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2018

느리고 틈이 많은


조지아주 사바나 어느 오래된 농장 입구.

예년과 다르게 봄이 길어지면서 봄철의 매력인 쌀쌀함이 계속되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얼굴과 손 끝만 남겨놓고 담요로 온몸을 돌돌 말았다. 담요를 뒤집어 쓴 채로 소파에 깊숙이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어느 한 곳이라도 차가운 기운이 닿지 못하게 담요 끝을 요리조리 꼼꼼하게 여몄다. 쿠션 두 개를 무릎 위에 포개고 그 위에 책을 올렸다. 담요 밖에서 한 손가락만 움직이면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자세가 갖추어졌다. 다른 날에는 커다란 창문 옆에 있는 식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집이 좀 추운 편이라 거기 앉아 있으면 더욱 서늘해서 정신도 더 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 주에는 수술을 하신 집사님의 일터에서 일손이 꼭 필요하다고 하여 도와드린다는 마음으로 일을 했다. 한 주 동안 수고한 보답으로 몸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는 마음이었다.

아들 산이는 친구들 만나러 갔고 남편은 주일 예배 준비하러 교회로 갔다. 산이는 일 주일에 한번 만나는 친구들과 놀다가 점심을 먹고 올 것이었다. 지역 장애인 단체가 제공하는 respite service에서 만나는 친구들이다. 주중 프로그램에 연결되지 않은 장애인들이 주말 하루는 집 밖 활동을 하도록,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이들도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서너 시간 동안 쉴 수 있도록 돕는 서비스이다. 산이가 없는 토요일 점심은 남편과 오붓하게 두 사람의 입맛에 맞는 식사를 할 수 있다. 남편은 아들을 놀이 장소에 데려다 주고 그날 따라 교회에 있는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겠다고 전화로 알려 왔다. 포근한 담요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던 차에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 혼자 먹는 끼니는 더욱 아무 문제가 없다.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고. 허전하면 냉장고 뒤져서 바로 먹을만한 것 꺼내서 배만 채우면 된다. 이제 며칠 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오후까지 느긋하게 읽어야지, 여유로움이 담요 안에 사르르 퍼졌다.

책의 흐름을 되새기기 위해 목차를 훑어보았다. 그리곤 지난 번 읽다가 멈춘 곳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에 이어서 두어 페이지를 읽었다. 어느 줄에 이르렀을 때 앞에서 언급했다는 설명이 나왔다. 잠깐만, 앞에 무슨 내용이었지? 다시 돌아가 천천히 읽어왔는데, 또 생각이 안 났다. 책장은 넘어가지 못하고 뚝뚝 떨어지는 졸음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왕 몸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으니 그대로 앉아 좀 졸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앞으로 푹 떨구어진 고개가 뻐근했다. 그럼 몸을 살짝 틀어 소파 등받이에 머리만 기대어 볼까….. 아까 보다는 조금 더 잠잔 것 같았으나 이번에는 허리가 아팠다. 예상했던 바였다. 이쯤 되면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그러라고 편하게 눕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성의 결단과는 다르게 담요로 꽁꽁 싸매 옹크린 몸은 그대로 소파에 꼬꾸라졌다.

주말의 반나절을 꼬박꼬박 조는 꼴이라니, 물리적인 힘이 조금씩 빠지면서 의지대로 할 수 없는 틈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의미 있는 일은 꾸준히 밀고 나갈 수도 있고, 사람이나 환경을 수용하는 폭이 넓으며, 타인의 얘기를 긴 시간 장단 맞추며 들어줄 수 있는 여유로움도 살짝 있다고 내 자신을 두둔해 주어도 그 틈이 다 채워지지 않는다. 느리고 빈틈이 많은 삶이다. 생김새만 보아도 그렇다. 둥글둥글, 물컹물컹, 울퉁불퉁, 중년 여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묵직한 풍성함, 그 자체다. 행동이 날쌔고 잰 사람들은 아무래도 몸이 가볍다. 난 그렇지 않다. 게다가 직장도 그만두었으니 하고 싶은 것 맘껏 하면서 널널한 시간을 다채롭게 꾸려가려니, 그렇게 또 다른 형태의 분주한 생활을 할 것 같다고 미루어 짐작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덜 바쁘고 경제적으로 덜 여유롭더라도, 더 평안하고 더 단순한 삶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두어 달 지내보니 메말라 버석버석 먼지만 날리는 영성의 안쓰러운 상태도 보게 되었다.

멀리 텍사스에서 사시는 현원 사모님과 심 목사님께서 이틀 밤을 우리 집에서 묵어가셨다. 사모님은 신앙 열정이 뜨거운 분이라 종종 도전을 받곤 한다. 50대 중반을 넘어선 사모님은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라는 시편 71 9절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듯하다고 하셨다. 노년이 된 다윗이 하나님께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시구다. 사모님은 청년 시절 열심히 예수님 닮아 살려고 애쓰던 때와는 달리 나이 들어 가면서는 신앙 열정이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하셨다. 하지만 청년의 때보다 덜 할 뿐이지 사모님은 지금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봉사에 열심인 것을 안다.

사모님이 가시고 난 뒤에 시편을 더 읽어보았다. 다윗은 힘 빠진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며 그래도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 …… /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 …… /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시편 71:14, 18, 24)

느리고 틈이 많은 영성을 가지고서라도 주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위로가 되었다. 자신과 주변을 살피고, 항상 주를 찬송하며, 주의 능력과 의를 읊조리기…… 텍사스 사모님을 통해서 나를 말씀에 비추어 보는 거룩한 순간에 놓였을 때, 주님의 은총이 가까이 있음에 그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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