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2014

정직하고 친절한 기업들




얼마 전, 가끔 이용하는 백화점 콜스(KOHL’S)에서 수표(Check) 한 장을 받았다. 나에게 발행된 것이었다. 수표에 적힌 금액은 25달러였다. 수표 아래 쪽에 있는 메모 공간에는 신용카드 잔액을 환불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지난 봄에 콜스에서 뭔가(이 몹쓸 기억력은 올 봄의 사소한 일들을 벌써 거의 잊었다)를 사고 그 백화점에서 발행한 신용카드로 결제를 했다. 사용한 금액은 그 다음 달에 어김없이 청구되었다. 내가 사용하는 신용카드가 몇 장 되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지불 기일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마감일 보다 몇 일 먼저 결제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하루 이틀 미루다가 콜스 신용카드 마감일 이틀을 남겨두고 온라인 뱅킹으로 결제를 시도했다. 보통은 이 결제가 당일이나 그 다음 날이면 가능하다. 여유롭게 들어간 온라인 뱅킹에서는 이틀이 지나 결제가 가능하다고 표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불 마감일에서 하루 늦게 결제가 되는 것이었다. 우편으로 내 수표를 보낸다 해도 마감일을 넘기기는 마찬가지여서 어쩔 수 없이 온라인 뱅킹의 결제를 허락했다.

그리고 또 한 달 뒤, 그 백화점은 마감일을 넘긴 벌금으로 25달러를 나에게 청구했다. 마감일을 하루 넘긴 잘못은 분명 나에게 있었지만 25달러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고 너무 아까웠다. 난 그 벌금을 결제하기 전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고객 센터에 전화를 했다. 상담원에게 결제가 왜 늦게 되었는지 설명을 한 뒤에, 그 동안 한 번도 마감일을 넘기지 않고 신용을 잘 지켜온 고객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상담원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다시 돌아와, 일단 25달러를 내면 환불해주겠다고 했다. 뜻밖에도 너그러이 벌금을 면제해주어 기분이 좋았다.

환불을 어떻게 해 주겠다는 것인지는 말이 없었기에 잊고 지냈다. 한 달이 다시 지나 청구서가 날아왔는데 신용카드 잔액에 25달러를 넣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결국은 자기네 신용카드를 다시 사용하도록 해놓았지만 벌금을 받지 않고 돌려주어 고맙게 여겼다. 언젠가 콜스에서 그 잔액을 사용할 일이 있겠지 하고 넘겼다.

바쁘게 올 여름이 지나갔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아도 매달 보내주는 청구서에는 25달러가 남아있음을 계속 알려주었다. 어서 사용하라고 재촉하는 듯하여 꼭 사야 할 생필품 가운데 25달러가 넘는 것을 찾고 있었다. 드디어 아이들 운동화가 필요했고 운동화 사는데 보태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이어서 받은 청구서에는 그 25달러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에구구, 빨리 사용할 걸…… 그래도 그렇지 줬다 빼앗는 건 또 뭐람! ‘

조금 아쉬웠으나 콜스 쪽에서도 고객에 대해 자기들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보여주었다 여기기로 했다.

이렇게 몇 개월 동안의 해프닝이 마무리되었나 싶었는데 콜스에서 수표가 우편으로 온 것이다. 25달러를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수표로 말이다. ,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살짝 감동 받았다.

이웃 블로거(http://oldman-james.blogspot.com)에게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코스트코(Costco)에서 5월에 복숭아를 샀단다. 그는 얼마 전 이 복숭아에 박테리아 감염우려가 있어 리콜을 한다며 코스트코에 와서 환불을 받으라는 편지를 받았다.

이 복숭아는 이미 다 먹은 지 오래 전이고, 영수증도 없고 해서 환불 받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다 나처럼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코스트코를 방문하는 길에 점원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고 한다. 점원은 그의 멤버십카드로 거래 기록을 조회하더니 $7.87를 현금으로 손에 쥐어주더라는 것이다.

이웃 블로거는 많은 손실이 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감염 가능성의 사실을 판매상인 Costco에 알린 복숭아 과수원지기 혹은 중간 유통회사의 정직함, 몇 불 안 하는 복숭아 한 박스 구입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알리고 찾아 온 손님들에게 군소리 한마디 없이 돈을 내주는 Costco라는 회사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직하다고 적고 있다.

적어도 이웃 블로거나 내가 경험한 기업들이 정직과 친절한 태도로 고객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업들에게 신뢰가 가고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정직과 친절은 신뢰의 관계를 쌓아가는데 중요한 덕목들인 것이 분명하다.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이러한 덕목들을 실천한다. 하물며 이윤창출 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진,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정직하고 친절한 삶을 살아야 할 텐데…… 도와주시길 하나님께 빌어본다

9/08/2014

한국학교에서 배우기




한인 이민자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학교가 개강을 했다. 지난 학기에 임시 교사로 몇 주 참여한 것이 기회가 되어 이번 학기에 초등학교 3, 4 학년이 된 아이들이 있는 한 반을 맡게 되었다. 새로 만난 우리 반 아이들과 부모님들은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특별히 높아 보였다.

학교가 개강하는 날 부모님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우리 반 학생들 집집마다 전화를 돌렸다. 그러던 중 손주들을 한국학교에 보낸 할머니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큰 아이는 한글을 읽는데 똑같은 기간을 배운 동생은 왜 아직도 읽지를 못하냐며 호통을 치셨다. 나는 할머니의 큰 손주를 맡게 되어 전화 드린 것이라 동생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었다. 나와의 통화가 시원치 않으셨는지 오리엔테이션에 오셔서 교장을 직접 만나 봐야겠다고 하셨다.

아이들의 부모님은 영어권이어서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쉽지 않은 환경인데, 오히려 할머니께서는 손주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게 하는데 아주 열정적이신 듯했다. 이분은 선생님들 사이에 무서운 할머니로 불린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학교가 시작하는 날 진짜로 찾아오셨다. 나는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맡아서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할머니는 작은 아이를 한국어 수준이 높은 반에 넣기를 원하셨고, 교장 선생님은 결국 큰 아이와 동생을 같은 반으로 배정하셨다. 둘 다 나의 반이 된 것이다. 한 학기 혹은 한 학년이 지나 동생이 글을 읽지 못하면 난 할머니께 혼나게 생겼다.

우리 반의 또 다른 아이는 3 학년인데 세 살부터 한국학교를 꾸준히 다니고 있단다. 또 다른 두 아이의 아버지들은 이사회에 참여하면서 학교를 열심히 돕고 계신다. 한 아이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은 잘 하지만 잊지 않고 더 잘 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러 온다.

학교가 끝나고 아이를 데리러 온 어느 아버님은 숙제가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학기 시작하는 첫날에 말이다. 다른 지역 한국학교에서도 가르쳐 봤지만 숙제를 내줬는지 물어본 학부모님은 처음이었다. 한 학기 학습 계획을 만들면서 숙제를 내주어야겠다고 이미 마음 먹고 있었다. 그래도 첫날부터는 아니였는데…… 아이들은 숙제 있다고 하면 엄청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난 마음을 정했다. 학교 행사가 있어서 수업이 없어도 숙제는 빠트리지 않고 꼭 내주는 걸로!

