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2010

“어려움…몹시 힘든 425 계단”


아미카롤라 폭포에 4번째 갔을 때 이 팻말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Difficulty…Strenuous 425 Steps”

첫 번째 갔을 때는 아미카롤라 폭포가 어디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는 목적한대로 자동차로 폭포 정상까지 올라가서 보고(!) 왔습니다.
418 Amicalola Falls Lodge Drive
Dawsonville, GA 30534

두 번째 갔을 때는 한국에서 오신 부모님들을 모시고 갔었습니다.
지금처럼 1월이었고, 어르신들이라-사실은 저보다 산을 훨씬 더 잘 타시는데- 처음의 경험대로 자동차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 쭉 둘러보고 돌아 왔습니다.

세 번째 갔을 때는 남편과 운동할 목적으로 갔기 때문에 계단을 이용해 폭포를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처음 175개의 계단이 끝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다시 425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는 표지판을 보고 계단보다는 쉬워보이는 등산길로 올라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가을 낙엽이 쌓인 등산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이상하게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표지판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길이 자꾸 빙빙 도는 것 같아 살짝 무섭기도 했구요.
어쨌든 겨우 흙으로 다져진 길을 찾았을 때는 폭포 정상이 아니라 출발한 연못으로 다시 내려와 있었습니다.*^^ *

얼마 전 네 번째 갔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갔습니다.
이번에는 안전하고 확실한 계단을 이용하여 정상까지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길을 나서서 그랬는지 계단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이 찼습니다.
하지만 이유는 완전 운동 부족!!!

175개의 계단이 끝나고 다시 425개의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표지판에 이번에는 “Difficulty…Strenuous” 라는 경고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그 경고가 맞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숨이 차서 헐떡거리고 있었으니까요.

아이들과 남편은 벌써 다시 오르기 시작합니다.
남편도 땀을 흘리고는 있지만, 지난 번에도 제가 등산로로 가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정상까지 걸어서 못 올라갔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가 올라가지 않겠다고 해도 아이들과 올라갈게 뻔했습니다.
강산이한테 올라가겠냐고 물으니 그러겠답니다.
저도 별 수 없이 올라가야죠, 뭐.

중간 중간 쉬면서 올라갔습니다.
겨울내 비가 많이 내려서 그런지 폭포 물이 풍성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휴우~
정상에 올라와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는데, 남편은 신년 특별 저녁 예배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빨리 되돌아 가야 된답니다.
아이들과 저는 정상에 남아 있고 자기만 내려가서 자동차를 가지고 다시 올라 오겠답니다.
아무래도 다같이 내려가자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은가 봅니다.
그러라고 하고는, 강윤이에게 아빠하고 같이 갔다 오라고 했더니 따라갑니다.

강산이와 둘이서 힘들어?, 저기 나무 좀 봐, 어쩌구 저쩌구 얘기를 하는데 눈 앞에 표지판이 다시 눈에 띕니다.
“어렵고 몹시 힘든 425계단”
올라와서 보니 그 말이 아래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뭐 그렇게 까지 경고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정상에 올라온 자의 성취감과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볼 때 눈 안에 들어오는 풍경의 넉넉함이 그새 헉헉거리던 기억을 씻어주었기 때문인가요.
산행이 주는 묘미를 오랜만에 느껴보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차가 나타났고 산 아래로 쉽게 내려왔습니다.
어디 갈 때마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인데 조금 힘들었다고 더 없이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또 생각납니다. 찬송가 535장
1.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 바람분 후에 잔잔하고 / 소나기 후에 햇빛나며 /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2. 연약한 후에 강건하며 / 애통한 후에 위로받고 / 눈물난 후에 웃음있고 / 씨뿌린 후에 추수하네
3. 괴로운 후에 평안하며 / 슬퍼한 후에 기쁨있고 /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 고독한 후에 친구있네
4. 고통한 후에 기쁨 있고 / 십자가 후에 면류관과 / 숨이진 후에 영생하니 / 이러한 도는 진리로다

535장 제목 밑에 적혀 있는 말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야고보서 1:12)

1/22/2010

혼자 또는 여럿이


<남편은 어디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상영되자마자 구해왔길래 보았던 것입니다.>
"솔로이스트"(The Soloist)
LA 타임즈 기자와 노숙자 나다나엘이 음악을 매개로 하여 우정을 만들어 가는 영화의 제목입니다.
이 영화는 LA 타임즈 기자인 스티브 로페즈의 글을 바탕으로 한 실화라고 합니다.

