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6/2013

친구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

   5년 반 만에 한국 방문. 한국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궁금했습니다. 한국 방문이라기 보다는 고향 방문이 더 맞는 말 같습니다. 나라 전체를 다 돌아보는 것도 아니고 관광지를 여행하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고향 언저리와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과 이천을 다녀오는 정도였습니다. 아파트 단지들이 크게 들어서고 새로운 길이 만들어진 곳이 있긴 했지만 예전에 다니던 주요 도로들은 그대로 있어서 다니는데 큰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새로운 길도 한 두 번 오고 가면 금방 익숙해졌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기엔 어려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녹아 들어가 있는, 고향이 주는 편안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아버님이 사용하시던 자가용을 내주셔서 먼 거리를 가야 할 때나 가족이 함께 다녀야 할 때는 그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버스와 지하철이 서울과 위성도시들 웬만한 곳은 다 연결되어 있고, 버스 타고 여유롭게 바깥 구경하며 다니는 것이 좋기도 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 타기 위해서 사이 사이에 사람들과 뒤섞여 걷는 것도 좋았습니다.

대학 동기들을 만나 즐거운 점심 한 때를 보내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서로 갈 길을 찾아 방향을 잡는데 저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버스를 타야 하는데 도로 중앙으로 버스 정거장이 옮겨지고 나서는 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얘들아, 난 어디로 가야 되니?”
야 야, 얘 한국 왔다가 미아 되겠다. * *가 알려줘.”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남은 친구는 버스 정거장이 있는 곳만 알려주면 될 것 같은데 함께 걷습니다. 정거장에 도착해보니 말로만 듣고 왔으면 정거장을 찾는데 시간이 좀 더 걸렸을 거 란걸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방향이라도 버스 정거장이 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 친구도 갈 길이 먼 친구였기에 어서 가 보라고 하는데도 괜찮다며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고 제가 탄 버스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서 있었습니다. , 이 느낌은 뭐지?
 
같은 중학교를 나왔고 대학 선배인 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도록 돕고, 살아갈 동기와 희망을 주는 세미나를 하는, 유명 강사인 언니는 아주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언니와 만난 후에는 대학병원에 들려 아버님 주치의를 만나서 상담하고, 약을 타 가지고 가야 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려면 시간이 좀 남아 있어서 언니에게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시원한 병원 한 구석에서 읽을 책을 준비해왔기에 예약 시간까지 시간을 보내는데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나 너 병원 갈 시간까지 같이 있을 거야.” 똑 부러지는 언니의 대답이었습니다.
언니가 약속 시간을 착각해 늦게 나온 것이 미안해서 그러나.’ 혼자 생각했습니다.

병원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는 길이고 걸어가도 되는 거리입니다. 언니는 같이 가자, 며 함께 걷습니다. 걷다 보니 전에 알던 건널목이 없어지고 작은 터널을 지나서 길을 건너도록 바뀌어 있었습니다. 새로 지어진 병원 건물의 입구도 언니가 아니었으면 헤맬 뻔 했습니다. 언니는 제가 가지고 간 진료 예약증을 내 놓으라고 하더니 접수 창구까지 데려다 줍니다. 이 창구를 찾기 위해서도 몇 번 물어봤어야 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언니는 바쁘게 돌아갔습니다. , 이 느낌은 뭐지?
  
   여러 번 이사하면서 전화번호가 바뀌어 친했던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이 끊어진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친구 찾기를 해 보았는데 찾아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에 잠깐 있는 동안 친구가 제 페이스 북에 메시지를 남겨놓은 것입니다. 바로 전화해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높은 톤으로 이게 왠 일이니, 호들갑을 떨면서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잘 어울리던 다른 두 명의 친구들도 연락이 되어 같이 만났습니다. 사는 모습이 넉넉해진 그들의 생활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흐뭇해서 웃고, 아이들 대학 입시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는 분명 한국말인데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과 준말들이 많아서 어이 없어서 웃는 시간이었습니다.

