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2019

드라마 "톱스타 유백이"


<모든 포스터는 tvN에서 가져오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 데는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단순한 미국 생활이 때로 심심하고 지루해서. 한국 풍경이 그리워서. 작가의 이야기 전개에 이끌려서. 개성있는 혹은 예쁘고 잘 생긴 배우들 보느라.

어느 날 포털사이트에서 연예 섹션을 검색하던 중 “톱스타 유백이”는 자연적인 예쁜 배경을 많이 보여주는 드라마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 그 문구 하나에 끌려 드라마 시청에 바로 들어갔다.

이미 방송된 지가 꽤 되어 여러 편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다. 진짜 근사한 배경이 나오는 지는 시청을 해 봐야 알 수 있기에 첫회부터 성실하고 꼼꼼하게 살필 마음으로 플레이 버튼을 클릭했다. 하지만 드라마가 시작되자 촬영된 장소와 배경이 어떠한지 보다는 전혀 의외의 설정과 줄거리의 전개에 더 집중되었다.






연예인 유백은 거침없는 말 때문에 구설수에 올라 여즉도라는 섬으로 잠시 피해 있는다. 여즉도는 인터넷, TV, 휴대폰이 연결되지 않는 섬이다. 이 섬에 사는 순수한 소녀 오강순은 유백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만나게 된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주인공에 얽힌 이야기는 엉뚱발랄하다. 더불어 오강순의 동네 오빠인 최마돌은 해적을 물리친 최연소 선장이다. 두 주인공과 최마돌의 관계는 드라마 전개를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에는 무엇보다 간질간질한 사랑이 여기저기 깔려 있다. 보통 사람들은  밖으로 드러내지 못할 것 같은 감정들을 그대로 꺼집어내어 보여준다. 사랑 표현이 노골적인데 정겹고 유쾌하다. 그래서 드라마 “톱스타 유백이”를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왔다.

시카고에서 있었던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여 친구 목사 부부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은퇴 후 삶에까지 이르렀다.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한 나이가 되었던가. 그들은 모두(!) 오래된 친구들과 멀지 않은 곳에 혹은 공동체로 어울려 살고 싶다고 했다. 같이 살고 싶은 친구가 이야기를 나누던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인지 아니면 각자가 생각하는 어떤 친구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노년을 보내길 원하는 그들의 바람에 살짝 놀랐다. 내 노후의 그림에는 남편, 아들 산이와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만 있었으므로. 

함께 살아온 시간과 추억이 있는 사람들,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산다면 어떤 모습일지... 직설적이고 거칠면서도 끈끈한 유대감을 갖고 사는 여즉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강순이 할머니가 만들어내는 음식도 소품처럼 놓여져 드라마에 정겨움을 더한다.

이 드라마는 지난주에 끝났다. 끝난 드라마는 몰아서 볼 수 있어 좋다. 모두 11회로 길지도 않다.

1/23/2019

쉐와클라 주립공원(Chewacla State Park)




몽고메리의 자연 환경을 보면 산이 없는 평야 지대이다. 내륙이다보니 바다하고도 멀리 떨어져 있고 강도 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다운타운 언저리에 있는 리버프런트 공원(Riverfront Park)에 가면 굽이굽이 흐르는 앨라배마 강의 어느 한 자락를 감상할 수 있다. 숲길 걷기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에겐 산이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대신에 새벽기도가 끝나고 나서 남편과 함께 교회 주차장을 여러 바퀴 돌곤 한다. 건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싶기도 하고 두서없는 얘기를 떠들기도 하고. 교회 옆에 공원이 있긴 한데 짧은 거리라도 자동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니 귀찮기도 하고 2-30 여분 걷기를, 이동하는 시간에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이곳은 겨울이 우기라 그나마도 비가 오면 걷지를 못한다. 그래서 조금 추워도 비가 오지 않으면 옷을 더 껴입고 걷는다. 어둑해도 우리 교회 앞이니 마음이 더 없이 편안하다.

우리는 생활 영역을 넓혀 몽고메리를 벗어나 산을 찾아보기로 했다. 주립공원은 일반 공원보다 자연이 더 잘 보전되어 있을 터이다. 집에서 자동차로 50분쯤 걸리는 쉐와클라 주립공원(Chewacla State Park)을 찾아갔다. 이 공원은 어번대학교와 자연 환경, 그리고 도시가 오밀조밀 어울려 있는 어번시에 자리하고 있다. 일단 입장료는 12-61세는 4달러이고 나머지 나이대는 2달러이다. 3세 이하는 입장료가 없다.

