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2018

거기 계셔주세요





아침 햇살이 수줍게 퍼질 즈음이면 뒤뜰에서 겨우 겨우 자라고 있는 고추와 호박이 지난 밤을 잘 보냈는지 궁금해진다. 4월 중순이 넘어 모종을 사러 가면 부실한 것들만 남아 있는듯하여 올해는 4월 들어서자마자 서둘러 고추 모종을 사다 심었다. 호박은 지난해 추수감사주일에 얻은 늙은 호박에서 씨를 얻었다. 두 그루의 고추는 안전하게 양동이에 심었다. 그리고 호박은 잡초투성이인 텃밭을 삽으로 뒤집어 엎기만 하고 거기에 씨를 꾹꾹 박아 놓았다. 올해는 더도 말고 이 두 가지 식물이 자라고 열매 맺으면서 주는 기쁨을 누려보리라 상상하며 넉넉하게 물을 주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고추는 이파리가 군데군데 누렇게 되고 비실비실 댔다. 씨를 심고 3주쯤 지나서 호박 떡잎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흙 밖으로 나와준 싹에게 고마워서 잘 자라거라, 하며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성하게 자라날 호박을 그리던 끝자락에는 밑거름도 안하고 씨를 뿌렸다는 사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호박은 거름을 충분히 줘야 하는데 까먹었다. 하긴 호박을 제대로 심어 열매를 얻어본 경험이 겨우 한 해 밖에 없으니, 차분히 기억해내고 알아보고 심었어야 했는데 마음이 앞섰다. 그래도 어떻게 살려볼 길이 없을까 싶어 퇴비를 사다가 흙 위에 조심스럽게 뿌려주었다. 어찌 될 지 아슬아슬 하다.

한국에서 지키는 어버이 날이 되어 부모님들께 전화를 드렸다. 먼저 강화 어머님과 통화를 하였다. 전화를 드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부만 여쭙고 있다가 부실한 호박과 고추 생각이 났다. 평생 농사를 지어오신 어머님한테는 내가 가진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책이 분명 있으리라 기대가 되었다. 엉터리 텃밭의 상황을 설명 드렸다.

, 괜찮아. 고추나 호박 싹에서 한 뼘쯤 떨어져서 손가락으로 동그래미를 그려. 거기다가 거름하고 비료를 솔솔 뿌려. 거기 퇴비는 오래 된 건가? 그러면 가까이에 뿌려도 되긴 한데……”

아차 싶었다. 사 온 퇴비를 조금이지만 벌써 가까이에 뿌렸다고 말씀 드렸다. 어머님은 그게 별로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듯 다음 말씀을 곧 이어가셨다.

거긴 벌 있니?”

뜬금없는 질문에 벌이 있는 것 같은데 확신할 수가 없어 말끝을 흐리며 네, 라고 대답했더니 어머님은 틈을 주지 않고 설명하셨다. 호박 줄기에 달린 암꽃과 수꽃이 수정을 해야 호박이 되는데, 벌이 있으면 신경 안 써도 되고 벌이 없으면 사람이 수정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박꽃은 다 똑같은 꽃이 아니었나?’ 난 새로운 사실에 살짝 놀라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호박의 암꽃과 수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들이 한 그루에서 같이 피는지 아닌지 몰랐다. 어머님은 애기호박에 달려 있는 꽃이 암꽃이고 수정 되지 않으면 호박이 자라지 않는다고 가르쳐주셨다. 어머님께서 사시는 곳에는 벌이 없어 직접 수정을 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벌이 없다니 정말 심각하네……’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언젠가 적어놓았던 마크 윈스턴이 쓴 『사라진 벌들의 경고』를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이 옆길로 빠지려는 순간, 근황을 전해주실 때의 담담한 목소리가 아니라 빠르고 높은 톤의 어머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내가 어머님 말씀을 잘 못 알아듣는다는 걸 눈치채신 모양이었다

, 수꽃을 매정하게 확 잘라! 꽃 주둥이 쪽을 쭈욱 도려 내. 그리고 암꽃에다가 꽃가루를 묻혀줘.”
…...”
나는 그대로 꽉 박아놓는다.”

그리곤 호호 웃으셨다. 꽃잎이 일부 잘려진 수꽃을 암꽃에다가 걸쳐놓은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머님이 하도 신나게 말씀하셔서 호박꽃이 피면 그리 해 보겠노라 답해 드렸다. 그랬더니 다급하게 한 마디 더 보태셨다.

어머, ! 호박꽃은 하루 이틀 밖에 안 펴. 피면 그냥 해야 돼!”

어머님은 심는 김에 가지나 토마토도 심어보라고 권해주셨다. 키우기 쉬운 것들이고 요즘 심어도 늦지 않았다고 알려주셨다. 난 다른 식물들을 더 심을 생각이 없어 얼른 화제를 바꾸어 가지치기에 대해 여쭤보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전문용어를 써 가면서 설명을 하는데 잘 이해가 안 갔었다. 어머님은 그것도 쉽게 정리해주셨다.

고추나 가지는 뿌리에서 제일 가까운 이파리와 순만 따주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라고 하셨다. 토마토는 열매가 튼실하려면 곁가지가 자라지 않게 순을 모두 따줘서 원줄기만 살려야 하고, 반대로 호박은 잎이 네댓 장 달린 후에 원줄기를 잘라주면 가지가 더 많이 뻗어나가면서 열매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어머님은 그거 재밌어!, 라고 강조하셨다. 식물이 자라고 열매 맺어 하나 둘씩 따서 드시고, 둘째 아들네나 이웃과 나눠 먹는 재미를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여겨졌다. 어머님과 다른 때보다 훨씬 오래 전화 통화를 했다. 텃밭 가꾸는 데 필요한 좋은 정보는 내가 얻었는데 어머님이 더 즐거우셨던 것 같았다.

엄마네도 전화를 했다. 엄마하고도 통화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전화벨이 한참 울린 다음에 엄마가 허겁지겁 달려온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야.”
, 어버이 날이라 전화했지? 나 씻다가 나왔어. 다음에 통화하자. 별일 없지?”
.”
다음에 엄마한테 전화할 때는 열무김치 담그는 법을 여쭤보아야겠다.

다음 해에도, 그 다음 다음 해에도, 그 다음 다음 다음……해에도 거기 계셔서 내 전화를 받아주시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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