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6/2008

변화가 많았던 한 해를 마무리하며

<누군가 찍어놓은 사진입니다. 제 사진기는 너무 낡아서...>

올해 마지막으로 올리는 글인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던 해입니다.
태어난 나라를 떠나 전혀 낯선 나라에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어 당황스럽고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나면서 알게 된 교우들과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잘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데 목회자 가정이라는 것과 조금 특별한 강산이 덕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아주 잠깐 동안 같아서, 정말 때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후회가 덜할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이 마무리 될 때든지, 요즘처럼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라야 정신 차리고 이런 다짐도 해보지만 마음과는 달리 생활 속에서 느슨해질 때가 많습니다.
뭔가 보려고 길을 나섰으나 정확히 무엇을 보고자함인지 모르거나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자신과 자주 마주치는걸 보면 그렇습니다.

성탄절 아침입니다.
딱히 무엇을 할 계획이 없는지라 잠 자리에 그저 누워있었습니다.
남편이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고서야 몸이 움직여졌습니다.
아침을 먹고 이런저런 일을 하는 동안 이번엔 반대로 남편이 곤한 잠에 빠졌습니다.
강산이는 자기 방에서 음악 듣느라 보이지도 않습니다.
언젠가 강산이에게 CD에 담긴 찬양을 맘대로 들을 수 있도록 플레이어를 사주마 약속했던 것을 이번 성탄에 지켰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소유의 조그만 CD 플레이어를 가지고는 한나절 동안 방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강윤이는 컴퓨터 게임.
언제나 봐왔던 것과 비슷한 성탄절 풍경입니다.

어느 정도 잤는지 남편은 점심 먹고 어디든 나갔다오자며 스모키 마운틴을 제안합니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그러자 했습니다.
점심 먹고 탁자 위에 놓인 과자, 쵸코파이, 바나나 2개, 그리고 물과 쥬스를 챙겨 길을 나섰습니다.
성탄절에는 식당이나 가게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하고 스모키 마운틴까지 두 시간 반쯤 걸리는 거리라고 하니 저녁 식사는 집에 와서 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날씨가 꼭 봄 같습니다.
그런데 북쪽에 있는 그 산에 가면 눈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북조지아 어딘가에 눈이 내렸다는 뉴스를 본 것도 같아 더 북쪽인 그곳에 가면 정말 눈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갖고 갑니다.
그리고 또 하나 조지아의 경계를 지나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가보는 것이니 그곳은 뭐가 다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자동차로 어느 정도 달리다보니 단조로운 고속도로와는 달리 마을 풍경이 도로 가까이에 있어서 눈이 심심하지 않습니다.
441번 도로라고 하는데 왕복 8차선 혹은 4차선의 지방 도로(?)쯤 되는가 봅니다.
북조지아와 맞닿아 있는 노스캐롤라이나의 모습은 그다지 특이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고 단지 산이 가깝고 많아 보였습니다.
멀리 산 꼭대기를 눈길이 닿는 곳까지 바라보았으나 쌓인 눈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을 알려주는 GPS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휑하니 뚫린 도로를 달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Great Smoky Mt.) 국립공원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성탄절을 제외하고는 늘 문을 연다는 방문자 센터에 내려 보니 화장실 말고는 문이 모두 닫혀있습니다.
알고 왔으니 망정이지 서운할 뻔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주유소와 와플 하우스만 영업을 하고 “모든” 상가들에 불이 꺼져 있습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산을 얼른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산 쪽으로 길을 잡고 차가 달리는데 GPS가 자꾸 돌아가라고 합니다.
목적지를 스모키 마운틴 파크라고 분명히 입력하고 왔는데 산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니 어찌된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산으로 계속 올라가면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GPS 말씀대로(--;;) 다시 내려 왔습니다.
GPS가 알려주는 곳은 아무래도 방문자 센터인 것 같습니다.
결국은 입력한 목적지를 지우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 보기로 합니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도 그저 산길이고 가끔씩 가드 레일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있을 뿐입니다.
GPS에도 길만 표시될 뿐 아무 정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 이제 내리막 길이야! 이대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데? 다시 돌아가자!!”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면서도 미리 계획되거나 확실한 정보가 없으면 어설퍼지는 저의 자연스러운 한 마디였습니다.
“저것 봐. 차들이 줄줄이 내려오네.”
내려가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저에게는 올라가는 차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새 내려가는 자동차에는 전조등이 켜져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보고.”
요즘 들어 제 의견을 대놓고 무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남편의 말입니다.
“아빠, 그냥 계속 가! 쭉쭉쭉.”
뭘 안다고 계속 가라는 것인지 강윤이는 끝까지 가봐야 된다고 우깁니다.

