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2014

작은 화분 속의 기적




뒤뜰 쪽으로 난 창문 아래에 좁고 길쭉한 꽃밭이 있다. 꽃 몇 뿌리만 심으면 꽉 차는 조그마한 공간이다. 그래도 아침에 블라인드를 열었을 때 고운 빛깔로 웃음을 건네는 몇 송이 꽃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꽃밭의 한쪽은 백합이 심겨져 있다. 부활주일 강단을 장식했던 백합 화분들에서 나의 꽃밭으로 이사온 녀석들이다. 백합의 알뿌리는 번식력이 좋은지 해가 지날수록 봄이면 올라오는 꽃줄기가 늘어나고 있다. 나머지 공간에는 메리골드, 빈카 따위를 심었었다. 이런 한해살이 꽃은 해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여러 종류의 꽃들을 심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다가 올해는 여러해살이 식물에 마음이 더 가길래 제라늄과 데이릴리를 두 뿌리씩 심어보았다.

물만 줄뿐인데 제라늄은 빨간색 꽃을 연이어 피우고 있다. 키우기 쉬운 식물이지 싶다제라늄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생각 밖으로 이 꽃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종류도 색깔도 다양했다. 잎에 독특한 향이 있어서 모기가 오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단다. 또 가지를 잘라 심어놓으면 어느새 한 그루의 제라늄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꽃이 많이 피는 제라늄과는 달리 데이릴리는 서너 주가 지나도 처음 심어놓았을 때와 별다른 차이 없이 가느다란 초록 잎만 보여주었다.

이파리 사이사이에 징그러운 고놈들이 아주 많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물을 주러 나갔는데 데이릴리에 민달팽이들이 여러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제라늄이나 백합 쪽에서는 민달팽이를 찾아볼 수 없는데 바로 옆에 있는 데이릴리의 이파리에서는 꿈틀대고 있었다. 민달팽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그것들이 징그럽고 싫었다. 하루 이틀 두고 보니 이파리들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고놈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이파리가 노랗게 죽어갔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벌레나 곤충들을 별로 안 좋아하기에 남편에게 민달팽이를 처리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걔네들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냥 두라는 것이다.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서 집 벽에도 덕지덕지 붙어 기어 다녔다.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퇴치법을 찾아보니 맥주에 담배 가루를 뿌려 놓으면 맥주 마시러 왔다가 담배의 독성 때문에 죽는다는 얘기만 많았다. 민달팽이 잡자고 맥주나 담배를 사느니 집에 있는 곤충 잡는 약이라도 뿌려보자고 했다. 화학약품이 안 좋으니 뭐니…… 대의명분으로 사는 남편도 아침마다 민달팽이를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는 아내의 끈질긴 볼멘소리를 못 견디고, 약도 뿌리고 몇 마리는 직접 잡아 죽이기도 했다. 결국 할 거면서 왜 그리 버티는지 모르겠다.


그 후로도 그것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데이릴리의 이파리를 괴롭혔다. 꽃봉오리도 갉아먹어서 똑똑 떨어뜨려 놓았다. 노란 색 꽃 한 송이가 겨우 살아남아 피었는데 꽃이 너덜너덜 했다. 불쌍했다. 잘 돌보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다 헤어진 노란 색 이파리들한테 미안해서 그 다음부터 내 눈에 띄는 민달팽이는 다시는 초록 잎의 맛을 보지 못하도록 엄단했다!

이렇게 그것들에게 맘을 독하게 먹은 이유가 또 한가지 있다. 첫째 아이가 어머니 날이라고 사온 페튜니아가 있었다. 특수학급 선생님, 친구들과 단체로 가서 샀을 것이다. 딱 주먹만한 화분에 심겨져 있는 진분홍색 꽃이었다. 학교를 통해서 어머니 날 꽃을 받는 것은 마지막이기에 오래 두고 볼 요량으로 민달팽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제라늄 근처에 옮겨 심어놓았다. 그런데 민달팽이가 페튜니아는 데이릴리 보다 더 만만한지 홀딱 먹어버렸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줄기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른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남은 페튜니아 줄기를 원래 것보다 조금 큰 화분에 심어주고, 민달팽이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생명력이 강한 페튜니아라도 손상이 심해 보였다. 줄기 끝이 마르고 있었다. 민달팽이를 포함해서 꽃밭을 둘째 아이에게 맡기고 한국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돌아와 꽃밭을 살펴보니 민달팽이가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 볕에 다 숨어버렸는지 어쩐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제라늄은 착하게도 여전히 붉은색 꽃을 내놓고 있었고 데이릴리는 더 이상 민달팽이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고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페튜니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잎과 꽃이 화분에 가득했다. 포기하지 않고 물만 주었을 뿐인데 말이다. 와우!

