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2013

IEP (1)


<고등학교 첫해에 참석한 홈커밍 파티에서 >
 


IEP Individualized Education Program 혹은 Individual Education Plan(개별교육프로그램)의 준말이다. 나의 첫째 아들 강산이 같이 장애가 있는 학생(student with special needs-장애인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로는 the handicapped, the disabled, 그리고 special needs 따위가 있다. 그 가운데 special needs가 제일 맘에 든다)은 일 년에 한 번씩 IEP를 검토, 수정, 보완하기 위한 모임을 갖는다.

보통은 일 년을 주기로 IEP 모임을 갖지만 일 년이 되지 않았을 때에도 장애학생을 교육하는데 IEP 모임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부모나 교사는 언제고 모임을 요청할 수 있다. IEP 모임 일정은 학교측에서 한 달 전, 그리고 적어도 5일 전, 이렇게 두 번 알려주도록 되어있다. 한 달 여유를 두고 모임 날짜를 알려주지만 사정이 생기면 날짜와 시간을 형편에 맞게 조정할 수도 있다.

이 회의에는 학생, 부모, 특수학급 교사, 일반학급 교사는 꼭 참석하고 IEP를 결정해야 하는 사항에 따라 학교 심리학자, 과도기 전문가(transition specialist), 상급학교 교사, 학교 사회복지사(school social worker) 등이 참석하기도 한다.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부모는 통역사를 요청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부모 입장에서 교사들에게 내 아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학교 밖에서의 생활을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을 초청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교회학교 교사나 과외활동 지도교사 등이다. 이런 경우에 부모와 함께 동행하는 사람에 대하여 학교에 미리 알리는 것이 예의인 것 같다.

IEP 모임에 대해 알고 있는 일반적인 규칙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미국에서 아이를 어려서부터 키운 부모나 이민 생활이 오래된 부모들은 IEP에 대한 경험이 많을 터이니 여기에 덧붙일 것들이 더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강산이는 현재 공립학교의 과도기 학급(transition class, 18-21 )에 속해 있다. 장애가 있는 학생은 공립학교에 만 21 세까지 다닐 수 있도록 특수교육법에 정해져 있다. 과도기 학급은 학교를 떠나서 사회에 나가면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일자리를 얻어 봉사하거나 급여를 받아 생활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곳이다. 과도기 과정을 위한 계획은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는 만 14 세부터 세워진다. 그리고 고등학교 4년 과정 이후에 과도기 학급에서는 사회에 통합할 수 있는 학습과 훈련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부모님은 고등학교 이후에 정규 교육 과정으로 과도기 학급에 다니는 아이들을 두고 대학 다닌다고 재미있게 얘기하기도 한다.

미국에 와서 처음 살았던 애틀랜타에서 첫번째 IEP 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선생님들이 물어보는 것에 답하는 것 밖에는 말을 거의 안 한 것 같다. 이 모임의 성격도 잘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학교에 처음 다니게 되는 강산이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아 속이 상해있기도 했다. 낯선 사람과 환경 속에서 강산이는 자기를 어떻게 표현할 줄 몰라 몸도 마음도 웅크리고 있던 때였다. 언어도 통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선생님이 뭘 지시해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 지시를 따를 수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선 한 학년이 새로 시작되는 시기였으나 미국은 학년 말이어서 많은 부분 기다려주고 설명해주어야 하는 새로운 전학생이 그다지 반갑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학교의 입장을 이해하고 학교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하며 두어 달을 괴롭게 보내고 모인 자리였다.

