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누가 부른 듯하여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면서 고개를 들었다. 둘째 아들 윤이의 입 모양이
‘마~’를 아직 끝내지 못해서 둥글게 벌어져 있었다. 우리 집 다른 두 사내의 눈길도 나를 향해 모아져 있었다. 다 늦은
저녁에 뭐 그리 애타게 엄마를 찾아댈 일이 있냐는 시큰둥한 얼굴로 그들을 죽 둘러 보았다.
“내일 인크레더블 투(2) 보러 가자.”
“싫어.”
요 몇 달 동안 영화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그러니 보러 가고 싶은 것도 있을 리 없다. 그렇더라도 너무 매정하게 대답을 했나 보다.
“아빠하고 같이 가.”
형 산이랑은 당연히 같이 가는 거니까, 엄마 대신 아빠를 끼워 넣는 것이 적당했다.
“아빠가 싫대!”
영화 구경에 대한 내 의사보다 아빠의 대답이 벌써 있었던 모양이다. 이어폰을 끼고 대중매체의
충실한 수신자 역할을 담당하느라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그럼 형이랑 둘이 가라, 고 성의 없는 두 번째 제안을 했다. 윤이는 무척 실망스러운지 두툼한
아랫입술이 비죽이 내밀어졌다. 다 큰 놈이 부모랑 영화 보러 가자고 하질 않나, 싫다니까 서운해하다니 별일이다 싶었다. 이번엔 거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극장 입장료를 내주겠다며 달랬다. 그랬더니 관두란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세 번째 제안은 대학 마지막 학년을 남겨 두고 있는 청년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린 것
같았다.
“내 기억에는 처음으로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 게 ‘인크레더블’이야. 인크레더블 투가 개봉한 지는 꽤 됐지만 그냥 같이 가서 볼려구
그랬더니….”
윤이는 주절주절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아빠나 엄마의 결정이 바뀔 것 같지 않다고 짐작한
듯이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지간하면 아이들이 보고자 하는 영화의 내용이 궁금해서라도-그래야 얘기 거리도 더 생길 테니- 같이 가겠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럴 맘이 통 생기질 않아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윤이가 며칠 집에 머무르는 동안 가만 보니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어깨가 더 넓어졌다. 애틀랜타한인교회 여름캠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중고등부
수련회에서 카운슬러를 하고 오더니 생각이 깊어진 것도 같다.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슬쩍 엿보였다. 집에 온 첫 날에는 이번 여름에 경험한 것들을 세 시간 넘게 꼼짝 않고
풀어놓았다. 성실한 교회 오빠의 냄새가 폴폴 났다. 집에서는
아직 어린 애 같이 스스로 알아서 하지 않으려 하고 툴툴대는 말투도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 녀석이 영화 보자고 제안하기 전 날에는 책장 앞에서 누워 뒹굴뒹굴 하다가 책장 맨 아래칸에 있는 폴더를 하나씩 꺼내 들쳐본 것을
알고 있다. 애기 적부터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거기서
영화 ‘인크레더블’ 홍보 전단지와 전단지에 쓰여 있는 2005년 1월이라는 날짜를 발견하고는 옛날 추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때도 엄마랑 같이 가서 봤다고 했다. 윤이가 나중에 얘기해주었다.
다음 날 새벽 기도가 끝나고 남편과 함께 교회 주차장을 걸으며 영화관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얼른 그러라고 답했다. 남편은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신앙의 원칙을 깨뜨리는 일이 아니라면 뭐든 하라고
격려한다. 그 원칙은 분명해서 영역이 그다지 넓지는 않다. 내가
하려는 대부분의 것들을 하도록 부추기기까지 하는 편이다. 그래서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다.
어쨌든 아침 식사를 같이 하자고 아이들을 깨웠다. 잠 자리에 있던 아이들은 뭔 일인지
몰라 눈을 뜨지 않았다. 이불을 더 끌어당겨 얼굴을 덮길래 이번엔 내가 주절댔다.
“아들, 엄마도 영화 보러 갈 거야. 영화비도 줄일 겸 오전 꺼 보면 어때? 점심은 아빠랑 같이 밖에서
먹자! 우리가 안 가봤던 식당 트라이(try) 해보자고 했잖아. 아침 먹게 빨리 일어나~.”
내가 식탁에 이르기도 전에 뒤따라 나오는 아들들. 이럴 땐 이십 대 청년이 아니라 애기들이다. 두 아들은 아침에 잠을 깨울 때 나를 성가시게 한 적이 없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일어나라’ 한 마디만 하면 되었다. 산이가 씻고 나갈 준비하는데 느릿느릿 해서 그렇지 잠투정은 도통 없다. 고맙게
여긴다.
우리는 편안하고 여유롭게 ‘인크레더블 투’를
관람했다. 평점이 꽤 높은 영화인데 앞부분은 지루했다. 다만
히어로도 여성이고 악당도 여성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산이는 재미있다며 이 영화 DVD를 사고 싶다고 했다. 윤이는 추억 쌓기 한 거지, 라고 애늙은이 같이 말했다. 윤이 말처럼 영화 하나로 한국과 미국에서, 13년의 간격을 이어주는 추억이 생겼다.
네 식구가 다 모인 점심 시간도 즐거웠다. 집 근처 쇼핑센터 초입에 있는 퓨전식당인데
콜럼비아에 8년째 살고 있으면서 우리 세 사나이들은 처음 가 보았다.
난 전에 한국학교 선생님들과 두 번 간 적이 있어서 오늘의 식당으로 추천한 것이었다. 영화를
같이 보지 않은 남편은 따로 식당을 찾아왔다. 식당은 자주 다니는 길 가에 있다. 남편은 운전해 오면서 식당 주변이 이렇게 좋았나, 새삼 느꼈다고
했다. 남편은 맛의 기준이 하도 높아서 비~싼 궁중요리를
먹으면 모를까 맛난 추억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느낌의 장소가 한 곳 더해진 것 같긴 하다.
요즘 비가 자주 와서 그런지 날이 맑을 때 나온 햇빛은 유난히 깨끗하고 반짝거린다. 극장
앞도 식당 주변도 생기 넘치는 빛들로 가득한 한 나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