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2021

그냥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야


앤 라모트 지음, 한유주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2015.


"!" "으악!“

얌전하게 앞으로 진행 중이던 우리 차를 누군가 뒤에서 들이받는 순간 들린 소리였다. 상체가 앞으로 튕겼다가 목이 뒤로 꺾이는 몸의 짧은 움직임은 낯선 경험이었다. 가족 동반이 아닌 친구들과 아주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들과 약속한 곳이 눈앞에 보여 안타까움과 긴장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운전하던 친구는 어느새 며칠 동안 아팠던 사람처럼 낯빛이 회색에 가깝게 변해있었다.

3중 추돌의 맨 앞에 있던 우리 자동차의 피해는 감사하게도 그다지 크지 않았고, 이 사고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달려온 경찰들은 교통사고를 능숙하게 처리했고 다른 사고 차량의 운전자들은 친구들이 몰고 온 SUV나 픽업트럭을 각각 타고는 휑하니 사라졌다. 그들의 찌그러진 자동차는 견인차가 싣고 갔기에.

친구와 나는 차를 몰아 약속한 식당에 이르렀고 친구들과 어이없는 교통사고 얘기를 나누며 조금 지체된 저녁 식사를 했다. 한 친구가 사고당한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음식값을 치렀고 그가 사는 동네에 전시된 성탄 장식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오래된 작은 마을, 반짝이는 크고 작은 전구들, 여러 콘셉트의 성탄 트리들, 겨울 안개비와 쌀쌀한 밤공기는 좀 전의 사고에 대한 불쾌감을 옅어지게 했다. 아기 예수님이 후줄근한 중년 여성들의 마음을 살짝 들뜨게 하는데 한몫을 하셨다.

우리는 서로 집에 도착하면 문자로 안부를 남기기로 하고 헤어지려는데 다른 한 친구가 우리에게 도시락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식당에서 미리 주문해두었나 보다. 그는 도시락을 아이들에게 주지 말고 남편들에게만 주라, 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이 얼마나 지혜로웠는지는 집에 와서야 알아챘다. 고통스러운 일은 언제고 일어나고 주변 사람들의 친절과 배려는 그 침울함을 밀어내는 치료제 같았다.

작가 앤 라모트는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 테러, 전쟁, 자연재해, 총기 난사와 같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아플수록 함께 하는 행동을 찾아라, 서툰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어라···,고 조언한다. 그의 글은 우리 안에 있는 인간애가 발현되도록 슬며시 돕는데, 그것은 그 스스로가 글을 쓰거나 전쟁의 피해를 알리며 투표를 독려하고 혹은 주일학교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등 크고 작은 실천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라모트의 여러 저작을 통하여 그의 영성은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의 삶이 조각나고 흔들릴 때마다 짜깁기 받침공("달걀 형태의 나무나, 돌 또는 도기로 만들어진 물건으로 대부분의 양말 속에 꼭 맞는 크기다")같은 역할을 한 교회가 곁에 있음을 보았다. 라모트네 교회는 나쁜 날들에 힘이 되어주는 좋은 교회인 것이 분명하다.

얼마 전 나의 작은 아들은 리조트에서 스노보드를 맘껏 타는 휴가를 보냈다. 휴가에서 돌아온 아들은 자기 몸 여러 군데에 멍이 든 것을 보여주었다. 한 번은 스노보드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와 멈추려는데 도착 지점이 예상과 다른 상황이어서 급하게 몸을 틀다가 미끄러지면서 뒤로 꽈당 넘어졌단다.

다행히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충격이 너무 커서 눈이 안 떠지고 속이 울렁거렸다고. 얼마 동안 그대로 누워 있는데 한 젊은 여성이 다가와서 내려다보며 "너 괜찮니?", 라고 물어보더란다. 어린 꼬마도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가던 길을 멈추고 말이다.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니 여성은 주먹을 내밀며 주먹끼리 부딪치는 펀치를 요청했고 아이는 자기와 하이파이브 하자고 요청했다고 한다. 쓰러진 사람이 몸에 정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려고 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말을 건네고, 음식을 나누고, 함께 걷고, 또는 지난 10일 미국 중서부를 강타한 엄청난 토네이도로 사랑하는 사람과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성탄헌금을 모아 보내고, 노숙자에게는 담요를 나누는 이 모든 행동을 라모트의 말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완전해지기보다는 조각조각 난 삶을 잘 연결하는 사람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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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2021

파괴되고 패배하고 죽는 길


믿음의 정상에 오를 때, 진 에드워드 글, 박인천 옮김, 대장간, 2020.