그 모임에는 고등학교 선생님 두 분이 와 있었다. 강산이는 한국에서 홈 스쿨을 하다가 남편의 목회지가 옮겨지면서 더 이상 홈 스쿨을 할 수 없어 뒤늦은 만 9 세에 초등학교 일 학년에 입학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왔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수업을 받으러 간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측에서 강산이를 어찌 생각했는지 나이를 문제 삼았다. 미국 학제에 따르면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나이이므로 고등학교 선생님을 초청했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왔으니 미국 법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나 중학교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는 것이 어찌 이상했다. 학생, 부모, 선생님이 동의가 되면 나이가 한 살 많아져도 중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다른 장애학생 부모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선생님 두 명 가운데 남자 선생님은 짧지만 한국 경험이 있는 분이었는데, 강산이에게 다가가 한국 말로 인사를 나누어주셨다. 또 다른 선생님도 잔잔한 목소리로 영어 인사를 건네며 웃어주셨다. 강산이는 고등학교 남자 선생님과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면서 관심을 나타냈다. 매가리가 하나도 없고 웃음을 보여주지 않는 중학교 담임 선생님과 심술궂고 딱딱한 표정의 특수학급 전담 교감 선생님과는 참으로 대조적이었다(이러한 인상은 중학교 선생님들이나 나나 서로에게 마음이 열려있지 않았기에 그리 보였을 거란 걸 안다). 세 시간 가까이 엄청 오랫동안 진행된 IEP 모임에서(그 이후에는 평균적으로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함께 참석하고 있던 강산이는 매우 의젓한 태도를 보여주었고 중학교 교감 선생님의 친절한(!) 지시에 따라 주어진 과제도 문제 없이 수행했다. 중학교 측의 강산이를 밀어내는 듯한 입장이나 고등학교 선생님들과 강산이 서로의 호의적인 태도, 공립학교에 소속된 어느 한국인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강산이는 하루가 다르게 적응해 나갔고, 일 년이 지나 IEP 모임에 갔을 때는 학교 생활을 즐거워하고, 자기 반 친구들 친절하게 잘 도와주며, 게다가 영어로 학교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선생님 말씀에 깜짝 놀랐다. 우리 식구 중에서 영어를 두려움 없이,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강산이가 되었다(강산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보다 한국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한국어를 읽거나 쓰는 것도 문제 없다. 이 또한 자랑스럽다). 또 여기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럼비아로 이사 와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동생 윤이가 전해주는 말에 따르면, 형이 학교에서 무척 인기가 높고 아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특히 여학생들과 친한데 서로 아는 척하며 포옹하는 것을 늘 본단다. 누굴 닮은 것인지……

지난 주에 강산이를 위한 IEP 모임이 있었다. IEP 회의에 가려면 늘 긴장됐는데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다. 여러 해 동안 IEP에 참석했다고 여유가 생겼나, 생각했다. 담임 선생님이 미리 작성한 IEP 초안을 가지고 회의를 하다 보면 그 문서의 내용이 자세하고 강산이에게 필요한 교육 목표들을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어서 질문하기 보다는 잘 듣고, 동의하고 그와 관련된 강산이의 강점을 애기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강산이가 사회로 나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지 직업 훈련과 관련된 질문들이 여러 개 떠올랐다.
 
---다음에 이어서

10/17/2013

아버님, 편안히 가세요


한국에서 보내준 사진


 
한국에 계신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데 나와 아이들은 그냥 여기, 미국에 있다. 마음이 아주 불편하다. 이렇게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쓸쓸할 지 몰랐다.

올해 2월 간암 수술과 6월 뇌종양 수술을 받고 집에서 투병하시던 아버님께서 음식을 전혀 못 드시고 호흡이 아주 거칠어지는 등 건강 상태가 아주 많이 안 좋아지셨다. 가까이서 아버님을 돌보시는 어머님은 첫째 아들인 남편이 한국으로 빨리 와주길 바라셨고 남편도 서둘러 비행기편을 알아보고 고향집으로 날아갔다. 아버님의 병과 수술, 그 후 건강이 악화되는 과정을 함께 겪으신 어머님과 뇌종양 수술 후 병원에 머무르며 아버님 상태를 잘 알고 있던 남편은 아버님에게 닥칠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있던 것 같다.