또 이곳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 이외의 많은 시간을 한국학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서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한인 이민자가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수백 명씩 모이는 한국학교가 여럿 있다. 주로 한인회나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들이다. 규모가 큰 학교는 운영하는데 필요한 인력과 재정이 넉넉해서, 운영을 책임지는 선생님들과 특별활동 선생님들이 따로 있고 교사들은 보통 자기 반 수업만 충실히 준비하면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한인 인구가 4,000 명쯤 되는 곳으로, 한인회 아래에 한국학교가 하나 있다. 30 명 안팎쯤 되는 학생들과 너덧 명의 선생님들이 작은 학교를 만들어가고 있다. 학생 수가 많든 적든 한국학교는 한국어, 문화와 역사를 가르치고 경험하게 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을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 보니 이곳 학교의 선생님들은 학교 운영, 수업, 특별활동 등등을 거의 같이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더 잘 가르치기 위한 방법들을 찾으려고 애쓴다. 선생님들과 사귄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그들이 학교를 위해 기쁘고 즐겁게 일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한국학교를 아끼는 마음이 느껴진다.

난 그들에게서 자신들의 시간과 선생으로써의 능력을 기꺼이 나누며 봉사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배울 수 있다면, 나는 그들과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선생님들에게는 지치지 않는 봉사의 마음과 가르치는데 필요한 지혜를, 학생들에게는 한국어를 잘 깨달아 배워갈 수 있는 지혜를, 학교 생활이 즐겁고 안전하기를,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재정이 넉넉히 채워지도록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마음을 나누면 될까?

8/25/2014

작은 화분 속의 기적




뒤뜰 쪽으로 난 창문 아래에 좁고 길쭉한 꽃밭이 있다. 꽃 몇 뿌리만 심으면 꽉 차는 조그마한 공간이다. 그래도 아침에 블라인드를 열었을 때 고운 빛깔로 웃음을 건네는 몇 송이 꽃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꽃밭의 한쪽은 백합이 심겨져 있다. 부활주일 강단을 장식했던 백합 화분들에서 나의 꽃밭으로 이사온 녀석들이다. 백합의 알뿌리는 번식력이 좋은지 해가 지날수록 봄이면 올라오는 꽃줄기가 늘어나고 있다. 나머지 공간에는 메리골드, 빈카 따위를 심었었다. 이런 한해살이 꽃은 해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여러 종류의 꽃들을 심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다가 올해는 여러해살이 식물에 마음이 더 가길래 제라늄과 데이릴리를 두 뿌리씩 심어보았다.

물만 줄뿐인데 제라늄은 빨간색 꽃을 연이어 피우고 있다. 키우기 쉬운 식물이지 싶다제라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생각 밖으로 이 꽃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종류도 색깔도 다양했다. 잎에 독특한 향이 있어서 모기가 오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단다. 또 가지를 잘라 심어놓으면 어느새 한 그루의 제라늄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꽃이 많이 피는 제라늄과는 달리 데이릴리는 서너 주가 지나도 처음 심어놓았을 때와 별다른 차이 없이 가느다란 초록 잎만 보여주었다.

이파리 사이사이에 징그러운 고놈들이 아주 많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물을 주러 나갔는데 데이릴리에 민달팽이들이 여러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제라늄이나 백합 쪽에서는 민달팽이를 찾아볼 수 없는데 바로 옆에 있는 데이릴리의 이파리에서는 꿈틀대고 있었다. 민달팽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그것들이 징그럽고 싫었다. 하루 이틀 두고 보니 이파리들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고놈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이파리가 노랗게 죽어갔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벌레나 곤충들을 별로 안 좋아하기에 남편에게 민달팽이를 처리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걔네들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냥 두라는 것이다.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서 집 벽에도 덕지덕지 붙어 기어 다녔다.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퇴치법을 찾아보니 맥주에 담배 가루를 뿌려 놓으면 맥주 마시러 왔다가 담배의 독성 때문에 죽는다는 얘기만 많았다. 민달팽이 잡자고 맥주나 담배를 사느니 집에 있는 곤충 잡는 약이라도 뿌려보자고 했다. 화학약품이 안 좋으니 뭐니…… 대의명분으로 사는 남편도 아침마다 민달팽이를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는 아내의 끈질긴 볼멘소리를 못 견디고, 약도 뿌리고 몇 마리는 직접 잡아 죽이기도 했다. 결국 할 거면서 왜 그리 버티는지 모르겠다.


그 후로도 그것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데이릴리의 이파리를 괴롭혔다. 꽃봉오리도 갉아먹어서 똑똑 떨어뜨려 놓았다. 노란 색 꽃 한 송이가 겨우 살아남아 피었는데 꽃이 너덜너덜 했다. 불쌍했다. 잘 돌보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다 헤어진 노란 색 이파리들한테 미안해서 그 다음부터 내 눈에 띄는 민달팽이는 다시는 초록 잎의 맛을 보지 못하도록 엄단했다!

이렇게 그것들에게 맘을 독하게 먹은 이유가 또 한가지 있다. 첫째 아이가 어머니 날이라고 사온 페튜니아가 있었다. 특수학급 선생님, 친구들과 단체로 가서 샀을 것이다. 딱 주먹만한 화분에 심겨져 있는 진분홍색 꽃이었다. 학교를 통해서 어머니 날 꽃을 받는 것은 마지막이기에 오래 두고 볼 요량으로 민달팽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제라늄 근처에 옮겨 심어놓았다. 그런데 민달팽이가 페튜니아는 데이릴리 보다 더 만만한지 홀딱 먹어버렸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줄기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남은 페튜니아 줄기를 원래 것보다 조금 큰 화분에 심어주고, 민달팽이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생명력이 강한 페튜니아라도 손상이 심해 보였다. 줄기 끝이 마르고 있었다. 민달팽이를 포함해서 꽃밭을 둘째 아이에게 맡기고 한국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돌아와 꽃밭을 살펴보니 민달팽이가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 볕에 다 숨어버렸는지 어쩐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제라늄은 착하게도 여전히 붉은색 꽃을 내놓고 있었고 데이릴리는 더 이상 민달팽이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고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페튜니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잎과 꽃이 화분에 가득했다. 포기하지 않고 물만 주었을 뿐인데 말이다. 와우!

꽃나무를 괴롭히는 민달팽이는 언젠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 지금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줄기만 짤록하게 남아 말라 들어가던 페튜니아가 다시 살아 진한 분홍색 꽃을 피우는 것을 바라보면 기적 같다. 이 작은 화분 속에서 일어난 기적이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길 바라는 우리 교회나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8/18/2014

지나친 슬픔







1992, 텔레비전에서 성탄 특집으로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방송한 적이 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두 아이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술이면서도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이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조용한 울음도 계속되었다. 해맑은 아이들이 수술 후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감정은 점점 짙어졌다.

수술 후 3일이 지나 쌍둥이 가운데 한 아이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쯤에서는 내 목구멍이 조여오는 아픔을 느꼈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을 쉬려고 해도 몸이 맘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목줄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얼마간 견디다가 다시 숨이 돌아와 살았다. 울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첫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다음 해에 아이가 태어났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송을 볼 때는 내 아이가 장애아일줄 꿈에도 몰랐는데 뭐가 그렇게도 슬펐는지 죽을 만큼 울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몇 달 뒤, 극장에서 영화 서편제를 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본 이 영화의 줄거리를 짧게 정리해 보면 이렇다. 소리꾼인 유봉은 금산댁을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유봉에게는 양딸인 송화가 있고, 금산댁에게는 아들 동호가 있다. 금산댁이 유봉의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된다. 유봉은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고 동호에게는 북 치는 것을 배우게 한다. 소리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던 시절이라 세 사람의 삶은 퍽퍽하기만 하다. 동호는 이러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유봉과 송화의 곁을 떠난다.

