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어디 있더라……’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오래된 물건들을 넣어둔 조그만 그릇 뚜껑을 열었다. 타원형
모양에 은색 칠이 되어 있고 유리로 된 뚜껑에 크리스털 컷을 흉내 낸 플라스틱 구슬 손잡이가 붙어 있는 그릇이다.
내가 찾는 게 그 안에 있으리란 기대가 손놀림을 빠르게 했다. 3박4일 영성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받은 액세서리들이 제일 많이 보인다. 선배
목사님이 미국 다녀오셔서 주신 콕스베리(기독교 용품 파는 곳) 제품도
거기에 있었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마지막 핸드폰에 걸고 다니던 것, 종이로
만든 브로치, 동인천 지하상가에서 구입하여 결혼식 때 썼던 꽃 모양 귀걸이 한 세트, 대학 때 친구와 이름을 새겨 넣어 끼고 다니던 플라스틱 반지, 고등학교
졸업 기념으로 학교에서 준 열쇠고리, 고등학교 교복에 달고 다니던 학교 배지……
생각 없이 모아놓은 물건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희태에게서 받은 그것을 찾으려다 보니 다른
것들도 꼼지락 꼼지락 나를 보며 배시시 다정하게 웃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응대해 줄 여유가 없는
것을 무표정으로 알리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좁은 그릇 바닥을 더듬거렸다. 아, 다행이다. 희태가 준 대학 졸업 반지가 거기에 있었다.
미국 이민 와 살면서 오 년쯤 지나면 한국을 꼭 갔다 오자는 다짐 같은 것이 있었다. 왜
꼭 다섯 해였는지 모르겠다. 좌충우돌 이민 생활을 계속 이어가려면 그쯤에서 모국의 익숙한 분위기 속에서
깊은 숨 고르기가 필요할 것 같았나 보다. 2013년 드디어 한국에 갔을 때 안타깝게도 아버님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셨다. 아버님은 우리 가족을 보고 반가워 하셨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뇌종양이 발견되어 연이어 수술을 받으셔야만 했다.
수술 후 반신불수가 되셨고 며느리를 알아보시는지 어쩐지 잘 모르는 상태로 퇴원을 하셨다. 인천공항에
들어서면서부터 느껴지는 공기는 엄청 편안하고 자유로웠지만 아버님이 계시는 강화 집 공기는 낯설고 무거웠다. 편안함과
불편함을 왔다 갔다 했던 여행이었다.
그 한국 방문 때 다니던 대학교에 어떤 일로 들르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4년 동안 함께 공부한 같은 과 친구 희태를 만났다. 희태는 늦은 나이에
모교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목사 안수를 받을 생각이라고 했다. 같이
공부한 이들이 대부분 목사 안수를 받든 받지 않든 목회를 하고 있으니 희태의 행보가 낯설리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목회에 대한 좀 더 깊은 얘기를 나눠볼 수도 있었을 텐데 별 다른 질문이 생기질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희태가 끼고 있던 졸업 반지에 눈이 갔다. MTS 라고 학교 이름이 새겨진 단순한
반지다. 학교를 졸업하며 여 동기들이 똑같이 만들어 나누어 가졌다. 희태의
반지 낀 손가락을 가리키며 나는 그거 잃어버렸어, 라고 말했다.
“이거 너 껴.”
한 순간의 쉼도 없이 희태는 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서 내 앞에 놓았다. 나란 인간은 희태가
끼고 있는 반지를 보는 순간, 나도 죽 끼고 다니다가 결혼 반지 끼면서 빼 놓았고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가져간 것 같다고, 변명 거리를 떠올리며 잃어버렸다고 말했을 것이다. 꽤나 꼼꼼한 척 소중한 게 뭔지 아는 척하고 있던 나는 희태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아냐, 이걸 왜…… 이거 하나 밖에 없는 거잖아! 너 껴.”
“난 됐어. 너 가져.”
담담한 듯 단호하게 희태는 말했다.
하나뿐인 반지를 친구가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관심을 보였다고 해서 빼서 주겠다는 생각을 전혀 못할 나에겐 희태의 행동이 엄청 충격이었다. 게다가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때 희태와 나는
서로 다른 반이었다. 이것이 이유가 될 지 모르지만. 그
때는 희태와 친하지도 않았고 얘기를 나눠 본 기억도 거의 없다. 이런저런 모임에서 만나도 아는 사이
정도였다. 이 덜 떨어지고 세속적인 인간은 그 날 이후로 희태가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어떤 사양의 말과 태도를 보였는지 기억이 없고 그 반지는 지금 나에게 있다.
그 희태가 지난 해 뇌종양 수술을 했다. 올해 들어 종양이 전이되면서 몸 움직임도 뇌
기능도 점점 안 좋아진다는 소식을 SNS를 통해 알고 있었다. 친구들과
나는 시간과 날을 정하거나 혹은 자유롭게 희태의 건강을 위하여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난주간이
시작되면서 희태가 의식이 없고 호흡기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난 심장이 막 두근거렸다. 희태가 육신으로 이 땅에 있는 동안 더 기억하고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그릇 속에 넣어두었던 희태가 준 졸업반지를 찾아 오른손에 끼었다.
반지를 안 끼던 손가락이라 어색해서 손을 움직거릴 때마다, 오른손을 사용하면서 반지가
눈에 띌 때마다, 반지의 머리가 뒤쪽으로 돌아가 바로 잡을 때마다, 남은 생을 평안히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하고 있다.
지난 이월 마지막 날, 삼 년 동안 하던 일을 그만 두었다. 얼씨구나 하면서 삼월부터 책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일 끝나고
배고파서 한 없이 먹어대던 제육볶음처럼 책이 맛있다. 달고 매콤한 양념이 밴 돼지 고기는 물론이고 부재료로
넣은 야채들까지 입에 착착 감기는 것처럼 책 속의 글들이 머리에 마음에 콕콕 와 닿는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하루 하루 읽어나가는 분량만큼 내 영혼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한 나절 책 읽는 유희 속에 살고
있다.
교회 집사님 한 분이 탈장 수술을 하였다. 입원이 필요치 않은 수술이라도 얼마간 몸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집사님은 옷 수선 가게를 운영하신다. 가게에는
직원이 한 분 있는데, 집사님이 수술 날짜를 정하기 전에 그 기간 동안 이미 휴가를 계획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집사님의 동생분이 가게 일을 하루 이틀 도와주실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셨다. 일도 그만 둔 상태이고 일한 값을 쳐주시리라 생각하신 것 같았다.
책 읽는 것이 아무리 좋아도 아프신 집사님을 돕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난주간이기도
하고 희태가 계속 떠오르기도 하여 하루를 도와 드리기로 맘먹었다. 집사님한테는 수술 받은 직후가 제일
불편하실 터라 하루 종일 도와 드렸다. 희태가 있는 병원에서는 몇 명의 친구들이 희태를 생각하며 쓴 편지글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성 금요일이었다.
희태는 친구로서 사랑할 수 있도록 인격적이고 공간적인 나와의 거리를 줄여주었다. 멀리
있는 희태를 보러 갈 수 있는 형편은 아니나 가까이에 있는 교우를 도울 수 있어서, 희태에게 고마웠다.
2018년 고난주간의 끝 날, 침묵으로 드리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쓰다. 오늘 꼭 써야 할 것 같아서.
*2018년 4월27일 밤, 박희태 목사는 가출한 청소녀를 돌보는 사역을 하다가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품으로 떠나다.
*2018년 4월27일 밤, 박희태 목사는 가출한 청소녀를 돌보는 사역을 하다가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품으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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