친구되기일상에 지친 기자는 어느 날 공원에서 두 줄 밖에 남지 않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나다나엘을 만나게 됩니다.
나다나엘에게 흥미를 가지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줄리어드 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하다가 중퇴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칼럼에 나다나엘의 이야기를 싣게 됩니다.
그 칼럼을 읽은 어느 할머니 독자는 자기가 50년 동안 사용했던 첼로를 나다나엘에게 선물로 줍니다.

기자는 이 첼로를 빌미로 거리가 아닌 노숙자 단체로 거처를 옮기라고 하기도 하고, LA 교향악단이 연주하는데 게스트로 참가해 볼 것을 권유해 보기도 하고, 교향악단의 첼리스트에게 부탁해서 개인 레슨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독주회를 열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나다나엘이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없고, 나다나엘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이 영화가 한참 지나도록 기자는 정신적 질환을 가진 나다나엘을 돕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노숙자 공동체에 찾아가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나다나엘은 정신질환을 갖고 있으며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자, 운영자는 필요한 건 하나, 친구, 라고 대답합니다.
그래도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기자는 의사를 만나는데 동의하는 서류를 나다나엘에게 보여줍니다.
나다나엘은 그 서류를 보고는 기자에게 죽일듯이 덤벼들고, 기자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합니다.

다시 나다나엘을 찾았을 때, 나다나엘은 그렇게 심하게 했는데도 친구가 되겠다니 안 믿어져, 합니다.
기자는 손을 내밉니다.
“Mr. 에어스(나다나엘), 당신 친구가 돼서 영광이야”

친구는 서로의 관심사를 알아주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이 영화는 보여줍니다.
기자는 나다나엘이 음악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음악에 완전히 빠져있는 것을 압니다.
디즈니 콘써트 홀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거리에서 연주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준비된 무대보다는 거리의 소음과 새들이 들어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도 인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나다나엘과 기자가 나란히 앉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합니다.
그 장면은 마치 친구를 위해, 기자는 더 이상 나다나엘에게 연주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으며, 나다나엘은 말끔히 차려 입고 훌륭한 관객이 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혼자 또는 여럿이나다나엘은 갇혀 있는 듯한 공간을 싫어합니다.
또 여럿이 어울려 연주하는 것을 방해하는, 뭔가 내면에서 들려오는 복잡한 소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자는 나다나엘을 두고 “내 친구는 내면에서 잔다, 그의 정신 상태와 내면은 불확실하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트인 공간에서 혼자 연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다나엘은 타고난 천재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혼자 연주한다면, 평범하지만 타고난 음악성을 가지고 혼자 연주하는 닮은 또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날마다 음악을 들으며 드럼 스틱을 들고 빈 공간에 있는 드럼을 상상하며 연주를 합니다.
그러길 한 시간 넘기는 것은 보통입니다.
드럼 연주에 대한 열정을 가진 솔로이스트입니다.
이 솔로이스트도 내면의 감각에 따라 드럼을 연주하는 것이라 여럿이 어울려 연주하는 것은 글쎄요….
벌~써 눈치채셨듯이 그 솔로이스트는 바로 강산입니다.


