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2019

다시 내게로 온 책




한 달 전쯤 남편이 애틀랜타에서 모임이 있다고 하여 따라 갔었다. 애틀랜타에 가는 큰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한인마트에서 식료품을 사오는 것이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위주로 산다. 또 다른 하나는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서다. 몽고메리로 이사온 뒤로는 교회 집사님의 미용실을 이용해서 좋았는데 집사님이 멀리 이사를 갔다. 애틀랜타에 갈 일이 생기면 단골로 가던 미용실이 있어 겸사겸사 머리를 깎고 오는 것도 괜찮다.

그 날도 애틀랜타에 머무는 동안 두 가지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잘 분배해야 했다. 집까지 가는 세 시간을 고려하여 너무 늦지 않게 출발하는 것이 좋다. 다음 날을 피곤하지 않게 보내려면 말이다. 남편이 모임을 갖고 있는 중에 나는 얼른 단골 미용실에 들러 후다닥 머리를 깎았다. 남편과 산이는 모임이 끝난 다음 우리 교회 구 집사님이 가신다는 이발관에 들렸다. 비용도 저렴하고 미용사가 여럿이라 기다리지도 않아 좋았다. 이 이발관은 애틀랜타에서 살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애틀랜타에 살 때는 관심도 없던 곳인데 오히려 타주에 살면서 소문 듣고 찾아가니 낯익음과 낯설음이 뒤섞여 기분이 묘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벼워진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한인마트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작은 아들이 빠진 세 식구를 위한 장보기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게다가 때때로 저녁 식사를 아예 먹지 않거나 허기만 면할 정도의 입맷거리만 있으면 되니까 더욱 그렇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장보기 목록에서 꼭 챙기는 것은 두부. 그 자체로는 밍밍한 맛뿐인 두부가 난 그렇게 좋다. 두부 다섯 개와 순두부 두 개를 골라 카트에 담고 다음은…

고개를 들어 지나쳐 온 콩나물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 있는 한 여인에게 눈길이 머물렀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인가. 애틀랜타를 떠나고 다시 애틀랜타를 그렇게 여러 번 다녀갔어도 조금이나마 가까웠던 사람들과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다. 그 여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공통된 기억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조심조심 그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노 집사님, 아니 이젠 권사님이시죠?”

교회에서 조용히 봉사하시는 모습을 봤었기에 다른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고 깊은 신앙으로 이끌어 주는 권사님이 됐을 것 같았다.

“네, 맞아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권사님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우리는 한국학교에서 같은 시기에 일을 하면서 친분을 쌓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 엄청 반가웠다. 드라마에서처럼 배경음악이 깔리는 상황이었으면 두 사람 모두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도 남았다.

“그렇지 않아도 권사님이 빌려준 책, 왜 그거 있잖아요. ‘파리 서점’ 나오는 책. 요즘 그 책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인터넷에 이런저런 단어들을 넣어봐도 찾아지지가 않더라구요.”

사실이었으므로 안부를 묻지도 않고 뜬금없이 책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 즈음 왜 이 책이 문득 떠올라 머릿속을맴돌았는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남편이 필요한 책을 미국 알라딘에 주문한다기에 배송료를 줄여볼까 하여 내가 읽고 싶은 책도 함께 주문하려고 정확한 제목을 찾고 있었다. 기껏 생각나는 ‘파리’와 ‘서점’을 키워드로 넣어도 좀처럼 찾아지지가 않고 있었는데 그 책의 주인을 만난 것이었다.

“난 그 책의 느낌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구입하여 다시 읽어보려고 했지요.”
“아, 그러셨구나! 나도 그 책 무척 좋아해요. 그런데 동생은 별로래요.”

서로 같은 책을 좋아한다니 반가움이 배가 되었다. 만나지 못했던 8, 9년의 간격이 친밀함으로 스르르 채워지는 것 같았다.

