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 길을 걷다가> |
교회는 나의 삶이다.
난 교회가 참 좋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다. 성장하는 시기에 맞게 드려지는 예배나 행사에 빠지지 않았고, 어떤 일이나 과제를 주어도 싫어하지 않고 끝까지 완수했다. 교회에 있으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했다.
김포에서 목회할 때였다. 상가건물을 빌려 10명도 안 되는 교인들과 어렵게 신앙생할을 하다가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다. 교회가 지어지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구석 구석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매주 교회를 방문하거나 등록하는 새가족이 생겨났다. 나의 부모님도 교회 옆으로 이사오시고 어려서부터 알던 고향 친구도 어찌어찌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내가 할 일도 적지 않았다. 전도, 심방, 예배 안내, 찬양 인도, 아동부 교육, 성인 교육, 주방일, 청소... 어릴 적 소원대로 교회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남편은 당신은 부목사나 마찬가지야, 라며 고무하였다. 나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교인이 점점 늘어나던 그즈음 당회에서 남편은 나에게 맡겼던 교육부장을 다른 이로 바꾸어 발표하였다. 새로운 교육부장은 나의 친구였다. 나랑 한마디 의논도 없었다. 교육부장이든 아니든 나에겐 별로 의미가 없었지만 남편에게 서운했다. 사실 결혼해서 함께 목회하는 내내 교회학교 교육은 거의 내 몫이었다. '교육부장이든 아니든 별로 의미는 없었지만' 남편은 교육부장에 내 이름을 올려놓곤 하였다. 남편은 내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직분-달라고 요청하거나 수락한 적도 없는-이 뭐가 중요하냐며 당신은 교회 전반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오히려 강조하였다.
그해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때였다. 강습회에서 찬양과 율동을 잘 익혀 성경학교 때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했다. 비용을 아낄 생각으로 율동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하지 않았다. 악보만 모아놓은 책도 한 권만 샀던 것 같다. 강습회에 세 명이 참석을 했는데 찬양 책은 주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찬양을 열심히 따라 했고 나는 율동을 기억하기 좋게 적어놓고 있었다. 열심히 율동을 익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교육부장이 악보가 담긴 책을 휙 끌어가 자기 앞에 놓았다. 난 순간 멍했고, 뭐가 잘못되었나 그 순간을 머릿 속에서 반복할수록 화가 났다.
나의 엄마도 나 만큼이나 교회를 사랑한다. 어쩌면 나보다 순수해서 교회에 더 심하게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모녀지간이니 기질적인 면에서 닮은 구석이 있겠지만 교회에 관하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부분이 많지 않은 듯싶다.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된 엄마 권사님은 주방 일을 거의 도맡아 하셨다. 엄마는 음식을 맛있게 만드신다. 양이 많은 음식도 겁내지 않고 만들어내신다. 성격이 깔끔하셔서 일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면 할 일이 하나도 없이 마무리를 해 놓으신다. 엄마는 나에게 교회에서 할 일이 많은데 주방 일은 이젠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딸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그러셨을 것이다. 엄마 마음을 이해했기에 주방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교회 젓가락이 몇 벌인지도 알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그곳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교회가 부흥하고 교인이 늘어나서, 여러 사람이 일을 나누고 협력할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감사한 일이었다. 교회는 변화하고 성장하는데 난 옛모습에 머물러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일들을 맡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일상이 되어 있었다. 어떤 일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나님을 위해, 적어도 교회를 위해 열심히 무엇인가를 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일을 나누기도 하고 아예 그 일을 놓고 물러서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 새로운 일(사명)로 나아가야 한다. 난 그걸 전혀 모르고 살다가 가족과 친구에게 제대로 한 방 맞고 깨달은 것이다. 그 한 방의 여운이 가시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미국으로 건너와 애틀랜타에서는 교회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천 여명 모이는 교회의 부목사 아내에게 요청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서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런 상황을 어색해 하는 나에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해서 하나님이 쉬라고 하시나 보다. 지금은 그냥 편안히 쉬어.”
엄마의 조언처럼 그저 쉬면서 내 믿음만 잘 지키면 되었다. 덕분에 영어공부하는 학교도 기웃거리고, 선교센터의 간사도 해보고, 한국학교에서 가르치는 경험도 갖게 되었다. 콜럼비아교회에서는 다시 담임 목회자의 아내로 지내야 했지만 한국에서처럼 온갖 일을 다하려고 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일인데 하려는 사람이 적거나 없을 때 기꺼이 나섰다.
지난해 9월, 몽고메리제일교회가 새로운 목회지가 되었다. 한국에 계신 강화 어머님과 통화를 하면서 아동부를 돕게 되었는데 교회학교 교육에서 멀어져 있었기에 잘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된다고 말씀 드렸다.
“ 힘들어도 열심히 햐.~ 배운 게 아깝지 않니? 내가 할려고 하면 안 댜아.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햐.”
어머님은 연세가 70대 중반을 넘어선 강화 망월교회 권사님이시다. 어느 날 연합속회를 인도하시게 되었다. 순서에 따라 진행하시던 중 성경 읽는 것을 까먹고 다음 순서로 넘어 가려 하셨다. 그러자 어머님 가까이에 계시던 박장로님이 눈치로 알려주셨다고 한다.
“이렇다니까요!”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교인들이기에 모두가 공감이 되어 까르르 웃고 지나가셨단다. 그러고 나서 어머님은 속회 인도자를 그만 내려놓겠노라 목사님께 말씀드렸다고 얘기해주셨다. 어머님은 이 일로 물러설 때를 감지하신 것이다.
우리 가족이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할, 몽고메리제일감리교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배움이나 경험이 교회를 위해 쓰여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엄청 감사할 뿐이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물러서야 할 때 가벼이 발걸음을 돌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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