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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2023

아빠가 부쉈어!




순이는 사우나를 하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순이가 사는 메이플릿지 공동체를 천천히 걸어서 돌아보던 중 사우나집은 흥미로운 곳 가운데 하나였다. 숲속에 아담한 호수가 있고 그 가장자리에 나무로 지어놓은 집이 바로 그곳이다. 사우나는 좋으나 준비물을 챙기는 것과 사우나 이후에 머리를 말리고 단장하는 과정이 번잡스럽지 않을까 싶어 순이의 물음에 대답하는데 뜸이 들었다.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 주저하는 나와는 달리 단호하고 적극적으로 보이는 순이의 기운은 이미 나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입을만한 반바지를 내어주고 빠르게 수건을 챙겨 길을 잡았다. 숲길을 자박자박 걸어가 호수를 다시 만났다. 호수 한쪽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모래밭이 보였다. 한낮에는 어린아이들이 수영을 배우고 있었는데 모래밭까지 있어서 물놀이할 맛이 나겠구나 싶었다.

자그마한 사우나실에는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사우나실의 냄새였다. 나무 향과 수증기가 섞인 건강한 냄새라고나 할까. 열기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계단식 자리의 맨 윗자리에 앉았다. 머리맡에 길게 연결된 줄을 당기면 달구어진 기계에 물이 쏟아져 뜨거운 수증기를 만든다. 줄을 몇 번 잡아당겨 온몸이 땀에 젖자 순이는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와우! 호수에 몸을 담가 땀을 씻어냈다. 냉온욕이 따로 없다. 마침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한여름에 온몸으로 맛보는 달콤한 시원함이었다. 차분하게 내리는 빗소리뿐인 숲속 호수에 몸을 담그고 수다를 떨다니, 이런 경험은 살면서 쉽게 할 수 없을 듯하다. 이렇게 사우나실과 호수를 서너 번 오가며 열기와 냉기를 즐겼다.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 손님의 피로를 풀어주려는 순이의 선택은 탁월했다.

메이플릿지에서 경험한 열기와 냉기의 반복은 사실 일상에도 이어진다. 비가 좀 많이 오면 내가 다니는 교회 건물 입구에 물이 흥건하게 고인다. 그 물웅덩이는 개구쟁이 아이들에게는 첨벙댈 수 있는 놀이터이기도 하지만 발을 적시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피해가야 하는 곳이다. 왜 물이 안 빠지나 알아봤더니 입구 옆에 심어놓은 나무가 오랜 시간 자라면서 뿌리가 올라와 물길을 막고 있었다. 그 매그놀리아 나무는 모두 네 그루로 키가 크고 잎이 많아 현관을 어둡게도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난해에 그것들을 다 잘라내었고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요즘 교회 주변을 단장하느라 백호(Backhoe) 같은 중장비가 교회 마당에 와 있다. 언젠가 그 기계를 운전하는 법을 살짝 배운 남편은 이 기회에 쓸모없는 그루터기를 제거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공적인 일에는 부지런히 열심을 내어 달려드는 편이다. 섬세함이 부족할 때도 있으나 마음을 다해 일을 이루어 간다. 워낙 덩치가 큰 기계를 건물 가까이에서 움직여야 하는 작업이라 마음이 쓰였지만, 남편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 나무뿌리를 캐내고 저녁때 들어온 남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남편이 하는 일을 지켜보았던 아들 산이는 나에게 뭔가를 알려주었다.

“아빠가 부쉈어! 나무뿌리로 팍 쳤어. 벽돌이 떨어졌어.”

이게 뭔 말인가 싶어 남편을 찾았다. 그는 산이의 고자질을 다 듣고 있었는지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설명을 덧붙였다. 굴착기로 나무뿌리를 캐내는데 끝도 없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뿌리를 어느 정도 정리한 다음, 백호 한쪽에 달린 버킷으로 파헤친 땅을 다지고 끌어당기다가 깊숙이 뻗은 뿌리에 걸려 현관 앞 회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쳤단다. 기둥을 감싸고 있는 벽돌이 일부 부서지고 말았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데 남편은 속상했나 보다. 내심 걱정스러웠다는 나의 지나가는 말에도 그의 마음이 풀어지기는커녕 더 차가워진 걸 보면 말이다. 

남편이 작업한 곳에 물길을 내야 하는 일이 남았다. 누군가 수고하면 여러 사람이 산뜻하게 그 길을 지나다닐 수 있다. 타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열정을 쏟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일이 해결되지 않는 차갑고 시린 시간을 경험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멈추고 잠잠히 물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시간도 필요하다. 이 모든 시간이 쌓여 의미 있는 삶이 되고 미래가 된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3/18/2023

나무를 심는 사람들

        




미국 식목일은 4월 마지막 주 금요일이다. 미국 남동부에 있는 앨라배마주는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높아서 그런지 2월 마지막 주가 나무 심는 주간이다. 그즈음부터 지금까지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몽고메리 다운타운을 지나 셀마로 가는 80번 국도로 들어서면 곧 몽고메리 지역 공항이 나온다. 공항 근처에는 M교회가 리트릿센터로 꾸며지길 바라는 빈 땅이 있다. 그곳은 바로 옆에 자리한 한인 기업이 30에이커 땅을 사면서 10에이커는 M교회에 기증한 땅이다. 기증자들은 그들의 땅을 쓸모 있게 만들기 위해 땅을 고르고 철제 울타리를 설치하면서 리트릿센터 부지에도 똑같은 작업을 말없이 진행해왔다. 

게다가 그들은 얼마 전부터 리트릿센터 부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먼저 감나무 200여 그루를 심었다. 감나무는 관리하기가 수월하고, 농약을 안 쳐도 괜찮고, 몽고메리 기후에서 잘 자라는 수종이란다. 매실, 백도, 자두, 대추, 복숭아, 밤나무도 30그루를 심었는데, 이러한 나무들은 키우기가 까다로워서 개수를 점차 늘릴 계획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M교회의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나무 심을 기회를 주기 위해 단감나무 85그루를 남겨놓았다. M교회의 일원인 나는 이 행사에 슬쩍 끼었다. 꽃샘 추위가 찾아오는 3월에 초여름 같은 날씨라니, 변덕스럽기도 해라! 그늘 없는 땅에서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그날의 하늘은 명랑했다.

기증자들은 친절하게도 나무 심을 구덩이를 적당한 간격으로 파놓았고 구덩이 안에는 거름도 넣어 놓았다. 한 분이 나무 심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묘목에는 뿌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접붙인 흔적이 보였다. 그 접붙인 부분이 땅 위로 조금 올라오게 심어야 하니 구덩이 옆에 있는 흙으로 높낮이를 조절하라고 일러주셨다. 묘목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물을 2갤런 정도 붓고 물이 스며들도록 기다렸다가, 그 위에 다시 흙을 덮고 발에 적당한 힘을 주어 꼭꼭 눌러주면 된다고 하셨다.

감나무는 씨를 심어 키우면 열매가 시원치 않으므로 반드시 접붙여서 키워야 함을 알게 되었다. 접붙일 때 뿌리 쪽 나무를 대목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감나무의 대목으로 열매가 풍성하고 잘 자라는 고욤나무를 많이 쓴단다. 우리가 심은 감나무의 대목은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부디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주기를 바랐다.

