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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끝나고 강화집. 어, 집 안에 누군가가...> |
한국에 7 주 다녀온 뒤로 시차 때문에 잠에
휘둘리고 기운이 나질 않아 보름쯤 엉성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교회 가는 것 빼고는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몸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방학 중이라 더 제 마음대로 쉴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한국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는 저를 바꾸지도 않고 끊곤 했습니다. 아마 축 늘어져 있는 저의 피곤한 사정을 헤아려 주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남편은 강화에 전화 한 번 하지, 합니다. 남편 생각에는 제가 시차 적응이 어느 정도 되었다고 신호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어찌 지내시는지 가늠해보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눈치채셨듯이 남편의 부모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시어머님, 시아버님, 시댁의
“시”가 주는 거리감과 불편함을 줄여보려고 말에서라도 그
“시” 자를 빼보았습니다.
결혼한 지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 경험으로
볼 때 아직까지는 괜찮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저의 부모님을 부를 때는 엄마, 아빠 합니다. 따로 “친정”부모님이라 하지 않고, 양가 부모님을 헷갈리지 않고 말해야 할 때는
사시는 지역 이름을 붙여 인천 부모님, 어머님과 아버님은 강화 부모님 합니다. 인천 부모님은 지금 김포에 사시고 계시나 거기서 사신 지 오래 되지 않았고 사시던 곳이 인천이니 처음부터 부르던
그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님은 올해 2월에 간암 수술을 하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간이 약하셔서 약을 드시고 계셨는데 암으로 발전한 모양입니다. 수술로
간의 상한 부분을 잘라내고 1/3 정도 남겨놓았는데 다행히 간은 건강한 부분이 조금만 남아있어도 재생이
된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버님은 수술 후 회복이 빨라 보통 열흘이 넘어야 하는데 일주일 만에 퇴원을
하셨습니다. 쉽게 오고 갈 수 없는 거리에 떨어져 살다 보니 수술이 잘 되었다는 소식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지지난해 12월 양가 부모님들께서 미국을 두
번째 방문하셨을 때 이제는 너희들이 한국에 와 봐야지, 하셨습니다. 저희도 5년 넘게 가보지 못한 한국에 다녀오리라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한국으로 떠날 날을 손꼽으며 아이들의 2학기 시작과 함께 동시에 학기의 끝인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버님께서 큰 수술을 받고 경과가 좋으시다고 하나 마음은 더욱 바빠졌습니다. 바로 한국 가는 비행기 표를 사 놓고, 더욱 건강해지신 아버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타국에 살면서 한국,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메꾸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가져갈 선물 목록을 작성하고, 인터넷으로 가격비교를 해서
조금이라도 할인된 가격으로 파는 곳과 때를 조사하고, 주문하거나 직접 매장을 방문하여 구입하고, 꾸러미마다 받을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고 하나씩 채워 넣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한편 한국 가서 만나야 할 사람들(만나고 싶은 사람과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꼭 해야 할 일들, 먹고 싶은 음식과 사고 싶은 것들을 적어봅니다(재미있는 것은 계획하고 바라던 일들은 거의 다 했다는 것입니다. 막연했던
큰 아이 치과 치료부터 자장면 먹기까지, 그것도 여러 번, 코스
요리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자장에서 보통 것까지!). 그렇게 몇 달을 여유로운 듯 보내고, 남은 날을 헤아리지 않음으로 모르는 사이에 출국할 날이 코 앞에 와 닿아 있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눈길만 마주치면 준 텐(June 10), 맞지?, 확인하는 첫 째 청년과 남은 날 수를 확인시켜주는 둘째 청소년 덕분에, 처음
누려보는 긴 휴가가 될 고국 방문에 대한 설레는 마음을 안 그런 척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국으로 떠나기 2 주 전,
서방님(시동생)으로 부터 무거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논에 나가셨다가 왼쪽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아 쓰러지셨고, 입원하여 검사한 결과가 뇌종양으로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종양은
세 군데쯤 펴져 있었고 수술 자체를 할 수 있느니 없다느니, 수술을 안 받겠다느니 혼란스런 시간이었습니다. 뇌 수술이기에 그 후유증이 클 수 있다는 것과 절반의 수술 성공 가능성을 병원 측에서는 알려 주었고, 가족은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수술에 동의를 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 도착하기 4 일 전 아버님은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오른쪽 뇌에 붙어있는 가장 큰 종양만을 제거하는 수술이었습니다. 하지만
종양이 운동신경을 관할하는 부분에 붙어있어서 깨끗하게 떼어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직검사를 해보았더니
아주 나쁜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려 마중 나온 서방님과 짧은 인사를 주고
받고는 바로 아버님이 입원해계시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중이신 아버님,
14 시간 40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온 피로감, 비가
조금씩 내려 축축해진 공기, 먹구름 때문에 어두워진 도로를 밝히려는 많은 자동차들의 어지러운 헤드라이트,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밋밋한 공항 고속도로,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어떤 일이 펼쳐질 지 그려지질 않습니다. 동시에 남편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수하물 찾는 곳에서 여행 가방을 찾아 나오는데 남편이 그럽니다.
“그래, 이거야.”
“뭐가?”
“긴장감이 없잖아. 으음.”하며 깊게 숨을 내쉽니다.