유봉은 소리란 한()에 사무쳐야 제대로 나온다고 여기고 송화에게 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송화를 남겨두고 유봉은 세상을 뜬다. 그렇게 송화와 동호는 각자의 삶을 살다가 어느 주막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송화는 소리를 하고 동호는 북을 치게 되는데, 앞을 못 보는 송화는 북소리만으로 동호임을 짐작한다.

이 오누이가 만나 북장단에 맞춰 소리를 하는 장면에서 난 또 한번 죽는 줄 알았다. 이미 몇 달 전에 울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있기에 감정을 조절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헤어져 살던 오누이가 마주 앉아 서로를 아는 체 하지 않고 들려주는 소리와 북소리에 내 온몸이 잠기는 것 같았다. 그들의 한이 온몸을 절절히 파고 들어 절여놓는 느낌이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극장이기도 하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간 남편에게 우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소리를 내지 않고 울다가 또 목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두 번의 울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한 뒤로 슬픈 영화나 드라마 따위는 아예 보지 않기로 했다. 어찌하다 보게 되더라도 목석 같은 심정이 되어 보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요즘 동영상도 아니고 멈추어 있는 사진 한 장만 보아도 가슴이 저릿하면서 눈물이 고이는 경우가 자꾸 생긴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광화문에서 단식하고 있는 희생자 아버지의 초췌해져 가는 모습,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가다가 경찰에게 끌려 나와 실신한 희생자 어머니가 길바닥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모습, 세월호 참사로 인해 죽어간 희생자들을 기억해 달라며 십자가를 지고 900 km를 순례한 희생자 아버지들의 울먹이는 모습……

샴쌍둥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영화 서편제를 보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슬픔을 느낀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소식들을 듣고 보면서 그 이유를 이제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생명, 가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보호되고 지켜내야 하는 소중한 가치들인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그 가치들이 존중 받지 못하고 훼손될 때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내 나름의 삶의 굴곡과 장애아를 자녀로 둔 어미의 심정이 보태어져서 그런 슬픔을 느꼈나, 짐작해 본다.

아직은 나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그 울음이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오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말씀에 기대어 보아야겠다

8/10/2014

전문가와 비전문가


아들 산이가 찍어놓은 사진이 있길래... ^^


얼마 전 한국 여행 갔을 때 지난 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타시던 자동차가 아직 있어서 편안하게 다닐 수가 있었다. 집에서 먼 곳으로 외출할 경우는 버스와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고 집에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곳은 자가용으로 이동했다.

그날도 친구를 만나기 위해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라 교통량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 복잡한 시내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라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자주 이용하곤 했다. 터널이 여러 개 연속해서 나오는 구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같은 차선에서 빠르게 저만치 앞서 달리던 자동차의 빨간 브레이크 등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내 차의 속도도 줄이면서 옆 차선을 보니 다른 자동차들은 쌩쌩 달리고 있었다.

뭐지? 차선을 잘못 선택했나 보군, 생각하는 순간 자동차 범퍼 보다는 작은 크기의 디귿 자 모양을 가진 물체가 내 차 앞에 뚝 떨어졌다. 내가 탄 자동차의 왼쪽은 터널 벽이고 옆 차선에는 자동차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그 물체를 밟고 지나갈 수 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오른쪽 앞 바퀴가 그 물체를 타고 넘는 것을 느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고 운전하는 내내 계기판 어딘가에 주황색의 경고 등이 혹시라도 들어오는 지 신경을 써야 했다.

다행히도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동안 자동차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 소심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문제가 있다가 자동차가 달리는 도중에 탈이 날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운전이나 조심스럽게 할 줄 알았지 자동차 구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쪼그리고 앉아 자동차 밑면을 들여다 보았다. ! 자동차 아래로 액체가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에어컨디션을 사용했으니 물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겁이 덜컥 났다.

자동차 수리나 검사를 하는 카센터를 운영하는 P 집사한테 득달같이 전화를 했다(미국에서라면 남편에게 전화 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친분이 있는 전문가에게 문제 상황에 대해 한국말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나 편안하던지…). 상황을 짧고 다급하게 설명을 했다. 집사님은 떨어지는 액체가 투명한 지 색깔이 있는 지 살펴보라고 차분하게 알려주었다. 다시 몸을 구푸려 살펴보니 색깔이 있거나 냄새가 나는 액체가 아니니 물인 것이 분명했다. 집사님의 한 마디에 자동차에 대한 걱정이 싹 날아가버렸다.

P 집사는 남편과 함께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자신도 자동차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있는 듯했다. 나중에 이 상황에 대해 다시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 전화로 정비 한 건 했어요라고 말하는 집사님 때문에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자동차에서 떨어지는 액체를 분별하여 문제가 있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은 상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동차 수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게는 P 집사의 처방은 전문가의 소견이었다. 나는 상황에 따라 지레짐작 하여 불안했지만 집사님은 차분하고 명료하게 대처했다. 비전문가와 전문가의 차이인가 보다.

그러고 보면 자동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난 어리바리 비전문가다. 그래서 삶을 바라보는 시야도 좁고, 생활이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않다고 여기기도 한다. 어느 순간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기도 하지만 많은 시간 동안 염려를 떨치지 못하기도 한다.

주일 예배 설교 시간에 베드로후서 3장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목사님은 한 사람의 인생도 끝이 있으며 지구를 포함한 모든 별들도 언젠가는 소멸을 겪게 될 것이니, 우리는 하루를 천 년 같이 천 년을 하루 같이 여기며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자고 했다. 그리고 죽음과 소멸은 끝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이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으니 그 약속을 믿고 살자는 것이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한 시간이 아니라 평강 가운데 말이다.

신앙인들이 늘 듣는 평이한 설교 같아도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은 나에겐 마음에 찔림을 주는 설교였다. 내 삶의 문제를 진단해주고 기꺼이 고쳐주는 전문가는 성경과, 그 성경을 해석하고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는 지금의 담임목사라는 생각이 든다

8/04/2014

청년 시절과는 다른




어렸을 적에는 내가 노래를 꽤 잘 부르는 줄 알았다. 이미 다섯 살 즈음에 대중가요의 제목만 대면 노래를 줄줄이 불러댔다고 친지 어르신들은 두고두고 얘기해 주셨다. 또 내 세상의 삼분의 일-가정, 학교, 교회가 내 세상의 전부였다-을 차지하는 교회에서 찬송 부르기 대회를 하면 상을 제법 받곤 하였다. , 고등부 시절에는 이웃 교회와 연합으로 찬송 부르기 대회를 해도 상 받는 자리에 한번씩 불려 나가곤 했다.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상을 두루두루 나눠 주었다 해도, 스스로 노래를 잘 하는 줄 착각할 만큼 격려를 많이 받았다