아버님은 화요일 저녁 늦게 한국에 도착한 남편과 하룻밤을 보내셨다. 한국이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을 즈음에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둘째 아이 윤이와 나는 전화로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그 동안 할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던 강산이는 할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면 자꾸 울어서 전화 통화하도록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그 동안 고마웠어. 할아버지가 있어서 좋았고, 할아버지가 곁에 없어도 우리 마음에 있을 거야. 하늘 나라에 가서 편안히 계셔. 할아버지, 사랑해.”

아무 대꾸도, 소리도 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께 윤이는 차분하게 자신의 마음 전했다. 나는 말보다 울음이 앞서 제대로 말을 못했다. 그리고 나서 그날, 10월 16일 수요일 낮 1 30(한국 시간)에 편안히 숨을 거두셨다.

아버님은 성실하고, 약간의 유머가 있으시고, 곧은 소리 잘하시고, 볼멘소리 하시면서도 어머님을 잘 도와주시고, 손주들에게는 무뚝뚝한 분이셨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권장하던 시기에 마을 이장 하시면서 솔선수범해야 한다며 아들 둘만 낳고 그만두신 결단력 있는 분이다. 그리고 두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기 위해 아주 열심히 농사 지으셨다고 한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 이상으로 대학원을 나와 목사와 특수학급 교사로 아버님처럼 성실하게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버님은 30 대에 교회 장로가 되셔서 돌아가시기 까지 목사들을 도와 교회를 섬기셨다. 세상 즐거움을 엿보지 않고 하나님 믿는, 신앙 안에서만 기쁨을 누리셨다. 그렇게 사시다가 육신을 가진 삶을 조용히 마무리 하시고 영원한 삶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로 떠나셨다.

앞으로 아버님과의 마지막 시간들을 기억할 때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남편이 돌아와 아버님 장례에 대해 들려주는 얘기가 내 기억에 보태어질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님을 조문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대접하며, 그러는 중에도 장례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이렇게 저렇게 마음 쓰고 있을 가족들의 고단함에서도 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

여기 분위기는 담담해. 다들 농촌에서는 추수가 끝나서 제일 한가로운 시간이고, 날씨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좋은 계절에 가셨고, 그리고 내가 여기 급하게 오고 다음날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돌아가셔서 복되다고 하셔.”

남편이 보내준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다.

담담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남편만 한국에 가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함께 가 뵙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어쩌다 이리 멀리 떨어져 살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자꾸 파고들어 난 새벽기도 때마다 소리 없는 울음을 참았다. 차라리 가족들과 조문객들과 섞여 함께 있는 편이 아버님의 죽음을 곱씹으며 장례 과정을 상상만 하고 있는 것보다 덜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가 있는 남편이 알려준 대로라면, 아마도 이 글을 올릴 때쯤(한국 시간으로 금요일 오전 9) 장례식장을 떠나서 평생 섬기시던 교회에서 발인예배를 드리고, 12 시쯤이면 아버님의 부모님과 이미 돌아가신 교우들이 잠들어 있는 교회 장지에 묻히시게 될 것이다. 나도 이젠 슬픔을 거두고 하늘 나라로 가신 아버님께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인사를 드리련다.

아버님, 편안히 가세요. 나중에 다시 뵈어요.”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니 /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요한계시록 7:15-17)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3-4)

10/12/2013

빨랫줄


이 사진만  찍고 이불을 가지고 얼른  집안으로 들어왔다.
경찰에 잡혀갈까봐!? ^^
 

밤이 점점 길어지는 시기라 그런지 해 뜨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 거기에 일광절약(daylight saving) 기간이라, 한 시간이 빠르므로 오전 9 시쯤 되어야 햇살이 밝게 펴진다. 가을의 곱고 보드라운 햇살은 한낮이 되면 화씨 80 (섭씨 26.7 ) 정도의 좀더 진하고 강한 빛으로 바뀌는데 그래도 여전히 부드럽다. 다만 해가 지고 나면 기온이 뚝 떨어져 아침 저녁으로 서늘해지는 날씨에 감기 걸리지 않도록 잠 자리 이불을 따스한 것으로 바꾸고, 덮었던 것은 깨끗하게 빨아 햇빛에 뽀송뽀송 말리면 좋을 때다.

