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2023

갓, 너 살아 있었구나!




나에게 갓씨가 조금 있다. 이 씨앗은 이웃집 여인이 나눠준 것이다. 여인은 씨앗에 담긴 그의 어머니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한국에서 오신 여인의 친정어머니는 그의 텃밭에 갓을 심으셨단다. 어머니는 갓을 솜씨 좋게 키우셨고 씨까지 받으셨다. 이 갓씨를 어머니는 딸에게 남겨주시고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여인은 나에게 한번 심어보라며 솜털이 부숭부숭 붙어 있는 씨앗을 건네주었다. 

이듬해 봄, 나는 상추씨를 뿌리면서 그 옆에 갓씨도 뿌렸다. 나는 무슨 일인지 갓씨를 쑥갓씨라고 찰떡같이 믿고 뿌렸다. 쑥갓은 상추와 잘 어울리는 쌈 채소이고 생선 찌개 비린내도 잡아주는 향기 좋고 부드러운 채소다. 그뿐 아니라 쑥갓을 살짝 데쳐서 된장에 무쳐도 정말 맛있다. 기억 속에 있는 온갖 좋은 쑥갓 맛을 상상하며 즐겁게 씨를 뿌렸다. 

그런데 잘 자라는 상추와는 달리 시간이 한참 지나도 쑥갓씨를 뿌린 쪽에서는 싹이 보이질 않았다. 결국, 그해 봄에 나는 쑥갓을 만나지 못했다. 내가 어설픈 일꾼이라 씨앗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을 수도 있고 씨앗의 생명이 한 해뿐인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했다.

어느 날 여인은 나를 초대하여 향과 맛을 첨가한 그만의 커피와 수제 치즈케이크를 내놓았다. 우리는 점잖게 수다를 떨었다. 수다 속에 싹 트지 않은 쑥갓씨 이야기도 걸려 나왔다.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내 맘대로 갓씨를 쑥갓씨로 착각했다는 것을. 그래도 그렇지, 씨가 발아조차 안 된 것은 의문으로 남았다.

여인의 어머니 이야기는 기억하면서 쑥갓 먹을 생각에 씨앗의 이름을 바꾸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 앞으로는 나의 식욕이 기억을 조작하는 일이 없길 바라면서 씨앗 봉투에 '갓'이라고 분명하게 적어 놓았다. 그해 봄에 뿌리고 남은 갓 씨는 나의 씨앗 서랍에서 그렇게 2년쯤 잠들어 있었다. 

올해 9월 초순, 여름내 깻잎을 내어주던 들깨를 뽑아내고 흙에 퇴비를 넉넉히 섞은 다음 갓씨를 뿌렸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갓씨를 뿌려보았다. 봄에는 갓 키우기에 실패했지만, 가을에는 성공할지 궁금했다. 혹시, 아주 혹시라도 갓이 자라준다면 갓김치 담그기를 시도해보리라.

나는 놀이터에서 물놀이하듯 텃밭 여기저기에 물을 주었다. 나는 체력 단련장에서 운동하듯 잡초를 뽑으며 허리를 구푸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배움터에서 지식과 깨달음을 얻듯 식물이 좋아하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인터넷을 기웃거렸다.

씨를 뿌린 지 보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갓이 드디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갓, 너 살아 있었구나! 갓의 어린 잎은 여리여리 보라색이었다가 자라면서 자주색으로 짙어졌다. 잎사귀도 시원스럽게 넓어졌다. 어찌나 싱싱해 보이던지 쌈을 싸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파리를 몇 개 뜯었다. 줄기에 잔가시가 있어 손에 거슬리기는 했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텃밭에서 막 가져온 자색 갓은 아삭하고 톡 쏘는 매콤한 맛이 났다. 아주 신선하고 매력이 넘쳤다. 겨잣과에 속하는 식물이라서 겨자채와 비슷한 맛이 났다. 남편과 나는 별 반찬이 없어 밥상이 심심한 날에는 갓을 몇 장 뜯어 왔다. 거기다 쌈장과 밥을 얹어 입안 가득 물고는 '음~, 음~' 감탄사를 날렸다. 떡볶이에도 파와 함께 갓을 잘라 넣었더니 나름 잘 어울렸다. 우리는 갓이 온전히 자랄 틈을 주지 않고 뜯어다 먹었다. 갓김치는 담그기는 이다음으로 미뤄두었다.

나는 예쁘게 생긴 갓잎을 몇 장 거두어 갓씨를 나눠준 이웃집 여인에게 주었다. 당신이 나에게 준 씨에서 나온 갓이라고 알려주었다. 건강한 음식을 좋아하는 그는 오늘 저녁은 고기를 구워야겠다며 좋아했다. 

씨앗은 그 작은 공간에 생명을 담고 있다가 적당한 환경에서 생명을 이어간다. 씨앗은 사람에 대한 편견도 없다. 여인의 어머니 손에서도 잘 자랐고 내 손에서도 자라주었다. 씨앗은 억지로 뭔가를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다. 씨앗은 천천히 느긋하게 기다리는 기쁨을 선사한다. 씨앗에서 다시 씨앗을 얻기까지 긴 호흡을 요구한다. 이제 갓씨가 아주 조금 남았다. 갓들아, 그저 살아서 씨를 좀 남겨주겠니?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11/18/2023

한 걸음 더 가까이




열이틀 동안 미국 동부에 사는 지인들을 만나러 다니는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해와 달리 삶의 자리가 바뀐 지인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우리 가족에게 그들이 어떤 말을 들려줄지 듣고 싶기도 하여 떠난 여행이었다. 그리고 아직 단풍이 남아 있다면 가을 끝자락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은 마음도 여행길에 나서도록 부추겼다.

블루리지를 지나 뉴욕으로 올라가는 81번 고속도로는 언제 봐도 푸근하다. 길고 긴 애팔래치아 산맥은 산자락에 보금자리를 가진 사람들뿐 아니라 길 위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오래도록 품어준다. 산맥 주변에 이미 단풍이 다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모여 있는 걸 보면 곧 겨울이 다가오고 연말이 멀지 않다는 생각에 달콤하고 흥겨웠다. 채도가 낮은 노란색과 붉은색 이파리들과 상록수의 초록색이 어우러진 나무 군락을 지나칠 때는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아직 단풍잎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 고마웠다. 

미국은 지역마다 식물원이 있어 각 지역에서 잘 자라는 식물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나는 식물과 관련한 특별한 지식이나 경험은 적은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꽃 구경이 즐겁다. 여행지에 있는 식물원을 일부러 찾아서 방문하기도 하는데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편안해진다. 이번에도 식물원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시들어가는 가을꽃들도 예쁘고 친환경적인 식물원을 견학하는 아이들 꽃도 예뻤다.