친구가 가져온 자가용의 GPS 덕분에 친구들과 수다 떨던 커피 집 근처에 있는 지하철 역을 어렵지 않게 찾았고, 긴 시간 정차할 수 없는 곳이었기에 서둘러 내렸습니다. 중간에 자가용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처음 만난 익숙한 장소에서 엄청 멀어져 있었습니다. 서울 변두리에 가까운, 처음 본 지하철 역이었습니다. 친구들이 탄 차가 움직였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잘 가라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렇게 나만 뚝 떨어뜨려놓고, 살짝 아쉬움이 찾아오려는 순간이었습니다.
   “* *, 잘 찾아갈 수 있지?”
먼저 연락이 닿았던 친구가 자동차의 창문을 내리고 소리를 지릅니다. , 이 느낌은….

멀리서 오랜 만에 고향을 방문한 친구가 길을 헤매지 않도록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써주는 친구들의 배려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아닌 척 살지만 외국에서 사는 것이 외롭긴 한가 봅니다. 그 감동이 지금까지도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오니 말입니다. 친구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을 적어봅니다. 그것은 친절입니다.

8/22/2013

알뜰살뜰한 아들



<주일 예배 끝나고 강화집. 어, 집 안에 누군가가...>


한국에 7 주 다녀온 뒤로 시차 때문에 잠에 휘둘리고 기운이 나질 않아 보름쯤 엉성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교회 가는 것 빼고는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몸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방학 중이라 더 제 마음대로 쉴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한국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는 저를 바꾸지도 않고 끊곤 했습니다. 아마 축 늘어져 있는 저의 피곤한 사정을 헤아려 주고자 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남편은 강화에 전화 한 번 하지, 합니다. 남편 생각에는 제가 시차 적응이 어느 정도 되었다고 신호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어찌 지내시는지 가늠해보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눈치채셨듯이 남편의 부모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시어머님, 시아버님, 시댁의 가 주는 거리감과 불편함을 줄여보려고 말에서라도 그 자를 빼보았습니다. 결혼한 지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 경험으로 볼 때 아직까지는 괜찮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저의 부모님을 부를 때는 엄마, 아빠 합니다. 따로 친정부모님이라 하지 않고, 양가 부모님을 헷갈리지 않고 말해야 할 때는 사시는 지역 이름을 붙여 인천 부모님, 어머님과 아버님은 강화 부모님 합니다. 인천 부모님은 지금 김포에 사시고 계시나 거기서 사신 지 오래 되지 않았고 사시던 곳이 인천이니 처음부터 부르던 그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아버님은 올해 2월에 간암 수술을 하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간이 약하셔서 약을 드시고 계셨는데 암으로 발전한 모양입니다. 수술로 간의 상한 부분을 잘라내고 1/3 정도 남겨놓았는데 다행히 간은 건강한 부분이 조금만 남아있어도 재생이 된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버님은 수술 후 회복이 빨라 보통 열흘이 넘어야 하는데 일주일 만에 퇴원을 하셨습니다. 쉽게 오고 갈 수 없는 거리에 떨어져 살다 보니 수술이 잘 되었다는 소식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지지난해 12월 양가 부모님들께서 미국을 두 번째 방문하셨을 때 이제는 너희들이 한국에 와 봐야지, 하셨습니다. 