“권사님, 그 책 제목이 뭐지요?”
“어… 가만있자… 뭐더라…”

나보다 두세 살 아래인 권사님 기억력도 나와 비슷한가 보다. 우리 둘 다 웃음이 났다. 웃음은 책 이야기에 집중했던 심각함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다. 권사님을 만난 것이 하도 신기하여 책 얘기부터 꺼내 놓다니 앞뒤 못 가리는 딱 주책없는 인간이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또 정신을 놨다. 책 이야기로.

“그 책 제가 드릴게요. 일부러 사지 마세요. 집주소를 알려주세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내 기억으로는 권사님 동생이 한국에서 책을 보내주곤 했다. 그 책도 동생이 보내준 책이라며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했었다. 본인에게도 한 권뿐이고 좋아하는 책이라면서, 그걸 나에게 주겠단다. 권사님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난 끝까지 정중하게 거절하며 제목이나 알려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로의 전화번호를 확인한 후 헤어졌다.

책 내용은 가물가물했다. 파리에 있는 서점에서 일어난 일을 적은 것이다. 주인공은 갈 곳이 없어 서점에 들렀다가 그 곳에서 기거하게 된다. 서점의 모토는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필요한 것을 취하라’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낯선 이에게 친절하라’. 서점 구석구석은 잘 곳이 없는 이들에게 집이 되어준다. 서점에 머물 수 있는 조건은 하루 한 시간 이상 허드렛일을 도와야 하고, 가능한 매일 한 권씩 책을 읽는 것, 그리고 글을 써야 한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우정과 사랑을 쌓으며, 마음에 품은 희망의 빛을 꺼뜨리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 실화인지 허구인지조차 기억에 없는데 다만 낭만이 가득한 이야기로 남아있었다.

그 책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면 할수록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며칠이 지나 난 참지 못하고 권사님에게 만나서 반가웠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책 제목을 얻기 위한 인사였다. 답이 없었다. 휴대전화 전화번호부를 살펴보니 권사님 이름이 두 개였다. 이메일 주소로 하나, 전화번호로 하나. 이름만 보고 전화번호도 없는 곳으로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이번엔 바로 답을 듣고 싶어 전화를 했다. 권사님은 역시나 반가워했다.

“하하. 그렇지 않아도 소포로 붙이려고 그랬어요.”
“우리 집 주소도 모르시면서요?”
“교회로 보내려고 그랬지요. 서프라이즈하려구요.”

좀 참을 걸 그랬다. 난 소극적인 편인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살아야지, 하다 보면 어설픈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성품이나 행동의 강약 완급의 적절한 조화는 정말이지 쉽지 않다. 권사님은 미완의 서프라이즈를 아쉬워하며 집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내 조급함을 겸연쩍어 하면서 집주소를 잽싸게 보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산이는 집 앞에 있는 메일박스에서 집 안까지 우편물을 배달한다. 하루도 안 거르고 우편물을 챙겨오는 성실한 배달부다. 산이가 소포를 안고 들어왔다. 함께 상자를 열던 산이는 대박!, 이란다. 책이 네 권이나 들어있고, 상자의 빈 공간에는 부각 봉지들과 초콜릿이 담겨 있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한식, 양식, 일식 할 것 없이 맛있고 멋스럽게 차려내는 권사님을 닮은 선물이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즈음에 권사님으로부터 받은 책들은 절제의 도구로 잘 사용되고 있다. 올해 사순절에는 드라마 보는 것을 끊어보기로 했다. 그 시간에 책을 읽으리라 굳은 다짐을 했다. 하지만 책이 빨리 읽혀져 시간도 남고 책에 계속 집중하고 있으면 눈이 침침해지기도 하니 어쩌나. 드라마를 도저히 끊지는 못하고 양을 줄여서 보고 있다. 주님께서 이 연약한 인간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10년쯤의 간격을 두고 다시 내게로 온『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부제는 셰익스피어 & 컴퍼니. 책의 제대로 된 제목도, 부제가 있다는 것도 새롭게 다가왔다. 예전엔 그런 생각을 못 했었는데 인터넷에 서점 이름, 셰익스피어 & 컴퍼니를 검색하니 수 많은 이미지들이 올라왔다. 이미지들에 상상력을 더해 생생한 느낌으로 두 번째 책읽기를 벌써 마쳤다.

