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2009

비가 내리길래...


여기 비 오는 모습이 좋습니다.
먹빛 구름이 큰 숨을 들이쉬고 잔뜩 참았다가 한꺼번에 내뱉는 것처럼, 비가 그렇게 옵니다.
아주 거세고 힘차게 내립니다.
재미있는 것은 잠깐이든 한나절이든 오던 비가 그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이 맑아집니다.
비가 내렸으면서도 끈적한 습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아 더 신기합니다.

또 하나 좋은 것은 맑은 날의 하늘빛과 구름입니다.
청명한 하늘빛 바탕에 풍성한 구름이 어울려 있는 모습은 그대로 명화가 될법합니다.
하늘은 왜 그렇게 끝없이 넓어 보이는지요.
그런 하늘을 보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집니다.
날마다 보는 하늘이지만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살만한가 봅니다.
뜬 구름 얘기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찌어다 /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찌어다 /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찌어다 /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찌어다 /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시편148:1-5)

8/21/2009

예, 아니오




요즘, 아니 몇 달 전부터 “예” 할 때와 “아니오” 할 때는 언제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예, 아니오 하는 것이 좋을까, 자꾸 생각해봅니다.

눈길이 닿는 그 무엇을 보다가도 그 생각이 문득 문득 떠오릅니다.
운전을 하다가 빨강색 신호등을 보고 멈추어 섰다가, 신호등 불빛처럼 분명한 자기 표현이 좋은 거야 해봅니다.
신호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능력인 빨강, 노랑, 초록의 빛을 적절한 때에 바꾸어 교통의 흐름을 조절하듯, 자기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은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때로 예와 아니오가 너무 분명한 사람은 능력 있어 보이고 깔끔해 보이지만 인간적인 맛이 덜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교회 화단에 중고등부가 심어놓은 꽃들 가운데 여러 가지 빛깔로 조화롭게 피어 있는 꽃에 눈길이 머물면서, 분명한 자기 색깔은 없어도 저렇게 예쁠 수 있는데, 해봅니다.


우리 집에서 교회를 가다가 둘루스 시내쯤 되는 곳에 속도 제한이 35마일로 바뀌는 곳이 있습니다.
보통은 45마일로 달릴 수 있는데 그곳에 가면 갑자기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길가에 상가들이 있어 사람들의 통행이 다른 길보다 많을 수 있어서인지(?)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 길에 들어서면 달리던 속도를 확인하게 되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운전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그곳에 서 있는 속도 제한 표지판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신보다는 이웃을 향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는데 예와 아니오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능력이 있지만 조금 천천히 가는 길을 선택하는 아름다운 사람도 있는데, 하면서 생각의 고리를 이어갑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어지럽습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의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Yes)하고 아니라(No)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Yes)만 되었느니라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Yes)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8/14/2009

융통성 없는 정직

<친구들과 학교 뜰에서>

고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그 당시 70여 년의 역사가 있는 학교였는데, 전통이 오래된 만큼 학교 본관 건물도 많이 낡아 있었습니다.
교실과 복도 바닥은 나무 마루로 되어 있었고, 나무 바닥을 보호하기 위하여 왁스로 걸레질을 해야 했습니다.
청소는 분단별로 나누어 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며칠 동안 모두가 청소를 했고 선생님은 꼼꼼하게 검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청소 시간에 바닥 닦을 손걸레를 개인적으로 마련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청소 시간이 되어 보니, 어떤 친구는 헝겊으로 만든 걸레를 가져 왔고 어떤 친구는 문방구에서 파는 스폰지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깜빡 잊고 걸레를 가져오지 않은 것입니다.
문방구에서 파는 스폰지를 살 돈도 없었던 것 같고, 무엇보다도 교문 밖을 나갈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청소 시간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쓸고 나르고 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딴 생각을 할망정 청소 시간에 딴청 부리는 것은, 제겐 자연스럽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이제 왁스로 나무 바닥을 닦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잠시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하고 있는데, “야, 담임 온다!” 하는 외침이 들렸습니다.
군데 군데 모여서 수다 떨던 아이들이 모두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그 중에 걸레를 준비하지 못한 아이들은 옆 친구가 가져온 스폰지를 반으로 잘라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우리 교실은 교무실 옆에 옆에 있었기에 선생님이 곧 나타났습니다.
교실 앞 복도에 서있던 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저는 어떻게 할 지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습니다.
나름대로의 이유는 이렇습니다.
걸레를 가져오지 않고 가져온 것처럼 하는 것은 자신과 선생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청소 시간에 한눈 팔아본 적이 없으니, 걸레 한번 안 가져온 실수는 선생님이 어여삐 봐주시지 않을까 하는, 되지도 않는 기대를 가지고 말입니다.

선생님은 모두 쥐 죽은듯 조용히 바닥을 닦고 있는데 손을 놀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던 제가 눈에 금방 띄었나 봅니다.
“야, 너 뭐해. 일어나! 이리 와.”
그 선생(이 부분에서는 “님”을 생략하렵니다)은 손으로 제 머리를 쿡쿡 쥐어박으며 어쩌구 저쩌구 했습니다.
복도 한가운데 여러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건 제 생각일 뿐, 선생님 편에서는 그럴 만도 합니다.
가져오라는 걸레는 가져 오지도 않고, 다들 열심히 바닥을 닦는데 뭐 잘한 것이 있다고 가만히 있냔 말이죠.
얼마나 뻔뻔해 보였겠어요.

정말, 융통성, 순발력, 눈치 같은 것들은 엿장수에게 주고 엿하고 바꿔 먹은 게 분명합니다.
아니, 저에게 융통성 같은 것들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아마 후천적으로 개발된 것이지, 타고난 DNA 어느 구석에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말하고 보니, 이런 부분에 있어서 저와 비슷한 강산이가 제 아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미안, 강산.”

고등학교 청소 시간 그때로 지금의 제가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걸레 가져오라는 지시를 적은 종이 쪽지를 방 여기저기에 붙여놓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스폰지 걸레를 가져온 친구의 스폰지를 반의 반이라도 잘라내 청소하는 척 했을까요.
아니면 교무실에서 걸어 나오는 선생님에게 달려가 팔짱이라도 끼면서(여선생님이셨으니까) “선생님, 깜박 잊고 걸레를 안 가져왔거든요. 쫌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하면서 애교를 떨었을까요.
그도 아니면 양말이라도 벗어서 걸레를 만들어 나무 바닥을 닦고 앉아 있었을까요.

80년대 초 경직된 분위기의 고등학교 청소 시간에 융통성 없는 정직함을 선택해서 부끄러움을 당한 제 자신이 그다지 싫지 않다고 여기는, 이처럼 아직도 지혜가 부족하며 융통성도 없는 이런 사람을 자녀로 삼아주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분이 계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편63:7-8)

8/07/2009

엄마, 보세요


엄마, 아이들 보고 싶으니 사진 많이 올리라 했지?
아이들 학교가 다음 주 월요일(10일)에 개학이에요.
그러면 새 학년이 시작되는 거구.
개학하기 전에 하루 바람 쐬러 나갔다가 찍은 사진이야.

지난 해 이맘 때는 아이들 학교 들어가는 것 때문에 많이 긴장했었는데, 그것도 한번 경험이 있다고 조금 여유가 생겼어요.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구요.

두루두루 안부 전해주세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