나무 심기를 제안하신 분들은 나무 하나하나에 물을 주며 제대로 심었는지를 확인하셨다. 흙을 충분히 덮어주지 않거나 물을 주지 않은 묘목들이 발견되었다. 정성을 다해 심었어도 이런 일이 생겼다. 심는 것보다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는 말씀이 실감 났다. 얼마 동안은 열흘에 한 번 물을 줘야 한다는 말씀에 우리 가족이 한 달에 한 번쯤 물 주기를 담당하면 어떨까, 생각만 하다가 끝내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나무를 심는 일은 꽤 멋있어 보인다. 나무를 심으려고 흙을 만지던 어느 분은 행복하다, 고 고백했단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는 지난 10여 년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고 한다. 나무가, 자연이 주는 위로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이야기였다. 

그뿐 아니라 정겨운 물물교환 이야기도 들었다. 넓은 부지 곳곳에는 검은 더미들이 커다랗게 쌓여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게 다 소똥 거름이었다. 그 거름은 회사 가까이에 사는 지역 주민에게서 얻은 것으로, 그 집에 불필요한 나무들을 잘라준 대가로 받았단다.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내는 모습이 그려져 훈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일나무를 심는 사람은 느긋한 마음의 소유자다. 적어도 2~5년을 기다려야 제대로 된 열매를 얻는다고 하니 나무 심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대단하다.

나는 막대기 같이 가녀린 나무들 사이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사람들이 신선한 공기를 가득 품은 초록 나뭇잎과 열매들 사이를 거닐다가 어느 나무 아래 무심코 놔둔 낡은 의자에 앉아 쉬어 가겠지. 시원한 물 한 잔 건네는 손에게 고마움을 전하겠지. 가지가 휘어지게 열린 열매를 이웃과 나누며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확인하며 기뻐하겠지.

한 분이 160그루를 기증하고, 또 어찌어찌 80그루를 사들여서 과일나무를 연이어 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글은 애틀랜타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12/25/2021

그냥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야


앤 라모트 지음, 한유주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2015.


"!" "으악!“

얌전하게 앞으로 진행 중이던 우리 차를 누군가 뒤에서 들이받는 순간 들린 소리였다. 상체가 앞으로 튕겼다가 목이 뒤로 꺾이는 몸의 짧은 움직임은 낯선 경험이었다. 가족 동반이 아닌 친구들과 아주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들과 약속한 곳이 눈앞에 보여 안타까움과 긴장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운전하던 친구는 어느새 며칠 동안 아팠던 사람처럼 낯빛이 회색에 가깝게 변해있었다.

3중 추돌의 맨 앞에 있던 우리 자동차의 피해는 감사하게도 그다지 크지 않았고, 이 사고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달려온 경찰들은 교통사고를 능숙하게 처리했고 다른 사고 차량의 운전자들은 친구들이 몰고 온 SUV나 픽업트럭을 각각 타고는 휑하니 사라졌다. 그들의 찌그러진 자동차는 견인차가 싣고 갔기에.

친구와 나는 차를 몰아 약속한 식당에 이르렀고 친구들과 어이없는 교통사고 얘기를 나누며 조금 지체된 저녁 식사를 했다. 한 친구가 사고당한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음식값을 치렀고 그가 사는 동네에 전시된 성탄 장식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오래된 작은 마을, 반짝이는 크고 작은 전구들, 여러 콘셉트의 성탄 트리들, 겨울 안개비와 쌀쌀한 밤공기는 좀 전의 사고에 대한 불쾌감을 옅어지게 했다. 아기 예수님이 후줄근한 중년 여성들의 마음을 살짝 들뜨게 하는데 한몫을 하셨다.

우리는 서로 집에 도착하면 문자로 안부를 남기기로 하고 헤어지려는데 다른 한 친구가 우리에게 도시락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식당에서 미리 주문해두었나 보다. 그는 도시락을 아이들에게 주지 말고 남편들에게만 주라, 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이 얼마나 지혜로웠는지는 집에 와서야 알아챘다. 고통스러운 일은 언제고 일어나고 주변 사람들의 친절과 배려는 그 침울함을 밀어내는 치료제 같았다.

작가 앤 라모트는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 테러, 전쟁, 자연재해, 총기 난사와 같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아플수록 함께 하는 행동을 찾아라, 서툰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어라···,고 조언한다. 그의 글은 우리 안에 있는 인간애가 발현되도록 슬며시 돕는데, 그것은 그 스스로가 글을 쓰거나 전쟁의 피해를 알리며 투표를 독려하고 혹은 주일학교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등 크고 작은 실천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라모트의 여러 저작을 통하여 그의 영성은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의 삶이 조각나고 흔들릴 때마다 짜깁기 받침공("달걀 형태의 나무나, 돌 또는 도기로 만들어진 물건으로 대부분의 양말 속에 꼭 맞는 크기다")같은 역할을 한 교회가 곁에 있음을 보았다. 라모트네 교회는 나쁜 날들에 힘이 되어주는 좋은 교회인 것이 분명하다.

얼마 전 나의 작은 아들은 리조트에서 스노보드를 맘껏 타는 휴가를 보냈다. 휴가에서 돌아온 아들은 자기 몸 여러 군데에 멍이 든 것을 보여주었다. 한 번은 스노보드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와 멈추려는데 도착 지점이 예상과 다른 상황이어서 급하게 몸을 틀다가 미끄러지면서 뒤로 꽈당 넘어졌단다.

다행히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충격이 너무 커서 눈이 안 떠지고 속이 울렁거렸다고. 얼마 동안 그대로 누워 있는데 한 젊은 여성이 다가와서 내려다보며 "너 괜찮니?", 라고 물어보더란다. 어린 꼬마도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가던 길을 멈추고 말이다.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니 여성은 주먹을 내밀며 주먹끼리 부딪치는 펀치를 요청했고 아이는 자기와 하이파이브 하자고 요청했다고 한다. 쓰러진 사람이 몸에 정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려고 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말을 건네고, 음식을 나누고, 함께 걷고, 또는 지난 10일 미국 중서부를 강타한 엄청난 토네이도로 사랑하는 사람과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성탄헌금을 모아 보내고, 노숙자에게는 담요를 나누는 이 모든 행동을 라모트의 말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완전해지기보다는 조각조각 난 삶을 잘 연결하는 사람으로 살자.“

 

*이 글은 모바일 앱 '바이블 25'와 인터넷 신문 '당당뉴스'에도 실렸습니다.

4/17/2019

특별기도회가 특별한 이유


<교회에 있는 사철나무 꽃. 향기가 엄청나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21일 특별기도회를 하고 있다. 이제 며칠 안 남았다. 기도회는 새벽과 아침 시간에 모인다. 여러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두 번의 기도 시간을 두었다. 각자 원하는 시간에 기도하고 있다.

난 평상시에 새벽 기도를 드리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하던 대로 기도하면 되려니 했다. 그런데 남편인 목사님은 아침 기도회에도 참여하는 것이 좋겠단다. 어떤 일보다 교회 모임을 우선시하기로 마음먹고 있는 터라 목사님 말씀을 따랐다.

새벽 기도회는 특별기도회 기간이라도 나에겐 특별한 것은 별로 없다. 보통 때 성경을 차례대로 읽어가던 것을 접어두고 선포되는 말씀이 요한복음이라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기도는 여전히 읊조리듯 드리고. 그런데 아침 기도회는 새벽과 사뭇 다르다. 찬양도 여러 곡 부르고 기도도 소리를 내어 크게 기도한다. 새벽에는 말없이 가만히 있으면서 생각이 정리되거나 무엇인가 깨닫게 되기도 하고 깜빡 졸기도 한다면, 아침에는 생각을 말로 끄집어내어 기도하다 보니 정신이 희미해질 틈이 없다. 하루에 색다른 기도회에 두 번 참여하는 올해 사순절이 나에게 특별하긴 하다.