나의 지인들은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 몸이 연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이민자 등등. 어떤 이는 푸드 뱅크에 가서 봉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식료품을 포장해 직접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대도시에 사는 한인 젊은이들과 밥 한 끼를 나누며 영성 있는 삶의 행복을 나누려 애쓰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음악학교를 개설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악기를 가르치며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목사가 없는 교인들을 위해 몇 주에 한 번씩 함께 예배를 드린다. 한 지인 가정에서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장기기증을 독려하고 여러 시각 장애인에게 각막 이식을 돕는 이도 만났다.

어느 지인은 오래도록 걸어온 목회의 기존 방식을 벗어나 교회가 아닌 영성센터를 꿈꾼다. 제도로 규정한 교회의 전통과 규율이 아닌 영성 훈련과 삶의 실천을 통해 자유로운 신앙생활로 나아가려는 창조적 몸부림이다. 다만 한국에서 시도해보겠다고 하니 쉽게 가보지 못할 것 같아 살짝 아쉬운 마음이 스쳤다. 

지인들에게서 신앙 실천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그들은 백수가 된 우리 가족에게 한결같이 정성이 듬뿍 담긴 음식과 깨끗한 잠자리를 제공하며 격려해주었다. 포옹을 좋아하는 아들 산이와의 포옹 인사도 잊지 않는 그들의 섬세한 보살핌은 정말 감동이다.

버지니아, 뉴욕, 로드아일랜드까지 올라 갔가다 되돌아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거쳐 애틀랜타에 이르렀다. 흐릿한 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언젠가 들렀던 순대국밥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적해 보이는 식당을 들어서니 손님들이 가득하고 먹을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자들까지 있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식당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새로운 손님들은 계속 대기자 줄을 이어갔다.

나는 궂은 날씨에 어울리는 뜨끈한 국밥을 먹으려는 우리 같은 사람이 참 많구나, 생각했다. 국에 담긴 순대나 얄팍한 고기에 양념이 잘 밴 배추겉절이를 척 걸쳐 먹으니 입에 착착 감긴다. 긴 여행으로 목이 아프고 기침이 나오는 바람에 입맛이 떨어졌는데도 음식이 잘도 들어간다. 

그러다 문득 집에서 세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서 토요일 오후에 한가로이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것은 주말이 주일예배를 향해 있는 우리 가족에게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역시 새로운 일을 위한 변화의 시간을 지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친구는 말로만 영적이고 몸으로 살아내지 않는다면 그건 꽝이다!, 라고 강조했다. 세상 안에서, 폴 틸리히의 개념을 빌려 표현한 '거룩한 타율'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10/21/2023

바람이 분다




영화 '더 이퀄라이저 3(The Equalizer 3)'가 최근에 개봉되었다. 그 이전 시리즈에서 보았던 주인공 로버트 맥콜 역을 맡은 덴젤 워싱턴의 차가운 듯 따듯한 연기와 액션 영화라는 장르는 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이탈리아 시골 농장의 평화로움과 거기서 습격당한 부하들이 죽어 널브러진 사이를 걸어가는 보스의 긴장감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짧은 대화가 있다. 영화 초반에 총상 입은 맥콜을 낯선 의사가 정성껏 수술해준다. 수술을 마친 의사는 맥콜에게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나쁜 사람인가?, 질문한다. 맥콜은 “모르겠다”, 고 대답한다. 

맥콜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자 이번엔 맥콜이 의사에게 나 어떤 사람 같아요?, 묻는다. 총에 맞은 사람을 보고 구급차도, 경찰도 안 부르고 상처에서 회복하도록 긴 시간을 들여 돌봐준 이유를 의사에게서 듣고 싶었나 보다. 더군다나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맥콜 자신도 모르겠다는 의아한 대답을 받고서도 말이다. 

의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대답은 좋은 사람만 할 수 있어요.” 선과 악, 예와 아니오를 명확하게 나누어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은 지점에서 이 영화는 나에게도 어떻게 대답할지 묻는다. 

맥콜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당하는 불의한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 맥콜에게는 모든 이웃을 도울만한 능력도 없다. 생선가게 아저씨가 마피아에게 두들겨 맞고 아저씨네 집에 누군가 불을 질러도 맥콜은 지켜볼 뿐이다. 맥콜은 자신의 체력을 키우면서 미국 정보기관에 마피아에 대한 정보를 흘려 도움을 받는 정도다. 

맥콜이 머무는 동네는 이탈리아 작은 어촌이고 마을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고, 소박하고, 우애가 깊다. 그들은 미국인 맥콜을 기꺼이 동네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맥콜은 마피아가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아무렇지 않게 악을 행하자 그제야 이퀄라이저로서 악당들을 척결하기 시작한다. 

자연 속에 음과 양은 언제나 존재한다. 음양은 한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점점 극단으로 치닫기도 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다시 균형을 잡아간다. 맥콜은 물론이고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의 삶에서도 이런 균형을 찾아볼 수 있다. 계절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무더운 여름이 길게 느껴지는 몽고메리 날씨지만 한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서늘한 기온은 여름에 흘린 땀을 씻어주고 성실한 수고의 결실을 가져온다. 

아침이면 비슷한 시간에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동쪽을 향하여 도로를 달린다. 가을이 오면 그 시간대에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장관을 자주 목격한다. 오염이 적은 하늘이라 그런지 이곳이 정말 태양하고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태양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보인다. 몽실몽실한 구름이 낀 날에 맞이하는 일출도 얼마나 당찬지 모른다. 태양은 구름 테두리를 맑게 빛나는 금빛으로 장식한 구름옷으로 차려입고 위엄 있게 등장한다. 또 온 세상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은 언제 봐도 벅차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이 설레는 것은 변화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다만 올가을에는 일상에 큰 변화가 있고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잘 몰라 약간의 두려움이 있다. 기대와 두려움으로 두 눈을 꼬옥 감는다.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평화로운 바람이 흘러나온다. 그 신선한 바람은 나를 감싸 안고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도록 밀어준다. 

영화 속 맥콜처럼 나 역시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하나님의 큰 계획 가운데 내 삶이 들어 있다는 것만은 안다. 불현듯 가수 조용필이 부른 '바람의 노래'가 입속에서 맴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 스쳐 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 나는 이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9/20/2023

아빠가 부쉈어!