어떤 영감을 주려고 이 책은 나에게 다시 왔을까. 보나마나 이번에도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게 되겠지. 셰익스피어 & 컴퍼니는 미국 사람이 파리에 낸 역사적인 서점. 저자는 캐나다 사람으로 잘 나가는 사회부 기자였다. 그가 캐나다에 있을 때 책을 냈는데,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해준 범죄자의 실명을 책에서 밝힌다. 그 일로 범죄자의 협박을 받고 쫓기듯 프랑스로 건너가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서 직접 겪은 이야기를 엮어서 내놓은 책이라는 것.

3/20/2019

그리움이라는 낯선 방문


<교회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새싹의 빛이 곱다.>

3월에는 둘째 아들 윤이의 생일이 들어있다. 2월 달력을 접어 넘기고 3월에서 아들의 생일을 찾아 표시했다. 올해 생일은 월요일.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잠깐으로 보이듯이 윤이가 대학 들어간 때가 엊그제인 듯한데 어느새 마지막 학기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 학교에서 그동안 배운 것을 활용하여 어떤 결과물들을 내놓아야 하는 프로젝트 수업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이번 학기 월요일에는 수업이 없는 걸로 들었다. 윤이에게 전화를 했다.

“윤, 생일에 애틀랜타에서 만날래? 점심 같이 먹자. 너 장볼 거 있으면 그때 같이 보고.”

빠듯한 생활비로 살아가는 학생에게 꽤 괜찮은 제안 아닌가. 겨우 한 끼지만 메뉴를 잘만 고르면 영양 보충할 수 있는 식사가 가능하다. 게다가 장을 같이 보면 엄마가 고른 식재료들과 섞여 계산대를 자연스럽게 통과할 것이다. 단 몇 십 달러라도 아껴지니 수학 잘하는 아들은 벌써 계산이 끝났을 것이다. 역시 대답이 바로 나왔다.

“아유, 뭔 생일…”

뒤이어 만나자는 대답이 나오려니 기대하는 마음이 삐죽 고개를 쳐들려는 순간이었다.

“싫어! 나 바빠.”

쌀도 떨어지고 해서 생일 전 토요일에 애틀랜타에 다녀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어차피 애틀랜타에 갈 거면 내 제안대로 움직이는 것이 여러모로 자신에게 유리할 텐데 대답의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가끔 엄마를 이해하는 척해서 감동받을 듯 말 듯한 경우가 몇 번 있던 터라 이번에도 그런 비슷한 상황인가 싶었다. 윤이가 사는 아파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사십 분이면 애틀랜타에 이를 수 있으나 엄마는 세 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엄마의 고단함을 덜어주려는 마음이라고. 4학년이라 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던 것을 그만 두어 생활비는 엄마에게서 나와야 하는데 이미 석 달치를 받아 가지고 있었다. 엄마에게 금전적인 부담을 더 주고 싶지 않은 거라고.

며칠 뒤 이번엔 윤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윤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타이어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걱정스러운 내용이었다. 타이어 하나가 교체된 지 오래되어 살이 쪄서 터진 것 같은 금들이 잔뜩 보이는 사진도 보내왔다. 안전 문제와 관련된 것이므로 남편은 어서 새 타이어로 바꾸라고 응답해주었다. 윤이는 토요일에 애틀랜타에 가는 길에 아틀란타한인교회 이권사님이 운영하시는 자동차 정비소에 들르겠노라 했다. 이권사님의 정비소는 우리 가족이 애틀랜타에 살 때부터 계속 이용하던 곳이다.

우리 교회 교우들 얘기를 들어보니 이번 주가 봄 방학이란다. 윤이와 통화하는 김에 봄 방학이 언제인지 물어보았다. 이곳과 같았다. 애틀랜타에서 만날 수 없으니 이번엔 봄 방학 동안 집에 다녀가라고 제안했다. 이번에도 단칼에 거절당했다. 이유를 물었다. 너무 멀다는 것이다. 자동차로 다섯 시간이면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못 올 거리도 아니구만… 통화 중 아주 짧은 말없음에 어떤 분위기를 감지했나 보다. 윤이는 거절한 이유를 흐물흐물 주절거렸다.

