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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2025

뜻밖의 요청





인간 관계에서 때로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시간의 질이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과 미국에 사는 나의 가족처럼 서로 멀리 살아서 자주 만날 없는 관계는 더욱 그렇다.

지난 추석 어머니(남편의 엄마를 시어머니라 부르고 않고, 나의 엄마를 친정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부르다 보니 예의를 갖추면서도 관계의 거리감이 좁혀진다.) 우리 가족과 명절을 함께 보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뜻밖의 요청은 우리 가족의 마음을 흔들었고 설날 전후 일정으로 한국행을 결정하였다.

한국 날을 기다리던 어느 , 엄마에게 위암이 생겨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초기 단계의 암이라고는 하지만 치료하는 과정에서 육체가 지칠 것이 분명하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수술을 받은 엄마는 해쓱한 얼굴로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를 위해 엄마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내가 엄마의 식사를 챙겨 보리라 생각하고 왔는데 끼부터 엄마 손을 거친 밥상을 받았다. 엄마의 상태가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치료하는 의료 기술의 발전에 놀라워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밥상에는 굴전이랑 굴무침이 보였다. 미국에선 육류를 많이 먹을 테니 굴이나 같은 해산물을 먹이려는 엄마의 계획이 보였다. 환자가 준비할 음식은 아니었다. 엄마는 이렇게 음식 만든 것을 동생네한테 비밀로 달라고 부탁했다. 밤새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기내식을 모두 맛있게 먹었지만 눈앞에 놓인 엄마의 밥상에 아무 주저함 없이 달려들었다.

엄마는 우리가 식사를 마치면 그제서야 두어 숟가락의 죽을 겨우 먹었다. 엄마의 끼니를 위해서는 한꺼번에 쑤어 놓은 죽에서 숟가락 덜어내어 데우는 일이 전부였다. 별다른 수고가 따르지 않았다. 한국에 머무는 대부분의 시간에 나는 그저 엄마가 부를 대답할 있는 자리에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순종했다. 물을 가져오라면 물을 가져오고, 설음식을 사오라면 그렇게 하고.

한국을 떠나는 아침 밥상에는 사위가 좋아하는 게찌개가 등장했다. 전날 엄마가 주방에서 한참 동안 덜그럭거리며 뭔가를 준비한 결과물이었다. 엄마는 아침 시간에 어수선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음식을 만든 것이다. 며칠 , 진한 국물의 게찌개를 정신없이 먹는 사위를 엄마는 남은 마리 게를 먹여 보내야 마음이 편할 같았단다. 엄마는 다시 헤어지는 서글픔을 몸을 괴롭히며 달랬던 것일까.

내가 엄마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남편과 나의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나는 한국에 도착했을 때와 떠나기 , 그리고 설날 앞뒤로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다. 우리를 맞이하는 주름진 어머니 얼굴은 동백꽃처럼 환하게 피었다. 다만 무릎이 약해져서 계단을 어렵게 오르내리시는 모습이 낯설고 안쓰러웠다.

어머니는 하루에 시간씩 마을회관에서 다른 어르신들과 시간을 보내신다. 어르신들은 간혹 자녀가 가져온 간식이라며 나눠 드실 때가 있단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멀리서 찾아온 아들을 핑계로 받아먹은 것을 갚을 기회로 삼으셨다.

명절 장도 풍물시장에 갔다. 어머니는 계획이 있으신 떡집에서 동부나 팥이 들어간 쑥송편과 모시송편을 푸짐하게 사셨다. 귤도 박스 사셨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우리가 드린 쿠키 상자를 마저 챙기시더니 마을회관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셨다. 떡과 귤은 명절 분위기 내기에 좋은 음식이었다. 어머니는 어르신들이 그것들을 넉넉하게 나눠 드셨다고 알려주셨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옷을 사주고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돌아다니다가 맘에 드는 옷을 사라며 크레딧카드를 주셨다. 이렇게까지 한국 옷을 입혀 보내려는 어머니에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온가족이 윷놀이를 하고, 설을 쇠면서 내내 즐거워하셨다.

이번 여행은 나를 고집하지 않고 부모님에게 집중하겠다고 다짐했어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저 부모님 곁에 있었을 뿐이고 오히려 부모님이 사랑을 부어 주셨다. 온기가 마음 한편에 남아 오래도록 힘이 되어줄 같다.