우울할 것 같은 집안 분위기가 예상되나 고향 땅이 주는 편안함이 여행 기간 동안 늘 함께 할 것이라는 어리광 섞인 믿음을 가져봅니다.
도착한 대학병원. 한국을
떠날 때쯤에는 새로운 건물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것을 보았었는데 다 지어져 그 건물 어디쯤에 아버님께서 입원해 계셨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쓰는 병실이라 조용히 들어섭니다. 아버님이 우리를
보고 알아보십니다. 아이들 이름도 불러주시고, 악수도 하고, 왔냐, 고 인사도 나누어주셨습니다.
수술 받은 머리에는 “ㄷ” 자 모양으로 넓은
테이프가 붙여져 있을 뿐 칭칭 감겨 있을 것 같았던 붕대나 모자 따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호하시는
어머님은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반가운 기색도 그다지 없으십니다. 남편한테
병원에 나랑 같이 있어야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하룻밤의
쉼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어머님께는 함께 병상을 지켜줄 사람, 아들이 절실하게 필요하신 상태인가 봅니다. 남편은 그 날 밤부터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날 까지 17 일
동안 낮에는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약속 없는 낮이나 밤에는 꼭 아버님 곁을 지켰습니다.
아버님은 병원에서 새벽녘 서너 시간 동안 간호하는 사람을
아주 힘들게 하셨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화를 내고 분노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기도 하셨답니다.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수술한 자리를 손으로 후벼 파는 바람에 다시 봉합하는
처치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이는 뇌수술 받은 사람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라고, 같은 층에 있는 다른 환자들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어머님은 말씀하시며 스스로도 위로하시고 가족들도 안심시키셨습니다. 집으로 가고 싶다는 아버님의 엄청 강한 욕구가 바로 채워지지 않고, 수술
후 왼쪽 몸이 완전히 마비가 되어 몹시 불편하셔서 더 그러셨나 봅니다. 결국 수술 부위가 채 아물기
전에 퇴원을 하셔서 강화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퇴원하신 다음 날, 아무도
못 본 사이에 머리 상처를 또 만지시는 바람에 응급실을 또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해결해 드릴 수 없는
아버님의 욕구가 서늘해지는 새벽 공기의 기운을 따라 마구 솟구치면 어머님과 남편은 알았다며 달래보다가, 안
된다고 거절했다가, 더 이상 돌봐드릴 수 없다며 협박도 했다가, 기도하고, 성경 읽어드리고, 찬송 불러드리고.
그러길 하루, 이틀…. 아버님은 우리와 소통이
되지 않는 아버님만의 생각을 불쑥 꺼내놓기도 하셨지만 점차 마음이 안정되어 가셨습니다. 남편은 아버님
침대 곁에 머물며 식사하시는 것을 돕고,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손과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왼쪽 마비로 혼자서 앉거나 일어설 수가 없어 누군가는 도와 드려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휠체어로 옮겨드려야 되는데 환자를 다룰 줄 아는 장정이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남편은 병원에서
남자 간호사가 하는 것을 눈 여겨 보았다가 아버님을 도와드렸습니다. 남편은 아버님을 휠체어에 옮겨 화장실을
드나들고, 바깥 산책도 시켜드리고, 아버님이 원하시는 대로
몇 번이고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남편이 미국으로 돌아갈 날들이 가까워지자 당신이 가고
나면 당신처럼 아버님 시중을 들어줄 수 없는데 조금 조절해야 되는 것 아냐, 했습니다. 남아서 간호할 사람들을 위해 아버님을 향한 열심을 줄여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얘기해본 것
입니다. 이런 이성적인 생각은 마치 사막에 던져진 장미꽃 한 송이인양 남편은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더 바쁘게 아버님을 이리로 저리로 옮겨드리고, 성경 읽어 드리다가, 아이폰으로 찬송가를 틀어 하루 종일 들려드리고, 강화 집을 떠나기
전 날 저녁에는 목욕을 시켜드렸습니다. 아버님을 씻기며 욕실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따뜻한 아버지의 몸을 만지는 아들의 마지막 손길인가 싶어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저런 것인가 기억에 새겨 넣었습니다. 내 남편이 저렇게 알뜰살뜰한 사람이었나 새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국에 가서 나한테도 아버님한테 한 것처럼 해 봐라, 좀.”
“내 마음은 연약한 사람한테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어.”
“….”
어머님께서 전화를 받으십니다.
“어머님, 저에요.”
“응, 그래. 아버지는….”
아버님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성격이 급하신 어머님께서
먼저 설명을 해주십니다. 저와 아이들은 남편보다 늦게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아버님이 식사를 잘 못하시는
걸 보고 왔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식사도 잘 하시고 정신도 더 맑아지셨다며 어머님의 헛헛한 웃음 소리가
들립니다. 뒤이어 올해 고추 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는 소식과 우리 집과 교회는 별 일이 없는 지도 물으십니다. 멀리서 저의 안부를 묻는 아버님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옵니다.
통화 내용을 가족에게 들려주자 아버님의 알뜰살뜰한 아들은
아버지가 그렇게 건강해지시면 좋겠네, 합니다.
“고추 밭에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아서 그래. 이모 할머니들, 인천 할머니, 인천 할아버지, 작은 아빠. 그리고
내 손길이 닿았잖아.”
둘째 녀석의 실없는 말에 맞다, 며 한 번 웃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