순이는 사우나를 하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순이가 사는 메이플릿지 공동체를 천천히 걸어서 돌아보던 중 사우나집은 흥미로운 곳 가운데 하나였다. 숲속에 아담한 호수가 있고 그 가장자리에 나무로 지어놓은 집이 바로 그곳이다. 사우나는 좋으나 준비물을 챙기는 것과 사우나 이후에 머리를 말리고 단장하는 과정이 번잡스럽지 않을까 싶어 순이의 물음에 대답하는데 뜸이 들었다.

새로운 일을 시도할 때 주저하는 나와는 달리 단호하고 적극적으로 보이는 순이의 기운은 이미 나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입을만한 반바지를 내어주고 빠르게 수건을 챙겨 길을 잡았다. 숲길을 자박자박 걸어가 호수를 다시 만났다. 호수 한쪽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모래밭이 보였다. 한낮에는 어린아이들이 수영을 배우고 있었는데 모래밭까지 있어서 물놀이할 맛이 나겠구나 싶었다.

자그마한 사우나실에는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사우나실의 냄새였다. 나무 향과 수증기가 섞인 건강한 냄새라고나 할까. 열기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계단식 자리의 맨 윗자리에 앉았다. 머리맡에 길게 연결된 줄을 당기면 달구어진 기계에 물이 쏟아져 뜨거운 수증기를 만든다. 줄을 몇 번 잡아당겨 온몸이 땀에 젖자 순이는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와우! 호수에 몸을 담가 땀을 씻어냈다. 냉온욕이 따로 없다. 마침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한여름에 온몸으로 맛보는 달콤한 시원함이었다. 차분하게 내리는 빗소리뿐인 숲속 호수에 몸을 담그고 수다를 떨다니, 이런 경험은 살면서 쉽게 할 수 없을 듯하다. 이렇게 사우나실과 호수를 서너 번 오가며 열기와 냉기를 즐겼다.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 손님의 피로를 풀어주려는 순이의 선택은 탁월했다.

메이플릿지에서 경험한 열기와 냉기의 반복은 사실 일상에도 이어진다. 비가 좀 많이 오면 내가 다니는 교회 건물 입구에 물이 흥건하게 고인다. 그 물웅덩이는 개구쟁이 아이들에게는 첨벙댈 수 있는 놀이터이기도 하지만 발을 적시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피해가야 하는 곳이다. 왜 물이 안 빠지나 알아봤더니 입구 옆에 심어놓은 나무가 오랜 시간 자라면서 뿌리가 올라와 물길을 막고 있었다. 그 매그놀리아 나무는 모두 네 그루로 키가 크고 잎이 많아 현관을 어둡게도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난해에 그것들을 다 잘라내었고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요즘 교회 주변을 단장하느라 백호(Backhoe) 같은 중장비가 교회 마당에 와 있다. 언젠가 그 기계를 운전하는 법을 살짝 배운 남편은 이 기회에 쓸모없는 그루터기를 제거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공적인 일에는 부지런히 열심을 내어 달려드는 편이다. 섬세함이 부족할 때도 있으나 마음을 다해 일을 이루어 간다. 워낙 덩치가 큰 기계를 건물 가까이에서 움직여야 하는 작업이라 마음이 쓰였지만, 남편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 나무뿌리를 캐내고 저녁때 들어온 남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남편이 하는 일을 지켜보았던 아들 산이는 나에게 뭔가를 알려주었다.

“아빠가 부쉈어! 나무뿌리로 팍 쳤어. 벽돌이 떨어졌어.”

이게 뭔 말인가 싶어 남편을 찾았다. 그는 산이의 고자질을 다 듣고 있었는지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설명을 덧붙였다. 굴착기로 나무뿌리를 캐내는데 끝도 없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뿌리를 어느 정도 정리한 다음, 백호 한쪽에 달린 버킷으로 파헤친 땅을 다지고 끌어당기다가 깊숙이 뻗은 뿌리에 걸려 현관 앞 회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쳤단다. 기둥을 감싸고 있는 벽돌이 일부 부서지고 말았다.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데 남편은 속상했나 보다. 내심 걱정스러웠다는 나의 지나가는 말에도 그의 마음이 풀어지기는커녕 더 차가워진 걸 보면 말이다. 

남편이 작업한 곳에 물길을 내야 하는 일이 남았다. 누군가 수고하면 여러 사람이 산뜻하게 그 길을 지나다닐 수 있다. 타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열정을 쏟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일이 해결되지 않는 차갑고 시린 시간을 경험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모든 일을 멈추고 잠잠히 물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시간도 필요하다. 이 모든 시간이 쌓여 의미 있는 삶이 되고 미래가 된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8/21/2023

커피 한잔해요


몽고메리 아트 뮤지엄(MMFA)에서.


애틀랜타에 가까워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애틀랜타 국제공항을 지나서부터 북쪽으로 향하는 85번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네비게이션이 계산한 도착 시각보다 몇 분이라도 줄여 보려고 했는데 도로 사정이 맘 같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사람들은 모두 애틀랜타에 산다. 그들은 일요일 저녁 시간에 모이기로 했고 몽고메리에 사는 우리 가족은 할 일을 다 마치고 가면 저녁을 같이 먹기는 어려웠다.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과 만남을 기대했다. 그 관심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얘기를 나눌 생각에 애틀랜타로 올라가는 내내 기뻤다.

늘 다니던 길을 포기하고 네비게이션이 찾아주는 빠른 길을 따라 갔어도 3시간이 훨씬 넘게 소요되었다. 한인이 많이 사는 도시 큰 길가에서 벗어나자 나무가 울창한 길들이 이어졌고 그 길가에 아담한 교회가 나타났다. 건물 중간쯤에 있는 문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제법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받쳐 들고 문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문이 열리자 적막하고 처량한 바깥과는 달리 다정하고 흔쾌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한국에서부터 알던 사람들도 보이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지인이 나서서 큰 소리로 우리를 환영했다. 낯선 곳에서 어색할 뻔했는데 그의 기운찬 목소리가 환한 미소를 불러왔다. 그가 만들어준 웃는 얼굴로 거기에 모인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오붓한 한쪽으로 옮겨가는 중이었다. 그 교회에서 일하시는 부부가 우리 가족을 위해 다시 한번 밥상을 차려주셨다. 온갖 곡물과 열매를 넣은 쫀득한 밥, 소고기를 넣고 푹 끓인 미역국, 오랜만에 먹는 삼치구이, 채소 샐러드와 적당히 익은 배추김치. 처음 만난 그 부부는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말없이 주위에 계셨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린 박자로 흘러가는 정겨운 옛날 노래 같아 보였다.

