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2019

다시 내게로 온 책




한 달 전쯤 남편이 애틀랜타에서 모임이 있다고 하여 따라 갔었다. 애틀랜타에 가는 큰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한인마트에서 식료품을 사오는 것이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위주로 산다. 또 다른 하나는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서다. 몽고메리로 이사온 뒤로는 교회 집사님의 미용실을 이용해서 좋았는데 집사님이 멀리 이사를 갔다. 애틀랜타에 갈 일이 생기면 단골로 가던 미용실이 있어 겸사겸사 머리를 깎고 오는 것도 괜찮다.

그 날도 애틀랜타에 머무는 동안 두 가지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잘 분배해야 했다. 집까지 가는 세 시간을 고려하여 너무 늦지 않게 출발하는 것이 좋다. 다음 날을 피곤하지 않게 보내려면 말이다. 남편이 모임을 갖고 있는 중에 나는 얼른 단골 미용실에 들러 후다닥 머리를 깎았다. 남편과 산이는 모임이 끝난 다음 우리 교회 구 집사님이 가신다는 이발관에 들렸다. 비용도 저렴하고 미용사가 여럿이라 기다리지도 않아 좋았다. 이 이발관은 애틀랜타에서 살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애틀랜타에 살 때는 관심도 없던 곳인데 오히려 타주에 살면서 소문 듣고 찾아가니 낯익음과 낯설음이 뒤섞여 기분이 묘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벼워진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한인마트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작은 아들이 빠진 세 식구를 위한 장보기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게다가 때때로 저녁 식사를 아예 먹지 않거나 허기만 면할 정도의 입맷거리만 있으면 되니까 더욱 그렇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장보기 목록에서 꼭 챙기는 것은 두부. 그 자체로는 밍밍한 맛뿐인 두부가 난 그렇게 좋다. 두부 다섯 개와 순두부 두 개를 골라 카트에 담고 다음은…

고개를 들어 지나쳐 온 콩나물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 있는 한 여인에게 눈길이 머물렀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인가. 애틀랜타를 떠나고 다시 애틀랜타를 그렇게 여러 번 다녀갔어도 조금이나마 가까웠던 사람들과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다. 그 여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공통된 기억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조심조심 그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노 집사님, 아니 이젠 권사님이시죠?”

교회에서 조용히 봉사하시는 모습을 봤었기에 다른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고 깊은 신앙으로 이끌어 주는 권사님이 됐을 것 같았다.

“네, 맞아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권사님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우리는 한국학교에서 같은 시기에 일을 하면서 친분을 쌓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 엄청 반가웠다. 드라마에서처럼 배경음악이 깔리는 상황이었으면 두 사람 모두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도 남았다.

“그렇지 않아도 권사님이 빌려준 책, 왜 그거 있잖아요. ‘파리 서점’ 나오는 책. 요즘 그 책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인터넷에 이런저런 단어들을 넣어봐도 찾아지지가 않더라구요.”

사실이었으므로 안부를 묻지도 않고 뜬금없이 책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 즈음 왜 이 책이 문득 떠올라 머릿속을맴돌았는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남편이 필요한 책을 미국 알라딘에 주문한다기에 배송료를 줄여볼까 하여 내가 읽고 싶은 책도 함께 주문하려고 정확한 제목을 찾고 있었다. 기껏 생각나는 ‘파리’와 ‘서점’을 키워드로 넣어도 좀처럼 찾아지지가 않고 있었는데 그 책의 주인을 만난 것이었다.

“난 그 책의 느낌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구입하여 다시 읽어보려고 했지요.”
“아, 그러셨구나! 나도 그 책 무척 좋아해요. 그런데 동생은 별로래요.”

서로 같은 책을 좋아한다니 반가움이 배가 되었다. 만나지 못했던 8, 9년의 간격이 친밀함으로 스르르 채워지는 것 같았다.

“권사님, 그 책 제목이 뭐지요?”
“어… 가만있자… 뭐더라…”

나보다 두세 살 아래인 권사님 기억력도 나와 비슷한가 보다. 우리 둘 다 웃음이 났다. 웃음은 책 이야기에 집중했던 심각함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다. 권사님을 만난 것이 하도 신기하여 책 얘기부터 꺼내 놓다니 앞뒤 못 가리는 딱 주책없는 인간이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또 정신을 놨다. 책 이야기로.