기도하는 시간이 좀 더 늘어난 것뿐만 아니라 특별한 것이 하나 더 있다. 21일 기도회가 끝나가는 지점에 이르고 보니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느껴지는 간절한 마음이다.

우리 교회는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리적인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세심히 살펴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하도록 안내하시는 목사님이 두 분이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시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갈 젊은 에너지를 가진 삼, 사십 대 교우들이 많다. 재정은 자립 된다. 우리 교회 건물은 아니지만 거의 주인처럼 성공회 교회를 사용한다. 멀지 않은 날에 더욱 마음 편히 교회 건물을 사용하고 공간도 넓혀 가리라 기대하고 있다

교회 모임 때마다 여러 손길들이 커피와 차를 준비한다. 함께 성경공부를 하며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나눈다. 중장비를 끌고 와 주차장에 쌓인 토사를 치우고 교회 텃밭을 일구어 놓는다. 주일 예배를 위해 꽃으로 강단을 장식한다. 어떤 이들은 한 동안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쌓인 미끄럼틀을 닦아내고, 어두운 아이들 예배실에 전등을 달아주고, 교회 주변 넓은 잔디를 깔끔하게 다듬어 놓는다. 안전한 환경을 위해 경비를 서기도 하고 CCTV도 설치한다. 주일 친교를 위해 많은 양의 점심을 만든다. 교사와 성가대의 부지런한 봉사도 빠뜨리면 안 된다. 그리고, 그리고 작은 일에 충성하는 수많은 헌신과 봉사가 교회에 가득하다

김포로 목회하러 갔을 때였다. 교회의 모든 상황은 바닥이었다. 남아 있는 교인 일곱 명만이 전부였다. 눈만 감으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 뜨겁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누가 뭐라거나 말거나 기도하는 자리에만 가면 교회를 위해 목놓아 부르짖었다. 살려주세요, 우리 교회 살려주세요. 기도하다 보면 머리통이 열기로 가득 차오르고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정말 감사하게도 교회는 점점 회복되었다. 애통하며 기도하게 하심도,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심도 모두 그 분의 뜻이었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예전과 달리 지금 우리 교회는 객관적인 상황이 좋은 편인데 기도하면 또 눈물이 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교우들의 마음을 받아 주시고 그들을 기억해 달라는 호소가 자꾸 나온다.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나 보다. 가만 엿들어보니 남편의 간절함은 어떻게 해야 우리 믿음이 새로워지고 굳건할 수 있는지,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겐 너무 무거우나 거기에도 기도를 보태 본다. 교회를 위해 흘릴 눈물이 아직 남아 있음을 발견한 이 십자가와 부활의 절기가 특별하다

4/10/2019

우리들의 시간이 쌓여 가는 어느 봄날




주일 점심은 비빔밥. 교회 대청소를 하려면 힘을 써야 하는데 비빔밥은 꽤 든든한 한 끼였다. 식사가 끝남과 동시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변신을 한 교우들이 저마다 청소 도구를 들고 어딘가로 흩어졌다. 갈 곳을 못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는 나뿐인 것 같았다.

여성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방과 화장실 쪽에서 정리하고 쓸고 닦았다. 다른 화장실 쪽에는 중고등부 아이들이 매달렸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일찌감치 끼지 못한 이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로 한 쪽으로 물러나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예배실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도 털어내고, 비눗물을 풀어 친교실 바닥을 닦기도 했다. 여러 방들은 그저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들 두서너 명이 들러 청소한 흔적을 남겼다.

건물 밖에서는 나무 가지치기를 하는 전지가위의 철컥거리는 소리가 풀을 깎는 기계 소리에 묻혀버렸다. 짤린 풀과 마른 검불은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의 옷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열심히 일한 표시였다. 교회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그늘진 작은 정원의 풀과 멋없이 길쭉하게 자라버린 장미 나무가 깔끔하게 이발을 했다. 올해 부활절 맞이 바깥 청소 절반의 완성!

또 다른 절반의 완성은 놀이터였다. 얼마간 돌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해지고 벌레와 개미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생겨서 놀이터를 벌레로부터 되찾기로 했다. 여러 사람들의 손을 모아 잡초를 제거하고 벌레들을 물리치고 바닥을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 아동부 교사들의 바람대로 한 쪽에 모래 놀이터가 될 공간도 확보되었다. 일이 이 정도로 진척되었으니 다시 사용할 날이 멀지 않았다

가장 많은 인원이 놀이터 일을 도왔다. 따끈따끈한 햇볕 아래에서 하는 힘든 일이었다. 사람들은 놀이터 쪽에 가서 잠시만 거들어도 얼굴이 벌개지고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러니 너덧 시간씩 일한 교인들의 수고가 짐작된다. 바깥일을 한 그들을 위해 팝씨클이며 김치전, 피자로 새참을 내준 이들도 있어 청소의 마무리가 넉넉한 사랑으로 가득하였다.

부활절을 준비하는 일이니 몸은 힘들어도 뿌듯한 마음으로 헤어질 시간. 거의 돌아가고 몇 사람 남지 않았다. 남편은 고향에서 모내기 하다가 온 사람처럼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옷을 벗어 둔 담임목사실 쪽으로 가는 것 같더니 금방 돌아와서는 방문이 잠겼다는 것이었다. 따로 갖고 있는 열쇠는 없단다. 내 가방도 거기에 있었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은 플라스틱 카드를 문틈으로 밀어 넣어 보기도 하고, 열쇠 구멍에 뾰족한 걸 넣어 돌려보기도 하고, 건물 밖 창문을 달싹여도 보았으나 그 방으로 들어갈 수가 보이지 않았다. 문이 열려야 우리 세 식구가 갈 수 있으므로 남은 이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모두 피곤한 상태일 텐데 그런데 묘하게 걱정이 안 되었다. 하다하다 안 열리면 남아 있는 누군가 우릴 재워주겠지, 그리고 다음 날 문제를 해결하면 되지 뭐, 하는 근거 없는 여유가 있었다.  

누군가는 잠긴 문고리와 씨름하며 땀을 또 흘렸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마치 자기 방문이 잠긴 것처럼 안타까워하며 문 여는데 도움이 될 듯한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화를 돌렸다. 소용에 닿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교회 건물주인 성공회 교인들이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오후에 주일 예배를 드린다. 이제는 실내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햇빛이 엷어지고 있었다. 바람은 불고 있으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부드럽게 머물렀다. 정리된 화단 쪽에서는 베인 풀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돕던 교우들 몇이 끝까지 같이 있지 못해 미안하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두 목사네와 김 장로님은 교회 건물 앞 돌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 뿌리가 뻗으며 돌테이블을 밀어내 쓰러져 있던 것을 얼마 전 목사님 두 분이 바로잡아 놓았다. 삽으로 뿌리를 자르고 테이블 받침을 다시 흙 속에 묻어두었다. 하지만 어떤 테이블과 벤치는 아직도 삐뚜름하다.

