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메리 아트 뮤지엄(MMFA)에서. |
애틀랜타에 가까워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애틀랜타 국제공항을 지나서부터 북쪽으로 향하는 85번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네비게이션이 계산한 도착 시각보다 몇 분이라도 줄여 보려고 했는데 도로 사정이 맘 같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사람들은 모두 애틀랜타에 산다. 그들은 일요일 저녁 시간에 모이기로 했고 몽고메리에 사는 우리 가족은 할 일을 다 마치고 가면 저녁을 같이 먹기는 어려웠다.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과 만남을 기대했다. 그 관심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얘기를 나눌 생각에 애틀랜타로 올라가는 내내 기뻤다.
늘 다니던 길을 포기하고 네비게이션이 찾아주는 빠른 길을 따라 갔어도 3시간이 훨씬 넘게 소요되었다. 한인이 많이 사는 도시 큰 길가에서 벗어나자 나무가 울창한 길들이 이어졌고 그 길가에 아담한 교회가 나타났다. 건물 중간쯤에 있는 문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제법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받쳐 들고 문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문이 열리자 적막하고 처량한 바깥과는 달리 다정하고 흔쾌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한국에서부터 알던 사람들도 보이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지인이 나서서 큰 소리로 우리를 환영했다. 낯선 곳에서 어색할 뻔했는데 그의 기운찬 목소리가 환한 미소를 불러왔다. 그가 만들어준 웃는 얼굴로 거기에 모인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오붓한 한쪽으로 옮겨가는 중이었다. 그 교회에서 일하시는 부부가 우리 가족을 위해 다시 한번 밥상을 차려주셨다. 온갖 곡물과 열매를 넣은 쫀득한 밥, 소고기를 넣고 푹 끓인 미역국, 오랜만에 먹는 삼치구이, 채소 샐러드와 적당히 익은 배추김치. 처음 만난 그 부부는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말없이 주위에 계셨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린 박자로 흘러가는 정겨운 옛날 노래 같아 보였다.
사실 우리는 그 모임에서 나눈 얘기가 거의 없다.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 이름을 소개하고 얼마 동안 노래를 불렀다. 모인 사람 중에서 작사, 작곡한 '다 쓰며 살게 하소서 다 쓰고 가게 하소서'와 다 알만한 노래들은 합창했다. 그리고 대학가요제 출신인 분은 맑고 고운 목소리로 정성스레 노래를 불러주셨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듣고 싶을 정도다. 노래 제목도 불어볼 겸. 한 젊은이의 비올라 연주를 들으면서는 비올라를 배워놓았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몰두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밥 먹고 노래만 부르다 헤어져서 조금 아쉬웠다. 언제 다시 만날는지 알 수도 없어 허전했다. 하지만 처음 만난 타인을 기꺼이 식탁에 초대하고 서로를 이웃으로 맞이하는 이런 행위는 여운이 길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며칠 뒤,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교회에서 새벽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기도 시간이 얼마큼 지났을 즈음, 기도 마치고 우리 모두 커피 한잔해요, 팔십 세가 가까우신 분이 제안하셨다. 난 소리를 빼고 입으로만 네, 하며 웃었다.
기도하던 사람 중에는 몽고메리에 정착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새벽에만 우리 교회에 나왔으므로 다른 분들과 사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놀랍고 기뻐서 다시 기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기도를 마치고 우리는 교회 근처에 있는 맥도널드에 갔다. 커피와 아침 메뉴를 가지고 가게 앞 테라스에 둘러앉았다. 밤새 내려앉은 기운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푸석한 아침과 정신 나게 하는 커피는 여전히 잘 어울렸다. 어르신들 뒤로 구름 많은 몽고메리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속에 어르신들을 담아 사진을 찍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그들에게 마음을 나눌만한 사람들이 곁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재물, 학력, 외모, 출신지만으로 사람을 짐작하는 것은 어리석다. 눈을 바라보고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나눠보면 세상의 잣대로 헤아릴 수 없는 인생을 만난다. 그곳도 환대가 이루어지는 자리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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