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제목만 봐서는 서늘한 기운이 묻어나는 가을 즈음에 읽으면 어울릴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펼치고 보니 여름 다섯 달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은 병증이 심해져서 더 이상 혼자 힘으로 일상을 살아가기 힘든 아버지 ‘보’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했던 아들 ‘한스’의 투박하면서도 애틋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보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그랬을까. 보에 비해 나는 아직 젊은데도 어느새 보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병든 보는 화장실 사용이나 식사 준비 등 요양보호사의 도움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반려견 ‘식스텐’을 위해 산책하기도 어렵다. 한스는 아버지와 식스텐을 보호하기 위해서 식스텐을 데려가려고 한다. 하지만 보는 한스가 식스텐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해서 분노한다. 보는 편하게 사용하던 소파를 한스가 맞춤형 침대로 바꾼다고 할 때도 마땅치 않다. 막상 의사를 표현하려고 해도 가래가 목을 막는다. 보는 무기력하게 생각한다. “내 목소리는 그들의 귀에 닿지 않았다. 하늘에서 죽은 새가 떨어지듯 내 말은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는 곳에 떨어진 것 같았다.”
보는 깜빡 잠에 잘 빠져 들고 그럴 때면 먼 과거에서 허우적거린다. 보는 현실과 과거를 자주 오간다. 이야기 속에서 그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해서 읽게 만든다. 보의 시선을 잘 따라가기 위해 두 인물에 대한 표현을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 당신이라는 인칭대명사는 요양원 치매 병동에 있는 보의 아내, 프레드리카를 말한다. 노인은 보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그의 아버지를 지칭한다.
침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보는 한스에게 집중하는 시간도 길어진다. 보는 한스가 어렸을 적 혼자 힘으로 물고기를 잡았을 때나 회사일이 바쁜데도 일주일에 몇 번씩 아버지를 보러 오거나 주방에서 커피 끓이는 뒷모습 등에 마음이 뭉클하다. 그런 아들이 자랑스럽다. 보는 안간힘을 쓰며 아들에게 그 마음을 전한다. 아들은 아버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한다. “잘 알고 있어요, 아버지.”그들이 진심을 전하기 위해서는 짧은 몇 마디로도 충분했다.
작가 리사 리드센은 스웨덴 사람으로 이 소설로 데뷔한 문학가이다. 서른일곱 살의 리드센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처럼 보의 모습을 상세하게 표현한다. 사람이 죽을 때 아마도 리드센이 쓴 흐름대로 갈 거라고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 “주변이 너무나 어두워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중략) 내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무언가가 방향을 바꾸는 듯한 느낌. (중략)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이 맑아졌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그 때를 모른다. 그러니 순간마다 비록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10여년 전 아버님은 뇌종양 수술을 받고 후유증으로 몸에 마비가 왔다. 말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져서 무척 답답해 하셨다. 아버님은 퇴원해서 집에 있기를 원하셨다. 집에서는 수시로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하셨다. 그러면 남편은 아버님을 휠체어에다 모시고 마당에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아버님은 계속 남편의 이름을 어눌하게 부르며 찾으셨고, 남편은 아버님과 산책과 화장실 오가는 일을 계속했다.
한국 방문 중인 나와 아이들은 조금 더 아버님 곁에 머물 작정이었고 남편은 먼저 미국으로 가야 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날 저녁이었다. 남편은 아버님을 모시고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화장실 앞을 서성거렸다. 화장실 문틈으로 노란 불빛과 물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참 뒤 남편은 깨끗하게 목욕을 마친 아버님을 안고 나왔다. 읍! 뜨거운 슬픔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무뚝뚝한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드릴 수 있는 다정한 인사 같았다.
그로부터 4개월쯤 지나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만 급히 한국으로 향했다. 아버님은 아들과 하룻밤을 보내시고 보 노인과 엇비슷한 날에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남편은 짧디짧은 며칠 동안 아버님의 모든 요구에 기꺼이 순종했던 순간들을 두고두고 감사한다.
*이 글은 애틀랜타 중앙일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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