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2019

떠나간 이가 남긴 깨달음


<여기가 어딘지... 엄마와 나>

가방 속에 있는 휴대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타주에서 열리는 미동남부 지방회의 장로 안수식이 막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막내 동생의 이름이 보였다. 

'아, 그렇지! 한국은 설날 아침이지...'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께 아직 설 명절 인사도 못 드린 상태였다. 

가족 생일이나 명절이 되면 엄마가 늘 먼저 전화를 주신다. 이번에도 내가 늦었다. 엄마가 설쇠기 위해 방문한 동생을 시켜 전화를 한 것이 뻔했다. 그런줄 알면서도 전화를 받을지 말지 아주 잠깐 주저거렸다. 무료 통화가 가능한 카톡 전화도 아니고 저렴한 이용 요금을 내는 스카이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나타내는 국제 전화 고유 번호 '82'가 전화 받기를 망설이게 한 것이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카톡으로 전화하자고 말해야지, 생각하며 연결 버튼을 눌렀다.

“응, 석아. 누나가 다시 전화할게.”
“아니 그게...”
“거긴 설날 아침이지?”
“응. 그런데...”
“우선 끊어 봐.”

조용한 곳을 찾으러 예배실을 나왔다. 뭐가 그리 급한지 동생은 그사이를 못 기다리고 카톡 전화로 나를 불러댔다. 지방회가 열리고 있는 이 교회를 나는 너무도 잘 안다. 지난 7년 넘게 교인들과 동고동락했던 곳이었다.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는 조그만 방이 불꺼진 채였다. 아무도 없었다. 그 방에 들어서고 나서야 전화를 연결했다.

“누나,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잠깐 기다려 봐, 엄마 바꿔줄게.”

인사치레할 것 같은 누나의 입막음을 위해 동생은 중요한 용건으로 선수를 쳤다. 울음 섞인 엄마의 음성이 들려왔다. 설 전날 동생네가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작은 아버지는 멀쩡하셨단다. 그런데 설날 아침에 살펴보니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며 엄마는 울먹거렸다. 작은아버지는 향년 78세.

'아, 그래서 그때...'

지난해 가을 아빠 팔순 생신이 있어 한국에 갔었다. 아빠의 생신 축하는 가족과 가까운 친척 30 여분만 모시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난 약속 장소로 먼저 가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명절 때면 늘 보던 얼굴들이었다. 작은엄마가 오셨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아버지도 함께 오셨다. 내가 알기로는 작은아버지가 아빠와 엄마가 관련된 가족 행사에 오신 것은 아주 아주 오랜만이었다.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나와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맞이하셨다. 작은아버지는 아빠와 포옹을 하셨다. 작은엄마와 엄마는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콧잔등이 시큰했으나 기쁜 일이니 얼른 눈가에 물기를 날렸다. 아빠는 이날 동생과 화해한 것으로 여기고 무척 기뻐하셨다. 

형제간에 사이가 나빠진 것은 제사문제 때문이었다. 엄마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집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몹시 힘들어하셨다. 17년 전 엄마가 대장암에 걸린 적이 있었다. 수술받는 날 내가 엄마 곁에 있었기에 엄마가 아빠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수술 받으면 내가 죽어서 나올지 살아서 나올지 모르겠어요. 만일 살아서 나오면 난 제사를 지내지 않을 거에요!”

엄마는 수술을 잘 받으셨고 자신의 신앙 결단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신앙이 없던 아빠는 내키지 않아도 엄마의 의견을 따르시면서 한편으로 작은아버지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엄마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아빠가 서운해하시지 않도록 기일에는 꼭 할머니 산소에 들려 꽃과 기도를 드렸다. 작은엄마와 성당을 다니던 작은아버지는 형수인 엄마의 결정을 매우 못마땅해하셨다. 그 어느 때부터 가족 행사에 작은아버지만은 오시지 않았다. 나는 그런 작은아버지가 늘 안타까웠다. 

작은아버지는 결혼 해서 아들을 낳기 전까지 나를 무척 예뻐해 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아빠와 작은아버지 뿐이었다. 단촐한 가족인데 작은아버지에게 첫 조카가 생겼다. 작은아버지가 연애할 때 작은엄마를 만나러 가면서도 나를 데리고 가셨단다. 두 분이 신혼 여행 떠날 때는 내가 같이 가겠다고 떼를 써서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고. 또 신혼방에 놀러가서는 두 분 사이에서 잠을 잤다나. 어린 아이는 누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구석이 있으므로 어르신들의 얘기를 종합해 볼 때 작은아버지가 조카딸을 끔찍하게 사랑하셨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특별한 것도 없는 나를 언제나 대견스러워 하셨다. 

나에게도 작은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분이셨다. 학창시절 졸지 않기 위해 소나무에 높이 올라가 앉아 공부했다는 일화는 위인전에서 읽을 법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방학하여 작은집에 놀러가면 아침 식사 전에 꼭 일본어 회화 공부를 하시던 모습도 기억난다. 결국 독학으로 일본어에 능통하게 되셨다. 회사를 대표하여 일본 출장갔다 오셔서 일본 가정의 생활상을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아이디어가 많아 다니던 회사에서 신제품을 만들기도 하셨고 자신의 기업을 일으키시도 했다. 유머도 많으셔서 이야기 중에 가족들을 많이 웃게 하셨다.  

아빠와 작은아버지가 좀 더 행복한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았으련만. 작은아버지가 가진 마음의 빗장을 이제야 여셨는데... 작은집과 우리집 식구들의 마음을 편안히 해주신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보다. 

동생이 먼저 하늘나라 가셨으므로 서글퍼하실 아빠에게 전화를 드렸다. 

“별일 없으시죠?”
“응 여긴 추워. 낮에도 영하야. 나랑 얘기하면 재미없어. 엄마 바꿀게.”

아빠는 잘 받아들이고 계신 듯하다. 이제는 한국에서 오는 전화를 가벼이 받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이글을 올해 설날에 돌아가신 작은아버지를 추모하려고 시작했다. 그런데 글을 마치려다 그 추모의 끝이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에게 가 닿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내 엄마.

할머니 기일이 다가오면 엄마는 아빠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긴장하며 더 많은 기도를 드린다. 명절 때는 내 동생들이 작은아버지댁에 문안인사를 드리도록 챙긴다. 작은아버지 생신도 꼭 기억하여 축하의 마음을 전하신다. 이것은 우리 가족의 일상일 뿐 엄마가 견디고 있을 제사문제와 거기서 비롯된 모든 불편함에 대해선 헤아려본 적이 없었다. 

“작은아버지가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고 가신 것 같아.”

아빠가 건네준 전화기에서 들려온 엄마의 첫마디였다. 

신앙의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것이었나. 이제까지 엄마는 나를 보살펴야 할 사람이지 내가 보살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왜 이리 이기적이고 아둔한가. 

내가 지금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엄마의 여생이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으로 차고 넘치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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