그러다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대학에 들어가서는 누가 보아도 노래 잘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면서 내 노래 실력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음역도 엄청 좁고, 음정과 가락을 익히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무엇보다도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닌 사람이란 걸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래 부르는 실력이 별로 없다는 걸 알아갈 청년 시절에 교회 성가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노래는 좀 못 불러도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 청년이었기에 성가대 자리라도 채우라고 성가대원을 시켜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성가대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지금 다니는 교회의 성가대를 4 년째 하고 있다. 와우! 지금도 여전히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나 성가대에 참여하는 태도는 청년 시절과 달라진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노력을 조금 더 한다는 것이다. 다같이 연습하는 시간에 음정을 다 익히지 못하니 집에 악보를 가져와서 한두 번이라도 연습을 더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음정이 불안한 곳에서는 붕어 같이 입만 벙긋거려야 하기 때문이다(지휘자나 성가대를 바라보는 교인들도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 지 늘 궁금하다. 그래도 물어볼 수는 없다. 만일 그들이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면 난 더 이상 성가대에 설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가사를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청년 때와는 달라진 점이다. 성경 말씀으로 가사를 삼은 것도 좋고, 찬송가를 편곡한 것도 좋고, 새로운 내용의 가사도 다 좋다. 예배 드릴 때 들려질 성가 곡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다. 우리 교회 성가대에 참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날 찬양을 할 때였다. “어버이의 그 사랑 나 어릴 때 몰랐으나 어른 되어 이제서야 그 사랑 알게 됐네라는 가사에 목이 턱 막혀 노래를 부르지 못한 적이 있다. 내가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할머니 생각이 나서였다. 할머니께서 베풀어주신 그 사랑을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할머니께 잘 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 뒤로는 감정에 치우쳐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으나 마음 속으로는 울컥 울컥 하는 위로와 믿음을 주는 가사를 만날 때가 있다. “주 찬양해 주 찬양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를 부를 때는 마치 천사들의 손에 들려진 나팔이라도 된 양 입을 쩍쩍 벌려 본다. 복식호흡으로 내는 소리가 나오기는커녕 목을 쥐어짜는 소리가 나올지라도 말이다.

세 번째는 여러 사람이 내는 음이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즐겁다. 새로운 곡을 받으면 곡이 예쁘네, 어렵네, 재미없네,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삐죽삐죽 울퉁불퉁 제 각각의 소리를 내는 것 같아도 여러 주에 걸쳐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파트마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동시에 다른 파트와 화음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 교회 성가대원은 아홉 내지 열 명 남짓이다. 웅장한 소리가 나올만한 인원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가대원 가운데 서운해 할 사람이 있을 지 모르나 노래 부르는 실력이 특출한 사람 없이 다 그만 그만 한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건가, 싶기도 하다.

우리 성가대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최고의 성가대이며 어려운 곡일수록 더 잘 부르는 성가대로 우리끼리(!) 인정한다. 우리 성가대는 나같이 노래를 못하는 사람도 참여할 수 있고, 성가대원이 되고 싶은 교인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서 좋다. 우리끼리 인정하는 최고의 성가대의 한 사람으로써, 주일 예배에서 성가를 부를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  

7/28/2014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큰 아들 산이와 6주 동안의 한국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내가 할 일들이 가득하다. 봄에 만들어 놓은 손바닥만한 텃밭에 물주는 일을 둘째 아이에게 맡겨 놓았는데 책임감 있게 감당한 듯 하다. 하지만 오로지 물만 주었지 다른 것엔 도통 손을 대지 않아 심어 놓은 식물과 풀들이 사이좋게 섞여 있었다. 나중에 해도 되련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집으로 돌아온 첫 번째 할 일로 풀 뽑기를 선택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많이 머무르는 주방 곳곳에 낀 물때도 닦아냈다. 교회와 관련된 일도 몇 가지 하고 나니 이틀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내가 원래 살던 자리로 돌아온 것이긴 하나 여행의 여운을 즐길 틈도 없이 너무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나마 여행하는 내내 누렸던 여유로운 시간 동안 새로운 경험과 만남들에 대해 되새겨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남는 것은 사랑과 우정을 키운 일이다. 앞일은 알 수 없으나 가족과는 다음에 만나기까지 좀 긴 시간이 걸릴 듯싶은 마음에 더욱 애틋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자녀, 교회, 시대적인 문제 같은 주제들을 거리낌 없이 얘기하며 격려하는 편안한 자리였다.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친절함도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다. 글 쓰는 일로 만난 사람들, 선배 목사님들 교회에 주일 예배 드리러 갔다가 만난 사람들, 산이의 긴 치과 치료 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

돌이켜 보니 이번 여행 동안 만난 사람들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기 위해 시간과 정성이 보태어져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로가 자기 시간의 일부를 내어주고,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되도록 진실되고 성실하며 친절한 모습이었다.

그리운 사람들을 뒤로 하고 미국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리 가족은 한반도 평화 행진과 기도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워싱턴 D.C.를 향해 자동차로 8시간을 달려갔다. 한인연합감리교회 통일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기독교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가 참여하는 초교파적인 행사였다.

한국전쟁 정전 61주년이라는 것과 이제는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뀔 때라는 글이 쓰여진 흰색 티셔츠를 입은 기독교인들의 무리가 파운드리연합감리교회(Foundry UMC)에서 백악관 앞까지 2 km 정도를 행진했다. 유모차에 타고 있는 어린 아이들, 청소년, 교인들, 목사들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걸어 나갔다. 백악관 정면에 있는 뜰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남한과 북한이 평화적인 관계를 맺고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구호도 외치고 기도도 했다.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은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두 시간 가까이 자리를 지키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몇 곡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들어 있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고등학생인 둘째 아이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나 이 노래 몰라, 했다. 모국의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노력이 나의 둘째 아이에게도 이어지도록 집에 돌아가면 이 노래를 꼭 함께 불러보아야겠고 생각했다. 모국을 위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소수의 무리가 부르짖는 평화의 외침이 이 소식을 들어야 할 모든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길 빌었다.

한국 여행 동안 사랑과 우정을 만들어 가는데 시간과 정성이 보태어져야 한다는 것이 마음을 떠나지 않는데, 이번 평화 행진에서도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나의 가족이 먼 길을 달려 평화 행진의 한 구탱이를 차지하고 목소리를 보탠 것은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도 시간과 정성이 깃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6/29/2014

여행 중에도 기도 시간을




몸을 뒤척이다가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일어났다. 아직 어두움이 가득한 거실에 걸려 있는 벽시계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어슴푸레 읽어 보았다. 새벽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잔 탓에 집안 공기가 후텁지근 했다. 창문 하나를 열어 강화어머님네(나의 시어머님이시다) 집 둘레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휘젓고 다니던 바람을 불러 들였다. 창문을 열자마자 밀려들어 오는 새벽 공기가 참으로 시원했다. 뒤뜰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님은 지난해 가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 주무실 때 문이란 문은 모두 걸어 잠근다고 하셨다. 평생을 모든 것이 익숙한 고향의 한 마을에서 살고 계신 어머님에게서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이었다. 며칠씩 집을 비울 때는 모르겠지만 하루 안에 돌아오는 외출을 하실 때는 현관문도 잠그는 일이 없으셨다. 큰 집에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되신 어머님이 아직 익숙지 않은 '혼자됨'을 힘들게 겪고 계시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강인하고 꾸밈이 없는 성격의 어머님이신지라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날 새벽 공기가 실어오는 상쾌함과 쓸쓸함을 들이키고 있는데 어머님이 깨어 나오셨다. 초여름이라도 으쓱한(어머님 표현에 따르면) 새벽 공기를 막아줄 얇팍한 긴팔 옷을 챙겨 입으시며 이미 깨어 있는 나에게 같이 새벽기도 가자, 고 하셨다.
 "목사 사모가 와 있는줄 다 알텐데, 왜 새벽기도도 안 나오나 할 거 아냐?" 
오랜만에 들어보는 꾸중 섞인 말씀이다.