꽃나무를 괴롭히는 민달팽이는 언젠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 지금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줄기만 짤록하게 남아 말라 들어가던 페튜니아가 다시 살아 진한 분홍색 꽃을 피우는 것을 바라보면 기적 같다. 이 작은 화분 속에서 일어난 기적이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길 바라는 우리 교회나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8/18/2014

지나친 슬픔







1992, 텔레비전에서 성탄 특집으로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방송한 적이 있다. 그 방송을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두 아이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술이면서도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한 수술이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조용한 울음도 계속되었다. 해맑은 아이들이 수술 후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감정은 점점 짙어졌다.

수술 후 3일이 지나 쌍둥이 가운데 한 아이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쯤에서는 내 목구멍이 조여오는 아픔을 느꼈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을 쉬려고 해도 몸이 맘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목줄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얼마간 견디다가 다시 숨이 돌아와 살았다. 울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첫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다음 해에 아이가 태어났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송을 볼 때는 내 아이가 장애아일줄 꿈에도 몰랐는데 뭐가 그렇게도 슬펐는지 죽을 만큼 울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몇 달 뒤, 극장에서 영화 서편제를 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본 이 영화의 줄거리를 짧게 정리해 보면 이렇다. 소리꾼인 유봉은 금산댁을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유봉에게는 양딸인 송화가 있고, 금산댁에게는 아들 동호가 있다. 금산댁이 유봉의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된다. 유봉은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고 동호에게는 북 치는 것을 배우게 한다. 소리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던 시절이라 세 사람의 삶은 퍽퍽하기만 하다. 동호는 이러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유봉과 송화의 곁을 떠난다.

유봉은 소리란 한()에 사무쳐야 제대로 나온다고 여기고 송화에게 약을 먹여 눈을 멀게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송화를 남겨두고 유봉은 세상을 뜬다. 그렇게 송화와 동호는 각자의 삶을 살다가 어느 주막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송화는 소리를 하고 동호는 북을 치게 되는데, 앞을 못 보는 송화는 북소리만으로 동호임을 짐작한다.

이 오누이가 만나 북장단에 맞춰 소리를 하는 장면에서 난 또 한번 죽는 줄 알았다. 이미 몇 달 전에 울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있기에 감정을 조절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헤어져 살던 오누이가 마주 앉아 서로를 아는 체 하지 않고 들려주는 소리와 북소리에 내 온몸이 잠기는 것 같았다. 그들의 한이 온몸을 절절히 파고 들어 절여놓는 느낌이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극장이기도 하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간 남편에게 우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소리를 내지 않고 울다가 또 목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두 번의 울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한 뒤로 슬픈 영화나 드라마 따위는 아예 보지 않기로 했다. 어찌하다 보게 되더라도 목석 같은 심정이 되어 보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요즘 동영상도 아니고 멈추어 있는 사진 한 장만 보아도 가슴이 저릿하면서 눈물이 고이는 경우가 자꾸 생긴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광화문에서 단식하고 있는 희생자 아버지의 초췌해져 가는 모습,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가다가 경찰에게 끌려 나와 실신한 희생자 어머니가 길바닥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모습, 세월호 참사로 인해 죽어간 희생자들을 기억해 달라며 십자가를 지고 900 km를 순례한 희생자 아버지들의 울먹이는 모습……

샴쌍둥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영화 서편제를 보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슬픔을 느낀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소식들을 듣고 보면서 그 이유를 이제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생명, 가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보호되고 지켜내야 하는 소중한 가치들인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그 가치들이 존중 받지 못하고 훼손될 때 아픔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내 나름의 삶의 굴곡과 장애아를 자녀로 둔 어미의 심정이 보태어져서 그런 슬픔을 느꼈나, 짐작해 본다.

