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2018

전환시대 2

<2015년 3월 교회 쉘터>


2015 1월 첫 주일이었다. 신년예배 설교를 하면서 남편은 한 해 목회 계획도 얘기했다. 남편은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그 연장선에 있는 두 가지 목표였다. 하나는 친교실 증축이고, 다른 하나는 교단 가입이었다. 우리교회의 과거 역사나 지역사회에서의 평판, 분위기를 갈아 엎고 복음이 자라고 열매 맺을 수 있는 새로운 토양을 준비하자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이 목표들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 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탁의 말도 덧붙였다.

앞서 말한 두 가지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함께 기도하지 않는 분들은 반대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반대하고 싶으시다면 잠잠히 있는 것으로 보여 주십시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상황을 몰고 올 수 있는 말이었다. 뭘 저렇게 까지, 목회 여부를 걸고…… 안정지향적인 나한테는 끔찍했다. 2014년 교인 총회 후에 미국 중북부에서 목회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었다. 아이들과 같이 단란한 가족 여행처럼 다녀왔지만 남편은 내내 묵직한 분위기였던 이유를 그제야 알 듯 했다. 제일교회에서 목회하게 된 하나님의 뜻이 무얼까, 이 시점에서 목회자로서 어떤 지도력을 가져야 할까 고민이 많았나 보다. 가장 가까이에 있어도 마음 속은 정말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맞다. 남편의 성정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보기 좋게 업적을 세워서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을 꾸밀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목회적인 사명을 위해 모험을 감행할 결단과 용기를 얻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제일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 필요한 일들이었다. 이 설교가 교우들 각자에게 어떻게 다가갔을 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목사님의 말씀이 마음에 다가오면 협력하면 되고, 마음에 다가오지 않으면 가만 있으면서 진행되는 일을 지켜보면 되는 것이려니 정도로 이해했다.

신년 예배를 드리고 나서 교회 증축을 반대하는 교우들은 마음이 많이 불편했던 것 같다. 그들은 몇 분 되지 않았지만 교회 의사 결정에 중심이었다. 우리교회는 독립교회로, 그간의 경험에 비춰 연합감리교회의 관례를 따르고 있었다. 지켜야 할 교단 법이나 교리와 장정, 중재할 교단 감독자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목사에게 목회협조위원회 소집을 요청했다. 나중에 들어 알게 된 바로는 회의에서 담임 목사의 사임을 논의했다고 한다. 누군가 제안했고, 일부는 침묵으로, 일부는 반대로 의사 표시를 했고, 결과적으로 목사 사임 안은 부결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몇 년 동안 목사와 교우가 함께 신앙 생활하면서 쌓은 관계가 보잘것없게 느껴져서 슬펐고, 지난 교회 역사에서 목사들을 불신하던 반복적인 태도에 조그마한 변화가 느껴져서 떨렸다.

이렇게 교회 임원들과 교우들 대부분이 새로운 변화를 원하고 있음이 확인되면서 2월 첫 주일에 건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건축위원장으로는 그린집사님이 선택되었다. 설계도가 그려지고 건축업자가 선정되었다. 예산은 57천불(6천만원쯤)이었다. 예산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그리 큰 공사가 아니었다. 원래 있던 친교실의 한 쪽 벽을 허물어 조금 더 넓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민 생활을 해보니 현실로 보나 교회 문화로 보나 목돈으로 헌금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증축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이것을 반대하던 이들은 어느 날부턴가 교회에서 볼 수 없었다. 그때의 심정을 담아 블로그에 올렸던 글, 마냥 좋지는 않아도 봄은 새롭다의 마지막 부분이다.

구태의연한 교회에서 벗어나서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흐름이 교우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마음들이 모아져 결정된 친교실 증축이 못마땅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마냥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우들 대부분이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 뜻이 무엇일까를 묻고 또 물으며 이 새로운 변화의 흐름에 끈기 있게 동참하고자 마음 먹고 있다. 생명이고 진리이신 주님이 동행해주시길 겸손히 바라며 새로운 길을 가다 보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음을 고백하게 되리라 믿는다. 새로운 변화를 이어갈 담대한 용기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길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 이제 남편이 제안한 방법대로 대출을 받지 않고 건축비로 57천불이 모아져야 했다. 여기에 덧붙여 남편은 교우들이 헌금하고 모자라면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 마이!!! 이상주의자, 대의를 앞세우는 남편을 만나면 이런 위험을 살아가는 동안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연애할 땐 이걸 몰랐다, 젠장.