교회 건물을 관리하는 어니스트가 온다고 하여 두서없는 얘기 보따리를 하나씩 끌러가며 기다렸다. 온다고 한 시간을 훨씬 넘겨 도착한 어니스트는 100개도 넘어 보이는 열쇠 꾸러미와 공구가 들어 있을 법한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몇 사람의 예상대로 그는 문을 열지 못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너무 웃겼다. 그래도 우리를 도와주러 온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김 장로님은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와 관련 있는 열쇠공에게 이미 연락을 취해 놓은 상태였다. 어니스트에게 먼저 기회를 준 것뿐이었다. 돌테이블에 둘러 앉아 가난한 사람들처럼 아무런 상차림도 없이 오로지 얘기만으로 배를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시간쯤 더 기다려 장로님이 섭외한 사람이 도착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열쇠공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문이 열리지 않는다며 최후에 쓸 수 있는 자신만의 비법으로 마침내 문을 열었다. 그는 영업 비밀이라며 그 마지막 방법을 목사님들과 장로님에게 알려주었다. 어쨌든 문은 열렸고 장로님으로부터 수고비를 받아 휑하니 떠났다. 장로님도 그제서야 바쁘게 길을 나섰다.

아침 1부 예배부터 거의 열두 시간만에 집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마치 아늑한 봄날 오후에 의리로 뭉친 친구들과 조촐한 파티를 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닥 피곤하지도 않았다. 교회 청소를 열심히 안 한 모양이다. 문이 어떻게 잠겼는지 모르지만 그 일로 인해 우리들의 시간이 돌테이블 위에 한 켜 쌓였다.

2/27/2019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신앙교육



<지난 겨울 어느 날, 우리 교회 두 김목사님네>


어제 우리 교회학교에서 교사와 학부모 간담회가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습을 돌아보고 우리 교회의 교회학교 교육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자리였습니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우리 교회는 30, 40대 부모가 주된 교인이므로 자녀 교육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열띤 대화와 토론, 다양한 실천 제안, 새롭게 소개한 쉐마와 하브루타 교육은 현재 우리 교회의 자녀 신앙교육의 반성과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게 하였습니다. 모이기에 힘쓰고 함께 기도하며 마음을 나누는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귀한 열매를 맺습니다. 교육은 먼 미래를 보고 가진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입니다. 앞을 내다보며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갖고 시작하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모든 부모, 특히 아버지들이 함께 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늘 하지만 직접 자신이 나서서 현실적인 방안을 함께 찾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아버지들은 아예 엄마에게 자녀 교육을 떠넘겨 버리고 방관자가 되어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갖춘 유명한 학교와 교회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높은 교육열에 비해 부모들의 역할과 책임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된 가르침을 주는 좋은 부모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교회학교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주일학교는 1769년 영국의 한 교회에서 노동자의 자녀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하며 시작하였습니다. 어릴 때 교회에 갔던 추억이 있어 교회의 문턱을 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지난 250년간 많은 교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가르쳤던 신앙교육이 수많은 어린이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신앙교육의 장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주일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전적으로 가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신앙교육의 책임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 6:7)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면 먼저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다보면 부모가 더 배우게 되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 글은 남편 김성은 목사가 썼습니다. 그리고 2월24일(주일) 주보에도 실렸습니다.

1/16/2019

물러설 때와 나설 때


<숲 속 길을 걷다가>


교회는 나의 삶이다.

난 교회가 참 좋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다. 성장하는 시기에 맞게 드려지는 예배나 행사에 빠지지 않았고, 어떤 일이나 과제를 주어도 싫어하지 않고 끝까지 완수했다. 교회에 있으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했다.

김포에서 목회할 때였다. 상가건물을 빌려 10명도 안 되는 교인들과 어렵게 신앙생할을 하다가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다. 교회가 지어지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구석 구석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매주 교회를 방문하거나 등록하는 새가족이 생겨났다. 나의 부모님도 교회 옆으로 이사오시고 어려서부터 알던 고향 친구도 어찌어찌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내가 할 일도 적지 않았다. 전도, 심방, 예배 안내, 찬양 인도, 아동부 교육, 성인 교육, 주방일, 청소... 어릴 적 소원대로 교회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남편은 당신은 부목사나 마찬가지야, 라며 고무하였다. 나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교인이 점점 늘어나던 그즈음 당회에서 남편은 나에게 맡겼던 교육부장을 다른 이로 바꾸어 발표하였다. 새로운 교육부장은 나의 친구였다. 나랑 한마디 의논도 없었다. 교육부장이든 아니든 나에겐 별로 의미가 없었지만 남편에게 서운했다. 사실 결혼해서 함께 목회하는 내내 교회학교 교육은 거의 내 몫이었다. '교육부장이든 아니든 별로 의미는 없었지만' 남편은 교육부장에 내 이름을 올려놓곤 하였다. 남편은 내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직분-달라고 요청하거나 수락한 적도 없는-이 뭐가 중요하냐며 당신은 교회 전반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오히려 강조하였다.

그해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때였다. 강습회에서 찬양과 율동을 잘 익혀 성경학교 때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했다. 비용을 아낄 생각으로 율동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하지 않았다. 악보만 모아놓은 책도 한 권만 샀던 것 같다. 강습회에 세 명이 참석을 했는데 찬양 책은 주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찬양을 열심히 따라 했고 나는 율동을 기억하기 좋게 적어놓고 있었다. 열심히 율동을 익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교육부장이 악보가 담긴 책을 휙 끌어가 자기 앞에 놓았다. 난 순간 멍했고, 뭐가 잘못되었나 그 순간을  머릿 속에서 반복할수록 화가 났다.

나의 엄마도 나 만큼이나 교회를 사랑한다. 어쩌면 나보다 순수해서 교회에 더 심하게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모녀지간이니 기질적인 면에서 닮은 구석이 있겠지만 교회에 관하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부분이 많지 않은 듯싶다.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된 엄마 권사님은 주방 일을 거의 도맡아 하셨다. 엄마는 음식을 맛있게 만드신다. 양이 많은 음식도 겁내지 않고 만들어내신다. 성격이 깔끔하셔서 일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면 할 일이 하나도 없이 마무리를 해 놓으신다. 엄마는 나에게 교회에서 할 일이 많은데 주방 일은 이젠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딸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그러셨을 것이다. 엄마 마음을 이해했기에 주방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교회 젓가락이 몇 벌인지도 알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그곳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교회가 부흥하고 교인이 늘어나서, 여러 사람이 일을 나누고 협력할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감사한 일이었다. 교회는 변화하고 성장하는데 난 옛모습에 머물러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일들을 맡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일상이 되어 있었다. 어떤 일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나님을 위해, 적어도 교회를 위해 열심히 무엇인가를 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일을 나누기도 하고 아예 그 일을 놓고 물러서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 새로운 일(사명)로 나아가야 한다. 난 그걸 전혀 모르고 살다가 가족과 친구에게 제대로 한 방 맞고 깨달은 것이다. 그 한 방의 여운이 가시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미국으로 건너와 애틀랜타에서는 교회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천 여명 모이는 교회의 부목사 아내에게 요청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서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런 상황을 어색해 하는 나에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해서 하나님이 쉬라고 하시나 보다. 지금은 그냥 편안히 쉬어.”

엄마의 조언처럼 그저 쉬면서 내 믿음만 잘 지키면 되었다. 덕분에 영어공부하는 학교도 기웃거리고, 선교센터의 간사도 해보고, 한국학교에서 가르치는 경험도 갖게 되었다. 콜럼비아교회에서는 다시 담임 목회자의 아내로 지내야 했지만 한국에서처럼 온갖 일을 다하려고 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일인데 하려는 사람이 적거나 없을 때 기꺼이 나섰다.