“그 책 제가 드릴게요. 일부러 사지 마세요. 집주소를 알려주세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내 기억으로는 권사님 동생이 한국에서 책을 보내주곤 했다. 그 책도 동생이 보내준 책이라며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했었다. 본인에게도 한 권뿐이고 좋아하는 책이라면서, 그걸 나에게 주겠단다. 권사님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난 끝까지 정중하게 거절하며 제목이나 알려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로의 전화번호를 확인한 후 헤어졌다.

책 내용은 가물가물했다. 파리에 있는 서점에서 일어난 일을 적은 것이다. 주인공은 갈 곳이 없어 서점에 들렀다가 그 곳에서 기거하게 된다. 서점의 모토는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필요한 것을 취하라’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낯선 이에게 친절하라’. 서점 구석구석은 잘 곳이 없는 이들에게 집이 되어준다. 서점에 머물 수 있는 조건은 하루 한 시간 이상 허드렛일을 도와야 하고, 가능한 매일 한 권씩 책을 읽는 것, 그리고 글을 써야 한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우정과 사랑을 쌓으며, 마음에 품은 희망의 빛을 꺼뜨리지 않는다. 이런 내용이 실화인지 허구인지조차 기억에 없는데 다만 낭만이 가득한 이야기로 남아있었다.

그 책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면 할수록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며칠이 지나 난 참지 못하고 권사님에게 만나서 반가웠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책 제목을 얻기 위한 인사였다. 답이 없었다. 휴대전화 전화번호부를 살펴보니 권사님 이름이 두 개였다. 이메일 주소로 하나, 전화번호로 하나. 이름만 보고 전화번호도 없는 곳으로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이번엔 바로 답을 듣고 싶어 전화를 했다. 권사님은 역시나 반가워했다.

“하하. 그렇지 않아도 소포로 붙이려고 그랬어요.”
“우리 집 주소도 모르시면서요?”
“교회로 보내려고 그랬지요. 서프라이즈하려구요.”

좀 참을 걸 그랬다. 난 소극적인 편인데 이제는 적극적으로 살아야지, 하다 보면 어설픈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성품이나 행동의 강약 완급의 적절한 조화는 정말이지 쉽지 않다. 권사님은 미완의 서프라이즈를 아쉬워하며 집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내 조급함을 겸연쩍어 하면서 집주소를 잽싸게 보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산이는 집 앞에 있는 메일박스에서 집 안까지 우편물을 배달한다. 하루도 안 거르고 우편물을 챙겨오는 성실한 배달부다. 산이가 소포를 안고 들어왔다. 함께 상자를 열던 산이는 대박!, 이란다. 책이 네 권이나 들어있고, 상자의 빈 공간에는 부각 봉지들과 초콜릿이 담겨 있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한식, 양식, 일식 할 것 없이 맛있고 멋스럽게 차려내는 권사님을 닮은 선물이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즈음에 권사님으로부터 받은 책들은 절제의 도구로 잘 사용되고 있다. 올해 사순절에는 드라마 보는 것을 끊어보기로 했다. 그 시간에 책을 읽으리라 굳은 다짐을 했다. 하지만 책이 빨리 읽혀져 시간도 남고 책에 계속 집중하고 있으면 눈이 침침해지기도 하니 어쩌나. 드라마를 도저히 끊지는 못하고 양을 줄여서 보고 있다. 주님께서 이 연약한 인간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10년쯤의 간격을 두고 다시 내게로 온『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부제는 셰익스피어 & 컴퍼니. 책의 제대로 된 제목도, 부제가 있다는 것도 새롭게 다가왔다. 예전엔 그런 생각을 못 했었는데 인터넷에 서점 이름, 셰익스피어 & 컴퍼니를 검색하니 수 많은 이미지들이 올라왔다. 이미지들에 상상력을 더해 생생한 느낌으로 두 번째 책읽기를 벌써 마쳤다.

어떤 영감을 주려고 이 책은 나에게 다시 왔을까. 보나마나 이번에도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게 되겠지. 셰익스피어 & 컴퍼니는 미국 사람이 파리에 낸 역사적인 서점. 저자는 캐나다 사람으로 잘 나가는 사회부 기자였다. 그가 캐나다에 있을 때 책을 냈는데,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해준 범죄자의 실명을 책에서 밝힌다. 그 일로 범죄자의 협박을 받고 쫓기듯 프랑스로 건너가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서 직접 겪은 이야기를 엮어서 내놓은 책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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