“거리가 멀어도 집에 갈 때는 식구들 본다는 생각에 길지 않게 느껴지는데, 돌아올 때는 너무 지루해.”

그랬구나. 윤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5월에 있을 졸업식에서나 보겠구나 하며 만날 기대를 좀 더 뒤로 미뤘다. 

아들에게 만나자는 요청에 대해 두 번이나 퇴짜 맞은 것을 알고 있는 남편이 옆에서 슬쩍 말을 흘렸다.

“집에 내려와서 생일도 보내고 여기 이 권사님네 가서 차도 고치라고 그래.”

이 권사님은 애틀랜타에 있는 자동차 정비소의 몽고메리 지점도 갖고 있다. 윤이에게 앞서 제시했던 만남과 특별히 달라진 내용도 없으면서 남편의 부추김에 힘입어 세 번째 전화 통화. 세 번 모두 거절하기가 미안했던지 자동차 수리 비용이 신경쓰였던지 이번엔 만남이 드디어 성사되었다. 삼세번이 윤이에게도 통했다!

아껴두었던 소고기 한 덩이를 넣고 우려내 미역국을 끓였다. 일부러 미역을 넉넉하게 불려 큰 솥으로 한가득 만들었다. 다행히 김치 한 보시기만으로도 다른 밑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맛있게 끓여졌다. 윤이에게는 어찌 하다 보니 미역국이 너무 많아졌다며 좀 싸 가지고 가라고 했다. 속마음은 꼭 가져가길 바라면서, 안 가져 가도 그만인 것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두 번 먹을 정도만 담아 달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윤이 자동차는 집으로 가져오길 잘했다. 차를 타보니 멀쩡한 길을 달리는데 바퀴 쪽에서 터덜터덜 소리가 크게 들렸다. 타이어가 금방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에 어깨가 자꾸 쪼그라들었다. 이 권사님은 자동차를 살펴보시더니 타이어를 바꿀 때는 아직 아니라며 위치만 바꿔 끼워 주셨다. 그런 다음 운전할 때 여전히 소리가 들리면 그건 베어링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진단하셨다. 타이어 위치를 바꾸고 잠시 달려보았더니 역시 권사님의 말씀처럼 베어링을 고쳐야 했다. 윤이 혼자 정비소에 갔으면 허둥댔을 수도 있었는데 아빠와 권사님 덕분에 맘 편히 자동차의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윤이는 미역국을 챙겨서 다시 멀쩡해진 차를 타고 자기 사는 곳으로 떠났다.

언제부터 아들을 그렇게 보고 싶어했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대학 가면 그때부터 부모 품을 떠난 거라 여기고 제 앞가림하며 지내니 그저 고맙다고만 생각했었다. 갱년기라 그런가. 불면, 기억력 감퇴, 폐경, 얼굴 홍조 따위의 증상들이 인생을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신체적인 변화가 감정의 색깔도 바꾸어 놓는 것 같다. 떨어져 사는 둘째 아들이 가끔 보고 싶기도 하다. 고국에 있는 가족도 때때로 그립다. 연애할 때나 가질 법한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요즘은 이렇게 가끔 낯선 방문을 하곤 한다.

아니면 봄이라 그런가. 나무에 물이 오르고 여러 빛깔의 새싹을 내놓으니 장차 무성해질 초록 이파리들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밝고 포근한 햇빛 아래 드러나 있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봄빛 따라 아물아물한 그리움이 슬쩍 찾아왔었나 보다.

3/13/2019

성경 퀴즈, 한국어로? 영어로?


<새벽녘 밝아오는 Vaughn Road-우리 교회가 있는 길>

이거 괜히 하자고 그랬나. 일이 너무 커지는데…
선생님들과 올해 아동부 계획을 세우면서 성경퀴즈 시간을 세 차례 갖기로 했다.