어머님네 와서 밤잠을 자게 되는 경우는 주로 명절을 쇠러 올 때다. 명절을 준비하느라 고단하기도 하고, 모처럼 부모님 집에 왔으니 목회 현장에서 떠나 푹 쉬고 싶은 마음이다. 날마다 드리던 새벽기도도 접고 길고 깊은 잠도 자보고 싶다. 그런데 어머님은 새벽기도를 가시면서 잠들어 있는 남편과 나를 보시면 화를 내셨다. 목회자 부부가 새벽기도를 빼먹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다. 게다가 목사는 안 나가도 사모는 기도해야 할 것 아니냐, 고도 하셨다(이것은 내가 이해가 안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도 꿈적하지 않으면, 새벽기도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셔서는 문을 소리나게 쾅쾅 여닫으시고 그릇도 더 달그락 소리가 나게 다루셨다. 아침 한나절은 어머님의 볼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는 신호였다.

어머님 댁을 방문할 때마다 새벽기도에 대해서 일관된(?) 태도를 보이자 어느 때인가부터 더 이상 새벽기도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머님과 내가 고부지간으로 만난 지 이십 여년이 흘쩍 넘었으며, 미국에 살다가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하여 며칠 어머님 댁에 묵고 있는데 그 새벽기도 얘기가 다시 나온 것이다. 난 웃으며 어머님만 다녀오세요, 했다. 밖으로 드러나 훤히 보이는 어머님 고집이나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내 고집이나 만만치가 않다.

어머님의 새벽기도 시간은 남다르시다. 잠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시간이 교회가는 시간이다. 새벽 두, 세 시라도 일어나시면 곧바로 교회로 가시곤 했다. 요즘은 네 시쯤 가시는 것 같다. 새벽예배 후에도 한참을 기도하시다 집에 돌아 오신다. 그동안 어머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본 바에 따르면 기도 드릴 때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실지 그려진다.

난 어머님과 같이 부지런하고 열정적이고 한결같은 기도를 드리지는 못한다. 나도 새벽기도를 드리지만 정해진 시간 동안 기도하며 대부분 읊조리거나 말없는 기도를 드린다. 삶이 단순하기에 생활하는 중에도 짧막한 기도를 자주 드리곤 한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멀리 떠나 여행할 때는 새벽기도를 드리지 않기도 한다. 이러한 어머님이나 나의 기도 생활이 온전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의 기도 생활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결코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에 같이 가자는 어머님의 이번 요청을 따르지 못한 것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여행을 하는 중이라도 기도 시간을 따로 떼어놓지 않으면 깊이있는 기도를 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이 생기는 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하루를 보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변화의 시점에 있는 내 교회와 부모님들이 다니시는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기를 위해서, 가족의 평안을 위해서, 그리고 여행 중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주님이 함께 하여주시길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새벽기도 가시고 집에 남겨진 나는 그 자리에서 마음을 정돈하고 하나님께 내 기도를 올려 드렸다.

6/21/2014

가족




"많이 돌아다닐 생각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와."
한국으로 오기 전 남편에게 여러 번 들은 말이다. 두 번째 한국 방문이니 첫 번째만큼 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얘기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번은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것이고, 일 년만에 다시 오게 되었으니 반가움이 덜할 것이라고 쉽게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은 미국에 남아 있으면서 한국 방문을 하는 아내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가 살짝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다. 자신의 아내가 그리 번잡스러운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런 당부의 말을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도, 한국에 머물고 있는 중에도 툭툭 하니 말이다.

하긴 나도 남편이 며칠 동안 외출을 하게 되면, 여행 가서 좋겠다!, 며 부러운듯한 말을 마구 던진다. 남편의 외출은 거의 교회와 관련된 모임이기에 회의나 교육 받는 시간이 대부분인 것을 안다. 그래도 일상을 떠나 낯선 장소가 주는 신선함이 있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도 있으니 외출 혹은 여행은 부러움을 살만한 경우들이다.

이럴 때 남편의 반응에 따라 더욱 얄미워지기도 하고 마음에 위로가 되기도 한다.
"회의만 하는데 뭐가 좋아, 지루하지. 집이 최고야!"
쳇, 아무렴 회의만 할까! 쉬는 시간에 수다도 떨고, 준비된 맛난 식사도 먹을 거면서.
"당신도 같이 가면 좋을텐데... 거기 가 봐서 좋으면 나중에 같이 가자."
경험상 나중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음을 알면서도 이런 말은 집에 남겨진 사람의 답답함을 어느 정도 가시게도 한다.

어쨌든 이번 한국 여행은 내가 집에 남겨진 남편뿐 아니라 작은아들의 부러움까지도 사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사는 곳에서 10분쯤 걸어가야 되는 곳에 조그만 텃밭을 가꾸고 계신다. 산책 삼아 나가 돌아보았는데 밭 한쪽이 온통 싱싱한 씀바귀로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뿌리째 뽑아 장아찌를 담그려고 키우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밭 주위를 지나 다니던 사람들에게도 이 씀바귀가 눈에 띄었나 보다. 어떤 사람이 씀바귀 효소를 만들면 좋겠다며 잎을 베어가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셨단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두 분 모두 텃밭에 나가셨는데, 아침 먹을 때쯤 아빠만 돌아오셨다. 엄마는 남아 있는 씀바귀를 모두 캐어 씻어가지고 올 거라고 아빠가 얘기해주셨다. 엄마도 씀바귀로 장아찌가 아니라 효소를 만들 작정이라면서.

조금 있다가 엄마는 젖은 씀바귀가 담긴 커다란 부대를 땀을 뻘뻘 흘리며 들고 오셨다. 엄마는 집으로 먼저 돌아오신 아빠가 계신 안방으로 곧장 가시더니 코 맹맹한 소리로 한 마디 하셨다.
"씀바귀가 많은 줄 알면 들어주러 와야지. 자전거를 가지고 오든가. 자전거 소리가 나길래 얼른 내다봤네, 에잇!"
말투는 무거운 씀바귀를 들고 오느라 힘이 들어 짜증났음을 드러내는 것 같은데, 내 귀에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아내의 애교 섞인 투덜거림으로 들렸다. 나의 부모님은 이런 식으로 서로가 필요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확인시키며 사시는구나, 새로이 알게 되었다.

애정어린 부러움과 질투, 애교스런 투정은 서로의 관계가 무뎌지지 않게 하는 윤활유 같은 것들이다.

한국 방문 중인 산이와 나에게 누군가 미국에 있는 다른 가족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산이가 반복적으로 하는 말을 들으며 가족에 대한 산이의 생각도 엿본다.
"아빠, 윤아, 기다려. 빨리 올게."
"미국 가서 비행기 빨리. 우리 한국 가자! 아빠랑 윤이랑 같이. 가족이니까"
"엄마는 우리 엄마. 아빠는 우리 아빠. 윤이는 뭐지?"
"내 동생." 요것은 내 대답이다.
"아빠 감기 해? 기도할게."

산이는 가족 누군가가 외출을 하게 되면 언제 오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한다. 어린 아이 같이 순수한 산이에게 가족이란 숫자 4(네 식구)인 것 같다. 우리 가족 네 식구가 늘 같이 있어서(지금까지는) 꽉 채워진 숫자 4 말이다.

가족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간다. 가족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언제나 행복하고 안정된 상태로 지속된다는 말은 아니다. 때론 관계가 삐그덕거려도 사랑은 가족을 지탱하게 해준다. 난 그 사랑이 더욱 견고해지기 위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늘 가닿아 있기를 기도한다.