이왕 산을 다닐거면 1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통행증을 구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통행증을 가지고 있으면 해당하는 주에 있는 어느 주립공원이든지 일 년 동안 횟수에 상관없이 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쉐와클라 공원 입구에 도착하여 표를 사는 곳에서 물어보니 다른 주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이 이용하려면 155달러이고, 쉐와클라 주립공원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고 담당자가 알려주었다. 통행증의 가격도 꽤 비싼 편이고, 우리 세 식구가 이 공원만을 일 년에 10번 이상 올 것 같지 않아 구입하지 않기로 했다.




매표소를 지나 자동차로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가면서 둘러보기로 했다. 이동하는 동안 시선을 끄는 것이 없어 끝까지 가보니 넓은 주차장이 나왔다. 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을 기념하는 공휴일(Martin Luther King Jr. Day)이라 그런지 차들이 꽤 많이 주차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려 숲 속을 걷기 전에, 트레일을 안내하는 지도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지도가 따로 설치된 것도 보이지 않았고 게시판도 텅 비어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가지가 다 잘려 생뚱스러운 나무였다. 그 나무에 폭포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팻말이 달려 있었다. 이 공원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안내 팻말을 발견하도록 하는데 가지가 없어 초라해 보이는 나무가 얼마간 도움을 줄 것 같긴 하다. 우리는 그 표지를 따라 폭포 쪽으로 길을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폭포가 나타났다. 무어스 밀 강(Moores Mill Rivers) 하류를 댐으로 막아 호수를 만들고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이 폭포가 된 것이다. 물빛도 흙탕물처럼 탁하고 근사한 모습의 폭포는 아니더라도 그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도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폭포를 등 뒤로 하고 강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갔다. 그러자 무어스 밀 강과 쉐와클라 강이 만나 섞이는 곳에 이르렀다. 무어스 밀 강이 끝나고 쉐와클라 강줄기가 더 넓어진다. 스스로 변화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자연을 만나는 지점이다. 



아이들이 어릴 적 김포 문수산에서.
멀리 보이는 강화대교.

쉐와클라 공원이 품은 산은 낮다. 한편 길에는 바위와 돌들이 많다. 낙엽만 있어도 걸음을 편안히 내딛지 못하는 산이는 바위가 나타나면 아빠의 두 손을 잡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산이가 어렷을 적에는 남편이 등에 업고서 산을 오르내렸다. 특히 왼발이 약해서 그랬었는데, 이제는 제 두 발로 걸어 산을 오르내리는 아들을 늘 대견해한다. 간혹 산이가 폴짝 뛰어내리기라도 하면 칭찬이 만발한다.

“잘했어! 이런 데 자주 오면 평행 감각도 생기고 좋겠어!”

산이가 이런 길을 한 두 번 오간 것이 아닌데 새삼스럽기는... 산에 자주 오자는 얘기를 '산'이를 핑계 삼아 하고 있는 것 같다. 뭔가 결심하기까지 남편에 비해 시간이 더 걸리는 나를 염두해 둔 말이다. 아들은 아빠를 믿고 의지하고, 아빠는 그런 아들을 흐뭇하게 여기며 도와주는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자니 이것이 천국 아닌가 싶었다.

언젠가 산이가 영화 트랜스포머를 집에서 DVD로 보다가 한 말이 생각난다. 정의와 생명을 존중하는 오토봇의 수장인 옵티머스 프라임과 악의 무리인 디셉티콘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마구 싸우는 장면이었다.  옵티머스 프라임이 힘에 부치는지 “오 갓(oh God)!” 이라고 말한다. 산이는 갓(God)이라고 말하므로 거기가 하늘나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옵티머스 프라임을 도와주러 오토봇이 나타나자 오토봇끼리 도와주기 때문에 하늘나라란다. 산이는 죽을둥살둥 싸우는 모습 속에서도 하늘나라를 보고 있었다.

