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2019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Selma to Montgomery)





월요일 아침. 어제 폭풍이 몰아치더니 기온이 뚝 떨어져 영하의 날씨가 되었다. 산에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 언젠가 가 봐야지, 했던 셀마를 다녀오기로 했다. 산 보다는 그곳이 덜 추울 것 같기도 해서. 주섬주섬 따뜻한 옷을 챙겨 입고 차에 몸을 실었다. 대학 다니던 시절 민주화운동에 열심이었던 남편은 무엇인가에 끌리는지 셀마를 꼭 방문해보고 싶어했다. 다른 외출보다 더욱 부지런히 채비를 하고 차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셀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 몽고메리까지 행진(아래 셀마 행진)을 시작한 도시이다. 이 도시는 달라스 카운티에 속해 있다. 1950년에는 달라스 카운티에 속한 유권자의 절반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그런데도 카운티나 주에서는 읽고 쓰기 테스트나 협박을 하며 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고 있었다.

셀마에서 출발한 행진 대열은 몽고메리에 있는 주청사에 이르기까지 국도 80번을 따라 54마일(86킬로미터)을 걸었다. 우리는 그 길을 자동차로 되짚어 보기로 했다. 집에서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 무엇이 내 맘에 남으려나, 지나치는 풍경들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몽고메리 지역공항을 지나 얼마쯤 가다 보니 다른 도로에는 별로 없는데 80번 도로에는 아주 많은 어떤 것이 있었다. 편도 2차선 도로에서 상행, 하행을 바꾸기 위해 유턴할 수 있는 샛길이다. 보통 고속도로에는 어쩌다 이 유턴길이 있고 그것도 경찰차나 도로 관리 차량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다. 

1965년에도 이 사잇길이 이렇게 많았을까.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이 유턴길에 이를 때마다 셀마로 되돌아 가고 싶지는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4박5일을 걸어 목적지에 이르렀던 그 비장함은 어떤 무게였을까...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며 그 길이 나올 때마다 셀폰을 눌러 댔다. 남편은 뭘 그렇게 자꾸 찍냐며 운전하는데 신경쓰인다고 했다. 왜 이 길에는 유턴길이 많은 지 궁금해서 그런다고 대꾸했다. 

“엑싯(exit)이 없잖아! 길 옆이 다 벌판이고 그러니까…”

그러고보니 정말 집에서부터 셀마까지 고속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번호가 매겨진 출구는 하나도 없었다. 고속도로 옆으로 어쩌다 지방도로가 나오거나 도로 옆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만 나왔다. 국도와 고속도로는 제한속도가 비슷해도 다른 형태로 운영이 되는 것인가 보다.




어느새 셀마에 다다랐음을 알려주는 에드문드 페터스 다리(Edmund Pettus Bridge)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셀마 인터프리티브 센터(Selma Interpretive Center)가 보였다. 남편이 설정한 네비게이션의 목적지는 어딘지 몰라도 더 가라고 안내하고 있었으나 센터를 발견하고는 급하게 차를 세웠다. 

차는 센터 앞 도로에 두고 먼저 다리 위를 걸어 보았다. 자신의 투표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다리를 건넌 사람들의 심정을 느껴보려 했건만... 앨라배마강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하도 쌀쌀하여 센터 건물로 자연스레 발걸음이 돌려졌다. 




셀마 쪽으로 걸어 들어오다 보니 낡고 사용하지 않는 듯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가 오래된 도시임을 보여주기에는 그럴듯하나 역사를 의미있게 이어가려는 에너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셀마 인터프리티브 센터 안은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역사적인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과 설명들이 가득하다. 1965년 셀마 행진이 있기 전 1월부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참여한 대중 집회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고 하니 사진이나 영상이 잘 남아 있는 것 같다. 1, 2층은 사진과 몇 가지 물품들, 3층에서는 동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같은 해 2월에는 셀마 북서쪽에 있는 도시 마리온에서 집회가 열렸다. 여기에 참여한 지미 리 잭슨 청년은 쓰러진 자기 할아버지를 보호하던 중 총상을 당해 사망한다. 이 사건은 셀마 행진으로 발전되었다. 




인터프리티브 센터 안내 데스크 뒤쪽에는 1965년 3월 7일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참상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날은 춥고 바람은 불지만 화장한 날이었다고 한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날씨와 똑같아 상상력이 더욱 발휘되었다. 게다가 3.1절 100주년을 보내면서 교회 어린이들에게 3.1절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던 터라 1919년, 1965년, 2019년 각각의 3월이 한군데 모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피의 일요일 오후, 비폭력 행진 참가자들을 에드문드 페터스 다리를 걸어 앨라배마강을 건너 갔다. 몽고메리로 향하는 다리 건너편에는 주 경찰관과 지역 경찰관들이 막고 있었다. 그들은 점잖은 시위자들을 경찰봉으로 밀고 때렸다. 최루가스는 그때도 있었나 보다. 대학시절 몇 번 최루가스를 맡아본 적이 있다. 눈을 뜰 수가 없고 눈물과 콧물에, 후두가 약한 사람은 숨쉬기가 고통스럽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사용하면 안되는 영 못된 가스다.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경찰과 대치하며 최루가스에 수도 없이 눈물 흘렸던 남편의 소회는 더욱 남달랐을 것 같다.

3월 9일 두 번째 행진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사람들을 인도하여 다리를 건너 간다. 그들은 계획대로 피의 일요일 현장까지만 가서 기도하고 셀마로 다시 돌아온다. 이 집회를 주도했던 제임스 립 목사는 그날 밤 거리에서 공격을 당하고 이틀 뒤 죽게 된다. 

3월 21-25일에는 셀마에서 몽고메리 주청사에 이르기까지 4박 5일을 걸으며 투표권을 얻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1965년 8월 6일 린든 존슨 대통령은 흑인 투표권법에 서명하였다. 

좁은 인터프리티브 센터를 돌았을 뿐인데 남의 일 같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의 표정에서 보았던 슬픔, 결연함, 기쁨이 내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애쓴 이들의 영상과 여러 번 겹쳐졌다. 




세 번에 걸친 행진의 시작점은 모두 브라운 채플 에이엠이 교회(Brown Chapel AME Church)였다. 이 교회는 지역 투표권 운동의 지휘 본부와 영적인 심장이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다. 교회 주변으로 1952년 연방정부가 조성한 주택단지를 볼 수 있다. 그곳 주민들이 민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단다. 




점심은 지역 음식점을 찾아가 먹기로 했다. 구글에 검색하여 행콕스 바비큐(Hancock’s Bar-b-que)로 정하였다. 주요리를 하나 선택하고 사이드 메뉴로 두 가지를 고를 수 있다. 바비큐, 갈비, 햄버거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양파를 다지고 볶아서 얹어 놓은 햄버거 스테이크가 남편과 나의 입맛에는 잘 맞았다.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Selma to Montgomery), 이 역사적인 사건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집에 가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2014년에 상영된 “셀마”를 유튜브나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도착하고 보니 피곤하였다. 옳은 일을 위해 꿋꿋하게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걸어간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어느 날, 영화는 그때 보기로 하고 그만 두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