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햇빛이 좋은 날, J는 아시안 식재료를 파는 마트에 구경 가자고 했다. J는 미국에서 첫발을 디딘 뉴올리언스에서 45년을 넘겨 살고 있다. 마트를 오가는 동안 그의 희로애락이 담긴 이민 이야기 속으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
70년대 끝 무렵, J는 먼저 도미한 아버지의 권유로 한국에 남아 있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에 도착한 J는 남부 시골 풍경에 무척 실망하였다. 미국이라면 영화에서 본 뉴욕처럼 높은 빌딩이 가득한 도시일줄 알았는데 J의 눈앞에는 녹슨 철도와 다리, 풀이 무성한 거리 뿐이었다. 서울 명동에 살면서 남산에 있는 국립극장 사무직 공무원이었던 그는 이런 시골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집안에 틀어박혀서 티브이만 보던 그에게 어느 한인은 왜 젊은 사람이 놀고 있냐며 호텔 일을 권유했다. J는 그의 엄마와 함께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하얏트 호텔 주방에서 접시 닦기를 시작했다. 호텔에서 일한 지 두어 달 지났을 때 그 모녀는 식품점으로 장을 보러 갔다.
20대의 J는 예쁘장한 한국식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식품점을 둘러보던 그들에게 갑자기 강도가 다가와 J의 뒷목과 척추를 칼로 찌르고 가방을 빼앗아 달아났다. 그의 엄마는 딸의 가방을 되찾기 위해 강도를 붙잡았다. 강도는 엄마의 팔을 찔렀고 어수선한 상황을 보고 달려온 식품점 매니저의 어깨도 찌르고는 달아났다. J는 심한 장애를 입을 뻔한 아찔한 상황을 겨우 피했고 엄마와 함께 병원 치료를 받았다.
J는 호텔 의료보험이 좋아서 그 당시 병원비는 문제없었다며 그의 모험담을 마무리했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도 다운타운을 지날 때 그가 일했던 호텔을 잊지 않고 알려주었다. 호텔 꼭대기에 있는 돔은 서울타워 레스토랑처럼 360도 회전하며 꽤 돋보이는 빌딩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마트가 있는 동네에 들어서자 J는 이민 와서 처음 살았던 동네라서 익숙하다고 했다. 잊지 못할 장소에 와서 그랬는지 J는 그의 엄마에 대한 추억을 하나 더 들려주었다. 그의 엄마는 아주 씩씩하고 언변이 좋으셨단다.
호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엄마는 재미난 말로 J의 고단함을 씻어 주시곤 하셨다. 엄마는 닭이 뭐라고 우는지 아느냐 물으시고는 수탉은“꼬끼오~ I love you~”하고 암탉은 “꼬끼오~ I don’t like you~”라고 대답하셨단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엄마의 우스갯소리가 재미있는지 깔깔 웃는다.
J의 부모님은 돌아가신 지 10년이 채 안 되었다. 그는 부모님을 가족이 모두 묻힐만한 넓은 묘지에 정성스럽게 모셨다. J는 “여기는 엄마, 여기는 아빠”유골이 묻힌 장소를 가리켰다. 부모님 곁에 자기가 묻힐 자리도 있다며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부모님이 그리워 묘지를 자주 방문하는 J의 마음을 나는 알듯 모를 듯했다. 보통은 학교나 직장 혹은 결혼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는데 J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늘 함께 지냈으니 그 정이 더 깊은가 보다. J는 “나는 여기서 살 거야. 부모님이 여기 계신데 어디를 가겠어”라고 야무지게 말한다.
J는 호텔에서 8년쯤 일하다가 한식당, 코리안 하우스를 차렸다. 번화한 위치에 있던 한식당은 남동생까지 네 식구가 매달려 일했다. 그는 코리안 하우스가 지역내 유일한 한식당이어서 한국 연예인이나 고위 공직자나 유명 선수가 다녀갔다는 말도 덧붙였다. 식당을 35년 동안 열정적으로 경영했을 J의 모습이 그려졌다.
우리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J는 불쑥 자신이 젊었을 적에 아버지를 닮아 고지식하고 퉁명스럽고 말수가 적어서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교만하다고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현재의 J를 보면 마음은 따뜻한데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게 서툴러서 그렇게 보였을 거라고 짐작했다.
J는 이제와 돌아보니 식당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신문에라도 내야 할까? 그때 왔던 손님들에게 미안하다고 말이야.”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실행하지 않을 해결책이었다.
부모님이 남겨 주신 추억이 J의 존재를 온통 감싸고 있다. 자녀에게 헌신하고, 당당하며 예의 바른 삶을 사는 J를 보면 말이다. 5월은 푸르고 우리들은 부모님의 사랑으로 오늘도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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