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에 살 때부터 즐겨보는 유선방송 채널이 있다.
여행 채널(TRAVEL CHANNEL)이다. 그
채널 가운데서도 세계 곳곳(미국 국내를 포함해서)을 여행하면서
볼거리, 먹을거리, 잠잘 곳 따위를 직접 체험하면서 소개해주는
쇼들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Rachel Ray의 $40 a day, Anthony Bourdain의 The Layover or No
Reservations, Samantha Brown, 그리고 Andrew Zimmern의
Bizarre Foods 이다.
$40 a day는 여기 콜럼비아에서는
본 적이 없으나 애틀랜타에서는 방송 시간을 기억했다가 찾아서 보곤 했다. 이 쇼의 진행자 Rachel(요리사)은 하루에 40 달러를 가지고 세 끼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행한 지역에서 주로 유명한 식당들을 찾아 다니는데 음식값이 비싼 곳에서는 가진 돈이 적다며
코스 요리에서 음식 하나만 골라 시킬 때도 있다. 그러면 음식점 주인이나 종업원은 흔쾌히 주문을 받는
것은 물론, 자기네 대표음식을 소개해주기도 하고(비싸도 그냥
주기도 한다), 비싼 음식이면 양을 적게 주어 음식값을 적게 받기도 한다. 처음엔 저렇게 알뜰하게 여행을 할 수도 있겠구나 했다. 그러다 방송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없거나 유명한 방송인이 아니고, 평범한 동양 여인이 방문해도 저런 합리적인 호의를
받을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애틀랜타에서와는 달리 한국 방송 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미국 방송을 보는 시간은 많이
줄었다. 유선방송 요금을 내는 것이 아까울 정도니 말 다했다. 그래도
내 손에 텔레비전 리모컨이 쥐어지면 어김없이 여행 채널부터 눌러본다. 화면으로나마 미국과 세계를 경험하는
것도 즐겁다.
한국 방송 중에도 여행과 관련된 쇼들을 즐겨본다. 정글의
법칙, 아빠 어디가?, 1박2일, 한국인의 밥상, 그리고
요즘 흥미롭게 보고 있는 꽃보다 할배가 있다. 앞의 것들은 여행하면서 생존, 미션, 게임, 음식과
결합된 것이라면 꽃보다 할배는 그냥 순수한 여행 체험기다. 70 세 이상 된 4명의 연륜 있는 배우들과 젊은 배우 한 명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고, 명소를 찾아 다니고, 음식점을 찾아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은 여느
사람이 여행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다른 예능 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인위적인 미션 같은 것 없이도
그 안에는 낯선 곳에서 겪을만한 긴장과 흥분, 감동이 다 담겨있다. 그런
면에서 꽃보다 할배를 무척 재미있게 보고 있다.
요즘 꽃보다 할배는 지난 번 유럽에 이어 대만 여행기를 방송하고 있다. 101 타워, 신베이터우 온천, 단수이
해변 공원 등을 소개하고 있다. 단수이
해변에 이르러서는 강 하류인데 바다와 연결되는 곳이며, 주걸륜이 감독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이 방송의 PD는 알려준다. 바로 그때, 이
방송을 함께 보고 있던 둘째 아들 윤이가 한 마디 한다.
“아, 저기였구나!”
“너 저 영화 봤어?”
“응. 좋은
피아노 곡 찾다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나도 봤어.”
윤이는 한참 전부터 알려진 “River flows
in yours”, “Flower Dance”, 일본 애니메이션 삽입곡들 중 “또 다시”나 “인생의 회전목마” 같은
곡들을 잠깐씩 피아노로 연습하기도 한다. 리듬이 감미로운 것들이기에(사춘기
아들이 좋아할 만하다) 윤이가 연주하면 듣기 좋다. 정신이
사나워 피아노를 그만 쳤으면 할 때도 아주 가끔 있지만 거의 참고 듣는다.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언제까지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윤이는 가지고 있는 피아노 곡들이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다른 곡을 찾아보곤 했었나 보다. 그러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는 영화도 보게 되고.