남편도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니 믿음으로 선포한 것으로 알아들었다. 교회 건축에 있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한국에서 목회할 때 이미 체험한 바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남편은 책임이라는 표현은 일이 완성되도록 하겠다, 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재정적인 책임이 아닌 다른 의미로 알아들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하여 기대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증축을 적극적으로 원하던 분들이나 사는 형편이 넉넉해 보이는 분들이 나서주길 은근히 바랐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남편이 아니었다. 남편(이런 일이 닥치면 그는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다)은 본을 보여야 한다며 어찌어찌 마련한 건축헌금을 먼저 드렸다. 몇 분도 동참하셨다. 그래도 2만불 정도가 부족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교회 밖의 일을 해 본 경험이 거의 없고 영어로 말하는 것도 엉성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감이 없었다. 해야 할 것 같은 생각만 자꾸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님께 묻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사순절이 끝나는 날, 알고 지내던 이웃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이가 일하는 회계사 사무실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이었다. 회계에 대한 아무 지식도 없었는데 이 소심한 인간이 용감하게 지원을 했다. 대학 시절부터 회지나 문서 따위를 만들면서 타자기나 컴퓨터를 조금 다루었던 경험이 무척 도움이 되었고, 나름 꼼꼼한 성격이 회계라는 일을 하는데 제법 잘 맞았다. 또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역사회를 좀 더 알아가는 좋은 기회였다.

이 일을 통하여 얻은 수입은 건축비에 보태는데 도움이 되었다. 교회에서는 경상비가 줄어들었음에도 목사의 생활비는 꼭 챙겨주셨다. 하지만 그대로 시간이 지나면 교회 재정은 적자가 날 상황이었다. 남편은  나의 수입이 있으므로 한동안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를 줄여서 적자가 되는 부분을 메꾸었다. 교회나 내게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한 시기를 지내고 보니 3년의 시간이 흘렀다. 내 삶의 3년 동안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한 그 이웃과 일자리를 내어준 회계사님께 고마운 마음이다. 무엇보다 내가 어디서 무얼 하든 언제나 조용히 동행해주신 주님께 감사 드린다.  

폐암 말기를 선고 받은 양권사님은 방사선치료와 약물치료를 받고 계셨다. 양권사님의 남은 생명을 삼 개월에서 육 개월이라고 한 의사의 진단은 빗나가고 있었다. 아프신 중에도 예배를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고 계셨다. 권사님은 해마다 고구마를 농장에서 직접 구입하여 한인들에게 판매하곤 하셨다. 수익금은 주로 교회를 위해 쓰셨다. 친교실 증축이 소원이라 한 것이 강력한 동기가 되어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었으니 이번에도 고구마를 팔아서 건축비에 보태겠노라 말씀하셨다. 권사님은 특유의 긍정적인 마음으로 아픔을 잊은 체 고구마를 열심히 실어 나르셨다

고구마 판매에는 교우들이 모두 동참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족한 건축비 2만불을 책임져야 하는 남편은 열과 성을 다해 고구마를 팔았다. 권사님, 권사님의 남편 딕스집사님, 그리고 남편은 고구마를 멀리까지 배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같은 주뿐 아니라 노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주의 여러 감리교회가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한 고구마라는 이유로 기꺼이 사주셨다. 동참해주신 동료 목사님들과 교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이제라도 전한다. 예산으로 세운 건축비용은 모두 마련되었다.

관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10월에는 우리가 사는 콜럼비아 지역에 큰 홍수가 났다. 날씨의 변동이나 자연재해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 지역 주민들은 많이 놀랐다. 당시 주지사였던 니키 헤일리는 1000년에 한 번 겪을만한 최악의 홍수라고 말했다. 건축하는 사람들이 공공 업무와 더 시급하게 건물을 지어야 할 일들에 손을 보태느라 우리는 더 기다려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남편은 우리교회의 교단 가입을 위해 절차를 밟고 있었다. 2015년은 새해 첫머리에 세운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긴장과 헌신과 기다림으로 채워진 한 해였다. (계속)

4/23/2018

전환시대 1

걷는 이
<2014년 교회 모습>

우리 가족이 콜럼비아제일교회에 오기 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편인 김성은 목사가 제일교회에 부임하기도 전에 친교실을 넓히려는 계획이 있었다. 교회가 부흥되어 교우들의 수가 조금만 더 많아져도 친교실이 복잡했다. 그러니 손님들을 초청하는 행사 때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러 교우들이 친교실 증축을 건의하였고 그러한 요구들이 모아져 증축을 위한 몇 가지 일이 진행되기도 했다. 2008, 설계도가 그려졌고 어떤 건축업자의 공사비 제안서도 있었다. 그에 따라 은행 대출도 받았으나 미국 금융 위기기 시작되면서 대출도 되갚아버리고 이 일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2011,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고향이 된 애틀랜타를 떠나 사우스 캐롤라니아 주의 주도인 콜럼비아로 이사 왔다. 우리가 온 그해부터 일년을 마감하는 교인 총회가 열릴 때마다 일부 교우들에 의해 친교실 증축에 대한 안건이 계속 상정되었다. 목사님은 증축에 대하여 온 교우가 한마음 될 때까지 기도하자고 했다. 그때 우리 교회는 아이들을 포함하여 35명쯤 되었는데, 교우들이 점점 더 결합하면서 50명쯤 모이는 작은 교회였다.

2014 8월이었다. 연세가 칠십 중반 되신 양권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서 폐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하셨다. 남편과 나는 열 일을 제치고 권사님 댁으로 달려갔다. 권사님은 사실 수 있는 날들이 삼 개월 내지 육 개월 정도라고 의사로부터 들은 말을 전해주셨다. 권사님의 남편 되시는 딕스집사님은 무거운 표정으로 아무 말씀도 없었다. 나는 2013년 뇌종양 수술을 받으시고 몇 개월 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체 계시다가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서, 양권사님이 암 말기라는 얘기에 상황이 예측되는듯하여 마음이 무척 아프고 슬펐다.