아직은 나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그 울음이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오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말씀에 기대어 보아야겠다

8/10/2014

전문가와 비전문가


아들 산이가 찍어놓은 사진이 있길래... ^^


얼마 전 한국 여행 갔을 때 지난 해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타시던 자동차가 아직 있어서 편안하게 다닐 수가 있었다. 집에서 먼 곳으로 외출할 경우는 버스와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고 집에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곳은 자가용으로 이동했다.

그날도 친구를 만나기 위해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라 교통량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 복잡한 시내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라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자주 이용하곤 했다. 터널이 여러 개 연속해서 나오는 구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같은 차선에서 빠르게 저만치 앞서 달리던 자동차의 빨간 브레이크 등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내 차의 속도도 줄이면서 옆 차선을 보니 다른 자동차들은 쌩쌩 달리고 있었다.

뭐지? 차선을 잘못 선택했나 보군, 생각하는 순간 자동차 범퍼 보다는 작은 크기의 디귿 자 모양을 가진 물체가 내 차 앞에 뚝 떨어졌다. 내가 탄 자동차의 왼쪽은 터널 벽이고 옆 차선에는 자동차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그 물체를 밟고 지나갈 수 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오른쪽 앞 바퀴가 그 물체를 타고 넘는 것을 느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고 운전하는 내내 계기판 어딘가에 주황색의 경고 등이 혹시라도 들어오는 지 신경을 써야 했다.

다행히도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동안 자동차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 소심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문제가 있다가 자동차가 달리는 도중에 탈이 날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운전이나 조심스럽게 할 줄 알았지 자동차 구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쪼그리고 앉아 자동차 밑면을 들여다 보았다. ! 자동차 아래로 액체가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에어컨디션을 사용했으니 물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겁이 덜컥 났다.

자동차 수리나 검사를 하는 카센터를 운영하는 P 집사한테 득달같이 전화를 했다(미국에서라면 남편에게 전화 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친분이 있는 전문가에게 문제 상황에 대해 한국말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나 편안하던지…). 상황을 짧고 다급하게 설명을 했다. 집사님은 떨어지는 액체가 투명한 지 색깔이 있는 지 살펴보라고 차분하게 알려주었다. 다시 몸을 구푸려 살펴보니 색깔이 있거나 냄새가 나는 액체가 아니니 물인 것이 분명했다. 집사님의 한 마디에 자동차에 대한 걱정이 싹 날아가버렸다.

P 집사는 남편과 함께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자신도 자동차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있는 듯했다. 나중에 이 상황에 대해 다시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 전화로 정비 한 건 했어요라고 말하는 집사님 때문에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자동차에서 떨어지는 액체를 분별하여 문제가 있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은 상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동차 수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게는 P 집사의 처방은 전문가의 소견이었다. 나는 상황에 따라 지레짐작 하여 불안했지만 집사님은 차분하고 명료하게 대처했다. 비전문가와 전문가의 차이인가 보다.

그러고 보면 자동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난 어리바리 비전문가다. 그래서 삶을 바라보는 시야도 좁고, 생활이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않다고 여기기도 한다. 어느 순간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기도 하지만 많은 시간 동안 염려를 떨치지 못하기도 한다.

주일 예배 설교 시간에 베드로후서 3장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목사님은 한 사람의 인생도 끝이 있으며 지구를 포함한 모든 별들도 언젠가는 소멸을 겪게 될 것이니, 우리는 하루를 천 년 같이 천 년을 하루 같이 여기며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자고 했다. 그리고 죽음과 소멸은 끝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이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으니 그 약속을 믿고 살자는 것이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한 시간이 아니라 평강 가운데 말이다.