지난해 9월, 몽고메리제일교회가 새로운 목회지가 되었다. 한국에 계신 강화 어머님과 통화를 하면서 아동부를 돕게 되었는데 교회학교 교육에서 멀어져 있었기에 잘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된다고 말씀 드렸다.

“ 힘들어도 열심히 햐.~ 배운 게 아깝지 않니? 내가 할려고 하면 안 댜아.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햐.”

어머님은 연세가 70대 중반을 넘어선 강화 망월교회 권사님이시다. 어느 날 연합속회를 인도하시게 되었다. 순서에 따라 진행하시던 중 성경 읽는 것을 까먹고 다음 순서로 넘어 가려 하셨다. 그러자 어머님 가까이에 계시던 박장로님이 눈치로 알려주셨다고 한다.

“이렇다니까요!”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교인들이기에 모두가 공감이 되어 까르르 웃고 지나가셨단다. 그러고 나서 어머님은 속회 인도자를 그만 내려놓겠노라 목사님께 말씀드렸다고 얘기해주셨다. 어머님은 이 일로 물러설 때를 감지하신 것이다.

우리 가족이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할, 몽고메리제일감리교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배움이나 경험이 교회를 위해 쓰여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엄청 감사할 뿐이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물러서야 할 때 가벼이 발걸음을 돌리리라.

1/02/2019

몽고메리에서 쓰는 이야기


<몽고메리로 이사하던 날, 휴게소에서>

지난해 9, 앨라배마주의 주도인 몽고메리로 이사를 왔다. 우리 가정이 이사를 하는 주된 이유는 남편이 목회하는 교회가 바뀔 때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제일교회를 사임하고 몽고메리제일감리교회(이하 몽고메리제일교회)에 부임했다.

한국 감리교단에 속한 미국 동남부지방은 6개 주를 아우르고 있다. 이 지방에는 36개 교회가 있는데 방문해본 교회가 몇 되지 않는다. 다른 교회를 방문하게 되는 대부분의 이유는 목회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거나 지방 행사가 있기 때문이다. 앨라배마주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두 번이나 몽고메리제일교회를 다녀가게 되었다.

한 번은 2017년 여름, 텍사스에 사는 친구를 보러 가는 길에 들러가게 되었다. 남편은 콜럼비아에서 오후에 출발하여 자동차로 여섯 시간쯤 걸리는 몽고메리에서 하룻밤 묵는 여행 일정을 짜 놓았다. 몽고메리를 거쳐 굳이 돌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대학교 후배 목사가 거기에 있었다. 저녁을 먹고 오는 바람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늦어 밤 아홉 시가 넘어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회 입구를 놓치고 몽고메리제일감리교회라고 써 있는 표지판을 발견하고는 유턴하여 찾아 들어왔다. 어두컴컴하고 넓은 주차장 한 켠에 차를 세웠다. 교회 건물이 큼직하고 안정적이었다. 잠시 기다리니 후배 목사님 부부가 달려왔다. 남편은 그 목사님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처음 만나는 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목사님은 교회로 들어가자고 안내해 주셨다. 예배실에 들어가 먼저 기도를 드렸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기를, 담임 목회자와 그 가정을 지켜주시기를, 그리고 우리 여행에 동행하여 주시기를 호흡을 몇 번 고르며 짧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들어보니 큰아들 산이는 어느새 드럼세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드럼 치는 것을 좋아하는 산이는 어느 교회를 가더라도 드럼 있는 곳으로 이끌려 간다. 난 그저 관심만 있지 만들어보지 않은 배너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교회 입구에 있는 휴게실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교회를 떠났다.

다른 또 한 번은 그로부터 반 년쯤 지나 지방회에 참석하러 몽고메리제일교회를 다시 오게 되었다. 지방회가 열리는 2월 초, 그때는 일을 하고 있었고 사무실이 무척 바쁜 때라 지방회에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장로 진급 과정에 있는 장로님 한 분이 동행해주길 원하셨다. 장로님은 여성이셨는데 낯선 곳에서 하룻밤 지내야 하는 것을 불편해하셨다. 장로님과 먼 길 오가며 더 가까워질 수도 있고, 다음 번 지방회에서 두 장로님 안수식도 있으니 미리 보아두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여 몽고메리에 내려오게 되었다.

지방회에 속한 지역이 워낙 넓다 보니 회원들이 모이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저녁을 먼저 먹고 회의는 식사 후에 열린다. 식사 시간 즈음에 도착한 우리는 교회 친교실에서 콩나물 김칫국을 먹었다. 지방회는 큰 행사이고 더군다나 안수를 받는 장로님도 있는 교회에서 잔치 음식이 아닌 간소한 상차림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교회 규모가 작지 않은 것으로 보아 먹는 것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알뜰한 교회인가 보다 미루어 짐작했다. 음식을 나누어주는 교인들은 원피스 같은 세련된 앞치마를 한 젊은 사람들이었다. , 사십 대 젊은 교우들이 많지 않던 교회에 있었기에 부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살피게 되었다. 젊은이답지 않게 부산스럽지도 않고 밝아 보이지도 않아 이 또한 기억에 남았다.

손님으로 지나쳐 갔던 몽고메리제일교회에 대한 기억은 여기까지다. 두 번의 방문은 어두운 밤이거나 오후여서 교회 주변을 돌아보거나 할 겨를이 없었다. 다음 날들도 갈 길이 바빠 도시를 구경할 마음을 조금도 갖지 못했다. 그냥 서서히 잊혀질 단기 기억 저장소에 담긴 조각들이었다.

지방회 다녀간 때로부터 다시 반 년쯤 지나 남편은 몽고메리제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우리 인생의 문이 언제 어디서 닫히고 열리는 지 신비롭다. 몽고메리에서 2018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았다. 몇 개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교회 안팎의 행정적인 일처리를 하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보내며 교우들과 어울려 지냈다. 기쁘고 설레기도 했고, 가슴 철렁하기도 했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이제는 한 순간 한 순간을 소중하게 살펴 오래 기억될 한 편의 이야기를 써야 할 듯하다.

7/23/2018

그 날은 바로 오늘이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설교했던 기념교회(사바나,조지아주)


마지막 날, 그 날, 혹은 최후 심판이 있음을 성경을 통해 알고 믿으면서도 구체적인 성경 구절이 마음에 새겨지지가 않았다. 심판이 먼 훗날에 있을 일이고 두렵기 때문인가 자문해 보았다. 아마도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무게중심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루 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결과가 그렇지 않더라도 성실히 살려고 노력했다는 자기변호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빠진 느낌이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린도전서 3:10-15)

어느 교우와 신앙 생활에 대해 재미나게 얘기하다가 그이로부터 이 말씀을 듣게 되었다. 전반부는 익숙한데 후반부의 낯선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교우는 마지막 날에 보석으로 남고 싶다고 부끄러운듯이 말했다. 나의 신앙생활은 불로 테스트를 한 후에 남는 것이 있을까. 영적인 생명은 있으나 공적이 없어 다 불타고 없어질 나무나 풀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나무나 풀은 생명조차 없는 짚이나 매한가지로 모두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닌가, 긴장되었다.