권사님은 그 즈음에 시편을 한국어로 읽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앞으로도 계속 읽을 것이고 그래서 괜찮다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주셨다. 죽음이 눈 앞에 있는데 그리 말씀하시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분명했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 말이 제일 편한 권사님이신데, 남편 덕에 영어도 하시고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한국어도 하시게 되었다. 처음 권사님을 만났을 때는 일본어 성경을 가지고 다니셨는데 점차 한국어 성경을 읽기 시작하셨다.

이어서 권사님은 교회와 관련하여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권사님은 친교실이 증축되는 것을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권사님께서는 사람들과 사귀고 어울리는 것을 아주 기쁘게 여기시고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또래 모임이나 예배도 열심히 참여하신다. 그래서 그런 소원을 갖게 되셨으리라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나는 권사님의 소원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룰 수 없는 소원인듯하여. 교회에서 증축을 결정하는 일도 어려울 뿐 아니라 결정이 된다 해도 몇 개월 안에 지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양권사님의 건강 상태는 교우들에게 빠르게 알려졌다. 남편은 교우들에게 권사님의 남은 생이 평안하시길 중보 기도하자고 부탁했다. 동시에 권사님의 소원에 대해서도 전해주었다. 정기 임원회 때도 그 소원은 안건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친교실 증축을 원하지 않는 이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증축을 놓고 기도하지도 않고 있었다. 사실 기도의 자리에 가 있을 뿐 기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지도 여러 해가 지난 생태였다.

나와는 달리 남편은 깊이 기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우리를 대하는 어떤 교우들의 마음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면, 남편은 하나님의 마음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남편은 가능성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여름에 양권사님이 교회에 대하여 가진 마지막 소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떨렸다고 했다. 가톨릭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은 우리 인생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고 고백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리키는 살아 있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우리 곁에 살아 있든, 우리 기억 속에 있든, 하나님이 인생길에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은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고 보여준다.”(분별력, 140)

헨리 나우웬은 공동체에서 만난 장애인, 가톨릭 성인들, 짧은 만남의 방문자, 제자, 동료, 등등을 말하는데, 남편에게는 양권사님이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교우들 가운데 교회 증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2002년 교회를 지으면서 받은 대출금에서 아직도 7만불 정도가 남아 있기에 그걸 먼저 갚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빚이 있는데 또 빚을 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수긍이 되는 이유였다. 이 대출금은 교회 경상비에서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갚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양권사님을 비롯하여 일부 교우들이 친교실 증축을 바라자 대출금 상환을 위한 헌금을 해서 빚을 먼저 갚으면 증축에 찬성하겠다고 했다. 이 의견은 온 교우들에게 알려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빚을 갚기 위한 목적을 위해 한 가정만 헌금 했다. 빚을 다 갚기에는 너무 적은 헌금이었다.

우리 교회에는 목회자와 교우들이 함께 참여하여 이루는 승리의 경험이 필요해 보였다.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창립한 후 13년 동안 11(담임자가 아닌 목회자도 있었던 것 같다)의 목회자가 바뀌었다. 그 중 한 분이 3년을 담임하셨으니 다른 분들은 일년 남짓 목회를 하신 것이었다. 미국연합감리교 교단에 가입하려는 노력은 가입 조건에 맞지 않는다 하여 번번히 거절되었다. 한국감리교 교단에 가입했던 적도 있으나 금방 탈퇴하였다. 부흥의 기쁨을 맛본 때도 있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남편은 12번째 부임한 담임 목회자이고 4년차 목회를 하고 있었다.

연말이 다가오고 또 다시 교인 총회를 준비했다. 남편은 그 동안 기도하면서 얻은 생각을 나에게 털어 놓았다. 증축에 드는 비용을 온전히마련하면 대출금 상환하는 것은 경상비에서 평상시대로 하면 될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도대체 이렇게 셈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 불안했다.

남편은 12월 교인 총회에서 증축에 대해 거룩한 부담이 생기고 계속 기도하고 있다며 이 사안을 추진해보자는 의견을 말했다. 예상대로 반대가 있었다.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전처럼 증축에 대해 결정된 것도 없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제시된 방법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자는 것이 달랐다. 막연한 연기가 아니었다. 남편도 대출금을 먼저 갚을 수도 있고 증축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약간의 여유를 두었다.

총회가 끝나고 긴장감이 떠나지 않았다. 증축을 반대하는 이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남편은 꾸준히 기도를 이어갔다. 남편은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진행시키겠다는 확신이 든다면 우리 가족이 감당해야 할 경제적인 부담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난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에 큰 전환을 이루려면 그만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나간 목회 여정에서 배워왔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부담이었다

좋은 이웃이 있었는데 그이가 새로운 직장을 얻어 일을 시작한 것을 들었다. 그 들음은 나도 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확장시키는 씨앗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