우리 교회 아동부에는 조이플 성가대가 있다. 올해 아동부 부장을 맡은 집사님은 조이플 성가대의 찬양이 은혜가 되었단다. 그래서 아이들이 찬양하는 동영상을 교회 홈페이지(http://www.montgomerykmc.org/)에 올리도록 관리자에게 부탁을 하셔서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셨다. 부장님은 카톡을 통해 매주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휘하고, 반주하고, 동영상을 찍는 선생님들의 수고에 감사를 전했다. 더 나아가 매주 성숙하고 멋져지는 아이들의 찬양 모습을 주변에 알려가자고 하시며 본인은 무척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주님 안에서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 속에는 하늘나라가 있다. 그런 관계로 이어진 사람들은 사랑, 생명, 정의와 같은 높은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행복하고 평온하며 기쁨을 누리게 된다.




강을 따라 얼마큼을 가니 산 위로 가는 길이 보였다. 등산이라고 하면 보통은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코스인데 이번에는 거꾸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올라오는 길은 짧은 거리라도 가파라서 숨을 헐떡거렸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상쾌하게 얼굴에 와 닿으니 거친 호흡이 금방 진정되었다. 하늘은 몹시 파래서 눈도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하루의 하늘나라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 가운데 나날이 확대되어 나가길 빌어본다.

1/16/2019

물러설 때와 나설 때


<숲 속 길을 걷다가>


교회는 나의 삶이다.

난 교회가 참 좋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었다. 성장하는 시기에 맞게 드려지는 예배나 행사에 빠지지 않았고, 어떤 일이나 과제를 주어도 싫어하지 않고 끝까지 완수했다. 교회에 있으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했다.

김포에서 목회할 때였다. 상가건물을 빌려 10명도 안 되는 교인들과 어렵게 신앙생할을 하다가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다. 교회가 지어지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구석 구석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매주 교회를 방문하거나 등록하는 새가족이 생겨났다. 나의 부모님도 교회 옆으로 이사오시고 어려서부터 알던 고향 친구도 어찌어찌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내가 할 일도 적지 않았다. 전도, 심방, 예배 안내, 찬양 인도, 아동부 교육, 성인 교육, 주방일, 청소... 어릴 적 소원대로 교회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남편은 당신은 부목사나 마찬가지야, 라며 고무하였다. 나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교인이 점점 늘어나던 그즈음 당회에서 남편은 나에게 맡겼던 교육부장을 다른 이로 바꾸어 발표하였다. 새로운 교육부장은 나의 친구였다. 나랑 한마디 의논도 없었다. 교육부장이든 아니든 나에겐 별로 의미가 없었지만 남편에게 서운했다. 사실 결혼해서 함께 목회하는 내내 교회학교 교육은 거의 내 몫이었다. '교육부장이든 아니든 별로 의미는 없었지만' 남편은 교육부장에 내 이름을 올려놓곤 하였다. 남편은 내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직분-달라고 요청하거나 수락한 적도 없는-이 뭐가 중요하냐며 당신은 교회 전반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오히려 강조하였다.

그해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때였다. 강습회에서 찬양과 율동을 잘 익혀 성경학교 때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했다. 비용을 아낄 생각으로 율동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하지 않았다. 악보만 모아놓은 책도 한 권만 샀던 것 같다. 강습회에 세 명이 참석을 했는데 찬양 책은 주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찬양을 열심히 따라 했고 나는 율동을 기억하기 좋게 적어놓고 있었다. 열심히 율동을 익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교육부장이 악보가 담긴 책을 휙 끌어가 자기 앞에 놓았다. 난 순간 멍했고, 뭐가 잘못되었나 그 순간을  머릿 속에서 반복할수록 화가 났다.

나의 엄마도 나 만큼이나 교회를 사랑한다. 어쩌면 나보다 순수해서 교회에 더 심하게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모녀지간이니 기질적인 면에서 닮은 구석이 있겠지만 교회에 관하여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부분이 많지 않은 듯싶다.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된 엄마 권사님은 주방 일을 거의 도맡아 하셨다. 엄마는 음식을 맛있게 만드신다. 양이 많은 음식도 겁내지 않고 만들어내신다. 성격이 깔끔하셔서 일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면 할 일이 하나도 없이 마무리를 해 놓으신다. 엄마는 나에게 교회에서 할 일이 많은데 주방 일은 이젠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딸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그러셨을 것이다. 엄마 마음을 이해했기에 주방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교회 젓가락이 몇 벌인지도 알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그곳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교회가 부흥하고 교인이 늘어나서, 여러 사람이 일을 나누고 협력할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감사한 일이었다. 교회는 변화하고 성장하는데 난 옛모습에 머물러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다양한 일들을 맡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일상이 되어 있었다. 어떤 일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나님을 위해, 적어도 교회를 위해 열심히 무엇인가를 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일을 나누기도 하고 아예 그 일을 놓고 물러서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 새로운 일(사명)로 나아가야 한다. 난 그걸 전혀 모르고 살다가 가족과 친구에게 제대로 한 방 맞고 깨달은 것이다. 그 한 방의 여운이 가시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미국으로 건너와 애틀랜타에서는 교회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천 여명 모이는 교회의 부목사 아내에게 요청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서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런 상황을 어색해 하는 나에게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해서 하나님이 쉬라고 하시나 보다. 지금은 그냥 편안히 쉬어.”