미국에 와서 사는 동안 운 좋게 뒷마당이 있는 집들에서 살고 있다. 지금 사는 집은 뒷마당이 넓어 잔디를 돌보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지만 답답하지 않아 좋다. 이불 같은 큰 빨래를 할 때면 건물로 가려지지 않은 한적한 뒷마당 한 가운데에 빨래틀을 펴놓고 따사로운 햇빛과 솔솔 부는 바람에 말려보고 싶은 마음이 늘 든다. 그런데 여태 한 번도 그렇게 해 보질 못했다. 가만히 눈치를 보니 집 밖에 빨래를 너는 집이 없다. 송화 가루나 꽃가루가 너무 많이 날리는 시기에는 어쩔 수 없다 해도 그렇지 않은 때에도 다른 집 마당에 빨래가 널린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불 하나 빨 것이 생겼는데 세탁기에 넣어 돌려놓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찾아가는 곳, 인터넷을 찾아가 빨랫줄 사용에 대해 물어보았다.

주로 2008 년을 이후로 나온 글들이 많았는데, 빨랫줄 사용 운동이 전개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운동이 벌어지는 것은 빨랫줄금지법에 반대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법이다. 이 법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빨래를 집 밖에 널어 놓으면 가난한 모습으로 보여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과 빨래건조기를 만드는 가전제품회사나 건조기에 사용되는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회사의 정치권과의 막후교섭 때문이라는 것이다. 2008년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빨래를 실외에 널지 말라는 요구를 무시하던 남성이 총에 맞아 죽기까지 했다는 것이다(연합뉴스 10.8.2010).

조금 다른 문제인데, 태양열을 이용하여 에너지 절약할 수 있다면 왜 선진국인 미국은 그걸 대중적으로 사용하지 않는가 궁금해 하며 교회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집사님은 전력회사가 태양열 사용에 대해 흔쾌히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빨랫줄 사용과 관련되어서도 비슷한 이유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 좀 씁쓸하다.

위키피디아에 빨랫줄 사용에 대한 장단점이 잘 적혀 있는데 당연하면서도 재미있어서 몇 가지 옮겨보려 한다(http://en.wikipedia.org/wiki/Clothes_line).

장점으로는……

l  돈을 절약할 수 있다(전기요금, 빨래건조기 구입비, 섬유유연제).

l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다(가정에서 배출하는 온실 가스의 3 분의 1이 빨래건조기에서 나오는 것이란다).

l  화학 섬유유연제 없이도 신선한 새물내(clothes-line fresh)를 맡을 수 있다.

l  옷이 줄어들거나 구김이 가는 것, 천의 마모 정도가 덜하다.

l  정전기로 달라붙는 현상이 덜하다.

l  빨랫줄이 끊어지거나 상하여 고치는데 드는 비용이 빨래건조기가 고장 나서 고칠 때보다 훨씬 적게 든다.

단점으로는……

l  빨랫줄에 빨래를 너는데 시간이 걸린다.

l  비가 오면 빨래를 실내에 널어야 되고, 갑자기 날씨가 바뀌면 젖을 수도 있다.

l  빨래를 도둑 맞을 수도 있다.

l  , 꽃가루, 새똥, 자동차 오염물질 같은 것들이 묻을 수도 있다.

l  빨래 집게 자국이 남는다.

