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2023

다정한 헤어짐




몸 한구석을 수술받은 이웃을 위해 여인들이 모였다. 저마다 비빔밥에 필요한 나물들, 소고기, 달걀부침, 그리고 밥까지 한 가지씩 들고서 말이다. 아, 환하게 웃는 꽃 한 다발도 있었다. 그의 집을 찾아가 아픈 곳은 잘 낫고 있는지 잠깐 살피고 나서 밥 먹고 수다를 떨었다. 그가 몇 시간 만이라도 즐거웠다면 괜찮은 만남이었으리라.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 중 사랑하다가 헤어진 사람들이 그 후에 어떤 관계로 남는가, 라는 주제로 흘러 들어갔다. 대부분은 서로 미워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는 것에 감정이입을 했다. 다른 두어 사람은 감정을 많이 절제한 헤어짐의 실례를 들었다. 헤어져도 가끔 만나서 식사도 하고, 집안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있는 경우에는 양육하는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자주 만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이야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곧 닥칠 내 이웃들과의 헤어짐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 라는 생각이 꼬무락거렸다.

몽고메리에는 2005년부터 현대자동차 공장과 수많은 협력 업체가 있어서 지역 경제를 살리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현대자동차 제2 공장에 대한 소문이 무성할 때, 몽고메리에 두 번째 공장을 지을 가능성과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들이 얘깃거리가 되었다.

그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사람마다 다른 이해가 어지럽게 깔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 기업이 미국에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면 일자리도 늘어나고 한인 인구가 유입되고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도 생겨날 것이다. 몽고메리에서 쌓은 경험을 가지고 공장이 생기는 위치에 따라 몽고메리에서 계속 사느냐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느냐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5월, 현대차그룹에서 조지아주 사바나에 전기자동차 공장을 짓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몽고메리에는 일자리가 많은 편이고, 중산층이 꽤 두껍고, 교육열이 높은 한인은 자녀들을 좀 더 수준 높은 공립학교나 사립학교에 보낼 수도 있다. 큰 도시인 애틀랜타와는 2시간 반 거리에 있어서 한인 마트나 병원을 많이 이용한다. 한인 기업들은 보통 앨라배마주와 조지아주 모두에서 사용 가능한 건강보험을 제공하고 있다. 현지 주민들은 현대자동차가 지역 경제에 이바지한 바가 있어 한인에 대해 우호적인 편이다.

그런데도 한인 이민자들에게 몽고메리는 거쳐 가는 도시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공교육의 질을 걱정하는 부모들은 학군 좋은 곳을 찾아 한두 시간이라도 북쪽으로 이사하거나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도시로 이동하는 얘기가 흥미롭게 돌아다닌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지역이 넓다 해도 먼 거리를 오가야만 하는 불편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한인 기업에서 신분 문제를 해결하거나 직장 경력을 쌓아 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직장을 찾아 다른 주로 옮기기도 한다. 몽고메리에서 지난 3, 40년을 사신 한인들도 계시지만 몽고메리에서 계속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나의 이웃들 가운데 사바나로 이사하기로 한 이들이 몇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사바나 공장에서 자동차 양산을 시작하는 2025년이 되면 더 많은 사람이 삶의 자리를 옮길지도 모르겠다. 또 회사 주재원과 유학생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한국으로 돌아가고, 어떤 이들은 은퇴하면 자녀가 사는 도시로 가거나 한국으로 역이민을 생각하기도 한다. 저마다 가진 삶의 목적이 몽고메리에서 채워지지 않으면 떠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내 삶도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었다. 어느 때는 떠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남겨지기도 했다. 부모와 모국을 떠나는 매몰찬 헤어짐, 이직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헤어짐, 사귀던 이웃과 뜻이 달라 헤어짐. 무슨 이유가 됐건 그럴 때마다 나는 서글프고 쓸쓸했다. 친밀하고 기대가 높은 관계일수록 슬픔이 깊었다. 이 감정은 그것대로 흘러가도록 두고, 몽고메리 지역의 특징을 받아들여 이번에는 다정하게 헤어져 볼 참이다. 

사바나로 떠나는 이웃의 평안을 빌어주며 이웃의 범위가 넓어지는 기회로 받아들이련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언제고 반갑게 만날 수 있는 느슨한 관계도 괜찮겠다. 그리고 이웃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진실하고 즐겁게 살다 보면 새로운 이웃도 사귀겠지.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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