엄마의 조언처럼 그저 쉬면서 내 믿음만 잘 지키면 되었다. 덕분에 영어공부하는 학교도 기웃거리고, 선교센터의 간사도 해보고, 한국학교에서 가르치는 경험도 갖게 되었다. 콜럼비아교회에서는 다시 담임 목회자의 아내로 지내야 했지만 한국에서처럼 온갖 일을 다하려고 하지 않았다. 꼭 필요한 일인데 하려는 사람이 적거나 없을 때 기꺼이 나섰다.

지난해 9월, 몽고메리제일교회가 새로운 목회지가 되었다. 한국에 계신 강화 어머님과 통화를 하면서 아동부를 돕게 되었는데 교회학교 교육에서 멀어져 있었기에 잘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된다고 말씀 드렸다.

“ 힘들어도 열심히 햐.~ 배운 게 아깝지 않니? 내가 할려고 하면 안 댜아.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햐.”

어머님은 연세가 70대 중반을 넘어선 강화 망월교회 권사님이시다. 어느 날 연합속회를 인도하시게 되었다. 순서에 따라 진행하시던 중 성경 읽는 것을 까먹고 다음 순서로 넘어 가려 하셨다. 그러자 어머님 가까이에 계시던 박장로님이 눈치로 알려주셨다고 한다.

“이렇다니까요!”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교인들이기에 모두가 공감이 되어 까르르 웃고 지나가셨단다. 그러고 나서 어머님은 속회 인도자를 그만 내려놓겠노라 목사님께 말씀드렸다고 얘기해주셨다. 어머님은 이 일로 물러설 때를 감지하신 것이다.

우리 가족이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할, 몽고메리제일감리교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배움이나 경험이 교회를 위해 쓰여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엄청 감사할 뿐이다.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물러서야 할 때 가벼이 발걸음을 돌리리라.

1/09/2019

흥미로운 관계


<몽고메리로 이사오기 일주일 전 방문했을 때>

겨울방학이라고 둘째 아들 윤이가 집에 왔었다.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열흘. 성탄절 행사가 있던 시기라  윤이에게도 크리스마스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만 그밖에 집에서 딱히 할 일이 없어 심심하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누굴 만나러 나간다고 알려왔다. 교우들과도 이번에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낯선 몽고메리에 아는 사람이 없을텐데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한술 더 떠 친구란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온라인게임에서 알게 된 이들 가운데 앨라배마 사람도 있다고 들은 것이 기억이 났다.

“누구? 게임?”
“응.”
“여자? 남자?”
“여자.”

나의 말끝은 올라가 있고 윤이는 덤덤하게 대꾸를 했다.

“너 연애하냐?”
“아냐! 그냥 오래 전부터 알던 누나야!”

내 말끝에 힘이 좀 빠지는 듯하니 윤이 대답이 되레 퉁명스러워졌다.

온라인게임에서 만난 누나를 2년 전 한국에 여행갔을 때도 만났다고 한 것 같은데, 아마도 같은 사람인 듯싶었다. 게임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 좀처럼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좀 더 정보를 캐낼 속셈으로 관심 없는 척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여기서 만나...”

윤이의 대답도 나긋나긋해졌다. 단순한 녀석. 그 누나의 부모님 집이 몽고메리에 있고, 이곳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 타주에 있는 대학원을 진학하였는데 방학이라 잠시 내려와 있다는 얘기를 주절주절 주워섬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우리교회도 다녔었대 얼마 전까지. 부모님도 같이.”