지난해 추수감사주일에 나의 블로그에 썼던 글들을 엮어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이어 우리 교회 청년, Y는 이 책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책 선물에 대한 예의를 차리기에는 그걸 받은 지 일 년이 다 되어가기에 늦은 감이 있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믿음의 정상에 오를 때의 소제목은 길고 부정적이고 무시무시하다. 그것은 바로 "친구가 적이 될 때, 억울한 상황에 놓일 때, 당신의 교회가 위기 가운데 처할 때, 당신의 교회가 쪼개질 수밖에 없을 그때, 바로 그때가 당신에겐···"이다. 나는 대단한 긍정론자도 아니면서 제목만 보고는 책으로부터 마음의 거리를 두고 읽기 시작했다.

저자 진 에드워드는 3대째 미국 남침례교인이고 같은 교단의 목사로 5년 동안 사역을 했다. 그는 우리의 믿음이 초대교회의 믿음과 다르다는 문제 인식을 하고는 교단을 떠나 유기적 가정교회 운동의 선구자가 된다. 믿음의 정상에 오를 때는 그가 사역자로서 신앙생활을 같이 했던 어느 청년 그룹이 분열의 위기를 겪으려 할 때 그들에게 들려준 메시지를 정리하여 낸 책이다.

진 에드워드는 종교조직 밖에 있던 그 청년들을 대적하게 될 조직과 종교체계의 영적인 역사를 설명한다. 조직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시고 천사를 세 부대로 나누어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도록 체계를 갖추신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세 천사장 가운데 루시퍼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의 부대를 이끌고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을 속이고 타락으로 이끌며 바벨이라는 도시처럼 사람의 삶을 체계화한다. 이 영적인 역사는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의 세속 역사에서 발전한 정치나 종교 조직에도 면면히 흐른다. 그리고 로마 시대의 교회로부터 오늘날의 개신교와 온갖 신앙조직(스텝, 센터, 본부 따위)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가르친다.

초대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에 정치 조직에 반하는 "생물"이었고, 질서가 있지만 어떤 조직은 아니었다면서 종교 조직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말라고 진 에드워드는 단호히 말한다. 동시에 종교 조직과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동일하게 간주하면 안 되며 그들에게 열려 있으라고 충고한다.

초대교회의 신앙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 교회들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진 에드워드에 따르면 종교 조직 안에 머무는 한 그러한 노력의 열매를 보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조직은 "반역의 결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나 문명을 통해서도 자신을 드러내시고 진선미(眞善美)를 이루신다고 믿는 나는 그의 역사적 견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그가 믿음의 정상에 오를 때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사역자'에 대한 고견은 여운이 길게 남았다. 사역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등으로 불리는 사람으로, 넓은 의미에서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를 뜻한다. 주님께서는 완전히 회복된 교회보다 제대로 된 사역자를 찾는데 더 중심을 두신다며 전혀 새로운 종()의 사역자를 제시한다. "공격하거나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사람. 쉽게 말하면 자신의 사역을 보호하려 들지 않는 사람. 자신의 사역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그것을 그저 바라보며 서 있을 수 있는 사람. 사람들이 자신의 사역을 무너뜨리도록 수용하는 사람. 하지만 결코 싸우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

하나님의 사역은 파괴되지 않지만, 사람의 사역은 언젠가 무너지는 위기가 찾아온다. 그럴 때 사역자는 사역의 기회를 잃거나 망신을 당하거나 명성을 잃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역자는 모든 것을 상실하고 패배하고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되어도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 묵묵히 믿음의 정상으로 나아갈 뿐이다.

나는 Y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선택했는지 듣고 싶었다. 뜻밖에도 Y는 아직 읽지 않았다며 나중에 읽고 나서 더 얘기하자고 했다. 아마도 진 에드워드의 사역자에 대한 통찰이 지금 내게 필요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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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2021

우리는 조금씩 다르다


『마음을 읽는 아이 오로르더글라스 케네디 글 · 조안 스파르 그림, 두행숙 옮김, 밝은세상, 2020.


온라인으로 주문한 책을 받을 때면 선물을 받는 기분이다. 값을 치렀고 예측 가능한 것일지라도 그렇다. 타국에 살아서 그런지 한글이 적힌 배달 상자는 반갑고 정겹기까지 하다. 상자를 꼼꼼하게 여민 테이프를 떼어내며 그 안에 담긴 책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기대하는 설렘은 마치 서점 앞에서 애인을 기다리는 마음 같다고나 할까.