최근 자료에서는 빨랫줄금지법을 폐지하고 햇빛에 말릴 수 있는 권리(Right to dry)를 회복하는 법이 미국 내 19 개 주에서 통과되었다는 것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플로리다, 하와이, 일리노이, 인디애나, 루이지애나, 메인, 매릴랜드, 매사추세츠, 네바다, 뉴멕시코, 노스캐롤라이나, 오레곤, 텍사스, 버몬트, 버지니아, 위스콘신 / 시애틀 타임스 8.13.2013). 비록 내가 사는 주는 거기에 속하지 않지만 빨랫줄을 다시 사용하자는 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주정부가 이러한 법을 통과시켜도 이미 빨래건조기는 생활필수품이 되었고, 마당에 내걸린 빨래가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의식을 바꾸기 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 이불 빨래를 해놓고 집 안에서 말리며(보통 때는 건조기에서 어느 정도 말리고 집안에 널어놓고 또 말린다) 쏟아지는 가을 햇빛이 아까운 마음이었는데 언젠가 우리 집 뒷마당에서도 빨래를 널어볼 날이 오려나, 막연하지만 그래도 기대를 해본다.


10/04/2013

서로의 머리를 매만지는 것은


 
 
한국 여행에서 돌아오기 바로 전에 머리에 염색을 했으니까 두 달이 조금 더 지났다. 새치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만큼 자라는 것인가 보다. 아닌가? 머리카락의 길이는 그다지 길어진 것 같지 않은데, 새치는 진한 갈색 머리카락을 뚝 잘라먹고 4 센티미터쯤 흰색으로 띠를 두른 듯 자라 있다. 세상 구경하겠다고 쑥쑥 자라나오는 이 새치들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는 기간은 두 달 남짓이다. 염색하는데 사용되는 약품 냄새가 싫어(요즘은 그 냄새가 많이 약해지거나 거의 나지 않는 상품들도 나오는 것 같다) 그 기간을 늘려볼까 했지만 참아지지가 않는다. 머리가 온통 하얗게 되도록 놔두려면 모를까 머리카락 뿌리 부분만 허얘지는 것을 견디는 내 인내심의 한도는 육, 칠십 일 안팎이다. 새치가 새로 나오기 시작할 때도 두피가 가렵거니와 어찌된 일인지 염색하고 두 달쯤 지나면 그때도 또 가렵기 시작한다. 이래저래 내 몸과 마음이 염색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주는 것 같다.

30 대 중, 후반부터 나기 시작한 새치는 혼자 염색이 가능했다. 앞머리, 옆머리, 그리고 정수리까지 거울 보고 염색을 하면 새치가 어느 정도 가려졌다. 전체 염색은 아주 가~끔 미용실이나 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엄마는 20 대부터 새치가 나기 시작해서 염색하는 것이 눈 건강에도 좋지 않고, 귀찮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하도 염색을 해서 도사가 되었다며 어떤 색이 자연스러운지, 어디부터 염색약을 발라야 좋은지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염색 전문가가 된 엄마한테 내 머리의 염색을 맡기고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른다. 빠른 시간 안에, 꼼꼼하게, 얼굴 피부에 염색약이 닿는 것을 허용치 않는 깔끔함에, 마음이 느긋해지니 몸도 나른해지고 그러다 졸기 까지 한 적도 두어 번 있다. 엄마가 염색을 해주던 초반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쫌 더 있다 나지 벌써 나니.”
그러시더니 이번 한국 갔을 때도 혼잣말을 하신다.
온통 하야네. 이거 어쩜 좋아!”
  돋보기를 쓰고 머릿속 여기저기를 안타까운 듯 헤집어보시는 엄마의 손길과 나이가 들면 누구에게나 생기는 새치인데 그 새치가 많아지는 딸을 염려해주는 엄마의 말소리는 아무런 세상 근심 없이 부모님의 보호 아래 살던 유년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언제부턴가 머리털 염색을 하고 두 달이 지나면 하얀 색 머리카락이 너무 많아져서 부분 염색으로 가려지지가 않는다. 거울로 보이지 않는 뒷머리까지 나 혼자 염색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미용실의 헤어 디자이너나 엄마 대신 남편이 내 머리 염색 담당이 되었다.