사실 우리는 그 모임에서 나눈 얘기가 거의 없다.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 이름을 소개하고 얼마 동안 노래를 불렀다. 모인 사람 중에서 작사, 작곡한 '다 쓰며 살게 하소서 다 쓰고 가게 하소서'와 다 알만한 노래들은 합창했다. 그리고 대학가요제 출신인 분은 맑고 고운 목소리로 정성스레 노래를 불러주셨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듣고 싶을 정도다. 노래 제목도 불어볼 겸. 한 젊은이의 비올라 연주를 들으면서는 비올라를 배워놓았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몰두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밥 먹고 노래만 부르다 헤어져서 조금 아쉬웠다. 언제 다시 만날는지 알 수도 없어 허전했다. 하지만 처음 만난 타인을 기꺼이 식탁에 초대하고 서로를 이웃으로 맞이하는 이런 행위는 여운이 길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며칠 뒤,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교회에서 새벽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기도 시간이 얼마큼 지났을 즈음, 기도 마치고 우리 모두 커피 한잔해요, 팔십 세가 가까우신 분이 제안하셨다. 난 소리를 빼고 입으로만 네, 하며 웃었다. 

기도하던 사람 중에는 몽고메리에 정착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새벽에만 우리 교회에 나왔으므로 다른 분들과 사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놀랍고 기뻐서 다시 기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기도를 마치고 우리는 교회 근처에 있는 맥도널드에 갔다. 커피와 아침 메뉴를 가지고 가게 앞 테라스에 둘러앉았다. 밤새 내려앉은 기운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푸석한 아침과 정신 나게 하는 커피는 여전히 잘 어울렸다. 어르신들 뒤로 구름 많은 몽고메리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속에 어르신들을 담아 사진을 찍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그들에게 마음을 나눌만한 사람들이 곁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재물, 학력, 외모, 출신지만으로 사람을 짐작하는 것은 어리석다. 눈을 바라보고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나눠보면 세상의 잣대로 헤아릴 수 없는 인생을 만난다. 그곳도 환대가 이루어지는 자리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7/25/2023

나 혼자 살고 싶어




몸을 뒤척이다가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아이고, 눈물부터 난다. 요 며칠 아들 산이가 툭툭 내놓는 말들이 마음에 쌓이더니 어디론가 쏟아내야 했나 보다. 다시 눈을 감고 도대체 왜 눈물이 나는지 묻고 또 묻는다. 

지난 6월 말, 우리 가족은 뉴욕주에 있는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4박 5일 동안 방문했다. 20여 년 전 책 「브루더호프의 아이들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에서 그 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브루더호프에서 16년 전부터 사는 박성훈 님이 지난해 발간한 「이상한 나라 하나님 나라」를 읽고 공동체를 경험하고 싶은 구체적인 소망이 생겼다. 박성훈 님과 최순옥 님(이하 박 Park 가족)이 먼저 우리 집을 다녀갔고 이번엔 우리가 그들을 만나러 달려갔다.

브루더호프에서 지낸 며칠은 자유롭고 평화스럽고 꿈같았다. 그들은 우리 같은 손님이 그들의 일상인양 자연스럽게 대하였고 우리에게도 어떤 부담이나 꾸밈이 필요치 않았다. 소박한 생활, 각자 역할에 따른 일과 쉼, 그리고 전체 모임은 강물같이 유유히 흘러갔다. 

그들은 일을 가르쳐 줄 때도, 자신을 소개할 때도, 우리에게 질문할 때도, 집 앞을 오가다 만날 때도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또한, 전체가 모일 때마다 부르는 노래의 화음은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공동체가 위치한 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멀지 않은 곳에 허드슨강이 흘러 포근하면서도 멋스럽다.

브루더호프는 자급자족하기 위한 몇 가지 비즈니스를 하는데 그중 하나가 어린이 가구를 만드는 커뮤니티플레이띵스(Community Play Things)다. 나도 그 일을 경험하기 위해 거기에 갔다가 산이가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공중에 매달린 도구를 끌어다가 나사를 조이는 듯했다. 그런 일을 해 본 적 없는 녀석의 뒷모습에서 왜 그렇게 진지함이 뿜어져 나오던지 내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산이는 맡겨진 일이 할 만했는지 틈만 나면 일하고 싶다, 고 반복해 말했다. 산이가 그 일에 대해 엄청 적극적이어서 흥미로운 한편, 우리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런 일자리는 없을 테니 산이에게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삶터로 돌아와 예상치 못한 산이의 변화 때문에 마음이 먹먹하다. 산이가 혼자 살고 싶단다. 박 가족이 있는 데서 일하고 싶고 동생 윤이처럼 자기도 혼자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산이가 전에도 이런 말들을 자주 한 적이 있었다. 동생이 대학 가서 따로 떨어져 살게 되자 자기도 윤이처럼 대학 가고 싶고,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고 했었다. 동생이 그리워서 그러려니 정도로 이해했다. 그래서 엄마 아빠랑 떨어져 살 수 있어?, 밥이랑 빨래랑 혼자 할 수 있어?, 라고 되물으면 산이는 아니!, 하고는 자기 말을 거두어들이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산이의 태도가 바뀌었다. 엄마 아빠 없이도 살 수 있단다. 산이가 좋아하는 레고 조립하듯이 잠깐 일한 것이 재미있었다고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가, 그의 속마음이 의심스러워 나는 거듭 확인을 했다. 박 가족이 사는 곳은 몽고메리에서 아주 멀어서 자주 만날 수 없다고, 밥 보다 빵하고 채소만 먹어도 좋으냐고 물었다. 산이는 다 괜찮다고 대답한다. 산이는 그동안 잘 먹지 않던 오이나 부추, 치즈 따위를 주어도 아무 불평 없이 다 먹는다. 비빔밥을 먹게 되자 채소를 먹어야 한다며 더 넣어달라고 주문한다. 

브루더호프에 박 가족이 없을 때가 있다고 해도 산이의 대답이 바뀌질 않는다. 부모 곁을 떠나도 함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느낀 걸까. 장애가 있는 사람을 위한 그들의 배려를 엿보았나. 산이가 브루더호프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저러는지 그의 성장이 놀랍고, 지금 당장 들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안쓰럽다.

우리 부부가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품고 산 세월이 꼭 산이 나이만큼이다. 서른 살이 된 산이에게 혼자 살고 싶은 의지가 생긴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산이와 우리 가족을 위해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 묻고 있다. 그 계획을 조금만 보여주시길 말이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6/23/2023

그들의 짐은 가벼웠다




나보다 나이가 꽤 많은 Y는 평소와 다르게 큰 가방을 두 개나 들고 모임에 나타났다. 