아동부에서 사용할 성경 퀴즈 문제를 정리하고 있었다. 난 설교에서 나눈 성경 말씀 중에서 문제를 낼 것이고 선생님들은 분반 시간에 가르친 성경 본문에서 문제를 낼 것이다. 퀴즈는 아이들이 성경 지식을 쌓고 성경과 친해지는데 목적이 있다. 문제와 답을 잘 정리하여 나누어 주고 한 달쯤 뒤에 퀴즈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퀴즈 형식은 퀴즈 프로그램 가운데 오래된 ‘도전 골든벨’처럼 하기로 했었다. 아이들에게 종이와 연필을 나누어 주고, 답을 적게 하고, 틀린 사람은 탈락하고, 맞힌 사람은 계속 맞출 수 있는 토너먼트이다.

이 성경 퀴즈는 내가 하자고 제안한 것이라 일이 되어지는 과정도 맡아야 할 것 같다. 일단 문제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50문제가 금방 정리가 되었다. 그 다음부터 하나, 둘 고민이 시작되었다.

우리 교회 아동부는 초등학교 가기 전 만4세부터 초등학교 5학년까지 아이들이 섞여 있는데 토너먼트 형식은 합리적이지 않아 보였다. 그럼 수준에 맞게 시험지를 만들어 반별로 치르면 어떨까. 아이들이 잘 맞출 수 있게 객관식으로 하든 보기를 많이 주든. 하자고 치면 시간이 걸려도 시험지를 만들겠지만 이번엔 아이들이 한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겼다. 한글을 읽고 쓰는데 능숙하지 않아 성경을 알아가는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 같은 염려가 되었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한인교회들은 한국어를 사용할지 영어를 사용할지를 교회 상황에 맞게 정한다. 아동부만 예를 들어보면, 미국 와서 내가 다녔던 두 교회 모두 영어만 사용하였다. 아이들이 미국 사회에서 어울려 살자면 교회에서도 영어를 쓰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회는 거의 한국어만 사용한다. 우리 교회는 이민 온 지 10년 이내의 교우들이 대부분이다. 아이들은 교회와 가정을 제외하면 영어를 사용하게 되니 영어를 못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가정과 교회에서라도 한국어를 사용해야 모국어를 잊지 않으며,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는 부모와 지속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모국어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해 보았다. 부모 세대의 모국어는 한국어다. 우리 교회 아이들은 이민 1.5세거나 2세이다. 아이들의 모국어도 역시 한국어. 아이들이 한국인이나 다른 언어권 사람과 결혼을 해서 이민 2, 3세를 낳으면 그들의 모국어에 엄연히 한국어가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한인 기독교인에게 주시는 사명이 무엇일까 묵상하다보면 어느 지점에선 여전히 모국어인 한국어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앞으로 남북이 통일되고 남북한이 세계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목사, 정치가, 학자, 사업가...들의 견해를 자주 듣는다. 그렇다면 통일 이후 기독교인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나만, 내 가족만, 내 교회만, 내 나라만 부요해지면 된다는 이기적인 발전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세계를 섬겨 조화로운 진보를 이루어가는 능력 있는 기독교인들이 필요하다. 한인 1.5세인 어느 집사님은 아무리 영어를 퍼펙트하게 잘 해도 (미국 원어민은) 자신을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당연히 한국어를 잘 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한국어와 영어, 이중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평화의 복음을 가지고 세계를 이끌어갈 사람이 요청되는 시대가 되었다.

모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어느 민족의 뿌리로부터 자신이 나왔는지를 기억하려면 언어는 매우 중요한 장치다. 적어도 우리 교회 아이들이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실력있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자신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늘 배우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길 바란다. 그러려면 한국어를 놓치면 안 된다.