남편은 처음엔 길지도 않았던 내 머리카락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몰라 허둥댔었다. 아마도 여성의 머리카락에 어떤 처치를 하기 위해 몇 십 분씩 만지작거려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또 염색약을 바르는 시간이 어찌나 긴 지, 머릿결이 상하는 것은 둘째 치고 약을 바르는 사이에 색이 다 들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염색을 해줄 즈음에 나에게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머리털을 세게 잡아당기면서 빗질을 한다(아마도 남편은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할 것이 분명하다). 정말 치사하지만 염색이 시작된 이상 참아야 한다. 두어 번 그런 일을 당하고는 꾀가 생겨서 별 탈 없이 잘 지낼 때에 염색을 부탁하곤 한다.

요즘에는 남편에게 염색해 달라고 요청하면 군소리 없이 잘 해준다. 이곳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로 이사온 뒤로 더욱 솜씨 있게 염색을 해준다. 그 동안 염색해본 경험이 쌓여서 그렇기도 할 테고, 우리 교회 교인들의 경우를 많이 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교인들 중에는 부부끼리, 가족끼리 파마를 해주시는 분도 있고, 머리를 깎아주거나 염색해주는 분들도 여럿 계신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이민 생활을 삼, 사십 년씩 오래 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예전에는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한인이 운영하는 미용실도 거의 없었을 테고(지금은 서너 군데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발과 미용을 가족이 서로 챙겨주는 것이 익숙해지셨나 보다. 또 그렇게 하면 미용실 가는 비용이나 시간을 아낄 수도 있어서 괜찮은 것 같다. 우리 가족도 비슷한 이유로 서로 머리를 깎아주고, 염색해주고 있다.

염색이 시작되면 남편에게 상기시켜주는 것들이 있다. 이마 위 앞머리부터 약을 바르기 시작하고, 머리카락을 염색솔로 너무 세게 문지르지 말고, 빨리 하고 끝내자, 이다. 엄마가 가르쳐주었던 것들이다. 엄마가 염색해줄 때처럼 남편을 믿거라 하는 마음은 아니지만 염색약이 묻은 머리가 얼굴 쪽으로 휙 넘어와 얼굴 어딘가에 닿을 때를 빼고는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는 아내의 머리칼 물들이기에도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남편의 성정대로 성실한 손놀림이 느껴진다. 남편은 나의 머리를 염색해주고 나는 남편의 머리를 깎아주며, 이런 작은 일상 속에서 서로의 필요를 더욱 느끼고, 감사하고, 의지하며 살게 되나 보다.

가을에 느낄 수 있는 선선한 아침 공기와 상쾌한 바람을 놓치고 싶지 않아 집 근처 숲길을 남편과 함께 걸었다.
여보, 내일 아침에 염색하자.”
내일이 되었고, 남편은 손에 익은 듯 머리를 요리조리 들춰가며 염색을 마쳤다.

잠깐. 뒤에서 사진 한 장 찍어봐.”
교회에 간다며 서둘러 나서는 남편을 불러세워 염색한 나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염색한 머리의 뒷모습이 뭐 특별한 것이 있겠어, 하며 좀 전에 찍어준 사진을 열어보았다. 염색한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지 않게 고무줄로 단정하게 묶여 있다(고무줄로 묶어놓는 것도 엄마가 가르쳐주신 것이다). 두 달 만에 내 머리털이 고르게 새로운 색을 입어 좋고, 단정하게 마무리된 뒷모습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엄마는 자신의 뒷머리 염색을 어떻게 하지?’
문득 궁금해진다. 어쩜 이다지도 엄마에게 무덤덤했을까. 다음에 한국에 가게 되면, 염색을 받은(?) 내 기분처럼 엄마의 기분도 좋아지게 엄마 머리 염색하는 것을 내가 한 번 해 봐야겠다. 하도 멀리 떨어져 살아 기회가 많지 않을 테니까 잊지 않게 스마트 폰 노트의 한국에 가서 할 일자리에 적어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