6/13/2014

낯설고 강렬한 경험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번 한국여행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산이의 치아 치료(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치료이고, 치료비용을 감안해 한국에서의 치료를 결정한 것이다)를 위한 여행으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산이의 치아 상태에 문제가 생겨 급작스레 예정보다 일정이 앞당겨졌다. 큰아들 산이와 나는 감사하게도 갈아타는 번거로움이 없는 한국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게다가 남편은 우리를 비행기가 출발하는 애틀랜타 공항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여건이 되었고, 한국 국적 비행기이니 여러 가지 면에서 편안한 이동수단이 되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긴 비행기 운항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줄 영화 목록을 살펴보았다. 보고 싶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있었다. 갑작스레 정해진 일정이었지만 비행기를 타기까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고 영화도 볼만한 것들이 꽤 있어서 이번 여행에 대한 느낌(느낌은 변화무쌍 하다. 신뢰할만 한 것이 못 된다)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제목만 봐서는 고풍스러운 배경을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근거 없는 기대가 있었던 영화였다. 비행기가 출발할 때부터 영화에 집중해서 한 시간 반 정도를 훌쩍 보내리라 생각했다. 새벽 일찍이 집을 나선 탓에 비몽사몽 오락가락 하면서 감상했어도 어쨌든 시간이 그럭저럭 흘러갔다.

한국 비행기 기내식의 대표 음식인 비빔밥을 점심으로 먹고, 저녁으로는 불고기와 밥을 먹었다. 당황스러운 사건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얼마 뒤에 시작되었다.

산이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이 그치지 않았고 그 소리가 점점 목구멍을 거칠게 훑고 나오는 것처럼 무거워졌다. 이때부터 평온한 여행에 대한 느낌은 쨍, 하고 깨져 버렸다. 산이가 기침을 힘들게 하기 시작하면 겁이 난다. 기침을 하다가 속을 싹싹 다 비울 때까지 토하기 때문이다.

기침한다고 승무원이 와주지 않을 것 같아 얼른 일어나 승무원들이 있는 공간으로 나아갔다. 냅킨을 좀 달라고 했다. 서너 장을 건네 받았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자 산이는 울컥 게웠다. 체한듯 싶었다. 승무원을 부르는 벨을 눌렀다. 내 마음이 급한 것인지 벨을 잘못 누른 것인지 승무원이 오는 기색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승무원들이 잠시 머무는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우리가 있었다. 그제서야 승무원은 뭘 도와 드릴까요, 물었다.

"우리 아이가 토해서요..."

승무원은 물티슈 여러 개와 두 개의 비닐 쇼핑백을 들고 와서 쇼핑백의 입구를 벌리며 내밀었다. 내 손에 들린 지저분한 냅킨을 넣으라는 신호인듯 하여 그리 했다. 나는 그 쇼핑백이 필요할지도 몰라 달라고 해서 발 밑에 두었다. 승무원은 가지고 온 또 하나의 쇼핑백을 벌려  아무 말없이 또 내 앞에 내밀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몰라 물었다.

"담요 넣으시라구요."

토한 것이 살짝 묻어 뭉쳐놓은 담요가 내 무릎 위에 놓여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순간 승무원의 서비스를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승무원은 돌아 갔고 승객이 덥고 있던 담요를 가져갔으면 새 담요를 가져다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소식이 없었다. 받으러 갈까 하다가 승무원 부르는 벨을 눌렀다. 왜 불렀냐는 표정이었다. 담요가 필요하다고 했다.

난 어둑한 실내등 불빛을 찾아 손을 쳐들었다. 손목시계의 바늘을 정확히 보기 위해 눈을 찡그렸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려면 여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제발 이대로만 버텨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산이는 기침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혹은 피곤하게 비행을 하고 있는 다른 승객들에게 엄청 미안했다. 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면 고집스러워지는 산이는 화장실로 가는 것을 거부했다. 멈추지 않는 기침을 하면서 화장실로 이동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난 다른 승객들에게 큰 민폐를 끼치는 것인줄 알면서도 원하지 않는 기침을 하면서 괴로워 하는 산이의 편이 되기로 했다. 등을 쓸어주며 기도하는 것 밖에는 해줄 것이 없었다. 이 상황이 오래 지속 되면 승객들에게 같이 기도해 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산이는 몸을 떨며 토하기를 두 번 더 했고, 자신도 괴로운지 끝내는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그러는 동안 승무원은 벨소리를 듣고 온 것과 소화제를 요청하여 가져다 준 것을 빼고는 다시 오지 않았으며, 우리 옆을 지나치면서도 괜찮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우리 모자는 비행기 안에서 공공의 적이었던걸까.

산이에게 울지 말라고 달래는데, 도리어 날 달래듯이 산이가 이젠 괜찮아, 했다. 속이 좀 편안해졌다는 소리로 들렸다. 감사, 또 감사했다. 기다렸다는듯이 피곤이 마구 몰려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깜빡 들었다.

어수선한 움직임에 눈을 겨우 떠보니 승무원 세 사람이 눈 앞에 있었다. 우리 바로 앞에는 두 아들과 엄마가 앉아 있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이는 작은 아들이 코피가 난 모양이었다. 알콜솜의 냄새가 잠을 확 달아나게 했다. 이미 가지고 온 얼음 봉지가 모자란 지 한 승무원은 작은 지퍼백에 담긴 얼음을 짤랑거리며 다시 달려왔다. 좁은 통로에 모여 있는 승무원의 뒷모습은 보란듯이 내 시야를 다 가리고 있었다. 한참을 아이와 눈빛을 마주하고 속삭이던 그들이 물러갔다. 내가 앉은 통로에서 보지 못했던 다른 승무원들도 오고 가며 아이의 안부를 계속해서 물었다.

아, 외롭게 겪은 산이의 소동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산이를 위한 승무원의 서비스가 이해되지 않았어도 그날의 사건은 여럿에게 불편함을 끼친 죄인의 심정으로 미안함만 기억되었을 것을. 산이와 앞자리의 아이를 대하는 다른 태도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벌벌 떨리고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았다. 오, 주여...... 내가 모르는 승무원의 행동 수칙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승무원들은 그 규칙을 따랐을 뿐일 거라고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따끔따끔거리는 마음으로 인천공항에 다다랐다. 산이 옆에 앉아 있던 청년 승객에게 불편함을 줘서 미안했다고 말했다. 청년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서고 승객들은 부산스럽게 짐을 꺼내 빠르게 통로를 꽉 채웠다. 우리도 일어섰다. 복잡한 승객들 사이를 비집고 멀리서 길고 흰 팔이 우리를 불렀다. 앉았던 통로 쪽에서 제일 많이 봤던 승무원이었다. 통로를 가득 메운 승객들 사이에서 산이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날 바라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하고는 마치 변명할 기회라도 얻은 사람처럼 아까는 화장실로 갈 상황이 안 되었다고 빠르게 덧붙였다. 비행기를 빠져나오는 동안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는 승무원들의 인사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평상시와는 달리 그들의 인사에 도통 대꾸할 수가 없었다.