잠깐 다시 오르막 길이어서 강윤이 말이 맞나 싶은데 다시 내리막 길이 이어지고...
그러더니 이럴 수가...
“이걸 못보고 갈 뻔 했네. 오길 잘 했지?”
의기양양한 남편과 강윤이의 말입니다.
“그러게.”
산 정상의 넓은 주차장이 나오고 꽤 여러 대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붉은 노을이 멀리 산 끄트머리에 걸린 풍경을 보며 저마다의 언어로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화가가 그려놓은듯 색깔이 점점 옅어지는 산 너머 산을 보니 장엄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해의 마감을 멋있게 사진으로 남겨보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 곁을 지나 전망대처럼 보이는 곳으로 나아가는데 익숙한 언어도 들립니다.
남편은 그들에게 “안녕하세요” 합니다.
그들도 “안녕하세요”로 답합니다.
강산이는 자꾸 “야호”해보라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의식되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일 년 내내 안개가 껴있는 큰 산답게 어둠이 내리는 속도가 빠릅니다.
이제는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하니 도착하기 까지 4시간쯤 걸리는 것으로 나옵니다.
올라갔던 길을 따라 다시 내려오는데 아무 불빛이 없습니다.
오고 가는 차들의 불빛만 있을 뿐입니다.
산을 다 내려온 다음, 남편은 운전하면서 차의 전조등을 껐다가 얼른 다시 켜봅니다.
또 한 번.
얼마나 어두운지 보려는 것이랍니다.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입니다.

열심히 달리고 달려서 집에 돌아왔는데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없습니다.
늦은 밤, 저녁으로 라면을 먹으면서도 즐겁습니다.

각자의 기질대로 제 역할을 하며 조화를 이뤄내는 가족이 있어 행복합니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같이 걸어 가는 가족이 있어 좋습니다.

여전히 서툴고 어설프지만 올 한해를 발판 삼아 예수님 은혜 안에서 영과 육이 더욱 성숙해지길 소망합니다.
GPS나 자동차 전조등보다 더욱 자세하고 밝게 우리 갈 길을 인도하시고 비춰주시는 주님이 계시니, 새해에도 그 분만 믿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렵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시25:5)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12/19/2008

빈 마음으로 맞이하는 성탄절

<강산이가 교회 Jubilee에서 만든 카드입니다.>

곧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추수감사절이 지나자마자 바로 크리스마스 캐럴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빨강과 초록빛의 성탄 장식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이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은 좋은 소식을, 큰 선물을 주실 것을 바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은 선물을 주셨고, 새롭고 놀라운 또 다른 선물을 준비하시고 계시는 넉넉한 분임을 믿기에 언제나 이 맘 때가 되면 들뜨는가 봅니다.
또 그 선물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풍성하게 여겨집니다.

아기 예수님이 찾아오실 수 있도록 마음 한 구석 치워놓으려 합니다.
들판에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구주의 나심을 전해주었을 때,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믿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모두 기쁘고 행복한 성탄절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2:15,16,20)

12/12/2008

저는 어미입니다


사람들은 가정, 직장, 교회, 친구, 동호회 따위에서 그 역할에 맞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여성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이름보다 누구 엄마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합니다.
여성학, 여성신학, 여성해방에 관심이 있을 때는 그리고 결혼해서도 한참 동안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이기보다 의식적으로 제 이름을 사용하려고 했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팔,구년 전쯤 폴 투르니에의 <여성 그대의 사명은>을 읽을 즈음부터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몇 번을 읽는 동안 내가 목사의 아내이고 아이들의 엄마이고 교회에서 사모인 것이 자연스러워지면서 축복이라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걸 상담에서 사용하는 "통합(integration)"의 과정이라고 쳐주신다면 제가 그 언저리쯤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어제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강산이가 흥얼흥얼 찬양을 합니다.
“해가 뜨는 아침에 주를 찬양하리
햇빛 찬란한 낮에 주를 찬양하리
별빛 반짝일 때에 주를 찬양하리
캄캄한 밤에도 주를 나 찬양하리라”
한국에서 할머니들 오시면 불러드리겠답니다.

오늘은 “일어나라 일어나라” 해도 꿈지럭대더니 결국은 스쿨버스를 놓쳤습니다.
버스 기사에게 먼저 가라 했더니 “~bring him" 뭐라고 합니다.
나보고 데리고 오겠냐고 하는 것 같아 “그러겠다”고 얼떨결에 대답했습니다.