그런데 강산이가 나다나엘과 다른 것이 있는데, 여럿이 같이 연주하는 것을 즐거이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 교회 청소년 오케스트라 정기 공연과 다른 교회 초청 공연 때요.
자기가 좋아하는 드럼이 아니라 트라이앵글이긴 하지만, 같은 타악기이니 자신의 음악적 감각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강산이는 오케스트라에 가는 것, 연주하는 것, 간식 먹는 것, 연주회 때 양복 입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편 강산이는 연습이 시작되면 자기 연습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강산이가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지휘를 맡고 계신 전도사님 덕분입니다.
전도사님은 강산이가 드럼 치기 좋아하는 것을 아시고 한번 시켜보라고 권해주셨고, 타악기를 지도하는 선생님도 해보라고 하셔서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았습니다.
지난 12월 제9회 정기 연주회와 이웃 교회 초청 공연 때 각각 두어 곡 연주를 하였습니다.
강산이가 연주할 때, 같은 악기를 연주하며 이끌어주는 친구가 옆에 있었습니다.
모두 고마운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강산이의 연주가 많이 부족한 것을 압니다.
전체 연주에 방해는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부분도 있구요.
그런데 정기 연주회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산이가 할 수 있다면 연주를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도전이 되지 않을까?’
연주회가 끝나고 전도사님과 인사를 나누는데 전도사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전도사님은 강산이가 좋아하면 됐어요, 하시는 것입니다.

영화에서처럼 친구는 아니더라도, 강산이를 알아주는 분이 계셔서 고마웠습니다.
이거 사실 나보다 강산이가 더 고마워해야 되는 건데, 그렇죠?

한편, 강산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강산이의 관심사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나 생각해 봤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를 경험하면서 그런 친구가 생기겠지요.(!?!)
지금은 보호와 배움이 필요한 시기이니 친구보다는 가족, 선생님들이 강산이 곁에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강산이 엄마이면서 동시에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강산이보다 먼저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많은 삶의 잣대를 접어두고, 강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강산이의 기쁨과 슬픔이, 저에게는 엄청난 환희가 되기도 하고 가슴 저리는 아픔이 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감정조차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 이상을 넘나드는데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누가 저한테 강산이 친구 되라고 하지는 않지만, 엄마이면서 친구가 되도록 해보렵니다.
엄마의 사랑을 가지고 강산이의 시각으로 보려고 애써 보렵니다.
좋은 방법 있으면 나눠주시길….


영화 초반에 나다나엘이 기자로부터 첼로를 전해 받고, 조심스럽게 첼로를 꺼내 연주를 합니다.
연주하는 동안 스크린에는 자동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는 바둑판 같은 모양의 아주 넓은 주차장 모습과 많은 자동차들이 줄지어 움직이는 엉킨 실타래 같은 교차로를 하늘 높이 나는 비둘기의 시각으로 비춰줍니다.
질서와 자유로움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장면과 함께 첼로곡의 선율이 정말 감미로웠습니다.
이 영화에 삽입된 첼로 연주곡들은 유투브(youtube.com)에서 soloist ost 라고 입력하면 들어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로마서 15:1-2, 5-7)

1/15/2010

겨울눈(Winter Bud), 언제나 준비하고 있구나


날씨가 조금 풀린 것 같습니다.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따라가 등을 디밀고 앉아있자면 따뜻한 기운이 살살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햇빛이 없는 곳에서는 여지 없이 히터를 끼고 있어야 할 만큼 춥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10년 만에 찾아온 한파니 100년 만에 내린 폭설이니 하는 소식을 자주 듣습니다.
여기는 미국의 남부 지역이라 눈은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보통 때보다는 많이 추운 겨울을 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터넷 신문을 보니 이러한 기상이변에 대한 이유를 밝히려는 과학자들의 의견이 여기저기 실려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는 북극의 찬 기운을 막아주던 제트 기류의 둑이 무너져서 북반구의 나라들이 이상 한파를 겪고 있다고 하고, 또 다른 교수는 지구 온난화가 계속 되면서 더워진 공기가 지구의 공기 순환을 빠르게 해 남극과 북극의 공기가 더 먼 곳까지 이동하게 됐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지구에 앞으로 2, 30년 동안 미니 빙하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의견들을 싣고 있습니다.




