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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2026

비올레트, 묘지지기



뉴올리언스는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묘지의 외관이 벽돌이나 그 위에 회칠한 작은 집 모양이면서 구획에 맞추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묘지 문화는 18세기 프랑스와 스페인 식민지 시기를 지나면서 스페인식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몇 년 전 뉴올리언스로 이사했을 때 지역 한인들을 처음 만난 곳이 바로 그 묘지였다. 고인은 향년 90세로, 뉴올리언스에서1980년대 목회하실 때부터 사셨던 목사의 아내였다. 고인을 생전에 뵌 적도 없는데 고인은 새로운 곳이 낯설기만 한 우리 가족을 이렇게 환영해 주셨다. 우리는 고인이 섬겼던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목회자 가정이었다.

뉴올리언스로 오기 전, 우리는 신의 곁을 떠난 적은 없지만 목회를 이어갈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뉴올리언스에 교인 다섯 명이 2년여 동안 목회자 없이 주일예배를 지키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땅에 내려서지도 못하고 하늘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을 떠다니던 마음이 뉴올리언스를 향했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뉴올리언스에서 살기로 했다. 그 마음을 고인도 알아채셨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환영하는 신비로운 방식에 휩싸였던 느낌은 프랑스 작가, 발레리 페랭이 쓴 장편소설 《비올레트, 묘지지기》를 읽으며 다시 살아났다. 이 소설은 주인공 비올레트가 사랑하고 연민하며 절망으로부터 ‘힘겹게’ 삶의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을 비올레트를 중심으로 한 세 부류의 주변인물들로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부류로, 비올레트가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비올레트는 스물아홉 살에 묘지지기가 되고 그곳에 잠든 이들을 예의와 마음을 다하여 돌본다.

두 번째는, 비올레트 곁을 떠나간 사람들이다. 비올레트는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비올레트의 엄마가 그를 낳았을 때 사산아인줄 알고 옆으로 밀쳐 놓았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온통 보랏빛을 띤 아기가 살아났다. 보라색을 뜻하는 비올레트가 아기의 이름이 되었다.

비올레트의 남편은 비올레트 곁에 온전히 머문 적이 없다. 비올레트는 위탁가정을 전전하다가 열일곱 살에 잘생기고 무책임한 필리프 투생을 만난다. 그들은 결혼했으나 투생은 비올레트와 만난 첫 해부터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비올레트가 피폐한 삶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에도 투생은 자기만의 사랑을 찾아 사라졌다.

비올레트와 투생 사이에는 딸 레오닌이 있다. 레오닌은 비올레트에게 살아갈 힘이고 기쁨이다. 레오닌은 일곱 살 생일을 앞둔 여름, 캠프에 참여했다가 의문의 죽음에 이른다. 비올레트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캠프 주최측과의 재판에서 레오닌과 친구들이 우유를 마시려다 사고를 일으켰다는 증언을 듣는다. 레오닌은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 비올레트는 그 사고가 인재라고 확신하고 원인을 규명하려고 나선다. 그 과정에서 투생의 여자들도 알게 된다. 비올레트를 멸시하는 투생의 부모가 저지른 비극도.

마지막 부류는, 비올레트에게 사랑과 연민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그 중에 셀리아와 사샤가 떠오른다. 그들은 고아인 비올레트에게 마치 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존재들이다. 비올레트가 묘지지기를 하기 전 건널목지기였을 때, 국영열차 파업으로 객차가 건널목 근처에서 멈춘 적이 있다. 비올레트는 열차를 살펴보다가 데리러 와줄 사람이 없는 셀리아와 손녀 에미를 발견한다. 비올레트는 그들이 집에서 묵어가도록 호의를 베풀었고, 나중에 셀리아는 비올레트에게 그의 별장 문을 열어둔다.

셀리아는 묘지지기를 하던 사샤에게 비올레트를 소개한다. 신비한 치료사 같은 사샤는 인상깊은 인물이다. 비올레트는 사샤를 만나자마자 마음의 평화를 경험한다. 사샤에게는 비올레트에 대한 어떤 평가의 기색이 없다. 사샤는 비올레트에게 관사에 딸린 정원을 가꾸는 법을 가르쳐주고 묘지의 일상을 보여준다. 비올레트는 딸의 죽음을 딛고 자신이 거듭 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샤는 은퇴하면서 비올레트에게 묘지지기 바통을 넘겨준다. 비올레트는 사샤를 보면서 뱃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꾸며낸 어떤 것이나 인생에서 잠깐 지속되는 흥분 같은 것이 아니라, 충만감”을 느끼면서 “그 여름을, 그 순간을, 정원을, 사샤를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한다.

나는 비올레트와 주변 인물들 사이에 극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가족의 부재나 죽음 같은 무거운 주제를 위트와 추리로 균형을 잡는다. 무엇보다, 생명을 돌보며 오늘을 사는 비올레트를 만나 반가웠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와 당당뉴스에도 실렸습니다.