사실 아이들이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 말을 배우려면 부모의 교육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한국학교 교사를 짧게 몇 년 한 적이 있다. 어느 아이도 스스로 한국학교를 찾아온 걸 보지 못 하였다. 보통 토요일에 열리는 한국학교에 아이들은 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저들도 주말에 쉬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가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판단되어 아이들을 한국학교에 데리고 오는 것이다. 모국어를 익히는 것은 부모의 영향 아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교회 학부모 간담회에서도 이중언어 사용에 대한 의견은 언제나 제시된다. 우리 교회에서 지낸 지난 6개월을 돌아보면 한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부모가 많다. 그렇지 않은 학부모도 늘 고민한다. 아이들에게 영어로만 말하게 할 것인지 영어와 한국어를 다 쓰게 할 것인지. 부디 불편한 노력이 필요한 쪽으로 나서주면 좋겠다.

생각 끝에 아동부 성경 퀴즈는 파워포인트를 사용하여 한국어와 영어로 동시에 문제를 제시하고 한국어든 영어든 말로 정답을 맞추기로 결정하였다. 글로 쓰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쉬우므로. 그리고 정답이 포함된 문제지도 선생님들이 번역하는 수고를 보태 이중언어로 만들어졌다.

3/06/2019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Selma to Montgomery)





월요일 아침. 어제 폭풍이 몰아치더니 기온이 뚝 떨어져 영하의 날씨가 되었다. 산에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 언젠가 가 봐야지, 했던 셀마를 다녀오기로 했다. 산 보다는 그곳이 덜 추울 것 같기도 해서. 주섬주섬 따뜻한 옷을 챙겨 입고 차에 몸을 실었다. 대학 다니던 시절 민주화운동에 열심이었던 남편은 무엇인가에 끌리는지 셀마를 꼭 방문해보고 싶어했다. 다른 외출보다 더욱 부지런히 채비를 하고 차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셀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 몽고메리까지 행진(아래 셀마 행진)을 시작한 도시이다. 이 도시는 달라스 카운티에 속해 있다. 1950년에는 달라스 카운티에 속한 유권자의 절반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그런데도 카운티나 주에서는 읽고 쓰기 테스트나 협박을 하며 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고 있었다.

셀마에서 출발한 행진 대열은 몽고메리에 있는 주청사에 이르기까지 국도 80번을 따라 54마일(86킬로미터)을 걸었다. 우리는 그 길을 자동차로 되짚어 보기로 했다. 집에서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 무엇이 내 맘에 남으려나, 지나치는 풍경들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몽고메리 지역공항을 지나 얼마쯤 가다 보니 다른 도로에는 별로 없는데 80번 도로에는 아주 많은 어떤 것이 있었다. 편도 2차선 도로에서 상행, 하행을 바꾸기 위해 유턴할 수 있는 샛길이다. 보통 고속도로에는 어쩌다 이 유턴길이 있고 그것도 경찰차나 도로 관리 차량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다. 

1965년에도 이 사잇길이 이렇게 많았을까.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이 유턴길에 이를 때마다 셀마로 되돌아 가고 싶지는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4박5일을 걸어 목적지에 이르렀던 그 비장함은 어떤 무게였을까...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며 그 길이 나올 때마다 셀폰을 눌러 댔다. 남편은 뭘 그렇게 자꾸 찍냐며 운전하는데 신경쓰인다고 했다. 왜 이 길에는 유턴길이 많은 지 궁금해서 그런다고 대꾸했다. 

“엑싯(exit)이 없잖아! 길 옆이 다 벌판이고 그러니까…”

그러고보니 정말 집에서부터 셀마까지 고속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번호가 매겨진 출구는 하나도 없었다. 고속도로 옆으로 어쩌다 지방도로가 나오거나 도로 옆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만 나왔다. 국도와 고속도로는 제한속도가 비슷해도 다른 형태로 운영이 되는 것인가 보다.




어느새 셀마에 다다랐음을 알려주는 에드문드 페터스 다리(Edmund Pettus Bridge)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셀마 인터프리티브 센터(Selma Interpretive Center)가 보였다. 남편이 설정한 네비게이션의 목적지는 어딘지 몰라도 더 가라고 안내하고 있었으나 센터를 발견하고는 급하게 차를 세웠다. 