버스가 가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텐데 강산이 방에 가보니 부시럭 부시럭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모른 척하고 “너 오늘 학교 안가지?” 하고는 켜있던 전등을 다 껐습니다.
그런데 계속 소리가 들리는걸 보면 먹고 씻고 입고 있나 봅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 차고로 나가는 문 여는 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일 날까 싶어 얼른 뒤따라 내려가며 ‘이걸 그냥.... 아까 버스 기사한테 대답만 안했으면...’ 해봅니다.

아침 나절, 블로그에 올릴 글 끄적거리는 걸 일찍 마치고 싶어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가 결국은 관두고 말았습니다.
열다섯 살이나 된 아들 녀석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녀석 애기가 빠지면 이제는 글을 쓰는 것도, 저를 설명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회화 수업(Conversation Class)에서 간단한 시험을 본다며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른 질문을 하고 그걸로 대화를 이어가라고 합니다.
저에게는 “우리 아이들이 잘 다투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물론 버벅 버벅...
그랬더니 질문을 바꿔서 “네 형제 자매가 있느냐? 그들과 싸운 적이 없느냐?”합니다.
뭐 싸운 기억이 별로 없어서 “내 동생들은 착하다” 그랬습니다.
그러자 “네 아이들은 안 싸우냐?”고 또 묻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가 “예스” 하라고 신호를 보냅니다.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은 거의 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 아들이 장애가 있는데...”
여기까지 대답하니까 이 사실을 아는 선생님은 얼른 말을 받아 “그 아이는 상냥하고(sweet) 그래서..."합니다.
저는 “맞다(sure)" 하고 대화 아닌 대화를 마쳤습니다.

그 수업 시간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긴장이 풀리면서 제 자신이 참 답답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아이들은 몇 살이냐? 어떤 상황에서 잘 싸우냐?” 라고 다시 물어서 말을 이어가든지, 아니면 옆 친구가 눈치 주는 것처럼 “예스” 대답해 놓고 쉬운 말로 적당히 꾸며대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융통성하고는 담 쌓고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쨌든 제가 조금 특별한 강산이의 엄마가 분명합니다.
그걸 핑계로 저의 부족함이나 게으름을 이해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제 삶이라는 것이죠!^^


어찌 된 일인지 오늘은 강산이가 여느 때보다 한 시간이나 빠르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버스 시간을 새롭게 조정하기 때문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다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강산이는 들어오면서부터 제 눈치를 봅니다.
아침에 일어난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 같아 한편 기분이 괜찮습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이 글을 계속 쓰고 있으려니까 옷 갈아입고 내려오며 “엄마한테 사과해야지~” 라며 혼잣말 하는 것이 들립니다.
학교에서 선물로 받은 지팡이 사탕과 브라우니라는 빵을 제 옆에 살짝 갖다놓으며 어깨에 손을 얹습니다.
그러더니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뭐라고 합니다.
저는 어디 다쳤나 싶어 “왜?” 그랬습니다.
강산이는 저의 손가락을 끌어다가 자기 새끼손가락으로 감싸 쥡니다.
“학교 일찍 안 돼.”
“학교 일찍 간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고?”
끄떡끄떡 합니다.
‘이 녀석아, 그 말이 그 말이야.’
강산이가 먼저 손을 내밀어준 것이 고마워 코끝이 시큰합니다.

이만큼 글을 쓰기까지-보기에는 몇 글자 되지 않아 보여도 저한테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강산이는 아직도 조용합니다.
“강산이 이리 와. 강산이 엄마하고 약속한 거 사진으로 찍어놔야겠어.”
“힝~”하고 오더니 한숨을 한번 크게 쉬고는
“내일 토요일 한국학교 갈 거야? 이건 뭐야?”
“강윤이는 크니까 좋겠다. 나도 크고 싶어.”
“학교 끝나고 할머니 오시면 공항 가?”하며 상황에도 맞지 않는 이야기를 줄줄이 합니다.
대충 대답을 해주었는데 엄마 마음이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엄마 스마일~”합니다.
‘야, 이 녀석아, 너 학교에 데려다 주려고 계단 내려갈 때 화 다 풀렸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

웃는 자가 마지막까지 살아 남는다-메리 페티본 풀

12/05/2008

수다스럽고 뇌쇄적인 여행을 다녀와서


이 나라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그 시간들을 다시 떠올려보면 꿈만 같습니다.