속상한 마음이 내 안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풀어놓았다. 동시에 이 낯설고 강렬한 경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듣고 싶다고 했다. 어린 아이처럼 장애인 역시도 연약함을 가지고 있어서 관심 있는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 묻고 협력하면서 그 돌봄의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피상적인 돌봄에 그치기 쉽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할 때 연약한 이들을 진심으로 돌볼 수 있는 지혜가 열릴 것이다. 산이를 아들로 주시고 가까이서 돌보게 하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6/06/2014

학교 이후의 삶을 시작하며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공식적인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비공식적으로 첫째 아이, 산이는 학교 일정이 마치기 하루 전에, 둘째 아이는 이틀 전부터 방학에 들어갔다. 둘째 아이의 말을 빌리자면, 일 주일 전부터 수업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 학교 분위기가 싱숭생숭하다고 했다. 학점을 따기 위하여 필요한 시험이나 과제를 다 끝냈고, 출석 일수에 지장이 되지 않으면 결석 처리가 되더라도 등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도 방학하기 이틀 전부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마무리를 잘 해야 되지 않을까, 하며 수업은 빠지지 않아야 된다는 밑도 끝도 없는 고정관념을 가진 나에게 둘째 아이는 대놓고 답답하다고 했다. 다 알아보고 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내 자신이 보편적인 제도나 질서 따위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어서 스스로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부분도 적지 않다. 둘째 녀석은 나와 닮은 듯하나 똑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나보다 훨씬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멋지게 만들어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방학하기 이틀 전 아침, 둘째는 학교를 가든 안 가든 알아서 잘 하겠지, 해놓고 첫째 아이는 학교에 보냈다.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산이한테서는 아무런 정보를 들은 것이 없으므로, 그리고 공교육을 하는 학교에 다닐 날이 더 이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학교 가려고 나서는 아이를 품에 안고 이마를 맞대고 잘 갔다 와, 하는데 가슴이 짠하다. 그 동안 한국에서 받았던 조기교육( 4)부터 미국 고등학교와 과도기 과정(transition class, 18-21) 마치기까지 겪었던 일들과 감정들이 뒤섞여 왈칵 왈칵 올라오는 것을 지난 주부터 참고 있었다.

지난 주에 산이가 학교 생활을 마치는데 부모의 사인이 필요하다며 학교로 오라고 했다. 이 모임은 산이를 위한 교육에 대해 재평가하는 자리로 두 달 전쯤 모였어야 했다. 하지만 방학을 코앞에 두고 호출하는 것이니 새로운 정보를 나누는 자리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올해 산이와 같은 반 친구들 가운데 네 명이 졸업하는데 모두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를 위해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단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래도 산이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서 의논할 것이 없다는 말에 무척 서글펐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학교 생활이 끝나면 아이와 여행도 하고, 평상시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수영과 볼링도 정기적으로 다닐 거라고 얘기했다.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직업재활(Vocational Rehabilitation) 하는 곳에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도 선생님에게 전해주었다.

산이와 우리 가족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담임 선생님과 직업훈련 담당 선생님은 두 분 모두 산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서두르지 말라(Be patient)는 말을 남기셨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산이의 담임선생님들한테 엄마로서 내가 부탁했던 말이 바로 기다려 달라, 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을 선생님들로부터 내가 듣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산이를 선물로 주신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인내를 배워가라는 것이라고 늘 말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산이가 학교를 떠난 후 앞으로의 삶에 대해 결정된 것이 없다는 사실에 불편한 마음이었다.

방학 기간이 끝나도 이제는 돌아갈 학교가 없다는 것이 헛헛하기만 한데 산이는 빨리 방학했으면 좋겠단다. 산이에게는 학교에 가지 말라는 말이 큰 꾸짖음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산이는 빨리 학교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만 스물한 살의 특별한 청년에게 학교는 어떤 곳이었을까?

방학을 하루 앞두고 아이가 학교를 갔다 왔는데 시큰둥했다. 친구들하고 선생님들하고 다 만났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네 반 친구들이 많이 안 왔다는 것이었다. 주초에 있었던 피자 파티가 학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나 보다. 둘째 아이 말 듣고 학교에 보내지 말 걸 그랬다. 남은 하루의 등교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 보내고 공교육을 끝낸 새로운 삶의 단계로 슬쩍 옮겨갔다. 감사하게도 산이는 여느 날처럼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바심도 조급함도 그에게서 느껴지지 않는다. 정한 때에 일을 이루시며 서두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산이의 어딘가에 숨겨놓으셨나 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잘 알려진 라르슈나 캠프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도 그런 마을을 이루어 살면 좋겠다는 꿈을 늘 꿔왔다. 산이의 학교 이후의 삶을 시작하며 돌아보니, 물리적인 공간을 가진 마을은 아니었어도 사랑의 관계로 이어진 공동체 안에서 살았음을 깨닫는다. 산이를 중심으로 가족, 친척, 친구들과 그들의 가족, 교우들,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이 산이를 풋풋한 젊은이로 키웠다. 라르슈 같은 마을공동체도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니, 꿈 같은 그런 마을을 만들 수 있는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져 있다

5/30/2014

깊어 가는 사귐




넉 달 전쯤 고춧가루와 곶감이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우편으로 받았다.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운전하여 이틀이 넘게 걸리는 데 사는 H가 보내준 것이다. 소포를 받기 며칠 전, 요즘 잘 지내느냐며 안부 묻는 전화를 H와 하게 되었다. 페이스북에 가을 고추 말리는 사진을 올려놓은 것이 기억나길래 고추는 잘 말렸냐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말린 고추를 빻았는데 색깔이 기가 막히게 예쁘다며 선뜻 보내주겠다고 했다. 아무리 고추는 농사 지은 것이 아니고 사 온 것이라 해도 햇볕에 말리고, 거두고, 빻는 수고를 엄청 했을 텐데 안부 인사 한 마디에 그 귀한 고춧가루를 나눠주겠다니, 난 얼른 그만 두라고 했다. H는 다 먹고 살자고 한 일이라며 어서 집 주소나 부르라고 했다.

몇 번이고 사양을 했지만 그럴 때마다 H는 자신의 수고는 뒤로 하고 나눠줄 만한 이유를 덧붙였다. 그이는 멕시코 국경과 가까운 주에 살고 있다. 멕시코는 우리처럼 매운 음식을 즐겨 먹기 때문에 고추도 다양한 품종을 생산하는 모양이다. 고추 밭에 직접 가서 고추를 사면 값도 저렴하고 우리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다고 했다. H는 우선 싼 값에 산 고추이므로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곳은 볕이 좋고 건조하기 때문에 말리는 것도 수월했으니 걱정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라고 대꾸해놓고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주소를 보내주었다.

몇 날이 지나지 않아 H로부터 정성이 가득 담긴 상자가 멀리서 날아왔다. 상자를 열자마자 칼칼한 냄새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웬걸 이렇게 많이도 보냈는지 고마움과 미안함이 마구 뒤섞였다. 제일 큰 봉투에 담긴 고춧가루는 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곱고 먹음직스러운 빨간 색이었다. 고추씨만 따로 모아 빻은 가루도 보였다. 덜 맵게 먹고 싶을 때 사용하면 좋다고 보낸 것이다. 게다가 손수 말린 곶감도 여러 봉지 들어 있었다. 이민자로 살다 보니 한국 제품이면 뭐든지 귀하게 여겨진다. H가 만든 것처럼 원재료는 현지의 것이더라도 우리네 입맛에 맞는 고춧가루나 곶감으로 바꿔 놓은 그의 솜씨도 귀하고 대단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어머님께서 만드신 고춧가루는 맛은 있는데 조금 매웠다. 어머님께 쬐끔 죄송하지만 H가 만든 고춧가루의 맵기가 내 입맛에 딱 맞는다. 너무 맵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고. 김치를 해 놓으면 맑은 빨강색이 되어 마치 음식 전문가가 만들어 파는 김치 같다. 곶감은 오랜만에 먹어보는 것이기도 하고 적당히 말라 먹기도 좋아, 아껴가며 하나씩 야금야금 빼 먹었다.