11/22/2025

낚시




우리는 뉴올리언스에서 동북쪽으로 뻗은 낯선 길로 들어섰다. P는 I-10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 사용하던 옛길이라고 알려주었다. 한적한 도로였다. 얼마 지나 좁고 녹슨 다리를 건넜다. 곧이어 나무 방파제가 있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나무 방파제는 낡았고 갓길에는 쓰레기가 너저분했다. 보통은 이곳에 차를 세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지도를 살펴보니 그곳은 물이 폰차트레인 호수에서 보른 호수로 흘러가는 길목이었다. 낚시꾼에게는 특별한 곳이었다.

P부부는 해 뜰 무렵과 해 질 무렵에 물고기가 잘 잡힌다고 이구동성으로 알려주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물고기가 거의 잡히지 않으며 너무 더운 여름과 겨울에는 낚시하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우리가 낚시터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지평선을 벗어나 있었다. 좀더 서둘러야 했을까? 햇빛은 습지 위 부시시한 관목의 실루엣을 따라 그윽하게 번졌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노인이 피우는 매캐한 마리화나 냄새는 우리 쪽으로 번졌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낚시할 채비를 서둘렀다. P부부는 낚시 먹잇감으로 살아 있는 새우를 가져왔다. 직접 잡았단다. 우리 가족에게 어떻든지 물고기를 잡게 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이 전해졌다. 고마웠다. 릴낚시 던지는 법도 알려주었다. 검지로 줄이 늘어지지 않게 긴장을 조절한다. 그러다 낚시대를 앞으로 튕기며 줄을 적당한 때에 놓아야 한다. 일찍 놓으면 추가 코 앞에 떨어지고 만다. 나는 서너 번 P의 도움을 받았다. 내 힘으로 던진 낚시추가 개천 저쪽 가장자리 가까이 날아가면 기분이 좋았다.

낚시를 시작하자마자 우리 부부는 물고기를 한 마리씩 잡았다. 초보자의 행운이었다. 모두 캣피시였고 물로 돌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낚시줄이 당겨지니까 당황하여 낚시대를 얼른 P에게 넘겼다. 그 바람에 손맛이라는 걸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아쉬웠다. 나의 아들은 캣피시를 잡기도 하고 거두는 과정에서 놓치기도 했다. P는 우리를 돌보면서도 트라우트와 블루크랩을 한 마리씩 잡았다.

어수선한 순간이 지나고 보니 해는 나무 꼭대기를 벗어나 있었다. 물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윤슬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지러웠다. 지난밤부터 불던 바람이 잦아들지 않았다. 풍속이 12mph. 5mph이하이거나 바람 없는 날이 낚시하시에 좋다고 했는데… 다들 화장실도 가고 싶다고 했다. 그 자리를 떠날 때였다.

우리는 다른 낚시 장소로 이동했다. 고속도로 옆으로 난 서비스도로가 끝나는 곳에 다리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서너 명이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한 사람은 통발로 꽤 많은 블루크랩을 잡았다. 게 잡는 명당인가 보다. P는 게가 좋아하는 닭 모가지도 준비했다. 우리는 다른 낚시꾼처럼 게라도 많이 잡히길 바랐다.

한 시간 정도 지났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피로가 슬슬 몰려왔다. 다른 사람들도 왔다가 금방 돌아갔다. 나는 고기 잡기에서 릴낚시 잘 던지기로 목표를 수정했다. 나는 다리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낚시 던지기를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와는 달리 아들은 우두커니 서있다가 고기를 잡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캣피시여서 다시 놓아주기는 했지만, 아들은 무척 좋아라 했다. 거기서는 P가 잡은 블루크랩 한 마리가 전부였다.

우리는 점심으로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다. 바람 부는 날과 따뜻한 국물은 제대로 어울렸다. 점심 먹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P와 대화하면서도 눈은 반쯤 감긴 상태가 되고 말았다.

 P 부부는 깨끗이 손질한 트라우트 한 마리, 블루크랩 두 마리, 그리고 수십 마리의 살아 있는 새우를 얼음에 재워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들을 라면에 넣어 끓여 먹으면 먹을 만하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그것들을 분리해서 얼른 냉동했다. 새우는 다음 낚시에서 미끼로 사용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라면은 쇼핑 목록에 추가했다.

아들은 낚시가 좋다며 또 가자고 연거푸 말했다.  “그러게. 엄마는 한 마리 밖에 못 잡았는데 산이는 여러 마리 잡았네!” 맞장구를 쳤다.

“나 기도했어.” 아들이 말했다.

“뭐라고? 물고기 잡게 해 달라고?” 내가 물었다.

“응!” 아들이 대답했다.

낚시가 이렇게 간절하고 사귐이 있는 활동이었나? 감사하게도 기억났다.