저희도 5년 넘게 가보지 못한 한국에 다녀오리라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한국으로 떠날 날을 손꼽으며 아이들의 2학기 시작과 함께 동시에 학기의 끝인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버님께서 큰 수술을 받고 경과가 좋으시다고 하나 마음은 더욱 바빠졌습니다. 바로 한국 가는 비행기 표를 사 놓고, 더욱 건강해지신 아버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타국에 살면서 한국,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메꾸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가져갈 선물 목록을 작성하고, 인터넷으로 가격비교를 해서 조금이라도 할인된 가격으로 파는 곳과 때를 조사하고, 주문하거나 직접 매장을 방문하여 구입하고, 꾸러미마다 받을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고 하나씩 채워 넣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한편 한국 가서 만나야 할 사람들(만나고 싶은 사람과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꼭 해야 할 일들, 먹고 싶은 음식과 사고 싶은 것들을 적어봅니다(재미있는 것은 계획하고 바라던 일들은 거의 다 했다는 것입니다. 막연했던 큰 아이 치과 치료부터 자장면 먹기까지, 그것도 여러 번, 코스 요리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자장에서 보통 것까지!). 그렇게 몇 달을 여유로운 듯 보내고, 남은 날을 헤아리지 않음으로 모르는 사이에 출국할 날이 코 앞에 와 닿아 있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눈길만 마주치면 준 텐(June 10), 맞지?, 확인하는 첫 째 청년과 남은 날 수를 확인시켜주는 둘째 청소년 덕분에, 처음 누려보는 긴 휴가가 될 고국 방문에 대한 설레는 마음을 안 그런 척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국으로 떠나기 2 주 전, 서방님(시동생)으로 부터 무거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논에 나가셨다가 왼쪽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아 쓰러지셨고, 입원하여 검사한 결과가 뇌종양으로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종양은 세 군데쯤 펴져 있었고 수술 자체를 할 수 있느니 없다느니, 수술을 안 받겠다느니 혼란스런 시간이었습니다. 뇌 수술이기에 그 후유증이 클 수 있다는 것과 절반의 수술 성공 가능성을 병원 측에서는 알려 주었고, 가족은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수술에 동의를 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 도착하기 4 일 전 아버님은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오른쪽 뇌에 붙어있는 가장 큰 종양만을 제거하는 수술이었습니다. 하지만 종양이 운동신경을 관할하는 부분에 붙어있어서 깨끗하게 떼어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직검사를 해보았더니 아주 나쁜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려 마중 나온 서방님과 짧은 인사를 주고 받고는 바로 아버님이 입원해계시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중이신 아버님, 14 시간 40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온 피로감, 비가 조금씩 내려 축축해진 공기, 먹구름 때문에 어두워진 도로를 밝히려는 많은 자동차들의 어지러운 헤드라이트,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밋밋한 공항 고속도로,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어떤 일이 펼쳐질 지 그려지질 않습니다. 동시에 남편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수하물 찾는 곳에서 여행 가방을 찾아 나오는데 남편이 그럽니다.
그래, 이거야.”
뭐가?”
긴장감이 없잖아. 으음.”하며 깊게 숨을 내쉽니다. 우울할 것 같은 집안 분위기가 예상되나 고향 땅이 주는 편안함이 여행 기간 동안 늘 함께 할 것이라는 어리광 섞인 믿음을 가져봅니다.