교회 얘기가 나오자 '누나'에 대한 의문이 거의 사라지는 듯했다. 엄마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 지 아는 것이다. 영특한 녀석. 지난해 교인들 일부가 다른 교회로 수평이동을 할 때 그 누나네 가족도 거기 속해있었나 보다. 청년도 30 여명이나 있었는데 어느 순간 모두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여러 교우들에게서 들었던 얘기가 오래되어 사라진 옛 것이 아님을 윤이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나의 관심은 굳건하게 교회를 지키고 있는 대부분의 교인들이다. 어쨌든 그 누나에 대한 관심 역시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윤이는 집에 있는 동안 수요예배에도 같이 갔다. 예배가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데, 집사님 한 분이 자신의 아들과 윤이를 가리키며 야, 너네들 어제도 같이 만났다며? 하셨다. 집사님의 아들, 환이도 방학이라 잠시 집에 온 것이다. 착하고 듬직해보이는 환이는 대답 대신에 수줍게 웃었다. 윤이는 그 누나만 만난 것이 아니었다. 환이와 누나의 애인까지... 그  애인도 우리교회 다니던 청년이라 집사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집사님은 이 아이들이 만난 지 꽤 되었고, 어떤 게임인지도 알고 계셨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도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임을 다른 예를 들어 재미있게 얘기해주셨다. 온라인게임에 대해 고리타분한 내 성향이 티가 났나 보다. 집사님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러니까 착하게 살아야 돼, 라며 시원한 웃음을 날려주셨다.

그러나 저러나 전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관계들이 몽고메리에서 자꾸 교차되고 만나게 되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남편이 교회에 부임하기 일 주일 전, 장로님들과 권사님 한 분을 뵈러 왔었다. 서로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김장로님이 먼저 오셔서 함께 다른 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으로 권사님이 도착을 하셔서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이어가는데 자꾸만 아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면에 실례가 될 수도 있어 망설이다가 고향과 살았던 동네를 물어보니 생각했던 그 아이(!)가 맞았다. 바로 옆집 언니의 남동생이었다. 그 고향 동네를 떠난 지 거의 40 여년만에 몽고메리에서 대학 교수가 된 옆집 아이를 권사님과 목사의 아내로 만난 것이다. 시간이 꽤 많이 흘렀는데 어떻게 어릴 적 모습으로 지금의 권사님을 알아봤는지 모르겠다. 권사님과 공유하는 옛 기억은 없으나 한 동네 이웃으로 삼, 사 년을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반가웠다. 우린 점잖게 놀라워했다. 권사님도 이 일이 흥미로우셨던지 교회 임원 단체 카톡에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한다.

예상치 못한 만남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일했던 사무실에서 몇 년 전에 일했던 분과 김포에서 살 때 윤이한테 피아노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을 남편이 부임 첫설교를 하기도 전에 만났다.

게다가 이사하기도 전에 만남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된 분도 있었다. 김포지방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고촌교회 박정훈 목사님께서 안식월을 미국에서 보내시면서 우리와 연락이 닿았다. 새로운 사역을 위해 몽고메리제일교회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드렸다. 그랬더니 박목사님은 고촌교회 어느 장로님의 아드님 가족이 몽고메리에 살고 있다면서 알아보셨다. 그들은 바로 우리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미국 사회심리학자인 스탠리 밀그램이 연구한 6단계 분리이론에 따르면 여섯 단계만 거치면 사람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소셜미디어가  발달되어 4.74단계, 한 국가로 한정하면 3단계로 줄어든다고 한다(http://socialcomputing.tistory.com).

그런데 우리 가족이 몽고메리제일교회에 다니게 되었다는 조건이 붙기는 해도 이렇게 한꺼번에 바로 연결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몽고메리로 이사 와서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난 일련의 만남들은 교회와 우리 가족이 더욱 친밀하고 안정감 있게 연결되도록 돕는 분이 계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런 흥미로운 조합을 만드는 큰 손은 하나님이 분명하다.

1/02/2019

몽고메리에서 쓰는 이야기


<몽고메리로 이사하던 날, 휴게소에서>

지난해 9, 앨라배마주의 주도인 몽고메리로 이사를 왔다. 우리 가정이 이사를 하는 주된 이유는 남편이 목회하는 교회가 바뀔 때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제일교회를 사임하고 몽고메리제일감리교회(이하 몽고메리제일교회)에 부임했다.