차는 센터 앞 도로에 두고 먼저 다리 위를 걸어 보았다. 자신의 투표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다리를 건넌 사람들의 심정을 느껴보려 했건만... 앨라배마강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하도 쌀쌀하여 센터 건물로 자연스레 발걸음이 돌려졌다. 




셀마 쪽으로 걸어 들어오다 보니 낡고 사용하지 않는 듯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가 오래된 도시임을 보여주기에는 그럴듯하나 역사를 의미있게 이어가려는 에너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셀마 인터프리티브 센터 안은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역사적인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과 설명들이 가득하다. 1965년 셀마 행진이 있기 전 1월부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참여한 대중 집회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고 하니 사진이나 영상이 잘 남아 있는 것 같다. 1, 2층은 사진과 몇 가지 물품들, 3층에서는 동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같은 해 2월에는 셀마 북서쪽에 있는 도시 마리온에서 집회가 열렸다. 여기에 참여한 지미 리 잭슨 청년은 쓰러진 자기 할아버지를 보호하던 중 총상을 당해 사망한다. 이 사건은 셀마 행진으로 발전되었다. 




인터프리티브 센터 안내 데스크 뒤쪽에는 1965년 3월 7일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참상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날은 춥고 바람은 불지만 화장한 날이었다고 한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날씨와 똑같아 상상력이 더욱 발휘되었다. 게다가 3.1절 100주년을 보내면서 교회 어린이들에게 3.1절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던 터라 1919년, 1965년, 2019년 각각의 3월이 한군데 모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피의 일요일 오후, 비폭력 행진 참가자들을 에드문드 페터스 다리를 걸어 앨라배마강을 건너 갔다. 몽고메리로 향하는 다리 건너편에는 주 경찰관과 지역 경찰관들이 막고 있었다. 그들은 점잖은 시위자들을 경찰봉으로 밀고 때렸다. 최루가스는 그때도 있었나 보다. 대학시절 몇 번 최루가스를 맡아본 적이 있다. 눈을 뜰 수가 없고 눈물과 콧물에, 후두가 약한 사람은 숨쉬기가 고통스럽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사용하면 안되는 영 못된 가스다.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경찰과 대치하며 최루가스에 수도 없이 눈물 흘렸던 남편의 소회는 더욱 남달랐을 것 같다.

3월 9일 두 번째 행진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사람들을 인도하여 다리를 건너 간다. 그들은 계획대로 피의 일요일 현장까지만 가서 기도하고 셀마로 다시 돌아온다. 이 집회를 주도했던 제임스 립 목사는 그날 밤 거리에서 공격을 당하고 이틀 뒤 죽게 된다. 

3월 21-25일에는 셀마에서 몽고메리 주청사에 이르기까지 4박 5일을 걸으며 투표권을 얻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1965년 8월 6일 린든 존슨 대통령은 흑인 투표권법에 서명하였다. 

좁은 인터프리티브 센터를 돌았을 뿐인데 남의 일 같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의 표정에서 보았던 슬픔, 결연함, 기쁨이 내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애쓴 이들의 영상과 여러 번 겹쳐졌다. 




세 번에 걸친 행진의 시작점은 모두 브라운 채플 에이엠이 교회(Brown Chapel AME Church)였다. 이 교회는 지역 투표권 운동의 지휘 본부와 영적인 심장이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다. 교회 주변으로 1952년 연방정부가 조성한 주택단지를 볼 수 있다. 그곳 주민들이 민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단다. 




점심은 지역 음식점을 찾아가 먹기로 했다. 구글에 검색하여 행콕스 바비큐(Hancock’s Bar-b-que)로 정하였다. 주요리를 하나 선택하고 사이드 메뉴로 두 가지를 고를 수 있다. 바비큐, 갈비, 햄버거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양파를 다지고 볶아서 얹어 놓은 햄버거 스테이크가 남편과 나의 입맛에는 잘 맞았다.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Selma to Montgomery), 이 역사적인 사건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집에 가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2014년에 상영된 “셀마”를 유튜브나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도착하고 보니 피곤하였다. 옳은 일을 위해 꿋꿋하게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걸어간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어느 날, 영화는 그때 보기로 하고 그만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