이 공적은 교회와 연결되어 있다. 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 그 수고가 열매 맺어야 한다. 자신에 대한 기대나 믿음으로 가득 차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자신만 주목 받기를 바라는 것은 영원한 것에 속하지 못한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 의지하고 세워주며, 예배와 기도와 성경을 가까이하도록 서로 권면해야 한다. 데살로니가교회처럼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이루는 공적, 사랑의 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둔 소망을 가지고 인내(데살로니가전서 1:3)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불을 통과해도 정결한 금, , 보석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그 날(13)은 바로 오늘이다.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신실한 사람이고 싶다. 그냥 좋은 사람은 엄청 많다.

5/06/2018

전환시대 3


<2016년 4월 증축 중인 친교실>


2018427일은 나의 조국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는 날이었다. 그 역사적인 장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곳은 한국과 13시간 차이가 나기에 26일 저녁 식사 후에 조그만 아이패드 스크린을 앞에 두고 앉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을 향해 자동차로 이동하는 장면부터 보기 시작했다. 가슴이 설레었다. 남과 북의 최고 지도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무척 기대가 되었다. 드디어 두 지도자가 만나 두 손을 꼭 잡을 때는 약간(!) 목이 메면서 감격스러웠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해서는 궁금함이 있었다. 몸짓, 말투, 목소리에도 집중이 되었다. 유머가 있고 생각에 여유가 있는 젊은 지도자로구나 여겨졌다. 북한에 대한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회담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기분 좋게 잠 자러 들어갔다. 물론 남편은 졸면서도 밤이 새도록 아이패드를 켜놓고 그 앞을 지켰다.

새벽기도 갈 시간보다 조금 일찍 잠이 깨었다. 엉겁결에 남북정상회담의 결과인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회담 일정이 잘 진행되고 있음이 확실했다. 들뜬 기분으로 교회에 다녀왔다. 아침을 먹으면서는, 정성스레 잘 준비된 잔칫집에서 격조 높게 손님 접대를 하는 남한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랑스러웠다. 8천만 동포의 염원을 담아, 우리 겨레가 평화와 번영으로 나아가는 전환시대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직장 생활한다고 미루고 쌓아두었던 지난 3년의 개인적인 삶을 정리하고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시작했다. 내 삶이 곧 교회와 붙어있는 신앙생활이다 보니 교회 얘기가 주가 되었다. 미우나 고우나, 좌절이 되거나 희망이 있거나 교회는 내 삶터다. 우리교회도 새로운 사명으로 초대받고 있는 전환시대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그 사명을 분별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우리교회 얘기를 좀 더 해보련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 미주연회 동남부지방 실행부 회의를 거쳐 우리교회는 2016 1, 거의 15여 년 만에 교단 재허입이 결정되었다. 지방 목사님들은 교회의 상처가 치유되고 성장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교회를 받아주셨다. 남편도 당시 25년 목회를 한 교단 정회원의 자격을 회복하였다.

친교실 증축을 위한 건축 허가가 떨어졌다. 바닥을 콘크리트로 채우는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기존 건물 밖에 콘크리트 바닥만이 마련되었을 뿐인데 교회는 기대감으로 들썩였다. 거리에 세워진 오래된 교회 간판도 바꾸었다. 새롭고 산뜻했다. 전교인 야외 예배도 오랜만에 드렸다. 장소 섭외가 늦어져 교회 마당에 있는 쉘터에서 모였다. 우리교회는 터가 넓어서 큼직한 쉘터도 지어져 있다. 하필이면 그날 소나기가 세게 내렸는데,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고 맛있는 시간을 보냈다.

2016 4월에 증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겨우 두 달여 만에 친교실은 확장되었다. 또 한 달쯤 뒤에는 준공검사도 끝났다. 넓어진 친교실에 들어갈 비품들을 마련하느라 건축비가 좀 더 들어갔으나, 에어컨디셔너 구입과 설치, 새 건물에 비해 바래 보이는 곳에 페인트 칠하기 따위는 자원하여 봉사하였다. 어려운 과정 속에서 건축이 마무리 되었음을 아는 교우들은 그들대로, 새로 들어와서 건축되는 기쁨을 짧게 맛본 교우들은 그들대로 하나님이 우리교회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였다. 또 하나 감사한 것은, 2014 8월 폐암 말기라고 진단받았던 양권사님은 암이 온몸으로 전이가 계속 되는 상황이나 지금까지도 주일예배에 꼭 참여하신다

결국 2015 1월에 선포된 교회의 두 가지 목표, 친교실 증축과 교단 가입은 2016년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교회 차원에서 큰 일이 다 끝난 듯 했는데 2016 12월에 열린 교인 총회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쯤에서 거참! 일 많은 교회네, 하면서 진부한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십 년 넘겨 살면서 이런 일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나눌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교회가 처음 지어질 때 은행으로부터 받은 융자금이 2017년을 앞두고 5만불(5천5백만원쯤)이 남아 있었다. 우리교회가 받은 융자는 몇 년마다 재융자를 받아야 했다. 재융자를 받기 위해서는 보증인도 필요하고 처리과정에 드는 비용도 적지 않게 필요했다. 예산도 적은 교회에서 재융자에 드는 비용과 이자가 아까웠다. 남편은 교우들 가운데 교회에게 5만불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것으로 은행 융자금을 갚고, 돈은 빌려준 교우에게는 3년 안에 갚되 이자는 주지 않는 조건이었다.

이번에는 선뜻 나서는 분들이 있었다. 남편은 한, 두 분이 부담스럽지 않게 다섯 명이 만불 씩 빌려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남편을 포함하여 다섯 교우들이 금방 채워졌다. 모두 친교실 증축에 필요한 기도, 재정, 봉사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헌신한 교우들이었다. 교회와 교우들 사이에 차용증서도 쓰고 공증도 받았다. 교회에서 갚아주는 순서는 서로의 형편을 고려해 구두로 정하고 공증해 놓았다.

교회에서 돈 거래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며 질색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증축과 교단가입, 대출금 상환은 우리교회가 딛고 일어서야 할 절박한 문제였고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남편이 늘 하는 말이 있다. 빌려주는 사람은 못 받을 것으로 알고 빌려주고, 받는 사람은 꼭 갚을 마음으로 받으라고. 정말 감사하게도, 3년 안에 다섯 명에게 갚기로 한 5만불을 단지 1년 동안에 다 갚아 버렸다!

남편은 제일교회에서 경험한 일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기도 외에는 없어. 때가 찼을 때 그 때를 분별하고, 비전과 당위를 가지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가야 되는 거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믿음으로 선언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야 해.”

불확실하고 위험한 순간들을 교우들과 함께 극복해나가면서 교회, 목사, 그리고 교우들간에 신뢰가 형성되었다.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의 의지와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나 우리교회를 진리와 번영으로 가는 전환점에 올려 놓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판문점에서 발표된 남북공동선언문을 들어보니 남편이 한 말을 일반 언어로 풀어놓은 듯 했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시대를 분별하며,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언어는 비슷한 모양이다. 요즘 정치적 상황을 두고불가역이란 말을 종종 듣게 된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 원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공동선언문에서 나는 결코 뒤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교회도 불가역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고, 지나간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와 신앙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은 전환시대다. 이제는 교회 건물이 아니라 교회의 몸인 우리가 새로 지어져야 한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2-8)

4/29/2018

전환시대 2

<2015년 3월 교회 쉘터>


2015 1월 첫 주일이었다. 신년예배 설교를 하면서 남편은 한 해 목회 계획도 얘기했다. 남편은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그 연장선에 있는 두 가지 목표였다. 하나는 친교실 증축이고, 다른 하나는 교단 가입이었다. 우리교회의 과거 역사나 지역사회에서의 평판, 분위기를 갈아 엎고 복음이 자라고 열매 맺을 수 있는 새로운 토양을 준비하자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이 목표들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 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탁의 말도 덧붙였다.