*이 글은 애틀랜타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11/10/2025

다시, 가을 소풍




뉴올리언즈 한국학교에서 시티 파크로 가을 소풍을 갔다. 시티 파크는 꽤 넓다. 그 중에서 우리 학교가 소풍 장소로 정한 곳은 탁 트인 잔디밭. 그곳은 끝 간 데 없이 맑고 푸른 하늘과 데칼코마니 같았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줄지어 선 야자나무 마저도 싱그러웠다. 올 초 한파 때문에 누렇게 시들었던 이파리들이 하나도 안 보였다. 우리의 가을 소풍을 위해 여름내 정성을 들여 단장한 모습 같았다.

이 야자수 길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첫 장면에 나오는 야자수 길이 떠오르게 했다. 영화에서 받았던 이국적이고 신비한 느낌이 정수리로 스멀스멀 올라오려 했다. 마침, 게임을 시작하기 전 몸풀기를 위해 국민체조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영화의 줄거리를 생각해내려는 공허한 시도를 거둬 들였다.

너무나 익숙한 국민체조 음악이 나오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체조를 인도하는 선생님의 동작은 절도가 있었다. 나도 동작을 큼직하게 따라하고 싶은데 티셔츠 길이가 짧아 팔을 높이 들면 넉넉한 배가 다 드러나게 생겼다. 체조를 하는 듯 마는 듯 하려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6학년 때인가… 아침 조회 시간에 운동장에서 국민체조를 할 때였다. 다 아는 동작이니 눈 감고 하면 어떨까 싶어 그렇게 했다가 다른 반 선생님한테 꿀밤을 맞았다. 눈을 떠보니 일렬로 서 있는 줄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두 상황이 겹치면서 웃음이 지나갔다.

네 살부터 성인까지의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누었다. 선생님들은 준비한 게임을 하나씩 진행했다. 팀별로 한 줄로 섰다. 공을 머리 위로 마지막 사람한테까지 전달했다가 공을 다리 사이로 처음 사람에게 다시 보내는 게임. 다음으로, 같은 팀끼리 손에 손을 잡는다. 한 사람씩 훌라후프를 통과하여 마지막 사람까지 훌라후프를 보내는 게임. 단, 잡은 손을 놓치지 않아야 하고 훌라후프를 손으로 잡지 말아야 한다. 나이든 학생들은 요령 있게 몸을 꼬았다. 꼬맹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언니, 오빠들이 동생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영어로 알려주었다. 급한 상황에서는 영어가 먼저 나오나 보다. 학생들 대부분이 이민 1.5세이고, 나이가 제일 어린 반과 성인반은 모두 미국 원어민이다. 학국어를 배우려는 원어민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는 분위기다.

입에 빨대를 물고 과자 양파링을 전달하는 게임도 했다. 처음에는 한 번에 4개까지 옮길 수 있다는 제한을 두었지만 다들 게임에 몰두하는 바람에 제한을 없앴다. 한 번에 예닐곱 개씩 너끈하게 옮긴 팀이 결국 이겼다. 컵에 물을 담아 멀리 세워놓은 병에 채우는 게임도 빠트릴 수 없다. 규칙을 이해하기 쉬운 게임이라 그랬는지 모두가 열성적으로 물을 날랐다. 근소한 차이로 승패가 갈렸다.

마지막으로, 종이비행기 멀리 날리기. 한 학생이 자기만의 방법으로 비행기를 접었다. 그 비행기는 모양도 근사했고 꽤 멀리 날아갔다. 또, 언니들을 따라 소풍 나온 꼬마가 비행기를 제일 멀리 날렸다. 우리는 모두 놀라워하며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사실 게임이 두 개 더 준비되어 있었지만 전체 일정과 비 올지도 모를 날씨를 고려하여 점심을 먹기로 했다. 거의 모두가 김밥을 싸 온 것 같았다. 나는 미국 올 때 엄마가 사준 찬합을 슬금슬금 풀어 놓았다. 나는 김밥 싸는 게 영 번거롭기도 하고 잘 말지도 못한다. 그래서 밥하고 반찬을 챙겨왔다. 반찬 그릇도 여러 개에다가 덜어 먹을 그릇까지 챙겨야 하니 이것도 번거로운 일이나 어쭙잖은 김밥보다 나을 것 같았다. 살짝 어색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내 도시락이랑 다른 선생님들 김밥이랑 나눠 먹었다. 다음번에는 나도 어떻게 하든 김밥을 말아올지도 모르겠다.

소풍 내내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서두르는 선생님들이 없었다. 학생들은 게임을 열심히 하면서도 이기려고 아웅다웅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미소가 가을꽃처럼 피어나는 시간이었다. 난 선생으로 따라와서 이렇게 맘 편히 소풍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디지털게임이나 문화에 익숙한 시대를 살면서 몸을 부대끼며 노는 일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글은 앨라배마 코리아 타임즈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