그 영화 재미있어?, 했더니 잔잔하고 볼만하단다. 주걸륜이 감독도 하고 주연도 맡았으며 피아노도 직접 쳤다며 주절주절 말이 길다(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주걸륜이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은 사실이며 영화에 나오는 피아노 배틀 장면에서 직접 연주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듯). 잔잔해? 지루한 것
아니야?, 물어보려다 그만두고 꽃보다 할배를 보는 중이니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다며 윤이의
입을 막아버렸다.
토요일 오후, 저녁을 먹고 나면 각자 방으로
흩어진다. 남편은 주일 설교 원고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시간이다. 그런데
윤이는 영화 보자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대고 남편은 푹신한 팔걸이 의자에 앉아 영화감상 모드를 취하고 있다. 다음
날, 그러니까 주일 설교는 우리 교회 중등부에서 설교를 해주시는 톰슨 목사님이 하시기로 되어 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톰슨 목사님은 다른 주에 있는 미연합감리교회에서 은퇴하시고 여기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살고 계신다. 우리 교회 집사님과의 인연으로 주일마다 중등부 아이들과 예배를 드리신다. 그 목사님 덕분에 남편은 여유 있는 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게 된 것이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Secret)”의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었다. 길을 따라 야자나무가
줄지어 있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고등학교가 비춰진다. 영화에서 나오는 키가 큰 야자나무와 같은
종류인 작은 야자나무(Palmetto)는 이곳 주(state)를
대표하는 나무이고 곳곳에서 볼 수 있어 눈에 익숙하다. 하지만 아직도 야자나무가 심기어진 것을 보면, 살고 있으면서도 이국적이라는 느낌이 더 많다. 대만이 여기처럼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음을 감지하며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기대가 되었다. 참고로 이 학교는 담강예술고등학교로
주걸륜이 실제로 다닌 학교라고 한다(별걸 다 알아봤다).
이 학교로 전학 온 상륜(주걸륜)은 피아노를 매개로 계륜미(샤오위)를
만나게 되고 예쁘고 상큼한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가슴 시린 사랑을 하게 된다. 세상살이에 눈이 밝기
전, 조금 어린 나이에 설레고 소화가 안 되어 얹혀 있는 느낌 같은 첫사랑을 해 본 이들은 그들이 보여주는
사랑에 살며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윤이같이 아직 사춘기에 있는 이들은 아마도 주인공들의
감정에 동화되겠지…….
사이 사이에 음악학과 친구와 상륜이 피아노 배틀을 하기도 하고, 계륜미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는 등 아름다운 연주곡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이 가는 곳, 사는 곳의 배경이 단수이 해변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평화롭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한낮의 햇볕이 점점 부드러워져 가는 이 가을과 잘 어울리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한 꽃보다 할배에서 이 영화를 몇 줄 자막으로 소개를 한다. 화면이 빨리지나 가는 바람에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오히려 영화의 재미를 위해서 잘된 일이었다. 여기 그 자막을 그대로 옮겨보련다. 영화를 볼 마음이 있거든 눈을
게슴츠레 하게 뜨고 획 지나치듯 읽으면 좋겠다. 그들의 사랑이 애절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될만한 단어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주걸륜이 감독 및 주연을 직접 맡은 판타지
로맨스 영화.”
“흥미로운 음악과 풋풋한 사랑, 그리고 시간 여행을 한데 묶어 호평을 받았다.”(꽃보다 할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장면들과 사건들의 앞뒤를 맞추어보거나 영화에서 다 말하지 못한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윤이와 함께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보여지는 장면에만 집중하고 있던 50대를 바라보는 나와는 달리 그 상상력이 놀랍고 넓었다.
신문을 보다가 영어 한 문장을 발견했다.
“When you know that you love
her, you’ll know what to do.”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된다, 음! 이 말은 남자 주인공 상륜의 용감한 선택을 표현해주는 말 같아 적어두었었다.
그리고 ‘her’를 ‘Jesus’로 살짝 바꾸어
묵상의 소재로 삼아보기도 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