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010

혼자 또는 여럿이


<남편은 어디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상영되자마자 구해왔길래 보았던 것입니다.>
"솔로이스트"(The Soloist)
LA 타임즈 기자와 노숙자 나다나엘이 음악을 매개로 하여 우정을 만들어 가는 영화의 제목입니다.
이 영화는 LA 타임즈 기자인 스티브 로페즈의 글을 바탕으로 한 실화라고 합니다.

친구되기일상에 지친 기자는 어느 날 공원에서 두 줄 밖에 남지 않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나다나엘을 만나게 됩니다.
나다나엘에게 흥미를 가지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줄리어드 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하다가 중퇴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칼럼에 나다나엘의 이야기를 싣게 됩니다.
그 칼럼을 읽은 어느 할머니 독자는 자기가 50년 동안 사용했던 첼로를 나다나엘에게 선물로 줍니다.

기자는 이 첼로를 빌미로 거리가 아닌 노숙자 단체로 거처를 옮기라고 하기도 하고, LA 교향악단이 연주하는데 게스트로 참가해 볼 것을 권유해 보기도 하고, 교향악단의 첼리스트에게 부탁해서 개인 레슨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독주회를 열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나다나엘이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없고, 나다나엘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이 영화가 한참 지나도록 기자는 정신적 질환을 가진 나다나엘을 돕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노숙자 공동체에 찾아가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나다나엘은 정신질환을 갖고 있으며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자, 운영자는 필요한 건 하나, 친구, 라고 대답합니다.
그래도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기자는 의사를 만나는데 동의하는 서류를 나다나엘에게 보여줍니다.
나다나엘은 그 서류를 보고는 기자에게 죽일듯이 덤벼들고, 기자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합니다.

다시 나다나엘을 찾았을 때, 나다나엘은 그렇게 심하게 했는데도 친구가 되겠다니 안 믿어져, 합니다.
기자는 손을 내밉니다.
“Mr. 에어스(나다나엘), 당신 친구가 돼서 영광이야”

친구는 서로의 관심사를 알아주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이 영화는 보여줍니다.
기자는 나다나엘이 음악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음악에 완전히 빠져있는 것을 압니다.
디즈니 콘써트 홀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거리에서 연주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준비된 무대보다는 거리의 소음과 새들이 들어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도 인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나다나엘과 기자가 나란히 앉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합니다.
그 장면은 마치 친구를 위해, 기자는 더 이상 나다나엘에게 연주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으며, 나다나엘은 말끔히 차려 입고 훌륭한 관객이 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혼자 또는 여럿이나다나엘은 갇혀 있는 듯한 공간을 싫어합니다.
또 여럿이 어울려 연주하는 것을 방해하는, 뭔가 내면에서 들려오는 복잡한 소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자는 나다나엘을 두고 “내 친구는 내면에서 잔다, 그의 정신 상태와 내면은 불확실하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트인 공간에서 혼자 연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다나엘은 타고난 천재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혼자 연주한다면, 평범하지만 타고난 음악성을 가지고 혼자 연주하는 닮은 또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날마다 음악을 들으며 드럼 스틱을 들고 빈 공간에 있는 드럼을 상상하며 연주를 합니다.
그러길 한 시간 넘기는 것은 보통입니다.
드럼 연주에 대한 열정을 가진 솔로이스트입니다.
이 솔로이스트도 내면의 감각에 따라 드럼을 연주하는 것이라 여럿이 어울려 연주하는 것은 글쎄요….
벌~써 눈치채셨듯이 그 솔로이스트는 바로 강산입니다.


그런데 강산이가 나다나엘과 다른 것이 있는데, 여럿이 같이 연주하는 것을 즐거이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 교회 청소년 오케스트라 정기 공연과 다른 교회 초청 공연 때요.
자기가 좋아하는 드럼이 아니라 트라이앵글이긴 하지만, 같은 타악기이니 자신의 음악적 감각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강산이는 오케스트라에 가는 것, 연주하는 것, 간식 먹는 것, 연주회 때 양복 입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편 강산이는 연습이 시작되면 자기 연습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강산이가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지휘를 맡고 계신 전도사님 덕분입니다.
전도사님은 강산이가 드럼 치기 좋아하는 것을 아시고 한번 시켜보라고 권해주셨고, 타악기를 지도하는 선생님도 해보라고 하셔서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았습니다.
지난 12월 제9회 정기 연주회와 이웃 교회 초청 공연 때 각각 두어 곡 연주를 하였습니다.
강산이가 연주할 때, 같은 악기를 연주하며 이끌어주는 친구가 옆에 있었습니다.
모두 고마운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강산이의 연주가 많이 부족한 것을 압니다.
전체 연주에 방해는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부분도 있구요.
그런데 정기 연주회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산이가 할 수 있다면 연주를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도전이 되지 않을까?’
연주회가 끝나고 전도사님과 인사를 나누는데 전도사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전도사님은 강산이가 좋아하면 됐어요, 하시는 것입니다.

영화에서처럼 친구는 아니더라도, 강산이를 알아주는 분이 계셔서 고마웠습니다.
이거 사실 나보다 강산이가 더 고마워해야 되는 건데, 그렇죠?

한편, 강산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강산이의 관심사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나 생각해 봤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를 경험하면서 그런 친구가 생기겠지요.(!?!)
지금은 보호와 배움이 필요한 시기이니 친구보다는 가족, 선생님들이 강산이 곁에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강산이 엄마이면서 동시에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강산이보다 먼저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많은 삶의 잣대를 접어두고, 강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강산이의 기쁨과 슬픔이, 저에게는 엄청난 환희가 되기도 하고 가슴 저리는 아픔이 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감정조차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 이상을 넘나드는데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누가 저한테 강산이 친구 되라고 하지는 않지만, 엄마이면서 친구가 되도록 해보렵니다.
엄마의 사랑을 가지고 강산이의 시각으로 보려고 애써 보렵니다.
좋은 방법 있으면 나눠주시길….


영화 초반에 나다나엘이 기자로부터 첼로를 전해 받고, 조심스럽게 첼로를 꺼내 연주를 합니다.
연주하는 동안 스크린에는 자동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는 바둑판 같은 모양의 아주 넓은 주차장 모습과 많은 자동차들이 줄지어 움직이는 엉킨 실타래 같은 교차로를 하늘 높이 나는 비둘기의 시각으로 비춰줍니다.
질서와 자유로움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장면과 함께 첼로곡의 선율이 정말 감미로웠습니다.
이 영화에 삽입된 첼로 연주곡들은 유투브(youtube.com)에서 soloist ost 라고 입력하면 들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로마서 15:1-2, 5-7)

댓글 1개:

  1. 한국에서는 25일 강산이의 생일이네요. 축하축하 합니다. '솔로이스트' 나도 보고 싶었는데 놓친 영화. DVD로 볼 생각이랍니다. 요즘 열심히 읽기를 끝낸 '오두막'이라는 책을 언니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면 보내드릴게요. 언니 메일 확인 해보고 답장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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