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교회 모습> |
우리 가족이 콜럼비아제일교회에 오기 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편인 김성은 목사가 제일교회에
부임하기도 전에 친교실을 넓히려는 계획이 있었다. 교회가 부흥되어 교우들의 수가 조금만 더 많아져도
친교실이 복잡했다. 그러니 손님들을 초청하는 행사 때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러 교우들이 친교실 증축을 건의하였고 그러한 요구들이 모아져 증축을 위한 몇 가지 일이 진행되기도 했다. 2008년, 설계도가 그려졌고 어떤 건축업자의 공사비 제안서도 있었다. 그에 따라 은행 대출도 받았으나 미국 금융 위기기 시작되면서 대출도 되갚아버리고 이 일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2011년,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고향이 된
애틀랜타를 떠나 사우스 캐롤라니아 주의 주도인 콜럼비아로 이사 왔다. 우리가 온 그해부터 일년을 마감하는
교인 총회가 열릴 때마다 일부 교우들에 의해 친교실 증축에 대한 안건이 계속 상정되었다. 목사님은 증축에
대하여 온 교우가 한마음 될 때까지 기도하자고 했다. 그때 우리 교회는 아이들을 포함하여 35명쯤 되었는데, 교우들이 점점 더 결합하면서 50명쯤 모이는 작은 교회였다.
2014년 8월이었다. 연세가 칠십 중반 되신 양권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서 폐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하셨다. 남편과 나는 열 일을 제치고 권사님 댁으로 달려갔다. 권사님은 사실 수 있는 날들이 삼 개월 내지 육 개월 정도라고 의사로부터 들은 말을 전해주셨다. 권사님의 남편 되시는 딕스집사님은 무거운 표정으로 아무 말씀도 없었다. 나는
2013년 뇌종양 수술을 받으시고 몇 개월 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체 계시다가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서, 양권사님이 암 말기라는 얘기에 상황이 예측되는듯하여 마음이 무척 아프고 슬펐다.
권사님은 그 즈음에 시편을 한국어로 읽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앞으로도
계속 읽을 것이고 그래서 괜찮다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주셨다. 죽음이 눈 앞에 있는데 그리 말씀하시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분명했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 말이 제일 편한 권사님이신데, 남편 덕에 영어도 하시고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한국어도 하시게 되었다. 처음
권사님을 만났을 때는 일본어 성경을 가지고 다니셨는데 점차 한국어 성경을 읽기 시작하셨다.
이어서 권사님은 교회와 관련하여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권사님은 친교실이 증축되는
것을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권사님께서는 사람들과 사귀고 어울리는 것을 아주 기쁘게 여기시고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또래 모임이나 예배도 열심히 참여하신다. 그래서
그런 소원을 갖게 되셨으리라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나는 권사님의 소원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룰 수 없는 소원인듯하여. 교회에서 증축을 결정하는 일도 어려울
뿐 아니라 결정이 된다 해도 몇 개월 안에 지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양권사님의 건강 상태는 교우들에게 빠르게 알려졌다. 남편은 교우들에게 권사님의 남은 생이
평안하시길 중보 기도하자고 부탁했다. 동시에 권사님의 소원에 대해서도 전해주었다. 정기 임원회 때도 그 소원은 안건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친교실
증축을 원하지 않는 이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증축을 놓고 기도하지도 않고 있었다. 사실 기도의 자리에 가 있을 뿐 기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지도 여러 해가 지난 생태였다.
나와는 달리 남편은 깊이 기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우리를 대하는 어떤 교우들의
마음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면, 남편은 하나님의 마음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남편은 가능성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여름에 양권사님이 교회에 대하여 가진 마지막 소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떨렸다고 했다. 가톨릭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은 우리 인생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고
고백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리키는 살아 있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우리 곁에 살아 있든, 우리 기억 속에 있든, 하나님이 인생길에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은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고 보여준다.”(분별력, 140쪽)
헨리 나우웬은 공동체에서 만난 장애인, 가톨릭 성인들,
짧은 만남의 방문자, 제자, 동료, 등등을 말하는데, 남편에게는 양권사님이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교우들 가운데 교회 증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2002년 교회를 지으면서
받은 대출금에서 아직도 7만불 정도가 남아 있기에 그걸 먼저 갚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빚이 있는데 또 빚을 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수긍이 되는
이유였다. 이 대출금은 교회 경상비에서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갚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양권사님을 비롯하여 일부 교우들이 친교실 증축을 바라자 대출금 상환을 위한 헌금을 해서 빚을 먼저 갚으면
증축에 찬성하겠다고 했다. 이 의견은 온 교우들에게 알려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빚을 갚기 위한 목적을 위해 한 가정만 헌금 했다. 빚을 다 갚기에는 너무 적은
헌금이었다.
우리 교회에는 목회자와 교우들이 함께 참여하여 이루는 승리의 경험이 필요해 보였다.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창립한 후 13년 동안 11명(담임자가 아닌 목회자도 있었던 것 같다)의 목회자가 바뀌었다. 그 중 한 분이 3년을 담임하셨으니 다른 분들은 일년 남짓 목회를
하신 것이었다. 미국연합감리교 교단에 가입하려는 노력은 가입 조건에 맞지 않는다 하여 번번히 거절되었다. 한국감리교 교단에 가입했던 적도 있으나 금방 탈퇴하였다. 부흥의
기쁨을 맛본 때도 있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남편은 12번째
부임한 담임 목회자이고 4년차 목회를 하고 있었다.
연말이 다가오고 또 다시 교인 총회를 준비했다. 남편은 그 동안 기도하면서 얻은 생각을
나에게 털어 놓았다. 증축에 드는 비용을 ‘온전히’ 마련하면 대출금 상환하는 것은 경상비에서 평상시대로 하면 될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도대체 이렇게 셈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 불안했다.
남편은 12월 교인 총회에서 증축에 대해 거룩한 부담이 생기고 계속 기도하고 있다며 이
사안을 추진해보자는 의견을 말했다. 예상대로 반대가 있었다.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전처럼 증축에 대해 결정된 것도 없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제시된 방법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자는 것이 달랐다. 막연한 연기가 아니었다. 남편도 대출금을 먼저 갚을 수도 있고 증축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약간의 여유를 두었다.
총회가 끝나고 긴장감이 떠나지 않았다. 증축을 반대하는 이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남편은 꾸준히 기도를 이어갔다. 남편은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진행시키겠다는 확신이
든다면 우리 가족이 감당해야 할 경제적인 부담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난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에 큰 전환을 이루려면 그만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나간 목회 여정에서 배워왔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부담이었다.
좋은 이웃이 있었는데 그이가 새로운 직장을 얻어 일을 시작한 것을 들었다. 그 들음은 나도 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확장시키는 씨앗이 되었다. (계속)
좋은 이웃이 있었는데 그이가 새로운 직장을 얻어 일을 시작한 것을 들었다. 그 들음은 나도 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확장시키는 씨앗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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