한국 감리교단에 속한 미국 동남부지방은 6개 주를 아우르고 있다. 이 지방에는 36개 교회가 있는데 방문해본 교회가 몇 되지 않는다. 다른 교회를 방문하게 되는 대부분의 이유는 목회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거나 지방 행사가 있기 때문이다. 앨라배마주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두 번이나 몽고메리제일교회를 다녀가게 되었다.

한 번은 2017년 여름, 텍사스에 사는 친구를 보러 가는 길에 들러가게 되었다. 남편은 콜럼비아에서 오후에 출발하여 자동차로 여섯 시간쯤 걸리는 몽고메리에서 하룻밤 묵는 여행 일정을 짜 놓았다. 몽고메리를 거쳐 굳이 돌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대학교 후배 목사가 거기에 있었다. 저녁을 먹고 오는 바람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늦어 밤 아홉 시가 넘어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회 입구를 놓치고 몽고메리제일감리교회라고 써 있는 표지판을 발견하고는 유턴하여 찾아 들어왔다. 어두컴컴하고 넓은 주차장 한 켠에 차를 세웠다. 교회 건물이 큼직하고 안정적이었다. 잠시 기다리니 후배 목사님 부부가 달려왔다. 남편은 그 목사님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처음 만나는 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목사님은 교회로 들어가자고 안내해 주셨다. 예배실에 들어가 먼저 기도를 드렸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기를, 담임 목회자와 그 가정을 지켜주시기를, 그리고 우리 여행에 동행하여 주시기를 호흡을 몇 번 고르며 짧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들어보니 큰아들 산이는 어느새 드럼세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드럼 치는 것을 좋아하는 산이는 어느 교회를 가더라도 드럼 있는 곳으로 이끌려 간다. 난 그저 관심만 있지 만들어보지 않은 배너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교회 입구에 있는 휴게실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교회를 떠났다.

다른 또 한 번은 그로부터 반 년쯤 지나 지방회에 참석하러 몽고메리제일교회를 다시 오게 되었다. 지방회가 열리는 2월 초, 그때는 일을 하고 있었고 사무실이 무척 바쁜 때라 지방회에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장로 진급 과정에 있는 장로님 한 분이 동행해주길 원하셨다. 장로님은 여성이셨는데 낯선 곳에서 하룻밤 지내야 하는 것을 불편해하셨다. 장로님과 먼 길 오가며 더 가까워질 수도 있고, 다음 번 지방회에서 두 장로님 안수식도 있으니 미리 보아두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여 몽고메리에 내려오게 되었다.

지방회에 속한 지역이 워낙 넓다 보니 회원들이 모이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저녁을 먼저 먹고 회의는 식사 후에 열린다. 식사 시간 즈음에 도착한 우리는 교회 친교실에서 콩나물 김칫국을 먹었다. 지방회는 큰 행사이고 더군다나 안수를 받는 장로님도 있는 교회에서 잔치 음식이 아닌 간소한 상차림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교회 규모가 작지 않은 것으로 보아 먹는 것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알뜰한 교회인가 보다 미루어 짐작했다. 음식을 나누어주는 교인들은 원피스 같은 세련된 앞치마를 한 젊은 사람들이었다. , 사십 대 젊은 교우들이 많지 않던 교회에 있었기에 부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살피게 되었다. 젊은이답지 않게 부산스럽지도 않고 밝아 보이지도 않아 이 또한 기억에 남았다.

손님으로 지나쳐 갔던 몽고메리제일교회에 대한 기억은 여기까지다. 두 번의 방문은 어두운 밤이거나 오후여서 교회 주변을 돌아보거나 할 겨를이 없었다. 다음 날들도 갈 길이 바빠 도시를 구경할 마음을 조금도 갖지 못했다. 그냥 서서히 잊혀질 단기 기억 저장소에 담긴 조각들이었다.

지방회 다녀간 때로부터 다시 반 년쯤 지나 남편은 몽고메리제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우리 인생의 문이 언제 어디서 닫히고 열리는 지 신비롭다. 몽고메리에서 2018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았다. 몇 개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교회 안팎의 행정적인 일처리를 하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보내며 교우들과 어울려 지냈다. 기쁘고 설레기도 했고, 가슴 철렁하기도 했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이제는 한 순간 한 순간을 소중하게 살펴 오래 기억될 한 편의 이야기를 써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