*이 글은 앨라배마 타임즈에도 실렸습니다.

11/22/2024

이렇게라도




할머니는 손녀인 나를 무척 귀하게 여기시고 예뻐하셨다. 할머니에게 딸이 없어서 더욱 그러셨던 같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엄마보다 할머니 품에 많이 안겨 있었다. 할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집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면서 할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너무 철이 없어서 나의 결혼에만 집중했고 할머니의 마음이 어떨지 헤아려 기억이 없다. 할머니는 내가 결혼하고 두어 달이 지나 갑자기 돌아가셨다. 11월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어느덧 30년이 훌쩍 넘었다.

할머니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할머니의 감정을 헤아려 생각을 못한 나의 부족함이 내내 아쉽고 죄송하다. 내가 사춘기였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할머니에게 퉁명을 떨었던 것도 너무 미안하다. 결혼하면서는 할머니에게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드리고 자가용을 타고 세상 유람 다니자고 했는데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입바른 소리를 하셨다. 나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이 예의 없게 굴면 참지 않으셨다. 그럴 할머니는 표정도 근엄하게 바뀌고 목소리도 무거워졌다. 일상 예절부터 걷는 모습까지 내가 얌전하길 바라셨다. 나한테는 그렇다 쳐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도 할머니는 예의를 가르치셨다. 나는 할머니가 그러지 마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할머니도 그립다.

내가 자주 만나는 이웃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연세와 비슷한 분들이 많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이웃들이 자매 많은 집의 큰언니 같은 느낌이다. 동시에 나의 할머니 같기도 하다. 이웃들과 사귀면서 나의 할머니를 섬기지 못한 죄송함을 만회할 기회가 종종 생긴다.

나의 이웃, J 70세가 넘어 처음으로 대장내시경을 하게 되었다. 수면 내시경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음으로 마취가 필요했고 보호자가 반드시 동행해야 했다. J 나에게 보호자가 되어 있는 물었다. 나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대장내시경을 차례 받은 나는 보호자가 주는 안정감을 경험한 바가 있었다. 병원 검사실이 주는 긴장감 속에서 안전하게 마취에서 깨어 보호자를 만날 번째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내시경을 진행한 의사로부터 검사 결과가 좋다는 소견을 보호자와 함께 들을 번째 안도감을 느낀다. J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나의 할머니에게 못다한 섬김을 갚고 싶었다.

번은 이웃, A 이곳저곳 다닐 일이 생겼다. 70 후반의 A 체구가 아주 작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아주 연약해 보였다. 그가 짐을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어떤 물건도 그의 힘에 부칠 같았다. 나는 짐을 받아 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A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괜찮아요, 라고 말하며 손을 물리쳤다. 조금 어색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얼른 자동차 문을 열어 드렸다. 그랬더니 A 우아하게 자동차에 올라타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자동차 닫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고, 자동차가 서고 때마다 여닫기를 반복했다. 나의 할머니라면 당연히 이렇게 모셨을 테니 이렇게라도

연세 많으신 이웃들에게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은 좋은데, 한국에 계신 부모님에게는 다른 아쉬움이 쌓이고 있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자녀의 도리를 하지 못하니 죄송할 뿐이다. 부모님 얼굴을 지도 6년이 넘었다.

어쩌다 영상으로 통화하며 부모님 모습을 뵈면 , 하고 놀라기도 한다. 부모님 얼굴에 나타난 세월의 흔적이 너무 낯설어 마음이 먹먹해진다. 지난 추석에는 어머니께서 명절이 되면 우리 가족의 빈자리 때문에 허전하다는 마음을 내비치셨다. 다음 명절에는 가까이서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 분이다. 어머니는 자녀가 멀리 떨어져 사는 이유를 누구보다 이해하시면서도 점점 커져가는 그리움을 숨길 없으셨나 보다. 다음 명절에는 식구들이 둘러 앉아 음식을 만들며 그동안 지내온 얘기를 수런수런 나누고픈 어머니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다. 이렇게라도 해서 부모님에게 그리움으로 남았던 시간들을 따뜻한 기억으로 채워 드려야겠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