그 기사들을 보면서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가 생각났습니다.
2004년 영화가 상영된 이후로 겨울이 오면 TV에서 이따금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기후학자인 주인공이 급격한 지구 온난화로 인해 남극, 북극의 빙하가 녹고 바닷물이 차가워지면서 해류의 흐름이 바뀌게 되어 결국 지구 전체가 빙하로 뒤덮이는 거대한 재앙이 올 것이라는 경고가 현실이 되는 내용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꽁꽁 얼어버린 뉴욕을 배경으로,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줍니다.
최근까지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뉴욕이 얼어버리는 것은 완전히 허구이고, 퀴즈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한 아들이 눈과 얼음 속에 갇히게 되고 그 아들을 구하기 위해 찾아나서는 주인공 아버지와의 감동 스토리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이상 기후를 봐서는 그 영화에서 벌어진 일이 있을 법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오랜만에 추위로 잔뜩 웅크린 어깨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눈길이 나무들에게 가 닿습니다.
여기도 있나….
있습니다. 겨울눈(Winter Bud).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여러 집 엄마들이 뭉쳐 공동육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아이들 데리고 박물관과 고궁 나들이를 자주 했었습니다.
어느 겨울 날, 경복궁에선가(?) 뭔가를 잘 설명해주는 얼씨구 엄마(엄마들 별명, 우리 가락과 사물놀이를 주로 가르치는 엄마였어요)가 겨울눈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저도 나무에 겨울눈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고 신비로웠습니다. *^^*
그로부터 겨울나무들을 볼 때면 겨울눈이 있나 자꾸 살피게 됩니다.

겨울눈은 나무나 여러해살이 식물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겨울을 지내기 위해 만드는 눈으로, 봄에 새싹이 나올 수 있도록 겨울 내내 보호된다, 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잎으로 무성한 여름부터 다음 해를 다시 살기 위해 눈을 만들고, 가을을 지나 차가운 겨울을 견딘다고 하니 참 놀랍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계획과 준비, 강인함과 인내를 보여주는 겨울눈이 어느 때보다 더욱 살갑게 느껴지기도 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합니다.
겨울눈들이 추운 이 겨울을 더욱 튼실하게 넘기고, 따뜻한 봄에 고운 새싹으로 만나게 되길 빌어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28-31)

1/08/2010

생각지 않은 늦잠이 가져다 준 즐거움

<아침 6시20분, 학교에 가는 강산이. 스쿨 버스가 오는 바람에 서둘러 찍어 사진이 흐릿합니다.>

엊그제 아침, 정신 없이 자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여는 인기척에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보통은 남편이 새벽 기도 가기 위해 준비하는 소리, 그리고 나서 조금 있다가 강산이를 깨우기 위해 울리는 셀폰의 알람 소리에 깊은 새벽잠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듯 뒤척거려야 할 시간이라 그랬는지, 방문을 여는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강산이가 들어오면서 바뀐 방안 공기의 느낌만으로 잠이 확 깼습니다.
“엄마, 나 학교 가야 돼.”
“…. 엉?”
셀폰의 시간을 확인해 보니 6시 45분.
스쿨 버스가 불 꺼진 집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떠난 지 25분이나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가느라 왔다 갔다 한 것도 모르겠고 5시 30분에 울렸어야 할 알람도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셀폰은 제대로 켜 있는데….

우리가 사는 카운티의 고등학교가 시작하는 시간은 7시 10분쯤인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강산이가 순조롭게 준비를 하고, 학교에 데려다 주면 그다지 늦지 않을 시간입니다.
다만 학교에서 아침 식사 할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강산이네 반 친구들과 선생님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아침을 함께 먹습니다.
아침 먹는 시간에 학교에 한번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일찍 등교한 학생들 대부분이 아침을 학교에서 먹는 것 같았습니다.
강산이는 미숫가루를 우유에 타서 한 잔 가득 먹고 학교에 가서 또 아침을 먹나 봅니다.
학교에서 무엇을 먹는지 궁금한데, 그때 자세히 볼걸 그랬습니다.

스쿨 버스를 놓치고 늦잠을 잔 것이 미안하면서도, 기분이 좋습니다.
강산이가 학교에 가기 위해 엄마를 깨웠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줄 몰랐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그 날이 학교에 가야 하는 날임을 알고, 다른 날과는 달리 계속 잠을 자고 있는(--;) 엄마를 깨워야 한다는 상황을 판단해서, 말로 엄마를 깨운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아이가 “엄마” 하고 처음으로 말을 했을 때나 첫 걸음을 걸었을 때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리고 기억 속에서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웃음 짓는 것을 압니다.
저는 그 기쁨과 웃음을, 며칠 있으면 열 일곱 살이 되는 아들에게서 지금도 선물로 받고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언제나 기쁨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몇 달 동안 강산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환경에 적응하라고 무턱대고 던져놓은 것 같아 미안하고 안타깝고 속상했더랬습니다.
이해의 정도나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학교에 가기 싫은 이유를 강산이의 감정 표현으로 어림 짐작했어야 했기에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학교 생활이 어떤지 말로 잘 해주지는 않지만, 어느새 혼란스러움이 아닌 친밀함을 만들어 가는 강산이가 대견스럽습니다.