“웬 배낭이에요?”

“여기서 자려고요.”

그의 대답이 친근하게 느껴지면서도 엉뚱하게 들려 그 가방을 매개로 한 인사는 거기서 끝났다. 

한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다가 지난주에 G가 소개한 유튜브 '미니멀유목민'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몇몇 친구는 그 유튜버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최근 영상을 모두 시청했다며 인상에 남은 정보를 주고받았다. 제목처럼 미니멀 라이프를 사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는 말에 그제야 그의 영상을 봐야겠다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때 G는 Y에게 어서 그 가방을 보여 달라고 재촉했다. Y가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사용했던 배낭과 그 안에 담긴 물품을 모임에서 소개하기로 했나 보다. 인사치레였던 Y의 가방에 관한 관심이 확 되살아났다.

나는 걷는 걸 좋아하지만 얼마큼 멀리 걸을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최근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10㎞는 그럭저럭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정도의 걷기 능력으로 800㎞를 걸어야 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안일하고 막연한가? 나이 60대에 들어 그 먼 길을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들여 두 번이나 다녀온 Y가 참 대단해 보인다. 그런 Y의 배낭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무척 궁금했다. 배낭의 총 무게는 3.6㎏. Y는 자신에게 적절한 가방 무게를 그렇게 정했단다. 물건이 필요할 때 찾기 쉽도록 주머니가 많은 배낭이다. 걷는 동안 꼭 필요한 것들을 여러 날 생각하여 줄이고 또 줄여서 정하였고, 부피가 작고 가벼운 것이 선택되었음은 물론이다.

Y는 순례 여정에서 중요한 소지품은 몸에 꼭 지녀야 하고, 숙소에서는 나라마다 다른 잠자는 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걷는 동안 발에 물집이 생기지 않게 하는 그만의 방법도 알려주었다. Y는 순례길에 가지고 갔던 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졌으며 길 나서기를 주저하는 우리에게 “떠나보세요”, 용기도 주었다. Y는 동네 친구들 가운데 먼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이로써 그의 경험을 나눠주었는데 이것이 어떤 열매를 맺을 것만 같은 기대가 생긴다.

모임이 끝나고 나는 유튜브에서 미니멀유목민의 산티아고 순례길 영상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헉! 그 유튜브의 주인 박 작가는 빈손과 맨발로(물론 신발은 신었다)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객을 인솔한 것을 포함하여 6차례나 그 길로 다녀본 경험이 있다지만 대단한 실험정신이었다. 박 작가는 유튜버가 필요한 노트북을 포함하여 39가지 물품을 재킷 주머니에 나누어 담았다. 주머니를 아주 많게 디자인한 기능성 오리털 파카로 보였다.

나는 박 작가의 순례길을 열한 번째 에피소드까지 단숨에 따라갔다. 박 작가는 여행 작가이면서 미니멀리스트로 자신을 소개한다. 그가 가진 전 재산은 가방 한 개와 소지품 80개란다. 그중에서도 쓰지 않거나 필요가 없어진 물건은 그때그때 팔아서 없앴다. 그것만 가지고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기 삶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자연 친화적인 생활, 꼭 필요한 지출, 건강 관리 등 자기 관리에 철저해 보였다. 미니멀 라이프가 주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인가 보다. 

  Y의 배낭과 박 작가의 빈손 순례를 만난 그다음 날은 이웃 S가 이삿짐 싸는 걸 도왔다. S는 다른 도시로 이사하면서 짐을 줄이기 위해 자신에게 필요가 덜한 물건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S는 주방용품을 상자에 담던 사람들에게 따로 밀어놓은 주방 도구 서너 개는 남겨두도록 부탁했다. 일손을 거들던 사람들이 떠나고 S는 무거운 질병이 있는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줄 팥죽을 쑤었다.

이번 한 주간은 여러 사람이 짐 싸는 걸 간접 혹은 직접 경험했다. 자신의 간절함을 신에게 전하기 위해, 자연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그들의 짐은 모두 가벼웠다. 이전과 다르게 살려면 짐이 가벼워져야 할 테지. 내일 필요할지 몰라 쌓아놓은 나의 온갖 물건들은 어떻하나.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5/28/2023

예감




식물에게 물 주려고 그 집에 들렀다. 부부가 사는 그 집에는 일 년 전부터 키우는 식물이 한 그루 있다. 그 아내에게 부탁을 받고 물 주러 간 첫날, 집주인이 잘 보살폈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커다란 잎사귀는 연둣빛이 선명하고 길게 자라 늘어진 줄기는 튼실했다.

그들이 집을 비운 지 두어 달이 지났다. 그 남편이 매우 아파서 치료하러 다른 도시로 갔기 때문이다. 그는 병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중이고 그의 아내는 남편을 가엾이 여기며 정성을 다해 간호 중이다. 아내는 자기가 키우던 식물도 내내 살아있길 바랐다. 아내는 식물에게 일주일에 한 번쯤은 물을 주어야 한다며 나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 부부가 건강하게 몽고메리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물을 화분에 골고루 뿌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블라운트 문화 공원에 있는 자동차 도로로 가면 시간은 비슷하게 걸려도 가로질러 가는 느낌이고 탁 트인 공원을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어 그 길을 선택했다. 사실 얼마 전에 알게 된 셰익스피어 정원에 다시 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그런데 자동차가 먼저 가닿은 곳은 몽고메리 미술관 옆에 있는 조각 정원이었다. 여길 오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이쪽으로 들어서 버렸다. 

조각 정원은 어떻게 꾸며 놓았을까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내친김에 둘러보았다. 미국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과 곳곳에 있는 조형물들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도 15분 정도면 충분한 아담한 정원이다. 햇빛에 고스란히 노출된 정원은 한적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이었다. 나는 마음에 둔 다른 정원으로 얼른 가고파서 서둘러 나왔다. 그곳 조형물 가운데 4점은 그곳에 늘 있는 작품이고 나머지 5점은 현재 전시하다가 바뀔 작품이라는 것을 나중에 웹사이트에서 알게 되었다. 아주 가끔 온라인으로 확인해서 작품이 바뀌면 다시 들려볼 만하겠다.