앞서 말한 두 가지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함께 기도하지 않는 분들은 반대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반대하고 싶으시다면 잠잠히 있는 것으로 보여 주십시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상황을 몰고 올 수 있는 말이었다. 뭘 저렇게 까지, 목회 여부를 걸고…… 안정지향적인 나한테는 끔찍했다. 2014년 교인 총회 후에 미국 중북부에서 목회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었다. 아이들과 같이 단란한 가족 여행처럼 다녀왔지만 남편은 내내 묵직한 분위기였던 이유를 그제야 알 듯 했다. 제일교회에서 목회하게 된 하나님의 뜻이 무얼까, 이 시점에서 목회자로서 어떤 지도력을 가져야 할까 고민이 많았나 보다. 가장 가까이에 있어도 마음 속은 정말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맞다. 남편의 성정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보기 좋게 업적을 세워서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을 꾸밀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목회적인 사명을 위해 모험을 감행할 결단과 용기를 얻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제일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 필요한 일들이었다. 이 설교가 교우들 각자에게 어떻게 다가갔을 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목사님의 말씀이 마음에 다가오면 협력하면 되고, 마음에 다가오지 않으면 가만 있으면서 진행되는 일을 지켜보면 되는 것이려니 정도로 이해했다.

신년 예배를 드리고 나서 교회 증축을 반대하는 교우들은 마음이 많이 불편했던 것 같다. 그들은 몇 분 되지 않았지만 교회 의사 결정에 중심이었다. 우리교회는 독립교회로, 그간의 경험에 비춰 연합감리교회의 관례를 따르고 있었다. 지켜야 할 교단 법이나 교리와 장정, 중재할 교단 감독자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목사에게 목회협조위원회 소집을 요청했다. 나중에 들어 알게 된 바로는 회의에서 담임 목사의 사임을 논의했다고 한다. 누군가 제안했고, 일부는 침묵으로, 일부는 반대로 의사 표시를 했고, 결과적으로 목사 사임 안은 부결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몇 년 동안 목사와 교우가 함께 신앙 생활하면서 쌓은 관계가 보잘것없게 느껴져서 슬펐고, 지난 교회 역사에서 목사들을 불신하던 반복적인 태도에 조그마한 변화가 느껴져서 떨렸다.

이렇게 교회 임원들과 교우들 대부분이 새로운 변화를 원하고 있음이 확인되면서 2월 첫 주일에 건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건축위원장으로는 그린집사님이 선택되었다. 설계도가 그려지고 건축업자가 선정되었다. 예산은 57천불(6천만원쯤)이었다. 예산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그리 큰 공사가 아니었다. 원래 있던 친교실의 한 쪽 벽을 허물어 조금 더 넓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민 생활을 해보니 현실로 보나 교회 문화로 보나 목돈으로 헌금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증축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이것을 반대하던 이들은 어느 날부턴가 교회에서 볼 수 없었다. 그때의 심정을 담아 블로그에 올렸던 글, 마냥 좋지는 않아도 봄은 새롭다의 마지막 부분이다.

구태의연한 교회에서 벗어나서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흐름이 교우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마음들이 모아져 결정된 친교실 증축이 못마땅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마냥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우들 대부분이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 뜻이 무엇일까를 묻고 또 물으며 이 새로운 변화의 흐름에 끈기 있게 동참하고자 마음 먹고 있다. 생명이고 진리이신 주님이 동행해주시길 겸손히 바라며 새로운 길을 가다 보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음을 고백하게 되리라 믿는다. 새로운 변화를 이어갈 담대한 용기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길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 이제 남편이 제안한 방법대로 대출을 받지 않고 건축비로 57천불이 모아져야 했다. 여기에 덧붙여 남편은 교우들이 헌금하고 모자라면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 마이!!! 이상주의자, 대의를 앞세우는 남편을 만나면 이런 위험을 살아가는 동안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연애할 땐 이걸 몰랐다, 젠장.

남편도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니 믿음으로 선포한 것으로 알아들었다. 교회 건축에 있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한국에서 목회할 때 이미 체험한 바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남편은 책임이라는 표현은 일이 완성되도록 하겠다, 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재정적인 책임이 아닌 다른 의미로 알아들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하여 기대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증축을 적극적으로 원하던 분들이나 사는 형편이 넉넉해 보이는 분들이 나서주길 은근히 바랐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이런 일이 닥치면 그는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다)은 본을 보여야 한다며 어찌어찌 마련한 건축헌금을 먼저 드렸다. 몇 분도 동참하셨다. 그래도 2만불 정도가 부족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교회 밖의 일을 해 본 경험이 거의 없고 영어로 말하는 것도 엉성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없었다. 해야 할 것 같은 생각만 자꾸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님께 묻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사순절이 끝나는 날, 알고 지내던 이웃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이가 일하는 회계사 사무실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이었다. 회계에 대한 아무 지식도 없었는데 이 소심한 인간이 용감하게 지원을 했다. 대학 시절부터 회지나 문서 따위를 만들면서 타자기나 컴퓨터를 조금 다루었던 경험이 무척 도움이 되었고, 나름 꼼꼼한 성격이 회계라는 일을 하는데 제법 잘 맞았다. 또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역사회를 좀 더 알아가는 좋은 기회였다.

이 일을 통하여 얻은 수입은 건축비에 보태는데 도움이 되었다. 교회에서는 경상비가 줄어들었음에도 목사의 생활비는 꼭 챙겨주셨다. 하지만 그대로 시간이 지나면 교회 재정은 적자가 날 상황이었다. 남편은  나의 수입이 있으므로 한동안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를 줄여서 적자가 되는 부분을 메꾸었다. 교회나 내게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한 시기를 지내고 보니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내 삶의 3년 동안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한 그 이웃과 일자리를 내어준 회계사님께 고마운 마음이다. 무엇보다 내가 어디서 무얼 하든 언제나 조용히 동행해주신 주님께 감사 드린다.  

폐암 말기를 선고 받은 양권사님은 방사선치료와 약물치료를 받고 계셨다. 양권사님의 남은 생명을 삼 개월에서 육 개월이라고 한 의사의 진단은 빗나가고 있었다. 아프신 중에도 예배를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고 계셨다. 권사님은 해마다 고구마를 농장에서 직접 구입하여 한인들에게 판매하곤 하셨다. 수익금은 주로 교회를 위해 쓰셨다. 친교실 증축이 소원이라 한 것이 강력한 동기가 되어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었으니 이번에도 고구마를 팔아서 건축비에 보태겠노라 말씀하셨다. 권사님은 특유의 긍정적인 마음으로 아픔을 잊은 체 고구마를 열심히 실어 나르셨다

고구마 판매에는 교우들이 모두 동참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족한 건축비 2만불을 책임져야 하는 남편은 열과 성을 다해 고구마를 팔았다. 권사님, 권사님의 남편 딕스집사님, 그리고 남편은 고구마를 멀리까지 배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같은 주뿐 아니라 노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주의 여러 감리교회가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한 고구마라는 이유로 기꺼이 사주셨다. 동참해주신 동료 목사님들과 교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이제라도 전한다. 예산으로 세운 건축비용은 모두 마련되었다.