두어 달 전, 책 『마음을 읽는 아이 오로르』를 만났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표지가 두 겹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아이가 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는 모습과 거기에 적힌 문장, "나는 남들과 다르대. 근데··· 당연한 거 아니야?"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얼른 읽고 싶게 만들었다. 책날개가 있는 바깥 표지를 서둘러 넘겼는데 저런···. 책등 부분에 제본한 상태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아마도 표지와 책등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걸 반품해야 하나, 삼 초쯤 고민한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반품하고 다시 멀쩡한 책을 기다리는 데다가 시간을 아낌없이 썼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새로 산 물건에 조금 흠집이 있어도 웬만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물건을 내가 정성껏 사용해주리라며. 게을러진 것인지 너그러워진 것인지, 아무튼 조금 변했다.

그런데, 이번에 『마음을 읽는 아이 오로르』를 다시 읽고 정리하면서 잘못된 책이 배송된 것이 아니라 누드 사철 제본한 책임을 알았다. 실로 책을 엮은 모습이 책등과 책장 사이 사이에 그대로 드러나게 제본한 것이다. 어쩐지 책을 꿰맨 빨간색 실이 밉지 않더라니···. 나의 너그러움은 사라지고 이 책이 특별하게 여겨졌다. 한 가지 더 특별한 점은 목차도 없다. 주인공 오로르 이야기는 어떤 순서나 제목 붙이기로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 굳이 필요치 않다고 여긴 걸까? 책을 다 읽고 나서 내 맘대로 생각했다. 

오로르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아이다. 오로르는 말 대신 글로 소통하는데 아주 솔직하고 당당하다. 그 아이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하며 사람을 돕는 일에 열정이 넘친다. 『마음을 읽는 아이 오로르』에서 어른이든 청소년이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의 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오로르를 만날 수 있다. 

김치를 사러 큰아들 산이와 한인 마트에 들렀다. 산이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카트를 좀처럼 만지려고 하지 않더니 이젠 다시 카트를 운전한다. 엄마와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산이의 운전은 친절하다. 어떤 크기의 물건이든 엄마는 힘이 없잖아, 하며 자기가 옮겨 싣는다. 산이는 쇼핑 목록을 미리 읽어보는 걸 좋아한다. 간혹 내가 사야 할 것을 지나치면 알려주거나 평상시에 샀던 물품이 보이면 필요한지 묻곤 한다. 산이는 기억력이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산이랑 장을 보면 이래저래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김치와 반찬이 있는 코너에 이르렀다. 김치는 잘도 사다 먹으면서 반찬에는 선뜻 손이 안 간다. 만들어진 반찬은 당연한 줄 알면서도 비싸다는 오래된 생각 습관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재료를 사다가 잘 만들어 먹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날도 단순히 어떤 반찬을 해 먹으면 좋을지 아이디어나 얻을 겸 해서 반찬들을 둘러 보며 나아갔다. 뒤따라 오던 산이가 나를 불렀다.

"엄마, 이거! 엄마가 좋아하잖아, 이거.“

몸을 돌려 산이가 가리키는 반찬을 보니 마늘종 무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늘종 무침이 눈에 들어왔으나 여느 날처럼 그냥 지나쳐 가던 중이었다. 사실 나는 마늘종을 엄청 좋아한다. 마늘종 장아찌, 마늘종 장아찌 고추장 무침, 마늘종 볶음, 마늘종 간장 조림. 하지만 산이에게 마늘종을 좋아한다고 표현한 적이 없으며 그 녀석이 마늘종이 뭔지 알고 추천하는지 의아했다.

산이도 오로르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나? 산이는 엄마의 뒷모습에서도 생각을 알아채나? 그러고 보니 산이와 오로르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구석도 있어 보인다. 나는 이 책 제목에서 '마음을 읽는'이라는 단어에 이끌려서 주문했는데 지금은 작가 더글라스 케네기가 만든 '아이 오로르'가 더욱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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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4/2021

내면이 풍요로운 정원사를 만나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3.


묵직하고 끈끈하던 새벽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손바닥만한 텃밭에 물 주러 나가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봄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내주던 식물들이 부추는 씨앗으로, 고추는 열매에 고운 색을 입히며 한 주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해충 탓에 일부 이파리가 누렇게 변해가는 가지는 아직도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있어 애처롭다.