원래 가려고 했던 셰익스피어 정원은 다른 날도 얼마든지 가볼 수 있으련만 첫인상이 이국적이어서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동네 친구들의 제안으로 이 정원에서 그들을 만났다. 앨라배마 셰익스피어 페스티벌 극장 옆에 이런 정원이 있는 줄 몰랐다. 운동 삼아 공원에서 걸을 때 극장 앞을 지나가면서도 보지 못했었다. 정원에 처음 들어서는데 마치 비밀의 정원 혹은 비밀의 원형 극장에 온 것 같았다.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친구들이라 정원을 둘러볼 짬 없이 모임만 하고 헤어지는 바람에 그 정원에 미련이 남았다. 무슨 꽃이 피었나 살펴보고 나무 아래 벤치에도 앉아보고 싶었다.

찬찬히 둘러보니 키가 큰 나무들이 줄지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서 더 비밀스러운 공간처럼 보인다. 짚으로 지붕을 인 쉘터는 잘 가꾼 꽃밭이 둘러싸고 있다. 꽃밭에는 허니서클, 메리골드, 노란 나리꽃, 이름 모르는 보라색 작은 꽃, 로즈메리가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다. 나무 그늘을 좋아하는 양치류와 헬레보루스도 눈에 많이 띄었다. 팬데믹 초기, 집 밖을 나가기 두려울 때 유튜브에서 정원 가꾸는 영상을 어찌나 보았던지 새로 알게 된 꽃을 실제 정원에서 발견하고 이름을 기억해내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정원 한쪽 출입구 앞에 있는 화장실마저도 초가지붕을 얹은 시골 부잣집 창고 같았다. 일보러 들어가서 너무 침침하여 어리둥절하다가, 이게 영국식 화장실인가 생각하다가, 너무 의미 부여를 하는 머릿속에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동네 친구들은 이 정원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고 나만 뒤늦게 알게 된 곳이니 호들갑스럽게 얘기할 거리도 아니다. 그렇다 해도 나는 가끔 이 정원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016년 보스턴 여행을 하고 내려오면서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을 관람한 적이 있다. 그 주변 건물들이 역사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에 한참을 걸어서 다녀보았는데, 건물들 사이로 여러 형태의 자그만 정원(공원)들이 참 많아서 흥미로웠다. 몽고메리 셰익스피어 정원이 필라델피아에서 보았던 정원의 분위기와 겹치면서 어디 멀리 여행 온 기분이 들었던 걸까. 

되돌아 나오는데 벤치에 앉아 혼자서 뭔가를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점심시간인가 보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5/08/2023

이상한 나라에서 온 손님




뉴욕주에서 온 손님을 남편은 몽고메리 공항에서 맞이하여 우리집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서며 먼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얼굴을 마주 보기도 전에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기대가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느끼는 반가움과 기대에 조금 더 보태 어서 오세요, 달려가며 답하였다. 남편은 그 부부를 평화 콘퍼런스가 열린 뉴욕에서 만난 적이 있으나 나는 그들과 첫 만남이었다. 그들은 소박하면서도 당차 보였다.

우리 두 부부는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체로 남편은 묻고 그들은 답하고 나는 들었다. 그들은 남편의 질문에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 이야기는 내 주변에서 볼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이었으나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 진솔하게 들렸다. 

그들이 사는 마을은 서로를 돌보는 모습이 다양했다. 식사 준비하는 사람, 옷 만드는 사람, 빨래하고 개어 주기까지 하는 사람이 따로따로 있다는 얘기가 많고 많은 이야깃거리 중에 흥미롭게 남았다. 한편, 그들이 동네 얘기를 하는 동안 이쯤에선 불평이나 험담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나의 지레짐작은 모두 틀렸다. 그럴 것 같은 순간에 그들은 말을 아꼈다. 오히려 내가 못 참고 험담 바가지를 깨트리곤 했다. 그들과 얘기를 나눌수록 내 영혼의 바닥이 드러나는 걸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남편은 그들에게 민권운동의 성지인 몽고메리를 보여주길 원했다. 하루는 아프리카계-미국인 투표권을 얻기 위해 도보 투쟁을 시작한 셀마에 다녀왔다. 손님들은 이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이 몽고메리로 가기 위해 건너야만 했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를 걸어보길 원했다. 그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니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는 몸짓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공권력에 맞서야 했지만 끝내 투표권을 획득한 역사 속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한 것 같았다. 셀마로 가는 길가에 있는 현대 자동차 공장의 겉모습이나마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후에는 로사 파크스 박물관에 갔다. 로사 파크스는 그가 앉은 자리를 백인에게 내주라는 버스 운전사의 요구에 당당하게 저항했고, 그의 용기있는 행동이 미국 민권운동의 시작이었음을 소개했다. 민권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로사 파크스 여사는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에서 첫 목회를 하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만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벌인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그 교회에 들러서는 아쉽게도 교회 겉모습만 사진으로 남겼다. 코비드19 이후로 교회 안을 둘러 보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요한데 그것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또 다른 하루는 레거시 박물관과 국립 평화와 정의를 위한 기념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프리카계-미국인이 겪은 노예의 삶에서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은 린치(Lynch)의 역사에 그들은 내내 마음 아파했다. 미국에 살면서 꼭 알아야 할 역사를 보게 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꼭 몽고메리를 방문하도록 권유해야겠단다. 사회적 약자에게 벌어지는 불의한 일을 안타까워하는 그들의 진심이 무뎌진 내 마음에도 깊숙이 다가왔다.

남편은 2000년 끄트머리에 책「브루더호프의 아이들」을 서점에서 발견했다. 책에 담긴 유익한 교육 철학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출판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다가 쉴터교회에서 운영하는 걸 알았고, 그곳에 예배드리러 가기도 했었다. 

그로부터 20년을 훌쩍 넘긴 지난해, 이번에도 남편이 「이상한 나라 하나님 나라-브루더호프 이야기」책을 찾아내고는 저자 박성훈 님에게 연락했나 보다. 연락한 이유를 나누던 중 「브루더호프의 아이들」은 그가 출판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때는 한국에서 서로를 모른체 만났을 수도 있겠다. 지금은 미국에서 한 가정은 브루더호프 안에, 한 가정은 브루더호프를 바라보며 이루어진 이 만남이 참 재미있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사람들과 3일을 같이 보냈으면 피곤하고 불편할 법도 한데 나는 그냥 여전하다. 이상한 일이다. 말이 아닌 삶으로 들려준 그들의 이야기는 첫인상처럼 소박하고 당찼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1부를 본 것처럼 그다음 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 언젠가는 그들이 사는 이상한 나라를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4/19/2023

다정한 헤어짐




몸 한구석을 수술받은 이웃을 위해 여인들이 모였다. 저마다 비빔밥에 필요한 나물들, 소고기, 달걀부침, 그리고 밥까지 한 가지씩 들고서 말이다. 아, 환하게 웃는 꽃 한 다발도 있었다. 그의 집을 찾아가 아픈 곳은 잘 낫고 있는지 잠깐 살피고 나서 밥 먹고 수다를 떨었다. 그가 몇 시간 만이라도 즐거웠다면 괜찮은 만남이었으리라.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 중 사랑하다가 헤어진 사람들이 그 후에 어떤 관계로 남는가, 라는 주제로 흘러 들어갔다. 대부분은 서로 미워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는 것에 감정이입을 했다. 다른 두어 사람은 감정을 많이 절제한 헤어짐의 실례를 들었다. 헤어져도 가끔 만나서 식사도 하고, 집안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있는 경우에는 양육하는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자주 만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이야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곧 닥칠 내 이웃들과의 헤어짐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 라는 생각이 꼬무락거렸다.