관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10월에는 우리가 사는 콜럼비아 지역에 큰 홍수가 났다. 날씨의 변동이나 자연재해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 지역 주민들은 많이 놀랐다. 당시 주지사였던 니키 헤일리는 1000년에 한 번 겪을만한 최악의 홍수라고 말했다. 건축하는 사람들이 공공 업무와 더 시급하게 건물을 지어야 할 일들에 손을 보태느라 우리는 더 기다려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남편은 우리교회의 교단 가입을 위해 절차를 밟고 있었다. 2015년은 새해 첫머리에 세운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긴장과 헌신과 기다림으로 채워진 한 해였다. (계속)

4/23/2018

전환시대 1

걷는 이
<2014년 교회 모습>

우리 가족이 콜럼비아제일교회에 오기 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편인 김성은 목사가 제일교회에 부임하기도 전에 친교실을 넓히려는 계획이 있었다. 교회가 부흥되어 교우들의 수가 조금만 더 많아져도 친교실이 복잡했다. 그러니 손님들을 초청하는 행사 때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러 교우들이 친교실 증축을 건의하였고 그러한 요구들이 모아져 증축을 위한 몇 가지 일이 진행되기도 했다. 2008, 설계도가 그려졌고 어떤 건축업자의 공사비 제안서도 있었다. 그에 따라 은행 대출도 받았으나 미국 금융 위기기 시작되면서 대출도 되갚아버리고 이 일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2011,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고향이 된 애틀랜타를 떠나 사우스 캐롤라니아 주의 주도인 콜럼비아로 이사 왔다. 우리가 온 그해부터 일년을 마감하는 교인 총회가 열릴 때마다 일부 교우들에 의해 친교실 증축에 대한 안건이 계속 상정되었다. 목사님은 증축에 대하여 온 교우가 한마음 될 때까지 기도하자고 했다. 그때 우리 교회는 아이들을 포함하여 35명쯤 되었는데, 교우들이 점점 더 결합하면서 50명쯤 모이는 작은 교회였다.

2014 8월이었다. 연세가 칠십 중반 되신 양권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서 폐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하셨다. 남편과 나는 열 일을 제치고 권사님 댁으로 달려갔다. 권사님은 사실 수 있는 날들이 삼 개월 내지 육 개월 정도라고 의사로부터 들은 말을 전해주셨다. 권사님의 남편 되시는 딕스집사님은 무거운 표정으로 아무 말씀도 없었다. 나는 2013년 뇌종양 수술을 받으시고 몇 개월 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체 계시다가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서, 양권사님이 암 말기라는 얘기에 상황이 예측되는듯하여 마음이 무척 아프고 슬펐다.

권사님은 그 즈음에 시편을 한국어로 읽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앞으로도 계속 읽을 것이고 그래서 괜찮다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주셨다. 죽음이 눈 앞에 있는데 그리 말씀하시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분명했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 말이 제일 편한 권사님이신데, 남편 덕에 영어도 하시고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한국어도 하시게 되었다. 처음 권사님을 만났을 때는 일본어 성경을 가지고 다니셨는데 점차 한국어 성경을 읽기 시작하셨다.

이어서 권사님은 교회와 관련하여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권사님은 친교실이 증축되는 것을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권사님께서는 사람들과 사귀고 어울리는 것을 아주 기쁘게 여기시고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또래 모임이나 예배도 열심히 참여하신다. 그래서 그런 소원을 갖게 되셨으리라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나는 권사님의 소원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룰 수 없는 소원인듯하여. 교회에서 증축을 결정하는 일도 어려울 뿐 아니라 결정이 된다 해도 몇 개월 안에 지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양권사님의 건강 상태는 교우들에게 빠르게 알려졌다. 남편은 교우들에게 권사님의 남은 생이 평안하시길 중보 기도하자고 부탁했다. 동시에 권사님의 소원에 대해서도 전해주었다. 정기 임원회 때도 그 소원은 안건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친교실 증축을 원하지 않는 이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증축을 놓고 기도하지도 않고 있었다. 사실 기도의 자리에 가 있을 뿐 기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지도 여러 해가 지난 생태였다.

나와는 달리 남편은 깊이 기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우리를 대하는 어떤 교우들의 마음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면, 남편은 하나님의 마음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남편은 가능성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여름에 양권사님이 교회에 대하여 가진 마지막 소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떨렸다고 했다. 가톨릭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은 우리 인생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고 고백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리키는 살아 있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우리 곁에 살아 있든, 우리 기억 속에 있든, 하나님이 인생길에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은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고 보여준다.”(분별력, 140)

헨리 나우웬은 공동체에서 만난 장애인, 가톨릭 성인들, 짧은 만남의 방문자, 제자, 동료, 등등을 말하는데, 남편에게는 양권사님이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교우들 가운데 교회 증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2002년 교회를 지으면서 받은 대출금에서 아직도 7만불 정도가 남아 있기에 그걸 먼저 갚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빚이 있는데 또 빚을 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수긍이 되는 이유였다. 이 대출금은 교회 경상비에서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갚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양권사님을 비롯하여 일부 교우들이 친교실 증축을 바라자 대출금 상환을 위한 헌금을 해서 빚을 먼저 갚으면 증축에 찬성하겠다고 했다. 이 의견은 온 교우들에게 알려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빚을 갚기 위한 목적을 위해 한 가정만 헌금 했다. 빚을 다 갚기에는 너무 적은 헌금이었다.

우리 교회에는 목회자와 교우들이 함께 참여하여 이루는 승리의 경험이 필요해 보였다.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창립한 후 13년 동안 11(담임자가 아닌 목회자도 있었던 것 같다)의 목회자가 바뀌었다. 그 중 한 분이 3년을 담임하셨으니 다른 분들은 일년 남짓 목회를 하신 것이었다. 미국연합감리교 교단에 가입하려는 노력은 가입 조건에 맞지 않는다 하여 번번히 거절되었다. 한국감리교 교단에 가입했던 적도 있으나 금방 탈퇴하였다. 부흥의 기쁨을 맛본 때도 있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남편은 12번째 부임한 담임 목회자이고 4년차 목회를 하고 있었다.

연말이 다가오고 또 다시 교인 총회를 준비했다. 남편은 그 동안 기도하면서 얻은 생각을 나에게 털어 놓았다. 증축에 드는 비용을 온전히마련하면 대출금 상환하는 것은 경상비에서 평상시대로 하면 될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도대체 이렇게 셈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 불안했다.

남편은 12월 교인 총회에서 증축에 대해 거룩한 부담이 생기고 계속 기도하고 있다며 이 사안을 추진해보자는 의견을 말했다. 예상대로 반대가 있었다.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전처럼 증축에 대해 결정된 것도 없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제시된 방법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자는 것이 달랐다. 막연한 연기가 아니었다. 남편도 대출금을 먼저 갚을 수도 있고 증축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약간의 여유를 두었다.

총회가 끝나고 긴장감이 떠나지 않았다. 증축을 반대하는 이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남편은 꾸준히 기도를 이어갔다. 남편은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진행시키겠다는 확신이 든다면 우리 가족이 감당해야 할 경제적인 부담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난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에 큰 전환을 이루려면 그만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나간 목회 여정에서 배워왔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부담이었다

좋은 이웃이 있었는데 그이가 새로운 직장을 얻어 일을 시작한 것을 들었다. 그 들음은 나도 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확장시키는 씨앗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