신앙인들이 늘 듣는 평이한 설교 같아도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은 나에겐 마음에 찔림을 주는 설교였다. 내 삶의 문제를 진단해주고 기꺼이 고쳐주는 전문가는 성경과, 그 성경을 해석하고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는 지금의 담임목사라는 생각이 든다

8/04/2014

청년 시절과는 다른




어렸을 적에는 내가 노래를 꽤 잘 부르는 줄 알았다. 이미 다섯 살 즈음에 대중가요의 제목만 대면 노래를 줄줄이 불러댔다고 친지 어르신들은 두고두고 얘기해 주셨다. 또 내 세상의 삼분의 일-가정, 학교, 교회가 내 세상의 전부였다-을 차지하는 교회에서 찬송 부르기 대회를 하면 상을 제법 받곤 하였다. , 고등부 시절에는 이웃 교회와 연합으로 찬송 부르기 대회를 해도 상 받는 자리에 한번씩 불려 나가곤 했다.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상을 두루두루 나눠 주었다 해도, 스스로 노래를 잘 하는 줄 착각할 만큼 격려를 많이 받았다

그러다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대학에 들어가서는 누가 보아도 노래 잘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면서 내 노래 실력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음역도 엄청 좁고, 음정과 가락을 익히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무엇보다도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닌 사람이란 걸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래 부르는 실력이 별로 없다는 걸 알아갈 청년 시절에 교회 성가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노래는 좀 못 불러도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 청년이었기에 성가대 자리라도 채우라고 성가대원을 시켜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성가대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지금 다니는 교회의 성가대를 4 년째 하고 있다. 와우! 지금도 여전히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나 성가대에 참여하는 태도는 청년 시절과 달라진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노력을 조금 더 한다는 것이다. 다같이 연습하는 시간에 음정을 다 익히지 못하니 집에 악보를 가져와서 한두 번이라도 연습을 더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음정이 불안한 곳에서는 붕어 같이 입만 벙긋거려야 하기 때문이다(지휘자나 성가대를 바라보는 교인들도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 지 늘 궁금하다. 그래도 물어볼 수는 없다. 만일 그들이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면 난 더 이상 성가대에 설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가사를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청년 때와는 달라진 점이다. 성경 말씀으로 가사를 삼은 것도 좋고, 찬송가를 편곡한 것도 좋고, 새로운 내용의 가사도 다 좋다. 예배 드릴 때 들려질 성가 곡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다. 우리 교회 성가대에 참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날 찬양을 할 때였다. “어버이의 그 사랑 나 어릴 때 몰랐으나 어른 되어 이제서야 그 사랑 알게 됐네라는 가사에 목이 턱 막혀 노래를 부르지 못한 적이 있다. 내가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할머니 생각이 나서였다. 할머니께서 베풀어주신 그 사랑을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할머니께 잘 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 뒤로는 감정에 치우쳐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으나 마음 속으로는 울컥 울컥 하는 위로와 믿음을 주는 가사를 만날 때가 있다. “주 찬양해 주 찬양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를 부를 때는 마치 천사들의 손에 들려진 나팔이라도 된 양 입을 쩍쩍 벌려 본다. 복식호흡으로 내는 소리가 나오기는커녕 목을 쥐어짜는 소리가 나올지라도 말이다.

세 번째는 여러 사람이 내는 음이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즐겁다. 새로운 곡을 받으면 곡이 예쁘네, 어렵네, 재미없네,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삐죽삐죽 울퉁불퉁 제 각각의 소리를 내는 것 같아도 여러 주에 걸쳐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파트마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동시에 다른 파트와 화음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 교회 성가대원은 아홉 내지 열 명 남짓이다. 웅장한 소리가 나올만한 인원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가대원 가운데 서운해 할 사람이 있을 지 모르나 노래 부르는 실력이 특출한 사람 없이 다 그만 그만 한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건가, 싶기도 하다.

우리 성가대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최고의 성가대이며 어려운 곡일수록 더 잘 부르는 성가대로 우리끼리(!) 인정한다. 우리 성가대는 나같이 노래를 못하는 사람도 참여할 수 있고, 성가대원이 되고 싶은 교인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서 좋다. 우리끼리 인정하는 최고의 성가대의 한 사람으로써, 주일 예배에서 성가를 부를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