올해 이른 봄, 거의 일 년 만에 자동차로 두 시간 반쯤 걸리는 애틀랜타를 방문했었다. 코로나19 백신을 언제 맞게 될지 모르던 때였으니 움츠러든 몸과 마음은 큰 도시에서도 여전히 편안치 않았다. 그나마 한인마트에서 고추와 가지 모종을 만난 것은 큰 선물이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보통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꽃샘추위가 지나갔다고 여긴다. 그래서 채소든 꽃이나 나무든 편안한 마음으로 심어도 좋다. 그걸 알면서도 부활절이 한 달이나 남은 3월 초에 멀리서 고이 모셔온 모종을 심었다. 설마 했던 추위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정원용 천으로 모종을 덮었다 벗기는 수고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겨우겨우 살려낸 고추와 가지는 자연에 이미 적응이 되었는지 얼른얼른 자랐다. 열매도 생각보다 빨리, 많이 열리기 시작했다. S 권사님께서 백 세를 누리시고 돌아가시기 몇 년 전 고추나무 한 그루에서 3, 400개의 열매를 땄노라며 놀라워하신 적이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고추나무가 권사님의 것과 같은 종류일지도 모르겠다. 가지나무도 그에 뒤질세라 열매를 바쁘게 내어놓았다. 한번 가지를 따고 이틀이 지나 돌아보면 다시 한가득 품고 있었다. 열매 거두는 재미가 쏠쏠했다.

"살아가면서 힘겨운 상황에 부닥칠 때 비로소 사람의 본성은 감춰지지 않고 드러난다. 각자가 정신적이나 이상적인 것과 맺고 있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비록 맛을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만, 익숙하게 뒷받침해주던 외적인 삶이 사라지거나 흔들릴 때 비로소 그 모든 것은 참모습을 드러낸다"(본문 중에서).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1899년부터 1955년 사이에 쓴 글들 가운데 21편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헤세는 평생 정원을 가꾸면서 영감과 쉼을 얻었다. 그는 소설가, 시인, 화가이면서 정원사로서 이사하는 집마다 정원에서 온갖 종류의 식물을 보살폈다. 헤세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그의 작품이나 반전 활동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정원이 주는 낭만과 멋을 누렸다.

나도 꽃이나 채소를 키워보고 싶어 몇 번 시도했으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내 일생에 이곳이 내 집이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지금 집에서 얼마 동안 살게 될지도 알 수 없다. 머무름, 지속하려는 나의 기질을 억누르며 교회를 따라 삶의 자리를 옮겨 다녔다. 헤세처럼 정원을 꾸며보고 싶다면 어느 뜰에서든 할 일을 찾아 기쁨을 누리련만 난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디 정원뿐일까. 재미는 사라지고 의무만 남은 일이.

몽고메리 집으로 이사하고는 전과 달리 나무(!)를 심었다. 늘 주저하다가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아서였다. 감나무, 동백나무, 배롱나무, 회양목, 뿔남천. 그것들이 잘 자라기를 바라지만 아직 연약한 상태다. 텃밭에는 교우들이 나누어준 것까지 모두 고추나무, 가지나무, 부추, 깻잎, , 방울토마토, 애플민트, 미나리가 살고 있다.

"자연을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은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단 1분도 허비하지 않고 소중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다. 그때는 아무리 바라보아도 눈이 피곤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지고 맑아진다. 눈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은 설령 흥미 없게 보이거나 흉측해 보이더라도 그 나름대로 생생한 면을 갖고 있다. 다만 그것을 보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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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2021

삶과 죽음의 중간 지대에서 모든 삶이 시작된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인플루엔셜, 2021.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아빠의 직장을 따라 인천 변두리로 이사를 했다. 도롯가에 코스모스가 가득 핀 계절이었다. 한 계절이 지나 눈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햇볕이 따사로운 날, 뒤뜰에서 새로 사귄 옆집 언니 H와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언니, 여기 교회는 어디에 있어?“

시내에 살 때 어느 교회에 다녔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동네 언니들의 손에 이끌려 성탄절에 곱게 단장하고 율동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것 말고는 별다른 신앙 추억이 없는데 왜 교회에 가려는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H는 자신이 다니던 감리교회를 알려주었다. 아이 걸음으로 30분 넘게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다.

