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감고 나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된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집안에서 일을 하든, 사람을 만나거나
교회에 가는 일 따위로 외출을 하든 말이다. 머리를 감은 후에 급하게 집 밖을 나갈 일이 아니라면 헤어
드라이어를 쓰지 않고 젖은 머리가 자연스럽게 마르도록 나둔다. 헤어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열기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다.
헤어 드라이어의 열기를 때로 피했다 하더라도 또 다른 열로 머리 모양을 잡아주는 플랫 아이론(flat iron)을 사용해야 하는 단계가 남아 있다. 플랫 아이론은
직사각형 모양을 한 넙적한 판이 마주보고 달린 고데기 같은 도구이다. 머리카락에 남아 있는 물기가 마르는
동안 부스스해지고 이리저리 삐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펴주는데 아주 쓸모 있는 도구이다. 이 플랫 아이론의
열이 머리카락을 더 손상시킬지도 모르지만 지난 몇 년 전부터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플랫 아이론은 미용실 원장님이 쓰던 것을 받아온 것이다. 원장님이
내 머리에 퍼머를 해주었는데 잘못되어 머리카락이 거의 다 타버렸었다. 뜨거운 압축기로 눌러놓은 것처럼
머리카락이 작은 지그재그 모양으로 구부려졌다. 그걸 만지면 바사삭 바스러질 것처럼 건조하고 거칠기가
이를 데 없었다. 머리를 묶지 않고 풀러 놓으면 가발을 쓴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머리를 삭발하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냥 괴상한 머리카락을
달고 그냥저냥 시간이 가서 머리카락이 자라는 대로 조금씩 잘라내며 상태가 나아지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머리카락
때문에 참담함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원장님은 미안한 마음에 다시 퍼머도 해주고(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자기가 쓰던 플랫 아이론과 고데기도 주었다. 그렇게 플랫 아이론은 머리카락을 일시적으로 진정시켜주는 도구로 나와 친해졌다.
얼마 전, 머리를 감고 다 마르도록 그냥 놔두었다. 하던 일이 마무리 되어 머리를 마저 정리하기 위해 플랫 아이론이 있는 화장실로 갔다. 플랫 아이론의 플러그를 찾아 콘센트에 꽂았다. 어라! 전원이 들어온 걸 표시하는 빨간 불이 켜지지가 않았다. 그 전날까지
멀쩡했기에 별 생각 없이 플러그를 뽑았다가 다시 꽂았다. 불은 여전히 켜지지 않았다. 그 쬐그만 등이 고장 났나 싶었다. 아이론이 뜨거워지기만 하면 등이
고장 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기다리다가 아이론에 손을 대보았는데 차가웠다.
그렇다면 화장실 콘센트 전체의 전원이 꺼져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인지 같은 벽면에 있는 콘센트의 전원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장치들이 되어 있다. 안방 화장실은 아이들이 주로 쓰는 화장실 콘센트에서 전원을 켜고 끌 수 있다.
가서 확인을 해 보니 전원은 들어와 있었다. 기대를 살짝 하며 다시 돌아와 플러그를 꽂아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갑자기 아쉬운 마음이 확 들었다. 손에
익은 아이론을 더 이상 쓸 수 없어 아쉽기도 했고, 그 아이론에 묻어 있는 기억의 조각들도 더 멀어져
가는구나 싶었다.
그 엉망이었던 퍼머를 하게 된 까닭은 40대 중반을
넘어 도전하게 된 지역 전문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머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간편한 스타일로 바꾸려는
마음에서였다. 영어 실력을 넓히고 미국식 사회복지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한 학기가 지나 그만 두었다. 더 공부할 마음이 있었으면 주변 상황이나
조건을 따지기 보다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 학기가 지나 재정적인 문제에 부닥치자
나는 곧 학교를 미련 없이 그만 두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엄청 흥미로운 일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얄팍하나마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과 가치관과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나름
진지했던 도전과 재빠른 포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플랫 아이론을 이제는 보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아, 잠깐! 잠깐만! 이 플러그가
아니잖아!’
화장실 서랍 속에는 헤어 드라이어와 플랫 아이론이 같이 들어 있다. 헤어 드라이어의 플러그를 꽂아 넣고는 플랫 아이론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오해한 것이었다.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플랫 아이론과 연결된 플러그를 꽂자 빨간 전원등이 수줍게 켜졌다. 얻어서
쓰던 조그마한 미용 도구의 수명이 다 했다고 여기며 지난 몇 년 전 일들을 떠올려 정리하고 있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전기가 공급된 플랫 아이론은 뜨거워졌고 거울을 보며 삐친 머리카락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도전한 것은 제대로 된 플러그를 사용했던
걸까?’
‘지금은 어떤 플러그를 쓰고 있는 거지? 인내의 플러그? 건강한 신앙 공동체에 대한 소망의 플러그?’
‘한 동안 감사의 플러그가 빠져 있었던 것 같아. 그건 하나님을 신뢰하는 플러그도 함께 서랍 속에 갇혀 있었다는 거겠지?’
머릿속에 날아다니는 어쭙잖은 생각들도 아직까지 잘 작동하는 플랫 아이론이 닿을 때마다 가지런하고
예쁘게 정리되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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