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주간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았다. 친절하게도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이곳은 따뜻한
지역이라 요즘도 낮 평균 기온이 27도를 넘나든다.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하여, 싸늘한 공기 어딘가에 이른 벼를
베고 난 들판에서 맡을 수 있는 흙과 지푸라기 냄새가 묻어있지 않을까 찾아 본다. 가을이 되면 방향제가
들어 있는 제품들 가운데 주황색 둥근 호박과 시나몬(계피) 향이
섞인 것들이 많이 나온다. 미국에 오래 살다 보면 호박과 시나몬 향을 가을과 짝지어 추억하게 될 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올해 가을은 갑자기 열매가 한 번에 대여섯
개 달리는 호박이 주는 기쁨으로 시작했다. 호박 줄기들이 가을 첫머리에 내리는 비를 자주 맞더니 연두
빛의 애호박들을 마구 내놓았다. 여름 동안은 물을 매일 주었어도 호박에게는 넉넉하지 않았는지 가끔 하나씩
열매를 맺었었다. 그런데 이번 비에 호박들이 여기저기 쑥쑥 자라 재미를 보았다.
올 봄 남편을 귀찮게 졸라서 담 아래에 손바닥만하게
만든 텃밭이 있다. 땅이 모래가 엄청 많은 흙이라 가게에서 파는 흙과 퇴비를 사다가 섞어주었다.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는데 도움이 될만한 높이로 이랑을 만들었다. 쑥갓
씨도 뿌려 보고, 시금치와 붉은 상추 같은 잎채소도 심었다. 고추는
모종을 내어 심었다. 호박은 구덩이를 파서 거름과 흙을 넉넉히 넣고 여러 날 묵혔다가 거기에 씨를 뿌렸다.
이곳 저곳에서 주워들은 정보로 텃밭의 흉내를 내
본 것이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단순한 생활에 흙이랑 풀 가지고 장난이나 쳐볼 수 있는 코딱지만한
놀이터라 여겼다. 혼자 처음 가꿔보는 텃밭이니 식물들이 잘 자라지 않거나 해도 어쩔 수 없는 실험용
놀이터라 생각하고 가볍게 시작했다.
역시…… 식물들이
초보자를 알아 보는 것 같다. 쑥갓은 싹이 몇 개 나오더니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시금치와 붉은 색 미국 상추는 모종을 사다가 심은 것이다. 그들은 3개월 정도 조그만 잎사귀만 보여주다가 없어졌다. 가지는 두 개의
열매를 주고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까지 살아 있는 고추나무와 호박 몇 줄기가
텃밭을 처음 시도해본 나를 위로하고 있다. 우리 집 고추는 미국 이민 오셔서 몇 십 년 내내 텃밭을
가꾼 할머니 권사님네서 봤던 고추나무와는 비교도 안 되게 키가 작다. 열매도 권사님네 것은 길쭉하고
통통했는데 우리 것은 모양이 짧거나 구불거린다. 우리 고추나무 모종낼 때 할머니 권사님이 주신 씨로
한 건데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호박도 어설프긴 마찬가지이다. 두 구덩이에 씨를 심었는데 심은 씨의 개수대로 싹이 다 나고 처음부터 하루가 다르게 잎(!)이 잘 자라 재미있었다. 똑같이 구덩이를 만들고 물도 주었는데
한 구덩이에서 나온 줄기는 점점 노랗게 마르다 없어졌다. 그나마 다른 한 구덩이는 잘 살아 잎이 무성하고
호박꽃도 군데군데 피어 있어 멀리서 봐도 풍성해 보인다. 호박 열매가 별로 없어도 말이다.
그렇게 나의 처음 텃밭은 미숙하게 끝나나 보다 했다. 그런데!!! 가을을 알리는 몇 번의 비가 내리는 동안 고추와 호박이
마구 열린 것이다. 고추도 미끈하게 쭉쭉 뻗은 녀석들이 가지마다 가득하고, 호박도 줄기마다 꽃을 피우더니 통통하게 여물어 갔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많은 열매가 맺힌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에 비하면 신통방통하기가 짝이 없었다.
작은 공간이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똑같이 물을 주어도 힘 없이 시들어가는 식물들을 볼 때는 안타까웠다. 물
주고 풀 뽑아주며 그저 생명이 붙어있는 식물들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다. 가끔 어줍잖은 열매를 얻을 때도
기분 좋았다. 식물들이 초짜의 손에 키워지면서도 열매를 내어줄 때는 고맙기까지 했다. 호박 몇 개를 다른 이들과 나눌 때는 쑥스러우면서도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이런 저런 맛에 텃밭을 하나 보다. 나의 아빠는 텃밭을 하는 이유가 열매를 거두어 엄마에게 가져다 주면 “어머!” 하며 놀라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손수 가꾸는
수고가 담긴 열매가 주는 기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초가을에 문득 찾아온 텃밭의 열매들처럼 기대하지 않았던 기분 좋은 결과들이 주어지는 것은
나의 수고가 아닌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더 이상의 열매가 없을 거라는 엉성하고 허술한 내 생각의 한계
위에 촉촉하게 대지를 적시는 가을비처럼 부드럽게 내려앉는 뜻밖의 은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