그리고 아무 준비 없이 미국 생활을 시작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강윤이도 별탈 없이 학교 생활을 잘 하고 있어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구겨진 종이 조각을 장난 삼아 친구에게 던지거나 점심 시간에 카페테리아 가다가 복도에서 떠들다 걸려서 작은 벌칙을 받았을 때, 이제껏 경험해온 학교 생활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자기도 스트레스가 많았을 텐데, 잘 견디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나름 학교 성적에도 관심을 갖고 목표한 점수를 유지하려는 모습도 종~종 봅니다.
아직 ESOL 반(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의 영어 능력 향상을 위해 영어 공부하는 반)에 참여하기 때문에 너그러이 봐주는 과목이 있어서 점수가 높게 나오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 강윤이가 아니라고 소리를 지를 것 같은데요? ㅋㅋㅋ
그래도 강윤이는 수학을 정말 잘 합니다!!!
학교 오케스트라에서는 선생님의 인정을 받아 같은 반 친구들이 바이올린 연습할 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학생이 학교 선생님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자신감을 주기도 하고 학교에 갈 맛(!)이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며칠 전에는 아빠에게 전화해서 집에 올 때 엄마 생일 케이크를 사오시라, 귀띔을 했다고 합니다.
짜아식!

강산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 위해 세수하고 로션 바르고 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만 닦고 나갈 마음으로, 학교 현관에서 내려줄 테니 혼자 들어가, 라고 했습니다.
강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싫답니다.
교실까지 함께 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강산이는 자기 교실이 어디인지 잘 찾아 다닙니다.
학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갔더니, 담임 선생님은 강산이가 행사 장소를 알고 있으니 강산이를 따라가라고 할 정도입니다.
“강산아, 혼자 들어가도 돼.”
무슨 생각인지 금방 고개를 끄덕입니다.

스쿨 버스, 부모와 학생들의 등교 차량으로 붐비는 학교 앞이 한산합니다.
차가 학교 앞에 멈추자 혼자 내립니다.
웃으며 손을 흔들고 학교 건물을 향해 걸어갑니다.
어느 만큼 가다가 뒤돌아 보고 엄마가 탄 자동차가 그대로 있으니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합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으니, 건물로 들어가서 차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 갈 길을 다시 가면서 어서 가라고 머리 뒤로 손을 흔듭니다.

강산이나 강윤이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기관리를 하며 커가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생각지 않은 늦잠이 커가는 자녀들을 느껴 보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다니, 사는 것이 날마다 새롭습니다.
엊그제도 그리고 오늘도 저는 기쁨과 감사를 선택해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예레미야애가3:19-23)

<눈이 조금 왔는데 더불어 기온이 뚝 떨어져서 학교가 문을 닫았습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1/01/2010

맑고 밝고 또렷한 2010년이 되길


20 여년 전, 신학생으로 봉사하던 교회에서 수요일(?) 저녁 예배 대표기도 하실 분이 안 나오시는 바람에 갑자기 대신 기도를 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어찌나 당황스럽고 떨리던지 뭐라고 기도하면 좋을까 하다가, 성경 말씀을 넣어 기도하면 그럴 듯 하겠다 싶어 성경을 잡고 아무 곳이나 펼쳤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말씀이 있었는데 로마서 12장 11절이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대표기도 하면서 뭐라고 기도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새해 첫날에 그 말씀이 다시 눈에 띕니다.

올해 기도제목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이뤄지길 바라는 소원들 뿐입니다.
바람들로 가득한 기도제목과 함께, 로마서의 말씀을 읽으며 어찌 살아야 할 지 마음을 가다듬어 봅니다.
겸손히 말씀처럼 살도록 도와주세요.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로마서 12장 9절-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