운동으로 엘 시스테마를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엘 시스테마를 통해 지난 35년간 30만 명의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악기를 나눠주고 교육한 아브레우 박사는 거리를 배회하던 아이들에게 소속감을 주고, 질서, 책임과 의무, 배려 등의 가치를 익히게 해, 자신은 물론 가족과 이웃을 빈곤과 무질서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회복지와 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우레브 박사는 올해 10월 제10회 서울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엘 시스테마는 184개의 센터가 운영되고 있으며, 2015년까지 50만 명, 2020년까지 100만 명의 아이들을 참여시킬 계획을 가지고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데, 그 운영 자금의 90%는 정부가 지원하고 나머지는 개인 기업과 다국적 기구 등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우레브 박사는 이 프로젝트를 운영하기 위해 음악가로서의 자질뿐 아니라 경제학 박사로서의 노하우와 정치가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365일 엘 시스테마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큰 걸음으로 나아가야죠. 코끼리처럼"
이 영화에서 열두어 살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들의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나이에 비해 성숙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얼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총 싸움이 끊이지 않고 가난하지만 자기가 태어난 동네를 좋아하고, 부모의 지원과 학교의 선생님들을 따라 부지런히 공부하고 음악을 배우며, 범죄자나 문제아가 아니라 “꿈을 이루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 다부지게 말합니다.
영화의 거의 끝부분에서 다시 한번 인터뷰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 아이는 삶의 목표를 이루는 이치를 깨달은 것 같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큰 걸음으로 나아가야죠. 코끼리처럼”이라고 합니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노래를 배우고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입니다.
2세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 그 학교(센터)에서 배우고 연주하는 표정과 몸짓은 사뭇 즐겁고, 진지하고, 열정적입니다.
연주할 악기 부족하기 때문에 종이로 악기를 만들어 종이오케스트라에서 배우는 아이들이나 진짜 악기를 가지고 배우고 연주하는 아이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또 아이들은 프로 연주자가 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계속 실력을 발전시켜나가고, 프로 연주자가 된 선배들은 후배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선배들은 자신이 음악을 통하여 얻은 경험과 함께 연주 기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아이들은 선배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특수음악반
엘 시스테마에는 장애우들을 가르치는 센터가 있어서, 이미 1500 명이 오케스트라에 진출해 있기도 합니다.
장애우들도 합창, 수화합창, 악기를 배우고 연주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엘 시스테마는 역시 한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이 될 만하다(^^), 장애우 가족으로서 저는 그리 보았습니다.


그 밖에 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배경음악으로든 실제 연주하는 음악으로든 들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유럽의 어느 유명한 음악가로부터 차세대 최고의 지휘자로 인정받은 28세의 구스타보 두다멜의 지휘하는 멋진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라, 등장 인물들이 전하려고 하는 정신이나 경험들을 귀담아 들으려고 해보았습니다.
새롭게 교회를 시작해야 하는, 아니 이미 시작한 목회자의 가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도 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276oR_tEmbs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8-19)

10/22/2010

이런 과수원 보셨나요?

<밀알사모님 웃음이 예뻐서 올려봅니다. 괜찮죠? ^^>

10월 초, 사과 과수원에 갔었습니다.
그 과수원에서는 상품 가치가 있는 사과는 기계로 따서 팔고, 남은 사과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자하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와서 딸 수 있도록 하는 곳이었습니다.
마치 구약 성경에 나오는 보아스의 밭처럼요.

과수원은 이러한 뜻을 여기 지역 UMC(미연합감리교회)에 해마다 알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인여목회자인 김목사님이 담임하시는 미국인 교회가 주최가 되어 사과를 따고, 그 사과 가운데 일부를 밀알선교단을 위해서 쓰겠다는 계획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과를 따고 옮길 때 힘 쓸만한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며 우리 가족을 초대해 주시는 밀알선교단 총무님의 따뜻한 말씀을 듣고, 우리 가족 모두 힘을 보태기로 했습니다.
좋은 일도 하고, 사과 과수원 구경도 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과수원에서 딴 사과를 파는 마켓도 안팎으로 얼마나 정겹게 꾸며놨던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도착한 사과밭은 얼마나 넓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상품으로 팔 사과는 이미 땄다고 했는데, 크고 작은 사과들이 나무마다 어찌나 많이 달려있던지 또 한번 놀랐습니다.
땅에 떨어진 사과들 가운데 멀쩡한 것들은 그것대로, 나무에 달린 것들은 그것대로 따서 자루에 담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미국 교회 교인 몇 분과 목사님, 그리고 밀알에서 어른들 몇 분 해서 15명 남짓(맞나요?)이 반나절 동안 차에 실을 수 있는 만큼만 사과를 땄습니다.
욕심을 부려서 너무 많이 실으면 타이어가 펑크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과의 일부는 교회를 통해서 어느 자선단체에 보내졌고, 일부는 밀알선교단을 위해서 쓰도록 했습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거저 주는 사과이니 개인적으로는 가져갈 수 없고, 팔 수도 없으며, 떨어진 사과 때문에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에 안전 문제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습니다.
과수원 주변에서 불을 피울 수도 없는데, 함께 참여한 밀알어머니들이 준비한 음식은 나누어 먹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허락되었습니다.

음~ 이러면 안 되는건대 밀알 총무님이 살짝 나눠주신 사과를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연두색 사과는 다 시다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팍 깨주었습니다.
아주 아주 달게 먹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는 과수원 주인의 넉넉한 마음과 이런 기회를 살려 밀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하려는 총무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말이죠.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 … /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룻 2:12, 15-16)

8/06/2010

고마운 테니스 시간


강산이가 일주일에 한번씩 테니스를 배우고 있습니다.
처음 해보는 운동이라 좋아할지 어떨지 모르고 얼떨결에 시작했습니다.
테니스를 시작한 지 10 주쯤 된 것 같은데, 테니스 하러 가는 날을 언제나 기다리고, 운동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며, 공도 제법 그럴듯한 자세로 잘 칩니다.


강산이에게 테니스를 지도해 주시는 최코치님은 밀알선교단을 통하여 만나게 되었습니다.
코치님의 귀한 레슨 시간을 나누어 장애우 10 여명을 위해 자원 봉사하시는 것입니다.
왠지 운동하시는 코치님들은 무서우실 것 같았는데, 첫 시간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털털하게 대해주셔서 강산이만 봐도 얼마나 편안해 하는지 모릅니다.


또 아이들이 테니스 하는 동안 공을 주워 모으거나 레슨이 끝난 아이들과 잠깐 동안 테니스도 쳐주는 고등학생 자원 봉사자들도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학생들입니다.
코치님께 감사한 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학생 자원 봉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의 마음입니다.

정말(!) 이상하게도 테니스 하는 날 그 시간이 되면 하늘에 구름이 많이 껴서 흐려지거나 비가 와서 운동을 못하기도 하고, 여러 명이 레슨 시간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짧게 할애되어 아쉬운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산이가 마음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땀 흘리며 운동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5: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