 도착한 대학병원. 한국을 떠날 때쯤에는 새로운 건물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것을 보았었는데 다 지어져 그 건물 어디쯤에 아버님께서 입원해 계셨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쓰는 병실이라 조용히 들어섭니다. 아버님이 우리를 보고 알아보십니다. 아이들 이름도 불러주시고, 악수도 하고, 왔냐, 고 인사도 나누어주셨습니다. 수술 받은 머리에는 자 모양으로 넓은 테이프가 붙여져 있을 뿐 칭칭 감겨 있을 것 같았던 붕대나 모자 따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호하시는 어머님은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반가운 기색도 그다지 없으십니다. 남편한테 병원에 나랑 같이 있어야 한다, 고 말씀하십니다. 하룻밤의 쉼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어머님께는 함께 병상을 지켜줄 사람, 아들이 절실하게 필요하신 상태인가 봅니다. 남편은 그 날 밤부터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날 까지 17 일 동안 낮에는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약속 없는 낮이나 밤에는 꼭 아버님 곁을 지켰습니다.

아버님은 병원에서 새벽녘 서너 시간 동안 간호하는 사람을 아주 힘들게 하셨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화를 내고 분노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기도 하셨답니다.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수술한 자리를 손으로 후벼 파는 바람에 다시 봉합하는 처치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이는 뇌수술 받은 사람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라고, 같은 층에 있는 다른 환자들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어머님은 말씀하시며 스스로도 위로하시고 가족들도 안심시키셨습니다. 집으로 가고 싶다는 아버님의 엄청 강한 욕구가 바로 채워지지 않고, 수술 후 왼쪽 몸이 완전히 마비가 되어 몹시 불편하셔서 더 그러셨나 봅니다. 결국 수술 부위가 채 아물기 전에 퇴원을 하셔서 강화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퇴원하신 다음 날, 아무도 못 본 사이에 머리 상처를 또 만지시는 바람에 응급실을 또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해결해 드릴 수 없는 아버님의 욕구가 서늘해지는 새벽 공기의 기운을 따라 마구 솟구치면 어머님과 남편은 알았다며 달래보다가, 안 된다고 거절했다가, 더 이상 돌봐드릴 수 없다며 협박도 했다가, 기도하고, 성경 읽어드리고, 찬송 불러드리고. 그러길 하루, 이틀…. 아버님은 우리와 소통이 되지 않는 아버님만의 생각을 불쑥 꺼내놓기도 하셨지만 점차 마음이 안정되어 가셨습니다. 남편은 아버님 침대 곁에 머물며 식사하시는 것을 돕고,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손과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왼쪽 마비로 혼자서 앉거나 일어설 수가 없어 누군가는 도와 드려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휠체어로 옮겨드려야 되는데 환자를 다룰 줄 아는 장정이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남편은 병원에서 남자 간호사가 하는 것을 눈 여겨 보았다가 아버님을 도와드렸습니다. 남편은 아버님을 휠체어에 옮겨 화장실을 드나들고, 바깥 산책도 시켜드리고, 아버님이 원하시는 대로 몇 번이고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남편이 미국으로 돌아갈 날들이 가까워지자 당신이 가고 나면 당신처럼 아버님 시중을 들어줄 수 없는데 조금 조절해야 되는 것 아냐, 했습니다. 남아서 간호할 사람들을 위해 아버님을 향한 열심을 줄여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얘기해본 것 입니다. 이런 이성적인 생각은 마치 사막에 던져진 장미꽃 한 송이인양 남편은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더 바쁘게 아버님을 이리로 저리로 옮겨드리고, 성경 읽어 드리다가, 아이폰으로 찬송가를 틀어 하루 종일 들려드리고, 강화 집을 떠나기 전 날 저녁에는 목욕을 시켜드렸습니다. 아버님을 씻기며 욕실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따뜻한 아버지의 몸을 만지는 아들의 마지막 손길인가 싶어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저런 것인가 기억에 새겨 넣었습니다. 내 남편이 저렇게 알뜰살뜰한 사람이었나 새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국에 가서 나한테도 아버님한테 한 것처럼 해 봐라, .”
“내 마음은 연약한 사람한테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어.”
“….”

어머님께서 전화를 받으십니다.
어머님, 저에요.”
, 그래. 아버지는….”
아버님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성격이 급하신 어머님께서 먼저 설명을 해주십니다. 저와 아이들은 남편보다 늦게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아버님이 식사를 잘 못하시는 걸 보고 왔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식사도 잘 하시고 정신도 더 맑아지셨다며 어머님의 헛헛한 웃음 소리가 들립니다. 뒤이어 올해 고추 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는 소식과 우리 집과 교회는 별 일이 없는 지도 물으십니다. 멀리서 저의 안부를 묻는 아버님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옵니다.

통화 내용을 가족에게 들려주자 아버님의 알뜰살뜰한 아들은 아버지가 그렇게 건강해지시면 좋겠네, 합니다.
고추 밭에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아서 그래. 이모 할머니들, 인천 할머니, 인천 할아버지, 작은 아빠. 그리고 내 손길이 닿았잖아.”
둘째 녀석의 실없는 말에 맞다, 며 한 번 웃어봅니다.

다시 한 번

<집 근처 주립공원에서>

이렇게 2 년 만에 은근슬쩍 돌아옵니다.
네모난 화면에 삶과 사랑을 담아 세상과 다시 한번 소통하고자 합니다.
제 자신에게는 다시 한 번 글쓰기를 해보라는 격려와 거칠고 부족한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소박한 애정을 담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