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삶이 단순해 보이든 복잡다단해 보이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쏟아 놓으면 책 몇 권은 될 거라고 관용구처럼 말한다. 그런데 소설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다산북스,2025)에는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수집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는 이야기가 없는 여인이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청소 도우미로 일하는 재니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청소 일에는 이미 숙련된 경력을 쌓았다. 수준 높은 베이킹 솜씨는 물론 납땜인두나 전기톱 등 전동 공구를 다룰 수 있고, 청소 도구도 필요한대로 만들어 쓴다. 덕분에 일하는 시간과 고객을 선택하고 관리하는 주도권을 쥐고 있다. 한편, 재니스는 일터에서 최대한 모자라고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아예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소심한 여인이다. 게다가 재니스가 일해서 번 돈을 펑펑 쓰면서도 청소 일을 무시하는 남편과의 관계를 견디기 힘들어 한다.
재니스는 남편에게 실망스러운 마음뿐이지만 묵묵히 청소 도우미를 하면서 고객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수집한다. 재니스에게 이야기를 수집할 때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상대가 자진해서 말해주는 이야기여야 한다. 일부러 질문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여야 한다. 예상 밖의 이야기나 과장된 이야기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재니스는 그들의 이야기에는 특별한 힘과 선의가 있다고 믿으며,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이렇게 살던 재니스가 B 부인을 고객으로 만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B 부인을 통해 과소평가했던 자신이 독보적인 청소 도우미이며 특별한 감수성을 가졌고 친절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임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 간다.
이 소설은 샐리 페이지가 중년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1년 동안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소설에 반영했다. 책 표지 날개에는 저자를 ‘잃어버린 마음의 풍경을 되살리는 이야기꾼, 꽃과 만년필 애호가, 가끔은 화가’라고 소개한다. 그는 실제 꽃집을 운영하기도 하고, 만년필 브랜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틈틈이 써온 글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나 역시 꽃을 좋아하고, 한동안 만년필만 사용하며, 가끔 글을 쓰기도 하지만, 샐리 페이지에게서는 다른 차원의 열정이 느껴진다. 그나마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점이 닮았다고나 할까.
뷰티 서플라이를 운영하는 S는 상도(商道)를 그의 아버지한테 배웠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람에게 피해주지 말아라. 정직해라.’를 강조하셨다. 아주 오래 전 S의 아버지는 마송 수삼센터에서 일하셨다. 아버지는 상품의 적절한 가격을 정하시고는 깎아 주거나 흥정하는 법이 없으셨다. S는 아버지가 안 계시면 아버지가 정한 가격에서 살짝 올려서 불렀다. 그렇게 해 놓고 손님이 깎아 달라고 하면 기분 좋게 올린 가격을 빼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버지를 찾는 손님이 더 많았다고 한다.
S는 대도시에서 찾아온 도매상 세일즈맨을 자주 만난다. 어느 세일즈맨은 아주 낮은 상품 가격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S는 이미 거래하는 도매상이 있을 경우는 금액에 좌우되어 거래처를 바꾸지 않는다. 간혹 거래하던 세일즈맨이 이직 혹은 사직을 하는 경우에는 다른 도매상을 알아볼지라도 말이다. 그의 사무실에는 세일즈맨을 위한 컵라면 같은 먹을거리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
경제 상황이 좋고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서 장사가 잘 될 때가 있다. S는 그럴 때는 손님이 장사를 한다, 고 표현한다. 주인이 별다른 경영을 하지 않아도 수입이 많다는 뜻일 게다. S는 손님에게 고맙죠, 라고 덧붙인다. 경제가 안 좋을 때는 오너가 그야말로 경영을 해야 하는데 그럴 땐 아버지의 상도를 떠올린다고 강조한다.
재니스나 S의 이야기처럼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마음에 공명을 일으킨다. 그 울림은 이야기에 담긴 선한 가치를 추구하려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야기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서 의미를 알아채는 과정을 거치며 그 힘을 발휘한다.
*이 글은 앨라배마 타임즈와 당당뉴스에도 실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