일곱 살의 나는 은근히 독립심이 강했나 보다. 감리교회를 찾아가 예배드리기 시작했고, 그곳이 나의 모교회로 마음에 남아있으며, 감리교 신학을 배우고, 감리교 목사를 만나 결혼하여 살고 있다. H 언니와 놀았던 그 장면은 마치 스노우 글로브(Snow Globe)에 담겨 있는 듯해서 꺼내 볼 때마다 따뜻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나이가 들어 이 기억의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상상을 하나 추가했다. 동네에는 나와 동갑내기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나 친구의 언니에게 교회에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면 그 자매가 다니던 교회를 소개받았을 것이다.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성당이었다. 만일 성당의 위치를 먼저 알게 되었다면 난 수녀가 되었을까? 신부님을 흠모하며 마음앓이 했으려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밤 12,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에게 열리는 신비로운 곳이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주인공 노라 시드는 11년 넘게 다닌 직장에서 해고된 날에 키우던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고, 단 한 명뿐인 피아노 레슨 수강생도 그만둔다. 노라는 도통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죽기에 딱 좋은 때, 라고 결정하고 유서를 남긴다.

그 순간 노라는 중학교 때 좋아했던 사서가 있는 자정의 도서관으로 이동한다. 거기서는 후회스러운 선택을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삶을 살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그 삶이 진정으로 좋다면 그곳에 남을 수도 있고 조금이라도 실망감을 느끼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꿔보고 싶은 또 다른 인생, 계속 진행 중인 미래를 여러 차례 살아본다. 양자물리학의 양자 중첩에 근거하여 여러 우주에 동시에 존재하는 삶들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런 이야기는 마치 한여름 스릴러 드라마나 판타지 영화에서 나올법하다. 나에겐 엄청 흥미로운 장르다.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볼 기회를 잡았다는 측면에서는 노라가 부러울 지경이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펼치면 노라와 사서가 체스를 두는 장면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 얼마 전에 시청한 미국 드라마 "퀸스 갬빗(Queen's Gambit, 2020)"에서 엘리자베스 하먼이 학교 지하실에서 체스 배우는 모습이 연상되어 그들이 낯설지 않았다. 한편, 삶을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는 이야기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3)"을 다시 보고 싶게 했다.

오늘의 나는 맘에 들든 그렇지 않든 선택의 결과물이다. 인생은 아쉽게도 다시 살아볼 기회가 없으니 후회를 남기지 않는 인생이 있을까 싶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나 위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이끄는 대로 다녀보고 그들이 들려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도 좋겠다.

이왕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얘기를 나누는 판이니···, 목사의 아내가 아니라 초등학교 교사, 신발디자이너, 식물원관리자, 탐정소설가 등등으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 공상만으로도 웃음이 실실 삐져나온다.

! 수요예배에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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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2021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오늘 읽은 성경 예레미야 25-27 

마음에 남은 말씀

예레미야가 모든 고관과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가 들은 바 모든 말로 이 성전과 이 성을 향하여 예언하게 하셨느니라 /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 (예레미야 26:12-15) 

미니 노트 #366

2020810, 성경을 읽고 짧은 묵상 글을 이곳에 남기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성경 한 권을 읽는 계획표에 따라 오늘 마지막 분량을 읽었다.

지난해 이맘때 아이들이 개학하여 코로나 19 때문에 온라인 수업에 참여했고 교회 아동부에서는 성경 암송과 율동 챌린지를 하면서 온라인 신앙생활로 들어갔다나는 아이들과 만나지는 못해도 같은 맥락으로 성경을 읽기로 작정하였었고 오늘에 다다랐다. 감사하다. 지금은 내가 알기로 12세 이상 우리 교인들 대부분은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을 접종했으나 코로나 19와 델타변이 바이러스가 아직도 전염되는 상황이라 각자의 형편에 맞게 현장 혹은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다.

팬데믹 초기에 스테이앳홈 정책이 시행되던 그즈음, 남편은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 꼭 교회에 갔다. 어차피 오디오로만 스트리밍하니 낮에 녹음해 놓든지 집에서 실시간 스트리밍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남편은 나한테 새벽 기도하러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말라며 아무도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자신은 영성 생활을 위해 그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남편의 반응이 얄미우면서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나의 영성을 위해 기꺼이 새벽에 일어나 교회로 간다. 기도가 잘 나오든 나오지 않든. 그리고 내일은 기도하지 못할 이유가 수없이 많기에 오늘 새벽을 놓치지 않는다.

팬데믹 동안 나의 글로 책을 한 권 만들어 보았고 성경도 일독을 마쳤다. 나에게 부여하는 새로운 과제를 몇 가지 생각하고 있다. 우선 올해 남은 날 동안 교인들과 암묵적으로 약속한 성경통독을 계속할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독후감 써서 바이블 25에 보내는 일도 할 것이다. ··· 성경을 영어로 읽고 묵상하는 것과 교회에서 지속가능한 북카페(?), 생활용품 재사용을 위한 어떤 것, 그리고 교회 밖에서 돈 벌면서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것은 상상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