이 곳에 오면서 여러 가지 기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에서도 가까이 지내던 친구네 가족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나 아이들까지도 모두 똑같이 “만남”에 대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찾아가면 되겠지만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그 집까지 가는데 자동차로 10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운전하는 여건이 좋을 경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기서 10시간 정도의 운전은 할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남편들끼리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주고 받다가 추수감사절에 우리가 가네 그들이 오네 했었나 봅니다.
그러다가 그 친구네가 플로리다로 여행을 가면서 가고 오는 길에 우리 집에서 머물기로 하였습니다.
게다가 더욱 먼 곳에 사는 친구도 함께 플로리다로 여행을 하기 위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풀어 있었는데, 플로리다에서 머무를 집에 방이 여럿이라며 여건이 되면 여행을 함께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좋은 제안이었지만 혹시라도 가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서 마음을 차분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여행할 수 있는 3일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얼씨구!!! ㅋ ㅋ ㅋ’

친구네 두 가족은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함께 먹을 것들을 사서 먼저 플로리다로 출발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루 늦게 그들과 합류할 예정입니다.

그날 저녁...
남편은 교회에서 무슨 교육이 있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아이들과 저는 저녁을 먹고 슬슬 짐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새벽 일찍이 떠나기 위해서입니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짐 챙겨서 교회로 9시까지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강윤이가 바라던 대로 밤에 출발할 모양입니다.

우리는 밤10시 가까이 되어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소풍 떠나는 들뜬 마음이 차 안 가득합니다.
자야할 시간에 운전하는 것이니 졸음을 이겨야 하고, 어두워서 바깥 풍경은 감상할 수 없지만, 친구들과 더불어 새롭게 경험하게 될 낯선 곳에 대한 기대가 우리를 즐겁게 했습니다.
플로리다 어딘가에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기까지 아이들은 그 즐거움을 꿈나라로 가지고 가고, 저는 조수석에서 졸고, 남편이 쬐끔(!) 고생했습니다.

졸린 남편을 도와 두어 시간 운전하던 것을 다시 남편에게 돌려주고 마지막으로 쉬기 위해 Rest Area에서 차를 멈추고 내렸습니다.
그 때 문득 밤새 달려온 것이 눈 한번 질끈 감았다 뜬 것처럼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서 나온 지니가 우리를 뚝딱 데려다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황금빛의 신선한 아침 햇살이 열대 나무 사이사이로 비춰지며 나니아 나라 이야기에서 나오는 디고리 커크 교수네 집에 있던 옷장을 열고 전혀 다른 나라로 나온 것 같기도 했습니다.
밤새 수고한 값으로 찬란한 아침을 고스란히 맞이하는 기쁨과 함께 플로리다에서 보낼 수 있는 하루를 벌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밤에 출발하는 것을 동료 목사님이 제안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 기회에 감사를...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친구 부부를 만난 곳도 역시 환상적이었습니다.
엄청 좋은 집을 통째로 거저 내어주신 알지 못하는 그 분께도 역시 감사를...

*Siesta Key Beach에서



*Organic Orange Picking



그리고
이틀 동안 새롭고, 여유롭고, 낭만적이고,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친구들은 우리보다 하루 더 남아 올랜도 디즈니 월드 가운데 한 곳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먼저 올라가더라도 아이들은 나두고 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집에 돌아온 후 그리고 친구들이 우리 교회에서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고 떠난 후 저는 며칠 동안 플로리다에서 느꼈던 감상들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방마다 꺼내놓은 이불들도 치우지 못하고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했던 것들이 객관적으로 보면 뭐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오래 사귄 친구들이 주는 편안함이 보태져서 더욱 좋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무척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월요일이 되어 아이들은 학교 가야하고 저 또한 영어 수업 들으러 가야 하니까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같이 영어 수업 듣는 여행을 많이 한 어떤 이에게 플로리다에 다녀왔다니까 자기도 가보았다며 그곳의 느낌을 이야기 합니다.
“그곳은 연인과 가면 딱 좋을 곳이야. 뇌쇄(惱殺)적이지 않아?”
저는 “뇌쇄”라는 말의 뜻을 몰라 얼른 호응을 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애가 타도록 몹시 괴롭힘”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행을 많이 한 사람답게 적절하고 멋있는 표현도 할 줄 아는가 봅니다.

여행하면서 얻은 좋은 추억들은 또 다른 여행을 꿈꾸게 하고, 그래서 일상을 살아내는 힘이 되기도 하고, 지금 여기의 삶을 소중하게 여길줄도 알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