돌이켜 보니 H와의 사귐은 이십 년이 넘었다. 같은 강화 지방에서 목회를 할 때 요한 웨슬레 목사 회심 기념 주간에 남편 목사들끼리 서로 교환 설교를 한 적이 있다. H네는 강화 본도에서 배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섬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강화 본도에서 목회하던 우리가 먼저 H네를 방문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들은 내 남편 목사의 설교는 안타깝게도 기억에 하나도 없지만 H가 만들어 주었던 닭조림과 김밥은 생생하다. 또 이후에 H네가 목회를 하게 된 교회가 내가 전도사로 있던 데여서 삶의 한 조각이 또 겹쳐지기도 했다. 거기서 얻어 먹은 오징어볶음과 스파게티도 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함께 나누어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는 것은 그 음식에 배어든 애정이 내 몸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음식을 시원스럽게 잘하는 솜씨 못지않게 H는 기도 생활도 열정적이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기도 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지만 그녀는 늘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다는 걸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인이 많지 않은 작은 도시에서 십여 년 동안 남편과 함께 묵묵히 목회를 감당하는 뒷심은 기도를 통해 얻는 힘이다. 때론 외롭고 때론 경쟁적인 일상에 매몰되려 하지 않고 하나님 뜻을 알려고 늘 애쓰는 모습에서 기도의 모습이 읽혀진다. 자기는 신앙 생활이 엉터리인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H의 얘기를 들으면서 오히려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 신앙 생활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서로 자신은 엉터리라고 하면서, 상대방에 대해서는 작은 열심이나 성실의 흔적이라도 찾아내어 칭찬해 주고 그 에너지를 나눠 받고 싶어한다. 이것이 우리 사귐이 지속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에 사는 몇 년 동안 우린 전화 통화만 할 뿐,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도 전화가 연결되면 늘 만나는 사람마냥 수다를 떤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이런 상황에서는 꼭 맞는 것 같지 않다. 서로를 기억하고, 전화든 편지든 시간을 내어 찾아보고, 입술 끝을 떠나면 곧 공기 중에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영혼 없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애정 어린 말을 나눠주고, 기도로 영적인 끈을 이어가는 관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그 사귐이 깊어질 수 있나 보다.

H와 새로운 만남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어찌 하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둘 다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미국에 살면서 언제나 만나냐, 하며 못 만났는데 결국은 한국에서 만날 기회를 갖게 될 듯하다. 의미 있고 맛있는 사귐의 자리가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5/23/2014

환대하는 선생이 되기 위하여


<뒷면에 동요 가사를 써서, 보면서 불렀어요.>


한국학교에서 가까운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올해 봄 학기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한 학년을 잘 마친 아이들을 격려하는 자리였다. 아이들은 몇 가지 놀이를 신나게 하고 나서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준비한 맛있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국학교에 빠지지 않고 출석했거나 한국어 실력 향상을 위하여 노력한 아이들을 칭찬해주고, 수료한 모든 아이들을 축하해주었다

미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학교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한국학교는 타국에 거주하는 동포의 자녀들(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에게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기관이다. 혹은 한국어에 관심 있는 본토 학생에게도 열려 있어서, 이곳 한국학교에는 두어 명이 수업을 듣고 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미국 안에 있는 한국학교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재미한국학교협의회(NAKS)는 미국 전역 14개 지역협의회로 구성돼 있고 산하에 953개의 한글학교가 있으며 전체 교사 수는 7천 명, 재학생 수는 8만 명에 달하는 조직이다. 이들 한글학교는 주로 교회나 성당, 한인회 등이 주말에 운영한다”(웹진 재외동포의 창, 2012 8월호).

한국학교에서 가르친 경험이 있는 지인들의 소개로, 나는 애틀랜타에 이어서 이곳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대체교사로 두 번 수업에 참여했다. 그러다 어느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어 학기를 마치기까지 남은 4주 동안 한 반을 맡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라 아이들과 사귐이 깊지 않았지만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즐겁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주택가 한 가운데 자리잡은 한적한 공원에는 우리들뿐이었고 두 모둠으로 나누어진 아이들은 맘껏 뛰놀며 놀이에 참여했다. 놀이가 끝나면 반마다 부모님들과 다른 반 친구들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나씩 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일 큰 언니 반만 K팝에 맞추어 춤을 추기로 했고 나머지 반은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우리 반은 동요인 솜사탕을 부르기로 했다. 다 같이 불러보는 연습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부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우리 차례가 되어 앞에 나가 섰다. 이동용 스피커에 연결된 마이크를 내 앞에 서 있는 어느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말할 때 거의 영어를 사용하지만 한국어를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마이크가 부담스럽다는 눈길을 내게 보내면서도 마이크는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 뒤에 서서 함께 부르기로 했다. 준비된 음악이 나오면 따라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계끼리 연결이 잘 안되었는지 음악 소리가 너무 작았다. 이미 음악은 흘러나오고 있었고 순간 나는 마이크를 든 아이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마이크를 다시 내게로 가져왔다. 아이들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도록 작은 소리의 음악 대신 내 목소리를 듣고 따라오라는 판단이었다.

노래를 마치고 인사를 하다가 마이크를 가지고 있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차, 싶었다. 아이는 한글을 더듬더듬 읽기는 하지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었나? 아무런 요청 없이 마이크를 가져가 버린 것이 화가 났나? 내가 아이에게 한 행동이 짧은 순간에 스치고 지나가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되가져온 그 순간의 내 마음은 1분 남짓한 공연의 가치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준비된 상황이 예상했던 대로 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더라도 선생은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이 끝까지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서 서툴더라도 한국말로 부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도왔어야 했다. 선생의 노래 자랑 시간이 아니었는데, 부끄러웠다.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에게 배움의 기회를 베풀었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 예수회 사제이며 영성 신학자인 헨리 나우웬은 인간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hostility)과 그들을 무조건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환대(hospitality) 사이를 오고 가면서 산다고 말하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환대해 주는 선생은 학생들에게 자신도 베풀 것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많은 학생들은 오랜 세월 동안 받는 입장에만 있었고 또 아직도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 깊이 잠겨 있습니다. 그런 나머지, 그들은 자신감을 잃어버렸으며 자기들보다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동료 학생과 선생에게까지도 자신들이 베풀만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합니다”(영적 발돋음, 두란노).

어릴 적 경험을 돌아보아도 그렇고, 선생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격려가 되기도 하는 것을 안다. 다음 학기에 한국학교에서 한 반을 맡아 가르치기로 했다. 그 때 아이들을 다시 만나면 학국학교 선생으로서 부족했던 마음가짐에 대해 귀한 가르침을 주어 고마웠노라 얘기해야겠다. 물론 미안했던 마음도 함께 말이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처럼 학생들을 따뜻하게 환대하는 선생이 되기 위한 발돋음을 해보련다.

한편, 상황에 이끌려 학생들을 환대하는 마음을 또 잃게 될 가능성이 많은 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선생으로서 학생을 가르치기만 할 뿐 학생에게서 배우려는 마음이 옅어진다든가 학업의 성과를 드러내 보이려 한다든가 하면서 말이다. 그런 순간에 부디 주님께서 내 영혼을 일깨워 주시고 환대하는 선생의 자리로 다시금 이끌어 주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