몽고메리에는 2005년부터 현대자동차 공장과 수많은 협력 업체가 있어서 지역 경제를 살리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현대자동차 제2 공장에 대한 소문이 무성할 때, 몽고메리에 두 번째 공장을 지을 가능성과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들이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사람마다 다른 이해가 어지럽게 깔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 기업이 미국에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면 일자리도 늘어나고 한인 인구가 유입되고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도 생겨날 것이다. 몽고메리에서 쌓은 경험을 가지고 공장이 생기는 위치에 따라 몽고메리에서 계속 사느냐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느냐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5월, 현대차그룹에서 조지아주 사바나에 전기자동차 공장을 짓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몽고메리에는 일자리가 많은 편이고, 중산층이 꽤 두껍고, 교육열이 높은 한인은 자녀들을 좀 더 수준 높은 공립학교나 사립학교에 보낼 수도 있다. 큰 도시인 애틀랜타와는 2시간 반 거리에 있어서 한인 마트나 병원을 많이 이용한다. 한인 기업들은 보통 앨라배마주와 조지아주 모두에서 사용 가능한 건강보험을 제공하고 있다. 현지 주민들은 현대자동차가 지역 경제에 이바지한 바가 있어 한인에 대해 우호적인 편이다.

그런데도 한인 이민자들에게 몽고메리는 거쳐 가는 도시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공교육의 질을 걱정하는 부모들은 학군 좋은 곳을 찾아 한두 시간이라도 북쪽으로 이사하거나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도시로 이동하는 얘기가 흥미롭게 돌아다닌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지역이 넓다 해도 먼 거리를 오가야만 하는 불편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한인 기업에서 신분 문제를 해결하거나 직장 경력을 쌓아 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직장을 찾아 다른 주로 옮기기도 한다. 몽고메리에서 지난 3, 40년을 사신 한인들도 계시지만 몽고메리에서 계속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나의 이웃들 가운데 사바나로 이사하기로 한 이들이 몇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사바나 공장에서 자동차 양산을 시작하는 2025년이 되면 더 많은 사람이 삶의 자리를 옮길지도 모르겠다. 또 회사 주재원과 유학생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한국으로 돌아가고, 어떤 이들은 은퇴하면 자녀가 사는 도시로 가거나 한국으로 역이민을 생각하기도 한다. 저마다 가진 삶의 목적이 몽고메리에서 채워지지 않으면 떠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내 삶도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었다. 어느 때는 떠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남겨지기도 했다. 부모와 모국을 떠나는 매몰찬 헤어짐, 이직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헤어짐, 사귀던 이웃과 뜻이 달라 헤어짐. 무슨 이유가 됐건 그럴 때마다 나는 서글프고 쓸쓸했다. 친밀하고 기대가 높은 관계일수록 슬픔이 깊었다. 이 감정은 그것대로 흘러가도록 두고, 몽고메리 지역의 특징을 받아들여 이번에는 다정하게 헤어져 볼 참이다. 

사바나로 떠나는 이웃의 평안을 빌어주며 이웃의 범위가 넓어지는 기회로 받아들이련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언제고 반갑게 만날 수 있는 느슨한 관계도 괜찮겠다. 그리고 이웃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진실하고 즐겁게 살다 보면 새로운 이웃도 사귀겠지.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3/18/2023

나무를 심는 사람들

        




미국 식목일은 4월 마지막 주 금요일이다. 미국 남동부에 있는 앨라배마주는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높아서 그런지 2월 마지막 주가 나무 심는 주간이다. 그즈음부터 지금까지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몽고메리 다운타운을 지나 셀마로 가는 80번 국도로 들어서면 곧 몽고메리 지역 공항이 나온다. 공항 근처에는 M교회가 리트릿센터로 꾸며지길 바라는 빈 땅이 있다. 그곳은 바로 옆에 자리한 한인 기업이 30에이커 땅을 사면서 10에이커는 M교회에 기증한 땅이다. 기증자들은 그들의 땅을 쓸모 있게 만들기 위해 땅을 고르고 철제 울타리를 설치하면서 리트릿센터 부지에도 똑같은 작업을 말없이 진행해왔다. 

게다가 그들은 얼마 전부터 리트릿센터 부지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먼저 감나무 200여 그루를 심었다. 감나무는 관리하기가 수월하고, 농약을 안 쳐도 괜찮고, 몽고메리 기후에서 잘 자라는 수종이란다. 매실, 백도, 자두, 대추, 복숭아, 밤나무도 30그루를 심었는데, 이러한 나무들은 키우기가 까다로워서 개수를 점차 늘릴 계획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M교회의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나무 심을 기회를 주기 위해 단감나무 85그루를 남겨놓았다. M교회의 일원인 나는 이 행사에 슬쩍 끼었다. 꽃샘 추위가 찾아오는 3월에 초여름 같은 날씨라니, 변덕스럽기도 해라! 그늘 없는 땅에서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그날의 하늘은 명랑했다.

기증자들은 친절하게도 나무 심을 구덩이를 적당한 간격으로 파놓았고 구덩이 안에는 거름도 넣어 놓았다. 한 분이 나무 심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묘목에는 뿌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접붙인 흔적이 보였다. 그 접붙인 부분이 땅 위로 조금 올라오게 심어야 하니 구덩이 옆에 있는 흙으로 높낮이를 조절하라고 일러주셨다. 묘목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물을 2갤런 정도 붓고 물이 스며들도록 기다렸다가, 그 위에 다시 흙을 덮고 발에 적당한 힘을 주어 꼭꼭 눌러주면 된다고 하셨다.

감나무는 씨를 심어 키우면 열매가 시원치 않으므로 반드시 접붙여서 키워야 함을 알게 되었다. 접붙일 때 뿌리 쪽 나무를 대목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감나무의 대목으로 열매가 풍성하고 잘 자라는 고욤나무를 많이 쓴단다. 우리가 심은 감나무의 대목은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부디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주기를 바랐다.

나무 심기를 제안하신 분들은 나무 하나하나에 물을 주며 제대로 심었는지를 확인하셨다. 흙을 충분히 덮어주지 않거나 물을 주지 않은 묘목들이 발견되었다. 정성을 다해 심었어도 이런 일이 생겼다. 심는 것보다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는 말씀이 실감 났다. 얼마 동안은 열흘에 한 번 물을 줘야 한다는 말씀에 우리 가족이 한 달에 한 번쯤 물 주기를 담당하면 어떨까, 생각만 하다가 끝내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나무를 심는 일은 꽤 멋있어 보인다. 나무를 심으려고 흙을 만지던 어느 분은 행복하다, 고 고백했단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는 지난 10여 년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고 한다. 나무가, 자연이 주는 위로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이야기였다. 

그뿐 아니라 정겨운 물물교환 이야기도 들었다. 넓은 부지 곳곳에는 검은 더미들이 커다랗게 쌓여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게 다 소똥 거름이었다. 그 거름은 회사 가까이에 사는 지역 주민에게서 얻은 것으로, 그 집에 불필요한 나무들을 잘라준 대가로 받았단다.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내는 모습이 그려져 훈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일나무를 심는 사람은 느긋한 마음의 소유자다. 적어도 2~5년을 기다려야 제대로 된 열매를 얻는다고 하니 나무 심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대단하다.

나는 막대기 같이 가녀린 나무들 사이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사람들이 신선한 공기를 가득 품은 초록 나뭇잎과 열매들 사이를 거닐다가 어느 나무 아래 무심코 놔둔 낡은 의자에 앉아 쉬어 가겠지. 시원한 물 한 잔 건네는 손에게 고마움을 전하겠지. 가지가 휘어지게 열린 열매를 이웃과 나누며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확인하며 기뻐하겠지.

한 분이 160그루를 기증하고, 또 어찌어찌 80그루를 사들여서 과일나무를 연이어 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글은 애틀랜타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2/17/2023

징검다리

 



앨라배마주에 있는 공립학교에서 한국어를 정식 교과과정으로 채택하고 학점을 주도록 하는 제도를 만드는데 이바지한 단체가 있는데, 바로 에이킵(A-KEEP: Alabama-Korea Education and Economic Partnership)이다. 에이킵은 2017년부터 지금까지 공립학교에서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가르치는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에이킵과 다른 일로 관계를 맺었는데 어느 날, 에이킵의 한 대표님은 내가 지난날 한국학교에서 가르친 경험과 책 한 권을 쓴 걸 경력으로 인정하셨는지 한국어 교사를 제안하셨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클럽이라 영어 실력이 어눌해서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대표님은 한국어를 90%, 영어를 10%만 사용하는 것이 한국어 교실 규칙이라며 잘 할 수 있다고 마구 격려해주셨다. 언젠가 이민 1.5세나 2세 한인 학생을 가르치는 한국학교에서 미국 학생 한 명을 같이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영어를 더 잘하면 좋겠다 싶었던 아쉬운 기억이 떠올라 그 규칙을 반신반의하면서도 미국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색다른 경험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대표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몽고메리에 있는 한 매그넛 중학교 방과후 클럽에서 일주일에 한 시간씩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매그넛 학교는 학업의 질을 높이고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생들을 뽑는다. 그리고 클럽은 자신의 관심 분야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니, 이런 기본 정보를 바탕으로 내가 맡은 학생들을 가늠해보자면 한국어를 배우려는 자발적인 의지를 가진 아이들이다. 실제로도 지난 학기에 그들은 수업에 집중했고 대체로 성실하게 출석했다.

지난 가을, 수업을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한국어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 알아야 했다(에이킵은 현재 한국어 표준 교과과정을 만드는 중이다). 설문조사를 통해 그중 몇 명은 초등학교나 여름 캠프에서 한국어를 배운 적이 있었고,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 대부분은 한국 문화와 언어에 관한 관심이었다. 더 나아가 나이가 들어 한국으로 이사하고 싶다, 한국인 친구와 대화하고 싶다, 한국으로 유학 가고 싶다, 는 눈에 띄는 이유도 있었다. 

케이푸드(K-Food)를 못 먹어본 아이들이 많았지만, 한국에 가면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응답이 꽤 있었다. 케이팝(K-Pop)이나 케이드라마(K-Drama)를 듣거나 시청한 아이들은 거의 다였다. 특히 방탄소년단과 블랙 핑크의 노래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적은 것을 보고 아이들이 나보다 최근 유행하는 한국 노래나 드라마에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 가보고 싶은 곳으로 서울(서울 타워, 명동), 제주도, 부산을 언급한 것이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나는 케이팝이나 케이드라마를 시청한 적은 있으나 한국어를 배워본 적이 없는 학생들을 기준으로 삼아 가르치고 있다.

올 봄학기 첫 수업 시간, 몇 년 동안 비닐에 싸여 옷장에 고이 걸려 있던 내 한복을 꺼냈다. 몇 안 되는 남자아이들을 위해서는 아들의 생활한복을 챙겼다. 아이들에게 설날을 소개하기 위한 준비물 중 하나였다. 떡국이나 연날리기는 사진으로 보여주더라도 세배할 때 입는 한복을 직접 입어보면 설날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이들은 '한복'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할 뿐 아니라 모두가 한복을 입어보길 원했고 한복 입은 모습을 서로 사진 찍어주며 즐거워했다. 지난 학기에는 추석 명절이 끼어 있어서 제기차기, 투호, 강강술래 놋다리밟기를 체험하도록 도왔다. 한국 음식을 소개하면서는 떡볶이와 김치를 가져가 직접 맛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이 '매워요'라는 맛 표현을 확실히 익히게 될 줄이야. 

처음에는 수업의 모든 내용을 한국어로만 하다가 클럽은 흥미로워야 할 것 같아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아이들이 한국어 배운 것을 쉽게 잊어도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는 어려움을 잘 알기에 그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아이들이 서툴더라도 한국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면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는 능력에 놀라고 한편으로는 흐뭇하기 그지없다. 


이 중학교에서는 한국어 정규과정이 새학년을 시작하는 올 가을학기에 열릴 수도 있다. 아이들이 정규과정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그들을 위해 징검다리를 놓아주려 한다. 내가 마련한 징검다리를 아이들이 재미있게 딛고 지나가면 좋겠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